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짙은 한숨을 쉬며 커피 가루 위로 포트를 기울이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제 선약 있다더니 너무 달린 거 아냐?”
막 탕비실로 들어온 송 과장이 하루 새 수척해진 낯빛을 살피며 말했다.
“그러게요. 가끔 그렇게 조절이 안 되는 날이 있더라구요.”
다경이 들고 있던 포트를 제자리에 내려놓고 멋쩍게 웃었다. 정말 조절이 안 된 건 제가 아니라 상대방 쪽이었지만, 이야기가 길어지기 전에 대충 대화를 갈무리해야 했다.
“그나저나 박 과장하곤 약속 잡았어?”
티스푼을 집어 들어 커피 안을 휘휘 젓던 손이 멈추었다.
“네?”
“옷도 빌려줬는데 밥 한 끼 먹으라니까.”
“아···.”
내 정신 좀 봐. 그제야 깜박하고 챙기지 못한 박 과장의 재킷이 떠올랐다.
제대로 입지도 못했지만, 준 사람의 성의를 봐서 드라이라도 해서 돌려줘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하게 들이닥친 권도하 때문에 당황해서, 그의 차 조수석 아래 뒀던 사실이 뒤늦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옷쪼가리 덮어준 새끼 반응이 제일 궁금한데.’
그 말과 함께 시작된 억지로 인해 근처 호텔로 들어가 일을 치렀고, 집요했던 섹스 후 데려다주겠다는 권도하의 뜻을 거절한 채 택시를 타고 집으로 들어왔다.
룸으로 올라갈 때도 나올 때도 종이백을 들었던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권도하의 차에 그대로 두고 내린 모양이었다.
어쩌지.
잠시 가라앉은 듯싶었던 두통이 다시 심해진다.
‘썸타는 새끼도 하나 둔 것 같던데.’
박 과장 얘길 할 때마다 유독 심기 불편해 보이던 험악한 낯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그 차에 두고 내려서.
혹시, 그 욱하는 성질머리에 차 밖으로 내다버린 건 아니겠지?
권도하라면 그러고도 남겠다는 불길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근데 자기, 정말 박일호는 영 아니야?”
팔꿈치를 툭 건드는 송 과장의 손길에 상념에서 깨어 옆을 돌아보았다.
“네?”
“박 과장, 남자로선 자기한테 영 꽝이냐고.”
어제도 은근슬쩍 박 과장과의 관계를 몰아가려 들더니 또 시작인 모양이다.
“왜 또 대화가 그쪽으로 튀어요.”
다경이 시큰둥하게 답하며 진하게 탄 커피를 입술에 기울였다.
“그렇잖아. 박일호 정도면 외모도, 스펙도 괜찮고, 집안도 번듯한데 벌써 2년째 나 몰라라 하고.”
도무지 그게 아니고서야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송 과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경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커피만 삼켰다.
간밤, 서툴게 도하의 것을 빠느라 생채기 난 입 안에 옅은 쓰라림이 번졌다. 제 처지를 일깨우는 선명한 감각에 혀끝으로 쓴맛이 짙게 스민다.
“뭣보다 박일호가 자기라면 아주 좋아 죽잖아.”
알고 있다. 박 과장이 줄곧 제게 보이는 관심을. 그리고 그런 그가 이성들이 만족해할 만한 조건을 갖춘 남자라는 사실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 마음을 모른 척하는 건, 송 과장이 말하는 것처럼 ‘그가 영 아니라서’라는 이유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가 제 눈에 차지 않아서가 아닌, 제가 그에 비해 한참은 모자란 여자라서.
돈 오백에 하룻밤을 팔아야 했던. 아니, 팔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구질구질한 인생이라서 그의 마음을 모른 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이 좀 순둥순둥해서 남자로서 매력은 덜할지 몰라도, 자기보다 몇 년 먼저 살아본 내가 볼 땐 그래. 남자 외모, 스펙, 집안 다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최고는 애처가더라. 나만 바라봐주고, 나만 예뻐해 주는 것만큼 행복한 게 없다? 우리 남편이 그렇잖아.”
그녀가 쑥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툭 건들며 말했다. 본인의 그 경험이 그토록 끈질기게 박 과장과 저를 이어주려 하는 이유라는 듯, 발간 낯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나만 바라봐주고, 나만 예뻐해 주는 것만큼 행복한 게 없다라.
‘내가 너한테 튈 구정물까지 다 뒤집어써줄게.’
10년 전, 저를 향해 장담하던 목소리가 귓전에서 메아리쳤다.
그래. 한때는 그 마음이면 족하다 여겼던 때가 있었다.
저런 마음이라면, 저 정도로 맹목적이고 희생 어린 애정이라면, 날 정말 이 시궁창 같은 삶에서 끄집어내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날이.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누군가의 인생이 타인에게 기댄다 하여 그와 같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결국 그 방패막이를 벗어나면, 한순간에 쓰러져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 제 비루한 현주소라는 걸.
꼴깍― 생각의 고리를 끊어내듯 남은 커피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곤 잠시 숨을 고른 뒤 송 과장을 향해 웃었다.
“감사해요, 과장님.”
먼저 살아본 그녀가 중요하다 말한 그 경험처럼, 열 마디 말보단 한 번의 경험이 뼈저린 깨달음을 주는 거니까.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난.
“인생 선배님의 조언 잘 새겨들을게요.”
두 번 다신, 그때와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을 테다.
* * *
내부 미팅 후 팀장단 회의까지 마치고서야 자리로 돌아왔다.
무심코 창 쪽을 내다본 도하의 눈에 블라인드 사이로 비치는 말간 얼굴이 들어왔다.
“감쪽같네, 아주.”
간밤 잔뜩 흐트러졌었던 그 모습이 허상이었나 싶도록, 오늘도 윤다경은 정갈함 그 자체였다.
커다란 모니터 앞에 반듯하게 앉아 묵묵히 제 할 일에 임하는 그 모습이 어쩐지 배알을 뒤틀리게 한다.
반면, 하루 사이 수척해진 것 같은 조막만 한 얼굴은 또 묘하게 명치 끝을 아릿하게 찔렀다.
젖살이 빠져선지 10년 전보다도 더 작고 갸름해진 얼굴.
한 줌이란 표현이 딱 어울리는 낭창한 허리.
살짝 씹기만 해도 불긋해지던 얇은 피부와 조금만 힘을 주어 쥐어도 부러질 것처럼 가느다란 다리.
그 사이로 간밤에만 세 번쯤 몸을 박아 넣은 저란 놈은 때늦은 발정기를 맞은 짐승과 한 끗도 다를 바가 없었다.
“미친놈.”
자책하듯 욕을 짓씹은 도하가 갑갑하게 목을 조이고 있는 타이를 신경질적으로 당겨 늘였다.
가겠다는 여자를 붙잡은 채 억지를 쓰긴 했지만, 정말로 그 횟수를 채울 생각은 없었다.
사실, 첫 번째 관계 직후 도로 선 걸 느꼈지만 기절하듯 잠이 든 여자에게 도저히 또 그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욕구를 억누르고 곧장 샤워실로 들어갔다.
마른 몸, 한 줌인 허리, 부러질 것 같던 다리가 마음에 걸렸으나 그러는 와중에도 양심도 없이 아래를 세우는 놈 때문에 한참을 차가운 물 아래서 몸을 식혀야 했다.
“씹, 사춘기 애새끼도 아니고.”
아니. 사춘기 애새끼나 다름없긴 하지. 쪽팔리지만, 그날 이후 제 이성 관계는 실로 열아홉 그날에 머물러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러니 고작 키스 한 번에 차 안에서 그 지경이 됐지.
오기로 다경에게 저를 삼키게 했을 때, 바로 끝을 보지 않은 것이 오히려 기적이랄까.
그래도, 좋기는 진짜 존나게 좋았다.
지난 10년 동안 다른 여자들이 눈앞에서 벗고 유혹해도 반응조차 없던 그게, 윤다경과는 고작 키스 한 번으로 서버릴 정도로.
그러다 진짜 10년 만에 윤다경과 몸을 맞댔을 땐, 이래서 제가 여태 이 못된 계집애를 못 잊었나 싶었을 만큼 고통에 가까운 만족감을 느꼈었다.
그리고 그런 제 아래서 파들파들 떨며 저를 받아내는 윤다경을 본 순간, 그녀 역시도 어쩌면 저와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스쳤다.
‘아, 음, 안 돼, 흣···.’
조금만 밀쳐 올려도 어쩔 줄 몰라 하던 수줍은 반응이.
‘아으, 흐응, 이상, 해···!’
아래를 문지르자마자 울 것 같던 얼굴이.
‘잠깐··· 아, 아프, 흑···.’
무엇보다 끝을 넣기도 뻑뻑했던 비좁은 입구가, 아무리 봐도 경험 많은 여자가 보일 모습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비록 화대라는 말은 했지만, 뭔가 사정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시작은 비록 반협박으로 인한 것이었을지라도, 이야기를 차차 풀어가다 보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새침하게 시작한 초반부완 달리, 마지막쯤엔 윤다경도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면서 끙끙거릴 정도로 좋아하기도 했었고.
그러니 차분히 밥이나 같이 먹으면서 그간의 얘기를 나눠보자 마음을 고쳐먹고 샤워실을 걸어 나온 참이었건만.
‘계산 빠른 머리로 한번 잘 생각해 봐. 너랑 내가 지금, 사이 좋게 마주 보고 앉아 밥 먹을 사이니?’
사람 속은 모르고, 대놓고 신경을 긁는 냉소적인 목소리가 미련하게 품은 기대를 와장창 깨부수고 말았다.
‘아, 몸 붙이고 뒹굴긴 해도 마주 보고 앉아 겸상할 사인 아니다. 뭐 그건가?’
‘잘 아네.’
예나 지금이나 말 안 예쁘게 하는 덴 일가견이 있었지만, 화대라는 말에 일차적인 타격을 받았던 터라 듣자마자 눈이 확 뒤집히고 말았다.
그래서 오기 반 진심 반으로 세 번을 채웠다.
아마 애무 도중 윤다경의 휴대폰이 울리지 않았다면, 그 이상도 갔을지도 몰랐다.
한편으론 너무했나, 생각하면서도 가슴 끝을 베어내듯 냉정한 목소리가 떠오르면 미약하던 죄책감은 언제 그랬냐는 듯 형체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너무할 게 뭐 있어, 씨팔.”
처음엔 좀 아파하는 것도 같았지만, 금세 적응해선 신음 하느라 여념이 없는 건 윤다경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면서도 말론 싫다, 그만하라는 말만 내뱉던 입술이 돌이킬수록 야속했다.
절정이 올 즈음이면 저를 꼭 안으며 10년 전 그 밤처럼 흐느끼고서도, 제 것이 빠져나가기 무섭게 차갑게 등을 돌리는 못돼 처먹은 계집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