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rologue (1/98)

 prologue

 “뭐해?”

 비딱하게 기울어진 턱 끝이 그의 허벅지를 가리켰다.

 “올라와.”

 “···뭐?”

 생경한 상황에 눈 둘 곳을 찾지 못한 시야가 어지러웠다.

 “왜 자꾸 순진한 척이야. 이미 볼 장 다 본 사이에.”

 남자가 피식 웃으며 넥타이를 잡아뺐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그가 원하는 바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다경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앞섰다.

 “대체 뭘···.”

 “왜.”···

 어느 틈에 거리를 좁혀온 남자가 떨구어진 작은 턱을 붙잡아 치켜 올렸다.

 “화대 운운하던 입이라 이 정돈 껌일 줄 알았는데, 안 내켜?”

 한쪽 입매 끝만 틀어 올려진 미소가 혀끝이 비릴 만큼 잔혹했다.

 그의 말처럼, 분명 모든 걸 다 감수할 각오로 수락한 거래이긴 했다. 그 거래에 이런 저질스러운 주문이 따르리란 건 감히 생각도 못 하고.

 나쁜 자식.

 “못 해, 그런 짓은.”

 원망 어린 눈으로 그를 쏘아본 채 턱에 닿은 손을 뿌리쳤다.

 “왜 못 하는데.”

 내치기 무섭게 붙잡힌 손목에 집착 어린 악력이 가해졌다.

 “10년 전엔 잘도 했던 짓이 지금은 왜 안 되실까. 적어도 그때보단 받아먹기 수월할 텐데.”

 조롱 어린 웃음이 마주한 동공을 싸늘히 핥았다. 뱉은 말들이 하나같이 저열해, 다경은 도무지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너 꼭 말을 그런 식으로 해야 돼?”

 “내 말이 어때서. 다 사실이잖아. 기억 안 나?”

 천연덕스럽게 응수한 얼굴을 비딱하게 기울이며 그가 악랄하게 속삭였다.

 “네가 순진한 얼굴로 허튼짓 운운하면서 내 바지춤 잡고 매달린 거.”

 잔인하게 귓속을 관통한 음성이 애써 덮어놓은 기억을 밑바닥까지 들추었다.

 10년 전.

 ‘허튼짓 해 줘, 도하야.’

 멈칫하는 그를 붙잡으며 절박하게 되뇌었던 제 마지막 부탁.

 그땐, 그날의 일이 오늘 같은 상황을 야기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질 못했다.

 아니. 이런 식으로 재회하리란 것 자체를 예상치 못했다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

 너와의 인연은 그걸로 끝일 거라고 굳게 확신했었으니까. 그런데···.

 “긴말 하기 싫으니까 올라와.”

 철컥, 열리는 금속성의 마찰음이 깊어지려는 상념을 끊어냈다.

 “싫어.”

 진저리치듯 읊조린 다경이 모멸감을 삼키며 단호히 덧붙였다.

 “차라리 그냥 네 멋대로 하고 빨리 끝내.”

 그 정도쯤은 해줄 수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지난날 내가 벌인 과오에 대한 최선의 사과라는 듯.

 하지만, 상대는 그냥 그렇게 끝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누구 좋으라고.”

 마디 굵은 손에 잡혀 빼진 벨트가 시린 바닥 위로 툭 떨어졌다.

 “누구 좋으라고 그냥 그렇게 끝내. 재미없게.”

 “너 정말!”

 “못 하겠으면 지금이라도 나가.”

 냉혹한 눈이 위압적으로 시야를 짓누른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윤다경한테 과연 회사까지 때려치울 배짱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잔인하게 비틀린 입술이 대놓고 그녀를 조롱했다. 그게 안 돼서 여기까지 따라온 걸 알면서, 구태여 그런 말을 덧붙인 저의가 사무치게 원망스러웠다.

 “너 원래··· 이런 애였니?”

 목줄을 움켜쥔 듯 오만한 미소에 울컥 울분이 차올랐다.

 “말 잘했어, 다경아.”

 마치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도하가 잘생긴 눈매 끝을 슬쩍 휘며 고개를 낮추었다.

 “맞아. 나 원래 이런 놈 아니었지. 오죽하면 친구 새끼들 입에서 윤다경 네 개라는 별명까지 붙었을까. 근데.”

 희미하게 휘어져 있던 눈꼬리가 일순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먹고 버려지니까 이렇게 되더라고.”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고. 날 이런 놈으로 만든 게 바로 너라고. 박제된 동공을 깊게 들여다본 채 도하가 나지막이 속살거렸다.

 그 음성이, 눈빛이 가슴 한구석에 비수처럼 내리꽂혔다. 날것을 앞에 둔 짐승처럼 위험하게 빛나는 눈엔 선명한 원망이 응축되어 있었다.

 “···.”

 지금까지 외면해 온 죄책감이 더는 부정할 수 없게 정면으로 다가왔다. 굳게 닫힌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 경련하는 턱 끝을 더운 손이 붙잡아 치켜 올렸다.

 “그러니까.”

 “읏···.”

 “식상한 소린 그쯤하고 그만 올라와. 다경아.”

 더듬듯 입술 선을 따라 배회하던 엄지가 불시에 틈을 헤집어 입술을 벌린다.

 “난 일단, 이 입술을 좀 맛보고 싶거든.”

 아랫입술을 짓누르고 침범한 손이 기어이 혀끝까지 닿고 말았다.

 “네 말 한마디면 배까지 뒤집어가면서 절절 기었던 날.”

 “하으.”

 “잘도 기만하고 튀었던 이 예쁜 입술을.”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간 치아가 살갗을 눌렀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대로 더 깊이 파고든 손가락이 유린하듯 입 안 점막을 문질렀다.

 “혀는 잘 쓰지?”

 미처 삼키지 못해 흘러내린 타액을 손끝으로 훑으며 그가 냉담하게 웃었다.

 “10년 만에야 맛보는 네 입 안은 얼마나 죽여줄지.”

 그의 입을 뚫고 나온 더운 날숨이 달구어진 혀를 더듬고 목구멍까지 치밀어 왔다.

 “몹시 궁금하거든, 내가.”

 덜컥 가라앉는 심장과 함께 아련했던 지난날의 잔상이 찰나처럼 뇌리를 스친다.

 ‘이용해, 날.’

 10년 전,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구원의 손을 내밀던 권도하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계산은 똑바로 해야지, 다경아.’

 그저 계산이라는 이름의 협박을 내세운, 한 마리의 발정 난 짐승만이 존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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