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98)

 4화.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집착과 갈망이, 다경은 짜릿하면서도 한편으론 무서웠다.

 제가 그런 마음을 받을 만한 주제가 못 됨을 알기에 느끼는 감정의 반동이었다.

 남자들 등골 빼먹는 엄마를 두고도 당당하게 쏘아붙이는 저였으나, 제 주제만큼은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제가 감히 서림재단 이사장 아들과 엮일 부류가 아니라는 것쯤은.

 “나 같은 거랑은···.”

 옅은 파동이 일었던 마음을 도로 내리누르며, 다경이 경고하듯 말했다.

 “그냥 남인 편이 너한테도 좋아.”

 가뜩이나 심기 불편해 보이는 눈이 그 순간 더 험악하게 구겨졌으나, 주눅 드는 기색 없이 뒷말을 이었다.

 “괜히 엮여서 너까지 구정물 뒤집어쓰지 말고 나한테서 신경 끄라고, 권도하.”

 오늘 일만 해도 마찬가지다.

 그대로 뒀으면 어디선가 소식을 들은 선생님이 쫓아와 일단락되고 말았을 일이 권도하의 등장으로 인해 더 떠들썩해지고 말았다.

 오늘의 불필요한 행동 때문에 녀석은 또 한 번 애들 입에 오르내리게 될 테지.

 창부 딸인 윤다경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물론 도하 본인은 그런 것 따윈 신경도 쓰지 않을 테지만, 녀석의 부모님은 생각이 다를 테다.

 아직 고등학생이라 할지라도, 다방 마담의 딸과 제 아들이 엮이길 바라는 부모는 이 바닥에 그 누구도 없었다.

 저로 인해 괜히 권도하까지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저 또한 아줌마들이나 보는 삼류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러니 이 유치한 신데렐라 노릇도 더 이상은 사양이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으면 이거 그만 놔.”

 다경이 단호한 얼굴로 어깨에 닿은 손을 뿌리쳤다.

 “설마 너.”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잠자코 듣고 있던 녀석에게서 생각지 못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나 걱정하냐?”

 걱정이라니. 다경은 짧게 코웃음을 터트렸다.

 “걱정? 내가 누굴 걱정하고 말고 할 처지니? 나중에 가서 괜히 내 탓 하지 말란 뜻이야.”

 “아닌 것 같은데.”

 완강한 부정에도 불구하고 말끝이 길어진 목소리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내 걱정하는 거 맞는 것 같은데?”

 사납게 으르렁거릴 땐 언제고 히죽 입꼬리마저 올린 녀석이 능구렁이 같은 표정으로 한 번 더 되물었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매가 이미 제 판단이 맞다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대체 그 말 어디에서 걱정을 느꼈다는 건지. 어이가 없으면서도 괜스레 귀 끝이 후끈거렸다.

 “웃겨, 진짜. 너 좋을 대로 생각해. 아무튼 난, 너한테 튄 구정물엔 절대 책임 안 질 테니까.”

 으름장을 놓듯 뇌까린 뒤 이유 없이 달아오른 뺨을 훔치며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불쑥 양옆을 짚어온 기다란 팔 탓에 다시금 몸이 베드 위로 앉혀지고 말았다.

 “뭐야, 비켜.”

 “누가 너보고 나까지 책임지래?”

 갑작스레 좁혀진 간격에 숨이 빠르게 목 아래로 당겨졌다.

 “붙지 말고 저리 비키라···.”

 “너야말로 내 일에 신경 꺼.”

 밀어내려 뻗은 손이 도리어 붙잡혀 아래로 끌어 내려졌다.

 “구정물 그깟 거, 튀어봤자 좃도 안 무서우니까.”

 시트 위로 결박된 손등이 델 것처럼 뜨거웠다. 두려움따윈 비치지 않은 올곧은 눈이 다경이 빠져나갈 구멍을 원천봉쇄 했다.

 코끝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수컷 냄새가 보건실 가득 떠도는 약품 향을 밀어내고 사고를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덕분에 제대로 된 대꾸도 못 하고 입술을 달싹이자 녀석이 말했다.

 “빨아버리면 그만이잖아.”

 “···뭐?”

 “성능 좋은 세탁기며 세제며 널리고 널렸는데, 그딴 걱정을 왜 해? 쓸데없게.”

 겨우 구정물 따위가 대수냐는 듯 거만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성능 좋은 세탁기와 세제라니.

 가까워진 거리에 당황하고 있던 것도 잠시. 다경은 그 어이없는 발상에 긴장이 풀리며 헛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지금, 한 마디로 저 잘났단 소릴 하고 있는 건데.

 “아, 그래. 좋겠네, 누군. 성능 좋은 세탁기 있으셔서.”

 대체 내가 지금껏 누굴 걱정하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너 금수저인 거야 잘 알겠고, 그럼 이 손은 좀 놔줄래?”

 다경이 빈정대는 투로 받아치며 붙잡힌 손을 턱짓했다.

 “난 너처럼 좋은 세탁기가 없어서 내 손으로 직접 다 빨고 수습해야 하거든.”

 저로 인해 튄 구정물쯤이야 성능 좋은 세탁기를 가져 상관없다는 녀석과 더 나눌 얘기가 있을 리 없었다. 권도하가 순순히 놓아줄 리는 없으니 빼내려 힘을 준 찰나였다.

 “원하면.”

 불현듯 턱 끝을 붙잡은 녀석과 다시금 눈이 닿았다.

 “네 구정물도 내가 다 빨아줄게.”

 나지막이 고막을 파고드는 음성이 귓속을 핥는 것만 같았다.

 “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이 혓바닥으로 직접.”

 동시에 잘생긴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붉은 혀가 제 아랫입술을 야살스레 핥았다.

 어쩐지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장면에 별안간 얼굴이 붉어졌다.

 “미, 미쳤니?”

 다경은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턱에 닿은 손을 발작처럼 뿌리쳤다.

 “빨긴 뭘 빨아? 내 건 내가 알아서 빨 거거든?”

 기세 좋게 외친 말끝에 미처 숨기지 못한 떨림이 묻어났다.

 조금 전 배 속을 끓게 하던 몽글거림이 한층 더 선명해졌다.

 심박이 빨라지고 얼굴이 뜨거운 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후끈거렸다.

 그러자 뭐가 웃긴지 대꾸도 않은 권도하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울림 좋은 웃음소리가 고요한 보건실 안을 가득 채웠다.

 다경은 영문도 모른 채 공연히 얼굴만 더 빨개지고 말았다. 아무래도 녀석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버린 모양이다.

 아무튼 이상한 놈이야. 기껏 생각해서 뱉은 말에 저런 어이없는 답이나 하고!

 “뭐, 그래.”

 여기서 괜히 흥분하며 날뛰어봤자 권도하의 손에 놀아나는 것밖엔 되지 않을 터였다.

 “성능 좋은 세탁기로 어디 한번 잘 빨아봐. 혹시 안 지워지더라도 저얼대, 내 탓은 하지 말고.”

 내 몫과 네 몫. 보이지 않는 선을 그으며 다경이 급히 대화를 갈무리했다. 그러곤 제 앞을 버티고 선 어깨를 밀며 도망치다시피 한 걸음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걱정 마라. 네 탓 할 일 따위 절대 없으니까. 그리고.”

 조금 전과 달리 웃음기가 가신 음성이 의미심장하게 등을 타고 넘어왔다.

 “앞으로 너한테 튈 구정물까지 내가 다 뒤집어쓸 예정이고.”

 우뚝 멈춰 선 채 들은 말을 곱씹다가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뜻이야, 그게?”

 “주변 애새끼들이 나보고 그러더라.”

 멈춰 선 다경의 앞으로 도하가 저벅, 한 걸음을 뻗어왔다.

 “윤다경 꽁무니 쫓는 개, 라고.”

 단숨에 거리를 좁힌 커다란 발이 다경의 발끝과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윤다경의 개라고. 언젠가 저 또한 들은 적이 있는 말을 되뇌며 웃는 얼굴이 왠지 모르게 긴장감을 조성했다.

 “처음엔 이 새끼들이 어디 감히 날 개에 갖다 붙이냐고 그랬는데.”

 마주 선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운 탓일까. 공연히 심장이 두근대고 호흡이 빨라졌다.

 “오늘 그 꼴을 보니 결론이 나더라고.”

 대체 어떤 결론을 내렸다는 건지.

 “여기서 더 꼭지 돌아 천지 분간 못 하는 짐승 새끼 되기 전에.”

 아슬아슬한 거리를 견디다 못해 결국 뒤로 주춤한 순간.

 “진짜 윤다경 네 개가 돼보기로.”

 무쇠처럼 단단한 음성이 올곧게 귓속을 관통했다. 외면하듯 허공 어디쯤을 헤매던 눈이 희미하게 구겨져 도하에게로 향했다.

 귓속을 파고든 말의 행간이 잘 파악되지 않았다.

 제 개가 돼준다는 게 무슨 뜻인지. 오늘 일이 왜 녀석에게 그런 결심을 하게 이끌었다는 건지.

 아니, 그보다도 태생이 이러해 시작된 제 불운을 권도하가 무슨 수로 뒤집어써주겠다 장담하는 건지. 어떤 것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상념이 깨진 건 그때였다.

 “대신에 넌.”

 불쑥 뻗어온 커다란 손이 뜯긴 옷 위로 걸친 녀석의 교복깃을 확― 잡아 벌렸다.

 “네 몸단속이나 똑바로 해.”

 “뭐 하는 거야!”

 다경이 사색이 된 얼굴로 부리나케 앞을 여몄다.

 처음 보는 도하의 난폭한 행동에 놀라 심장이 덜컥거렸다. 하지만 제대로 옷을 추스를 새도 없이 팔이 붙잡히며 녀석에게로 당겨지고 말았다.

 “아···!”

 “한 번만 더 딴 놈들 앞에서 속살 보이는 날엔.”

 중심을 잃은 몸이 그대로 도하의 가슴팍으로 안겨버렸다.

 “본 새끼들 대가리를 다 깨버릴 테니까.”

 줄곧 장난기 어리던 검은 눈에 섬뜩한 이채가 돌았다.

 “아무리 너라도 그걸 바라진 않겠지.”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 돋는 음산한 경고가 품이 큰 교복 틈으로 헤집듯이 파고들었다.

 쿵, 쿵. 온몸을 휩싸는 열기가 창밖의 무더위마저 잊게 했다.

 감당되지 않는 열기에 다경이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사냥감처럼 가늘게 헐떡였다.

 난폭한 소유욕이 파들대는 심장을 콱 옥죄어 온다.

 퇴로가 막힌 피식자처럼 위태로이 바들대며 도하를 올려다본 순간.

 “좋아해, 윤다경.”

 개인 줄 알았던 녀석이 난폭한 늑대의 얼굴로.

 “오늘부로 나랑 사귀어.”

 명령 같은 고백을 내뱉었다.

 숨죽인 채 마주 보는 시선 사이로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다경은 그 앞에서 감히 어떤 부정의 말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대로 한 마디만 더했다간, 눈앞의 짐승에게 산 채로 목이 뜯겨버릴 것만 같아서.

 그렇게 권도하는 윤다경의 개가 되었다.

 내리쬐는 햇볕이 살갗을 녹일 듯 뜨거웠던, 열아홉의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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