18화.
그런데도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어딘지 모를 께름칙함이 명치를 불편하게 짓눌렀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뭐가 문제일까.
보이는 반응들은 하나같이 수줍은데, 왜 그토록 말은 독하게 뱉는 걸까.
10년 전 그 밤 제게 받아 간 그 돈이 정말 윤다경에겐 화대와 다름없었을까?
하곡에서 도망칠 모녀가 자리 잡기 위해 필요했던 돈이었을 뿐일까?
그래.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은 왜 이렇게 냉정하게 구는 건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자기는 했어도 딴 새끼랑 한창 썸타는 중이라 죄책감이 들어서?
― 똑똑.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물고 늘어지며 골몰하던 찰나, 노크 소리가 끼어들었다. 습관처럼 머리카락을 헝클이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박일호입니다, 팀장님.”
문밖에서 흘러든 음성과 함께 안 그래도 구겨져 있던 미간이 더 날카롭게 좁혔다.
호랑이 새끼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하필.
“들어오세요.”
흐트러졌을 머리를 쓸어넘겨 단정히 정돈하곤 느슨하게 풀어두었던 넥타이도 바짝 조여 맸다.
무표정한 얼굴로 컴퓨터의 모니터를 응시하자 안으로 들어선 박 과장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뭡니까?”
예의를 갖춘 부하 직원을 상대로 저도 모르게 날 선 목소리가 나갔다. 당황한 표정의 박 과장이 반듯하게 몸을 세우며 답했다.
“아, 어제 팀장님께서 전화로 출근하면 팀장실 좀 들르라고 하셔서 왔습니다.”
그제야 어젯밤 차에서 박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던 일이 생각났다. 윤다경을 겁주려고 저지른 쇼의 끝에서 일 핑계로 전화를 마무리 지으며 그리 말했던 것이.
멍청한 놈.
자조 섞인 욕설이 입 안에서 굴렀다. 일에 관해선 어지간하면 허점을 보이는 성격이 아닌데, 초반부터 이 무슨 병신 같은 짓인지 모르겠다.
“미안합니다, 제가 업무 파악하느라 정신이 좀 없어서.”
피로감이 밀려오는 관자놀이를 긁어내리며 자꾸만 흐트러지는 정신머리를 다시 붙잡았다.
“우리 부서와 협약 맺은 업체 관리를 박 과장님께서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거래처 정보와 단가표 정리해서 내일까지 부탁드리죠.”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답한 박 과장이 단정한 인사를 끝으로 몸을 돌렸다.
딱 보기에도 우직해 보이는 게 무게감 있고 책임감 있는 인상이었다. 평상시의 저였다면 딱히 못마땅해할 구석이 없는 직원이다. 하지만···.
“돌겠네, 진짜.”
윤다경과 썸타는 놈이란 생각에 꼴사나운 사심이 깃들어 번번이 삽질 아닌 삽질을 하는 저 자신이 한심했다.
도하가 뜨끈하게 열이 오르는 이마를 신경질적으로 문질러 올리며 다시 블라인드 너머로 눈을 돌렸다.
“얼굴 좋네.”
일상 전체가 정상 궤도를 벗어난 저완 달리 야속할 만큼 평온해 보이는 낯이 시야에 박힌다.
저 나쁜 계집애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병신 같은 짓인지.
급하게 한국에 들어오게 되는 바람에 아직 이 회사의 시스템 파악도 미숙했고, 신경 쓸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언제까지 윤다경의 존재에 얽매어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그와 같은 판단에 자꾸만 다경이 있는 쪽으로 몰리는 신경을 차단하듯, 팀장실 블라인드를 확 내려버렸다.
윤다경과의 일이야 아직 아홉 번의 계산이 남아 있으니 차차 고민해 볼 문제다.
이제부턴 정말 일에 집중하자 생각하며 태블릿을 집어 든 찰나, 책상 위에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
느른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몸이 벌떡 세워졌다. 막 손안에 집어 든 태블릿을 내던지고 곧장 휴대폰을 옮겨 집었다.
[오늘 퇴근하고 볼 수 있을까?]
다경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간밤, 데려다주겠다는 것도 극구 마다하고 기어코 궁상맞게 버스 타고 돌아가더니.
“이 철벽이 웬일로.”
신경 끄자 맘먹은 게 1분도 안 지나갔건만, 입꼬리가 히죽 올라섰다. 제가 먼저 연락하면 연락했지, 윤다경에게서 먼저 보자는 말이 나올 거라곤 기대도 못 했다.
왜 보자는 건데. 퇴근하고 뭐 하려고?
쓰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너무 안달 내는 티가 날 것 같아 부러 딱딱하게 활자를 찍었다.
[끝나고 주차장으로.]
보내자마자 읽음 처리된 메시지 창에선 그 이후의 답장은 없었다.
하여간 살가운 면이라곤 없다며 미약한 불만이 솟아올랐으나, 그 성격에 제 연락처를 저장해놓고 먼저 연락을 준 게 어딘가 싶었다.
물론, 같은 부서의 상사라 피치 못해 저장해둔 걸 수도 있겠지만.
“근데 진짜 왜 보자는 거지. 저 까칠한 게.”
도하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긴 채 답장 없는 메시지 창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남아 있는 계산을 빨리 해치우고 싶어 보자는 걸까. 내친김에 연달아 달리고 끝내려고?
근데 어제 그렇게나 했는데 또 하기는 좀···.
“이 새낀 또 왜 이래.”
이틀을 연달아서 하기는 좀 그렇다면서도 양심도 없이 부풀어 오른 앞섶이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 답이 없다.
적당히 좀 하자, 권도하.
욕구야 충만했지만, 순식간에 열 번을 다 채우고 윤다경을 붙잡아 둘 명목이 사라지는 것도 제가 바라는 바는 아니었다.
애초에 몸으로 갚으라 억지를 부린 것 자체가 윤다경을 그렇게나마 제 옆에 눌러 앉혀 놓기 위함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간밤에 몸을 맞댈 때마다 느껴지던 앙상한 감촉이 아무래도 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룸서비스까지 시켜놨건만, 인정머리 없는 게 그런 야속한 말이나 지껄여선.
“오늘은 진짜 밥이나 좀 먹일까.”
양심도 없이 선 놈을 무시하곤 휴대폰의 검색 어플을 켰다. 회사 근처 맛집을 검색하다가 불현듯 실소가 터졌다.
“하. 누구랑 밥 한번 먹기 더럽게 힘드네.”
허탈한 웃음이 입꼬리를 타고 씁쓸하게 번진다. 휴대폰을 손안에 꾹 쥔 채 이마에 맞대었다.
아무렇지 않게 매점에서 마주 보고 앉아 웃던 그때의 잔상이 문득, 목울대를 울컥이게 만들었다.
* * *
“다른 데서 보자고 할 걸 그랬나.”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에서 우르르 내리는 직원들을 보며 다경이 난처한 듯 얼굴을 돌렸다.
퇴근 시간의 주차장은 오고 가는 사람들의 눈이 많아 영 마음이 불편했다. 행여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구설수에 오르기 딱인 장소.
하지만 그렇다고 회사 밖 어디선가 보자고 하기엔, 그건 그것대로 부담이 있었다.
관계가 관계인 터라 유쾌하지 않은 상황으로 이어질 게 뻔했으니까.
권도하에게서 먼저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차에 두고 내린 게 하필 제 옷이 아닌 박 과장의 옷이라 마음이 조급했다.
그 성질머리에 부디 차 밖으로 내다 버리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언제 내려오는 거지.”
퇴근 시간 30분 전쯤 부장실로 들어가던 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금방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누가 보기 전에 빨리 쇼핑백만 챙겨서 올라가고 싶었다.
전화라도 걸어볼까, 생각하던 찰나. 등 뒤편에서 알은체하는 음성이 넘어왔다.
“어라, 윤 대리 아냐?”
“어머, 대리님!”
같이 카풀을 하고 있는 송 과장과 후배 미애였다. 하필 여기서 저들과 마주치다니.
“다섯 시 되자마자 내려가시지 않았어요?”
당황한 기색을 감춘 다경이 최대한 자연스레 말을 건넸다.
정시에 주차장으로 내려올까 하다가 권도하가 늦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도 좀 빠지고 나서 가는 게 낫겠다 싶어 20분쯤 버티다 내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차장에서 부서 직원들을 마주치니 그녀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 안 그래도 오늘은 칼퇴 하려고 했는데 미애 씨가 커피 한 잔 사서 가자고 하지 뭐야. 그래서 1층 카페 들렀다 왔지.”
“에이, 그래서 제가 칼퇴 대신에 맛있는 마카롱 사드렸잖아요. 오늘 종일 통계 낸다고 눈 빠져라 모니터만 봤더니 완전 당 딸리는 거 있죠.”
“아···.”
타이밍이 안 맞으려니 이런 식으로 안 맞았다.
일찌감치 퇴근했을 것이라 생각했던 부서 식구들과 이런 식으로 맞닥뜨려 버리고.
“근데 자기가 주차장엔 왜 내려왔어? 자기 우리 모르게 차 뽑은 거야?”
입사 4년차지만 여전히 뚜벅이 신세인 그녀를 아는 송 과장이 주차장 쪽을 내다보며 물었다.
“아뇨. 가는 길에 차를 좀 얻어 타기로 했는데, 바쁜지 좀 늦네요.”
“누구?”
바로 돌아온 물음에 차라리 다른 핑계를 좀 댈 걸 그랬다는 때늦은 후회가 밀려들었으나, 이제 와 주워 담을 수도 없다.
여기서 괜히 당혹스러운 기색을 내비쳐 봤자 수상하게 보일 뿐일 테다.
“있어요, 과장님께선 모르시는 제 지인. 물론, 박일호 과장님은 절대 아니구요.”
태연함을 가장하려 부러 농담을 하는 것처럼 박 과장을 언급했다.
“에이, 혹시나 했더니. 쯧. 근데, 자기한테 우리가 모르는 막역한 지인이 있었어?”
송 과장이 그럼에도 뭔가 미심쩍은 기운이 가시지 않는지 눈썹 끝을 까딱 올렸다.
아무래도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긴 역부족이려나. 이러다 상대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으면 어쩌지.
초조함에 입이 바짝 말라온 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