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98)

 5화.

 3. 차단된 퇴로

 후― 다경이 무거운 숨고르기를 끝으로 사무실 안에 발을 들였다.

 “아니, 우리 윤 대린 어쩜 티쪼가리 하나를 입어도 이렇게 예뻐?”

 자리로 돌아오자 송 과장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맞이했다.

 “이 정도면 옷이 윤다경 얼굴발 받는 거 아냐?”

 원래도 오버가 심한 사람이긴 하지만, 좀 전의 실수 탓인지 오늘따라 반응이 더 유난스러웠다.

 “그만 좀 하세요, 과장님. 사람 민망하게.”

 “왜애, 진짠데? 윤 대리가 우리 마케팅 2팀 비쥬얼 담당 아냐. 다른 부서에서 그런다더라. 마케팅부 수지라고.”

 마케팅부 수지라니.

 “수지는 대체 뭔 죄래요?”

 “음, 얼굴이 예쁜 죄?”

 진저리치는 다경의 반응에 송 과장이 뭐가 좋은지 깔깔거리며 웃는다.

 입사 때부터 사수였던 그녀는 종종 이런 식으로 다경의 외모에 대해 찬양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면 다경은 우쭐하긴커녕 민망함에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얼굴 좀 반반하다고 해서, 제 인생이 같이 반반해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 같은 생각이 들자 문득 제 불운했던 인생의 조각 하나를 쥔 남자가 떠올랐다.

 ― 앞으로 너한테 튈 구정물까지 내가 다 뒤집어쓸 예정이고.

 권도하.

 빠르게 머릿속을 스친 이름 석 자와 함께 본능처럼 눈을 돌리려던 순간, 송 과장이 끼어들었다.

 “근데 스커트는 괜찮아? 아까 같이 젖었잖아.”

 커피 때문에 더러워진 옷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하의는 여벌이 없어서 그냥 대충 닦아냈어요. 위쪽이라 티로 가려지기도 하고.”

 “에구. 늙으면 이렇게 한 치 앞을 못 본다. 이 못난 손! 이 삐꾸 같은 눈!”

 송 과장이 갑작스레 자학 모드에 돌입했다. 괜찮다는데도 영 마음이 개운해지질 않는 모양이다.

 “아이참, 괜찮다니까 그러시네. 정 그렇게 미안하시면 과장님 옷 벗어주시든지요.”

 “그럴래? 그러자. 벗어줄게, 내가.”

 그냥 해본 소린데 그걸 또 넙죽 받아들이며 진짜로 벗는 시늉을 한다.

 “여기서 벗으시게요?”

 “그래애! 내가 다 벗어준다 이거야. 근데 자기 개미허리에 이게 맞긴 하겠니?”

 송 과장의 천연덕스런 주접에 줄곧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근심도 잊고 픽 웃음이 터졌다.

 “에계. 괜히 벗어주기 싫으시니까 사이즈 핑계 대시는 거죠?”

 “왜, 다경 씨 무슨 일 있었어요?”

 한결 풀린 얼굴로 송 과장과 붙어 앉아 아웅다웅하고 있는데, 불쑥 등 뒤에서 목소리 하나가 넘어왔다. 그와 동시에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조금은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때마침 휴식을 마치고 옆을 지나치던 박 과장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 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 실수로 옷을 좀 버려서.”

 “그러고 보니까 아침이랑 옷이 바뀌었네. 반팔인데 안 추워요? 에어컨 아래라 쌀쌀할 텐데.”

 소매 아래로 드러난 맨살을 보며 박 과장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그러자 이때다 싶은 송 과장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어머, 왜애? 박 과장이 우리 윤 대리 대신 옷이라도 벗어주게?”

 “과장님!”

 다경이 깜짝 놀라 서둘러 대화를 저지했다.

 다른 직원이라면 모를까, 하필 박 과장에게 그런 질문을 한 그녀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괜한 말씀을···.”

 “필요하면 벗어주죠.”

 송 과장의 속내를 알아채곤 눈짓을 보낸 찰나. 무뚝뚝한 목소리와 함께 박 과장이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건넸다.

 “일하는 동안이라도 좀 걸치고 있어요.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아뇨, 그렇게까진.”

 “오! 역시 상남잔데, 박일호!”

 당황하는 그녀 대신 송 과장이 넙죽 손을 내밀어 그의 옷을 받아들더니 다경에게 불쑥 건네주었다. 덥석 손에 들린 재킷을 보며 다경이 난처한 기색을 내비쳤다.

 “송 과장님!”

 “남자가 이 정도 희생정신은 있어야지, 응?”

 다경의 군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송 과장이 박 과장과 찡긋 눈짓을 주고받았다.

 머쓱한 표정의 그가 귀 끝을 붉히며 제 자리로 돌아간다. 그 바람에 돌려줄 기회를 잃어버린 옷이 무겁게 다경의 무릎을 짓눌렀다.

 “과장님, 정말.”

 결국, 참다못한 다경이 나지막이 볼멘소리를 했다.

 “번번이 왜 그러세요, 사람 자꾸 난처하게.”

 “왜, 강제로 뺏은 것도 아니고 제가 좋아서 주겠다는데. 정 마음 불편하면 옷 돌려주면서 둘이 밥 한 끼 먹어. 겸사겸사 딱이네, 안 그래?”

 굳이 받을 필요도 없는 걸 과장님 때문에 받았는데 그것 때문에 같이 밥까지 먹어야 하느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다경은 꾹 참았다.

 아무리 편한 사이라 할지라도 송 과장은 엄연히 선임이었기에, 좀 불편하고 짜증나도 예의는 차려야 했다.

 “옷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다음부턴 이러지 마세요.”

 “아, 알았다. 알았어.”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송 과장은 박 과장이 건네주고 간 옷을 다경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나저나 감기 걸리겠다, 자기.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우리 비쥬얼 담당이 코나 찔찔 흘리고 그러면 안 되지.”

 사람 속은 모르고 쓸데없는 오지랖을 떠는 송 과장을 다경이 마뜩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내 인간관계란 이래서 힘들다. 난처해도 그조차 있는 그대로 내색할 수가 없으니.

 후···. 깊은 한숨이 목울대를 울린다. 다경이 강제로 여며진 옷을 어쩌지 못한 채 짜증스레 눈을 들었을 때였다.

 “···!”

 언제부터 이쪽을 보고 있었는지 모를 날카로운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쳤다. 그 순간 심장이 발작하듯 오그라들고 숨통이 덥석 죄어들었다. 상황에 치인 나머지 잠시 잊고 있었던, 제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 원흉, 권도하였다.

 습관처럼 무시하려 비껴간 시선이 저도 모르게 되돌아갔다. 이전보다 더욱 날 선 눈빛이 피할 수 없을 만큼 그녀를 빤히 저격하고 있었다.

 마치 한 번만 더 외면했다간 그대로 달려들어 목을 콱 물어버리리라 위협하는 것만 같은, 흉포한 짐승의 눈.

 “팀장님.”

 끈질기게 이어지던 시선의 교차를 끊은 건 그의 앞에 있던 차장의 목소리였다.

 “말씀하신 자료는 언제까지 보고 올리면 될까요?”

 집어삼킬 듯한 눈으로 다경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비로소 눈길을 돌렸다.

 “다른 건 이번 주 중으로 넘겨주시고, 선호도 조사만 오늘 퇴근 전까지 부탁드리죠.”

 “알겠습니다, 팀장님.”

 차장과의 대화를 끝으로 방향을 튼 등이 팀장실 문 너머로 모습을 감춘다. 그제야 가까스로 트인 숨이 입 밖으로 무겁게 쏟아졌다.

 저도 모르는 사이 힘이 들어간 손끝에 가느다란 떨림이 번졌다. 재킷으로 여며진 등골이 그럼에도 선득했다. 쉬이 불식되지 않는 불안감에 다경이 그가 사라진 유리문으로 다시금 시선을 옮겼다.

 닫힌 문을 뚫고 고개를 내민 짓궂은 우연이 혀를 쏙 내밀며 저를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 * *

 온종일 시계만 봤던 것 같다.

 거의 분 단위로 시각을 살피던 눈에 드디어 6시를 1분 앞둔 시간이 보였다.

 마우스를 쥔 검지 끝이 컴퓨터 종료 버튼 위에 1분 대기조처럼 버티고 있다.

 그러다 시각의 마지막 숫자가 0으로 바뀐 순간, 다경은 달칵 종료 버튼을 클릭하곤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머, 웬일로 퇴근이 빠르네. 자기?”

 눈치 싸움이 필수인 퇴근 시간. 어지간해선 먼저 일어서는 법이 없는 다경의 신속한 움직임에 송 과장이 의아한 얼굴로 자리를 내다보았다.

 “아, 오늘 선약이 좀 있어서.”

 “선약? 옷은 어쩌고?”

 “옷이 이러니까 서둘러야죠.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과장님.”

 되는대로 둘러댄 뒤 핸드백을 집어 들고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내딛는 걸음걸음에 숨기지 못한 초조함이 묻어났다. 행여 누가 따라붙기도 할까 봐 마음을 졸인 탓이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떡하면 좋을지, 이 재회를 어떤 식으로 대처하면 좋을지.

 아침에 그런 식으로 권도하를 마주하고부터 온종일 머리가 터지도록 생각했다. 그와 마주칠 장면을 시뮬레이션까지 돌려가며 답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본들 결론은 하나였다.

 회사가 하루아침에 망하지 않는 한 그와의 마주침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럼에도 당장은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 일단은 되도록 단둘이 마주치는 상황만이라도 피해 보는 수밖에.

 물론 저쪽에서 작정하고 마주치려 들면 어찌할 도리가 없겠지만, 딱히 권도하가 제게 그럴만한 이유도 없었으니까.

 ‘없어, 그런 이유 따위.’

 단호한 부정으로 제 안에 돋아나는 불안의 싹을 잘라낸 뒤 뛰듯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막 손을 뻗은 순간 그녀보다 빠른 손 하나가 앞질러 버튼에 닿았다.

 “퇴근이 칼 같네요, 윤다경 대리.”

 “!”

 빨갛게 불이 들어온 외부 버튼과 함께 귀에 익은 저음이 귓불을 잡아챘다.

 “퇴근이 아니라 도망인가?”

 애써 다잡고 있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발밑으로 내려앉았다. 발작처럼 향한 눈동자에 피하고자 했던 상대의 얼굴이 오롯이 들어찼다.

 “꽁무니 빼는 뒷모습이 꽤나 절박해 보이는데.”

 작정하고 따라 나온 것임이 틀림없는 미소가 뒤통수를 날카롭게 강타한다.

 하루 종일 어떻게 피할지 고민하던 게 무색하게도 남자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동시에 다경은 깨달았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권도하를 피할 수 있다 생각한 것 자체가 미련한 짓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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