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하. 볼일이라···.”
그 단어가 거슬린 듯 도하가 낮게 읊조렸다. 짜증스런 얼굴로 젖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넘기더니 뭔가를 참듯 훅 숨을 뱉는다.
아슬아슬하게 둘러진 타올 위,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복근에 괜스레 낯이 달아올랐다.
10년 사이 소년의 티를 완전히 벗고 한층 더 단단해진 몸은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랫배를 조여들게 만들었다.
아니. 저 몸이 주는 쾌감을 직전에 맛본 탓인지도 몰랐다.
대체 어쩌자고 그 지경으로 울며 매달리고 만 건지.
미처 옷을 챙겨입지 못해 드러난 제 상반신이 뒤늦게 생각나 다경이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볼 장 다 본 사이에 이제 와 내외하는 것도 우스웠으나, 아무렇지 않을 만큼 익숙한 상황은 아니었다.
“좀 비켜줘. 옷 입어야 해.”
어색하게 눈을 돌리며 그의 뒤편에 널브러진 옷 쪽으로 손을 뻗었다.
“밥 먹고 가.”
미처 옷을 집어 올리기도 전 손목이 붙잡혔다.
“룸서비스 시켜놨어.”
룸서비스라. 초점 없이 바닥을 담은 연갈색 눈이 이내 차게 가라앉았다.
“생각 없어.”
다경이 붙잡힌 손을 툭 떨쳐내며 건조하게 답했다.
“왜 생각이 없어. 밥때 지난 지가 언젠데.”
다경에게서 나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저녁 시간이 지났으니 배고픈 게 당연한 거 아니냐는 논리엔 틀린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다경은 그 태평한 사고방식 자체에 기가 찼다.
이 와중에 제 목구멍으로 밥이 들어갈 것이라 생각하다니.
처지에 따라 서로의 입장 차가 이렇게나 클 수 있나 싶어, 도저히 고분고분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샤워하기 전에 시켰으니까 곧 올 거야. 그 상태로 옷 입지 말고 들어가서 씻···.”
“권도하.”
선을 긋듯 이름을 부르며 차갑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계산 빠른 머리로 한번 잘 생각해 봐. 내가 왜 밥 생각이 없을지.”
애써 화를 누그러트리는 듯하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졌다.
“뭐?”
“너랑 내가 지금, 사이 좋게 마주 보고 앉아 밥 먹을 사이니?”
불같은 섹스를 했다고 해서, 뒤틀어진 관계 자체를 바로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방금 한 그 섹스는 말 그대로 그와 제가 볼일 중 일부분일 뿐이었다.
권도하의 말을 빌리자면 미처 마치지 못한 계산 중 한 번일 뿐. 그리고, 그 인정머리 없는 계산에 함께 먹는 밥 같은 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아···.”
미간을 구긴 채 그녀의 말을 곱씹던 도하가 싸늘히 조소했다.
“몸 붙이고 같이 뒹굴어도 마주 보고 앉아 겸상할 사인 아니다. 뭐 그건가?”
잠시 비딱함을 보이지 않았던 새카만 눈에 도로 잘 벼려진 칼처럼 날이 섰다.
“잘 아네.”
차갑게 대꾸한 뒤 줍다 만 옷을 집어 들어 몸을 끼워 넣었다. 대충 옷매무새를 다잡곤 바닥에 떨어진 백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럼 볼일 다 봤으니까 먼저 갈게. 쉬다 와.”
익숙지 않은 행위에 혹사당한 몸이 여전히 삐걱거렸으나 일말의 내색조차 하지 않은 채 등을 돌렸을 때였다.
“누가 그래. 볼일 끝났다고.”
미처 한 걸음을 내디딜 틈도 없이 붙잡힌 어깨가 그에게로 돌려졌다.
“뭐?”
“하룻밤에 오백이랬지 한 번에 오백이라고 한 적 없는데, 난.”
고집스런 눈을 한 채 뱉어내는 억지에 다경의 얼굴이 경악감으로 물들었다.
“야, 너 지금 무슨 소릴!”
“무슨 소리긴, 다경아.”
다경의 손에 잡혀 있는 백을 빼앗듯 내던져 놓곤, 그가 뻔뻔한 얼굴로 부연했다.
“고작 한 번 싼 걸론 어림도 없다는 뜻이지.”
미쳤나 보다, 정말.
말문이 막힌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한 번으론 어림도 없다는, 듣도 보도 못한 억지에 다경은 민망함과 황당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돈 오백을 빌미로 열 번의 밤을 요구할 때부터 이미 도를 넘어선 억지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가겠단 저를 붙잡고 또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제정신 아냐, 이 자식.
“정신 나간 소리 그만하고 비켜.”
다경이 싸늘히 뇌까리며 내던져진 백을 향해 다시 손을 뻗었다.
“그게 왜 정신 나간 소리야.”
그대로 손을 낚아채 바로 세운 도하가 인정 없는 얼굴을 코앞까지 바짝 갖다 붙였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팩튼데.”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는 웃음이 악랄했다.
“이거 놔!”
“잘 생각해 봐. 10년 전 그 밤.”
벗어나려 애쓰는 양팔을 포박해 몸을 밀착하곤 다경의 귓가에 입술을 기울였다.
“너랑 내가 하룻밤에만 몇 번이나 붙어먹었는지.”
갑작스레 10년 전 일을 운운하는 은밀한 속삭임에 줄곧 바르작대던 몸짓이 멈칫했다.
돌아보자 사악한 악마처럼 입꼬리를 당긴 그가 오른손의 세 손가락을 보란 듯이 펴 보였다.
“세 번쯤 했지, 아마?”
그날을 떠올린 얼굴이 불현듯 달아올랐다.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쓸데없이 선명해진다. 저, 변태 같은 게.
“처음이라 아파하는 너 눕혀놓은 채로 한 번.”
“그만 말해.”
“네가 내 위로 올라타서 한 번.”
“하지 말라니까?”
“기절하듯이 잠든 너 뒤에서 안은 채로 또 한 번···.”
“말하지 말라고!”
밀려드는 민망함을 견디다 못해 손을 뻗자, 입을 막으려는 손을 손쉽게 제압하곤 그가 되짚었다.
“참 정신없이도 붙어먹었었는데, 그 밤.”
“아읏···.”
“발정 난 암수가 따로 없을 만큼.”
그와 동시에 도하에게 잡힌 검지의 끝이 그대로 그의 입술로 끌려가 삼켜졌다. 남자의 새빨간 혀가 파들거리는 손가락 사이사이를 느릿하게 핥고 내려왔다.
“흐···.”
얇은 손바닥에 짙게 입술을 묻곤 보란 듯이 눈을 맞춘다. 집어삼킬 듯 새카만 눈이 다경의 이성을 침식했다.
입술이나 은밀한 부위도 아니고, 고작 손바닥이 빨리는 것뿐인데도 순식간에 다리 사이가 저릿해졌다. 혀를 타고 흐르는 질척한 감촉이 기이할 만큼 야릇했다.
그 혀가 제 몸에 주는 자극이 어떠한지 익히 알고 있는 탓일지도 몰랐다.
저 혀로 제 살결을 흡입하면 얼마나 아찔한지 온몸이 반응하도록 알고 있어서.
“하, 으···.”
“이제 좀 알겠어, 다경아?”
직전의 정사로 미처 마르지 못한 곳에 또다시 뜨겁게 물이 고였다.
“내가 말한 하룻밤이란 그런 거야.”
손목까지 핥고 내려간 손을 그의 골반 뒤로 잡아 빼어, 단숨에 둘의 거리를 좁혔다.
“온몸이 다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하고 또 하는 거.”
얼굴이 화끈대도록 외설적인 말을 하면서도 민망한 기색 하나 내보이지 않는 낯이 교활했다.
“유감스럽게도 내 볼일은 끝나려면 아직 먼 상태고.”
“이 손 좀···.”
“이거 봐.”
어느 틈에 제 아래를 가리고 있던 타올 마저 풀어버린 그가 그대로 다경의 손을 내려 제 흉흉해진 곳에 손바닥을 닿게 했다.
“이 발기 찬 새끼 빳빳하게 고개 쳐든 거.”
끈적한 액체가 가늘게 떨리는 얇은 피부를 척척하게 적셨다. 화들짝 놀라 손을 빼려 했으나, 압도적으로 큰 체격만큼이나 악력의 차이 또한 컸다.
“이, 변태 자식···.”
“알아, 나도.”
그가 저어하는 손을 꾹 감싸 쥐어 살덩이를 움켜쥐게 했다. 그러곤 입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스커트를 위로 확 들추어 아래를 맞대었다.
“그런 변태랑 몸 맞추자마자 젖는 너도, 타고난 변태고.”
“잠··· 아!”
큼직한 손이 오른쪽 허벅다리를 추켜 올려 그에게로 확 당겼다.
“아흐···.”
델 듯 후끈한 열기가 선명하게 아래를 잠식한다.
“그러니까 그만 튕기고 협조해.”
번쩍 들려 완전히 그를 품게 된 몸이 파르르 경련했다. 갈 곳 잃은 새하얀 손이 본능처럼 그의 목에 매달렸다.
“내 거 다 쏟아낼 때까지.”
불안정한 다리를 잡아끌어 제 허리로 감게 한 그가 젖은 혀로 귓바퀴를 핥으며 간교하게 속삭였다.
“이 방에서 못 나가, 너.”
* * *
온몸을 커다란 장갑차가 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래는 낯선 이물감이 좀처럼 가시지 않아 그냥 서 있는 것조차 곤욕스러웠다.
‘읏, 그만 좀···.’
‘벌려. 마르려면 아직 멀었어.’
10년 전에 했던 횟수를 들먹이며 부린 억지를 정말로 실행에 옮길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제대로 된 삽입으론 세 번, 욕실에서 있었던 가벼운 패팅을 더하면 네 번. 그러고도 아쉬워서···.
‘하, 끝내주네. 윤다경. 그렇게 해댔는데도 질척거려.’
‘아흐, 이건 네 게 남아서··· 앗!’
‘안 되겠다, 치마 걷어 봐.’
스커트 사이로 기어들어 간 발정기의 짐승은 기다리다 못한 엄마가 또다시 전화를 걸고서야 마지못한 척 저를 놓아주었다.
덕분에 몸 곳곳에 생채기가 지고 뼈 마디마디가 욱신댔으나, 모든 걸 권도하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었다.
‘아으, 안 돼, 더는.’
‘안 된다는 몸이 왜 이래, 응?’
‘···몰라, 읏, 싫어···.’
‘싫기는. 그래놓고 또 갈 거면서.’
말론 그만하라고 싫다고 하면서도 양심도 없이 절정에 올라버린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걸까.
때늦은 후회와 함께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파스스― 종이컵을 채우는 믹스커피의 가루가 꼭 형체 없이 부서져버린 제 줏대 같았다.
앞으로도 아홉 번의 밤이 더 남아 있건만, 고작 하룻밤만으로도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해 이렇게나 흔들리는데. 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안색이 안 좋네, 윤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