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엄마가 지칠 때까지 이어질 것 같던 드잡이는 홀에서 정 마담을 찾는 아저씨들의 목소리에 겨우 일단락되었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대신, 애꿎은 권도하의 교복을 갈기갈기 찢는 것으로 화풀이를 하며 분노를 삭인 엄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네에, 박 싸장니임!”하며 콧소리를 내곤 방을 빠져나갔다.
어제 김주미에게서 뽑아낸 것과 비할 수 없이 잡아 뜯긴 많은 양의 머리카락들이 갈기갈기 찢긴 도하의 교복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다경은 홀로 남은 방안에서, 넝마가 된 교복을 주워들어 한 땀 한 땀 바늘로 기웠다.
그런다고 엉망이 된 교복이 멀쩡해지는 것도 아닌데, 그리하지 않고선 너덜너덜해진 제 속이 도무지 나아질 것 같지 않아 그냥 둘 수가 없었다.
* * *
“입가는 또 왜 그래?”
아침 조회를 마치고 쉬는 시간, 권도하가 앞자리로 와 앉으며 물었다.
“부딪혔어.”
무심한 어조로 대꾸하곤 서랍 속에서 문학 교과서를 꺼내었다.
“너 평소에 눈 감고 다니냐?”
숙인 고개 끝이 불쑥 뻗어온 커다란 손에 잡혀 정면을 향했다.
“어디에 부딪히면 이 꼴이 나?”
말이 되는 거짓말을 하라는 듯, 녀석이 다소 험악한 어조로 되물었다.
“손 치워.”
다경이 탁, 소리 나게 턱에 닿은 손을 쳐냈다.
그런 저를 보며 뭔가를 참듯 길게 숨을 뱉어내는 권도하의 호흡 소리가 들렸으나 그조차 무시한 채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삽시간에 얼어붙는 공기에 주변 애들이 초조한 낯으로 둘을 주시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검게 그은 싸늘한 동공이 비딱하게 다경의 낯으로 내리 닿는다.
반 애들 앞에서 서로 적당히 장단을 맞추자고 합의 아닌 합의를 한 게 바로 어제였다.
지금 제 반응이 권도하 입장에선 충분히 황당하겠다 싶으면서도, 오늘은 도저히 그에게 맞춰줄 여력이 나질 않았다.
“곧 수업 시작해.”
그러니 그만 네 자리로 가보라는 듯 녀석의 자리 쪽을 눈짓했다.
“쉬는 시간에 같이 매점이나 가.”
애써 성질을 가라앉힌 목소리가 서늘한 입술을 타고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보아하니 아침도 걸렀을 것 같은데.”
“생각 없어.”
그 말 또한 차갑게 잘라낸 뒤 교과서를 펼쳤다. 필기구를 꺼내고 오늘 수업할 페이지로 교과서를 넘기려던 찰나 탁, 하고 장애물에 걸렸다.
“야, 윤다경.”
뼈마디 굵은 큼직한 손이 무게를 실어 지그시 교과서 위를 눌러 짚었다. 단단한 손등 위로 푸르스름한 힘줄이 선명하게 돋아나 있다.
반사적으로 올라선 갈색 눈에 새카만 동공이 충돌하듯 부딪혔다. 한층 더 싸늘해진 공기가 무겁게 어깨를 짓누른다. 왜 저러니, 하며 저만치에서 속닥거리고 있는 김주미 무리가 보였다.
화내려는 걸까.
무표정한 낯과는 달리 사실 단전 아래에선 불안함이 들끓었다. 제아무리 권도하라도 이쯤 되면 한계가 넘고도 남을 성싶었다.
명색이 서림고 황태자인 녀석인데, 여기서 당장 소리를 질러도 할 말이 없겠다 생각한 순간.
“너.”
불현듯 기울어져 온 얼굴이 다경의 뺨을 스쳐지나 귓전에서 멈추었다.
“그렇게 계속 쌩하게 굴다가 애들이 눈치챈다. 우리 사이 구란 거.”
비 오기 직전에 부는 습한 바람 같은 음성이 무방비한 귓바퀴를 타고 적실 듯 흘러들었다.
날이 무뎌져 동그래진 눈동자가 이끌리듯 옆을 향한다.
“갈래, 말래?”
하필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있는 매끄러운 입술이 짓궂게 의사를 물었다.
거절할 여지를 차단한, 답이 정해진 제안.
“···여우 같은 자식.”
나지막이 읊조린 말에 녀석이 픽 웃으며 가소롭다는 듯 코끝을 퉁긴다.
“그러는 넌 존나 따가운 고슴도치고.”
경계심을 흐리게 하는 아찔한 미소가 두 눈을 따갑게 했다.
퉁겨진 건 코끝인데 어쩐지 심장 끝이 찌르르 아려왔다.
제 미력한 내공으론 도무지 이겨낼 수가 없는, 천년 묵은 구미호 같은 녀석이었다.
* * *
“누구야, 이번엔?”
싫다는 손에 빵과 우유를 억지로 쥐여주며 권도하가 물었다. 아무 말 않고 허공만 응시하자 바나나맛 우유의 은박 포장지 위로 툭, 하고 빨대가 꽂혔다.
“애들 풀어서 탈탈 털어 봐?”
“신경 꺼. 반 애들처럼 네가 유치하게 협박할 수 있는 사람 아니니까.”
도저히 빵은 안 먹힐 것 같아 마지못해 우유에 꽂힌 빨대만 쪽 빨았다.
“대체 다방은 왜 하는 거야?”
대충 누구 소행인지 알겠다는 듯, 도하에게서 짜증스런 물음이 돌아왔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다방 말고 다른 거 하면 되잖아. 식당이라든가, 뭐 작은 옷가게 같은 그런 거.”
식당, 옷가게라.
인생 편하게 산 도련님의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에 피식 웃음이 샜다.
“왜, 너랑 사귄다고 소문난 애가 막상 다방 마담 딸년이라니 영 안 내켜?”
“하여간 말하는 거 하곤.”
짙은 한숨을 뱉으며 앞에 놓인 이온음료를 따 벌컥 들이켠다.
“보기 안타까워서 그러는 거잖아.”
단숨에 비워낸 빈 캔을 구겨 저만치에 있는 휴지통에 던져 넣곤 도하가 말을 이었다.
“너희 어머니야 본인이 선택한 일이니까 그렇다 치고, 넌 무슨 죈데? 뭐, 그렇다고 너희 어머니께서 하는 일이 나쁘다, 그런 뜻은 아니지만.”
부족한 것 없이 자라 남의 감정을 배려할 일이 있었을까 싶은 녀석이었다. 그런데 말끝에 안 어울리는 변명 비스무리한 걸 덧붙이고 있으니 설핏 실소가 터졌다.
설마 내 엄마의 직업을 폄하하는 것처럼 들렸을까 봐 걱정하는 걸까.
덕분에 어젯밤부터 뾰족하게 날이 서 있던 마음이 다소 둥그레졌다.
“울 엄마도 꼭 그 일이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야.”
다경에게서 체념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할 수밖에 없어서 하는 거지.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이라.”
달달한 바나나 우유가 터진 입 안을 시큰하게 맴돌았다.
간밤, 경멸 어린 말들로 엄마의 가슴을 할퀴어 놓았으나 다경 또한 엄마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고아원에서 나고 자란 엄마는 원장에게 겁탈당할 뻔한 날 그곳을 뛰쳐나와 몸 하나 누일 곳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돈 한 푼 없는 열여덟 살 미성년인 엄마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었고, 결국 그때 들어가게 된 곳이 후미진 윤락가였다.
하루에도 십여 명씩 남자들을 받아내는 삶을 살다가 어느 날 덜컥, 저를 가졌다.
지우지 못해 낳았고, 버리지 못해 키웠다.
그렇게 혼자만을 감당하기도 벅찬 엄마에게 딸린 저란 존재는, “누구 때문에”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그녀에게 고달파진 인생의 책임을 전가하기 좋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선택 사항이 없었던 건, 엄마 또한 매한가지였다.
누구의 자궁을 통해 태어날지 선택하지 못한 저나, 부모가 저를 버릴 줄도 모르고 태어난 것도 모자라 덜컥 누구 씨인지도 모를 아이를 낳아 짐처럼 이고 지게 된 제 엄마나.
돌이켜보니 간밤 엄마를 향해 뱉었던 말들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가슴을 찔렀다.
얻어맞은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어제따라 괜히 속이 울컥해서.
“내 앞으로 들어놓은 적금이 좀 있는데.”
불쑥 상념을 파고드는 말에 다경이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았다.
“졸업하고 미자 떼면 아마 이래저래 돈도 좀 생길 거고.”
매점의 소란을 뚫고 귀에 닿은 뜻 모를 말에 그래서? 라고 묻듯 눈썹 끝을 치켰다. 그러자 권도하가 답지 않게 눈을 피하며 멋쩍은 투로 말했다.
“나중에 그거 모아서 가게 하나 차려주면, 너나 네 어머니도 좀 편해지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다경은 잠시 할 말을 잃은 채로 소리 없이 두 눈만 깜박였다. 며칠 전엔 구정물 타령을 하더니 이젠 가게 타령을 하는 순진한 도련님의 말에 기가 탁 막힌 탓이다.
어차피 머나먼 미래의 얘기고 준다 해도 받지도 않을 거지만, 얘야말로 이걸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우리 모녀한테 그 돈 다 주고, 넌 뭐할 건데?”
황당하다는 얼굴로 묻자 권도하가 특유의 능청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나? 나야 뭐, 대충 먹고 살지 않겠냐? 너도 알다시피 이 구역 금수저잖아, 내가.”
별문제 될 거 있겠냐는 듯 양손을 들어 툭 털어 보인다.
대충 먹고 살지 않겠냐고. 말은 저렇게 하지만, 집안이 금수저인 걸 떠나 공부도 곧 잘하는 녀석이라 앞길이 걱정되진 않을 터였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저완 달리, 이 사회의 상위층에서 엘리트 코스들을 밟고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 금수저다운 삶을 살게 되겠지.
그래도 그렇지. 제가 가진 돈을 우리 모녀에게 주겠다니.
겉보기완 다르게 바보인가, 생각하며 그 허무맹랑한 소리를 무시로 흘려보내려는데.
“그냥 받는 게 정 마음에 걸리면.”
도하가 마주 앉은 테이블에 턱 하니 양팔을 짚었다.
“그거 받고, 나한테 시집오든가.”
“뭐?”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잖아. 아무리 네가 예뻐도, 그 얼굴에 대머린 좀 그렇지 않냐?”
진짜 속셈은 그것이었던 듯 민망해하는 기색 하나 없이 뻔뻔한 낯으로 대놓고 능청을 떨었다.
어떻게 된 애가 단계라는 게 없지?
“언젠 지켜준다면서 사귀자 그러더니, 이젠 돈 줄 테니까 결혼하자고?”
“그게 그렇게 되나?”
그제야 조금은 민망한 기색을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당당한 태도로 덧붙인다.
“근데 뭐든 네가 손해 볼 건 없잖아? 나 이래 봬도 인기 많은데.”
한쪽 입매 끝만 말려 올려진 도톰한 입술이 매끄러운 곡선을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