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10/11)

외전 1.

불청객

밤이다. 나양은 밤이면 아무도 다니지 않는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더 그랬다. 사람도, 차도, 가로등도 없는 길을 따라 오토바이를 천천히 몰았다. 비가 와서 속도는 내지 않았다.

버스 터미널 앞, 훤히 헤드라이트를 켠 버스가 맞은편에서 천천히 들어왔다.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피해 오토바이를 세웠다.

버스가 완전히 지나가길 기다리는 동안 눅눅한 안개 사이로 뿌연 매연이 훅 끼쳤다. 문득 담배가 당겼다. 결국 오토바이 시동을 꺼 놓고 담배를 물었다.

차를 돌려 후진으로 뒤꽁무니부터 안으로 넣는 버스에 ‘서울─나양’이라고 적힌 누런 팻말이 보였다. 나는 타 본 적이 거의 없는 버스다. 일주일에 딱 한 번 오간다는 버스인데도 언제 가고, 언제 오는지도 몰랐다.

내가 담뱃불을 끄자 주차를 마친 버스 헤드라이트도 꺼졌다. 나는 오토바이 시동을 걸고 반대편으로 달렸다.

“이 군! 지금 괜찮은 겨? 비가 너무 와!”

“너무 오니까 지금 고쳐야지. 이대로 두면 빗소리 시끄러워서 할배 잠도 못 자.”

나는 기름집 할아버지가 건네는 우비를 입고 작은 사다리를 폈다. 뚝 꺾인 처마 빗물받이가 반쯤 뜯어져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이거 오늘 새로 못 달아. 일단 다시 이어 놓을 테니까 들어가 있어.”

“내일 아침에 다시 올 겨?”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곤 사다리에 올랐다.

이게 내 일이었다. 나는 동네 심부름꾼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동네 잔일을 거들어 주고 용돈을 받았던 것이 졸업하고 나서부턴 일이 되었고, 하루에도 몇 번을 불려 나갔다.

지붕에 난 구멍도 때우고, 깨진 화장실 타일도 갈았다. 어떤 때엔 곰팡이 얼룩이 진 벽을 닦고 도배도 하고, 변기도 뚫었다. 쌀가마니나 소금 가마니를 지고 옮기기도 했다.

몸을 덜 쓰는 일도 있었지만 종일 한자리를 지키는 일은 도저히 성질머리에 안 맞았고, 그렇다고 싹싹하게 남을 대하지도 못하는 내게 몸 쓰는 심부름은 적당한 일이었다.

나한테 새참 심부름을 시키고 막걸리 한 사발을 퍼 주던 양반들이 이제는 나이가 들어 집에 들어앉았고, 힘쓰는 일도 못 하게 됐다. 그 노인네들을 수발든다 생각하면, 심부름 일이라고 나쁠 것도 없다.

어차피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백수로 살 수도 없었다. 사지 멀쩡한 사내놈들이 군대에 가 버리고 나니, 쓸 만한 놈이라곤 군 면제를 받은 나뿐이었다.

나는 타고나길 남들 다 보는 색을 보질 못했다. 뭔들 남들만큼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우비 잘 줌 써. 비 다 맞잖여!”

부서진 처마 빗물받이를 받치다가 거추장스러운 우비를 벗어 버렸다. 내 생각을 해 준답시고 내어 준 우비는 너무 커서 뒤집어쓰면 눈을 다 가렸다.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좀 들어가! 알아서 할게.”

나는 결국 비를 다 맞고 빗물받이를 이어 달아 놓았다. 내일까지 버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비까지 오는 야밤에 빗물받이를 새로 달 수는 없었다.

일은 했지만 뭔가 찝찝한 느낌이라 오늘 일한 돈은 받지 않았다. 대신 내일 새 빗물받이를 달 때 두 배로 일당을 받을 거라고 했다.

기름집 할아버지는 안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가 수건을 던져 주고는 내가 머리를 닦는 새 뜨거운 보리차를 줬다. 나는 마루에 앉은 채로 보리차를 마셨다. 그새 비는 더 거세졌다.

“비 참 질기다.”

나양에는 여름마다 비가 많이 내린다. 내가 나양에 산 이후로 내내 그랬다. 하지만 올해처럼 초여름부터 많이 내린 적은 없었다. 장마가 오기도 전에 올해 내릴 비가 한꺼번에 내리는 것 같았다.

“좀 그치거든 가. 요즘도 화투 치러 오락실에 가는 겨?”

일주일에 두어 번 오락실 화투판에 끼곤 했다. 가는 날을 정해 놓고 시작한 건 아니었는데, 월요일과 금요일 저녁엔 오락실에 갔다.

판돈을 크게 거는 일도, 크게 잃을 일도 없는 심심풀이 판이라 종종 끼던 것이 취미처럼 됐다. 형들이랑 운동 안 하는 날 밤에는 딱히 할 일도 없었으니까 나쁘지 않은 취미였다. 그런데 오늘은 귀찮다. 비를 하도 맞아 피곤하다.

─이 군! 왜 여즉 안 오구 전화질야? 오라고 한 지가 언젠디.

기다릴까 싶어 안 간다고 통보라도 해야지 싶어 전활 걸었는데 재깍 받는 게 불안하다. 갑자기 뭘 시키는 건 아니겠지.

─빨리 줌 와 봐. 서울서 아가씨가 하나 왔는디 와서 좀 도와줘야 쓰겄어.

“서울서 오긴 누가 와. 내가 누군 줄 알고 찾는데?”

딴 데 새지 말고 곧장 오란 말과 함께 전화가 뚝 끊겼다.

하여튼 제멋대로야. 화투 치러 오라더니, 갑자기 심부름을 시키려고 들어. 어쩐지 불안하다 했다. 그래도 같이 패 맞춘 정이 있으니 가 준단 마음으로 기름집을 나섰다.

기름집 할아버지 성화에 못 이겨 오토바이를 놓고 걸었다. 평소에도 잔소리가 많은 양반이긴 했지만, 내 눈에도 안개가 심했다.

한참 쏟아붓고 나서 잦아든다 싶던 비는 그새 바람에 흩날리는 얄미운 비로 변해 있었다. 우산 좀 쓴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다 젖은 거, 우산 들기도 귀찮아 입고 있던 후드를 뒤집어썼다.

안개가 뿌옇게 일어나는 길을 걸었다. 손을 뻗으면 안개가 감기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어릴 적 봤던 강시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걷는 길이 지겹지 않았다.

오락실 문을 열자마자 앞에 선 여자가 보였다. 뒷모습만 봐도 모르는 여자였다.

“화투 치자고 불러 놓고 왜 사람을 데려다 놓으래? 알지도 못하는 여잘.”

여자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어디서 왔다고?”

“…….”

“어디서 왔냐고.”

오락실 문을 발로 한 번 찼더니 그제야 어깨를 움츠리며 나를 돌아봤다.

나양에서 나를 찾는 사람은 많았지만, 여자는 나를 찾을 사람이 아니었다. 나를 알지도 못하면서 기다렸다는 게,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를 기다린 여자를 데리고 가는 건 이상하지만 당연하게 느껴졌다. 딱히 불청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자는 서울에서 왔다고 했다. 어딜 가다 길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게 여자가 말한 전부였다.

아까 터미널로 들어가던 버스를 타고 왔겠지. 여자는 나처럼 비를 맞은 꼴이었고, 우산도 없었다. 나는 짐짝처럼 여자를 데리고 오락실을 나섰다.

여자도, 나도 아무 말도 없이 걸어 우리 집으로 향했다. 가려던 곳이 어디였든 지금 이 시각에 갈 곳은 우리 집밖에 없었다.

때마침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 대충 설명했다. 길을 잃어버려서 오락실에 있던 여자를 데리고 간다고. 엄마는 일단 데리고 오라 했다.

우리 엄마는 미용실을 했고, 미용실에 붙어 있는 집에 쓸데없이 남아도는 방을 여관으로 꾸렸다. 손님은 거의 없었다.

엄마는 여자와 주거니 받거니 말을 나누고는 방을 안내해 주란 말만 하고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남은 나는 여자를 내 나름대로 손님처럼 대했다. 겉옷을 받아 널고, 수건도 줬다. 젖은 구두 대신 갈아 신을 슬리퍼까지 주었다.

이 정도면 복에 겨웠지. 이 밤에 생판 남이 누가 이렇게 도와줘? 그런데도 나를 잔뜩 경계하는 여자에게 거들먹거리고 싶었다.

“새 거야.”

쫄딱 젖은 구두를 신고도 내가 준 슬리퍼로 갈아 신지 않고 버티는 꼴이 웃겼다.

그래도 지 생각해서 새 슬리퍼를 내줬는데, 무슨 놈의 의심이 많은지. 내가 슬리퍼에 독이라도 발랐을까 봐? 여자는 그때서야 쪼그리고 앉아 지 발을 집어넣었다.

들어가려고 미용실을 정리하는 사이, 전화가 울렸다.

전화 올 데라면 몇 군데 정해져 있었다.

“미용실은 문 닫았고, 방은 있어요.”

엄마가 몇 번 만난 정비소 사장이었다. 엄마는 더 이상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고, 사장은 술에 취한 밤이면 괜히 전화를 걸어 이 말이고 저 말이고 했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할 말도 없으면서, 방 있는지는 왜 물어? 욕을 해 주자니 혹시라도 엄마를 더 괴롭힐까 싶어 나는 대꾸도 않고 수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사장이 하는 말을 흘려들으며 여자를 비스듬히 돌아봤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건 알겠지만, 몇 살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핏기 없는 얼굴에 의욕 없는 표정. 비쩍 마른 몸.

설마 죽으러 온 건 아니겠지. 나양 사람도 아닌데 이 깡촌까지 내려올 이유가 자살 말고는 생각나질 않았다. 남 일에 관심 없는 나 같은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여자는 무표정했고, 무엇보다 어딘가 이상했다.

몇 해 전에도 이런 손님이 찾아와 엄마가 끝까지 방을 내주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이 나양 어딘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는 얘긴 못 들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찜찜한 구석이 있긴 했었다. 하루 묵을 곳이 필요하다고 제 발로 와 놓고는 정신 사납게 온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꼭 끌려온 사람처럼. 이 여자도 어딘가 그래 보였다.

아무리 길을 잃었다고 해도 알지도 못하는 남잘 따라오는 여자는 본 적이 없다. 지가 따라와 놓고 내가 어딘가에 팔아넘기기라도 할 것처럼 구는 꼬라지라니.

하도 모자라 보여서 모지리 아니냐고 했더니, 득달같이 아니라고 따지며 지는 미술관엘 간단다. 화낼 정신머리 정도는 있는 거 보니 당장 죽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뉴스를 보면 자살을 하려는 사람은 세상에 대한 오만 정이 떨어져서 더 이상 화도 나지 않고, 슬프지도 않다고 했다. 화도 안 나고, 슬프지도 않은데 왜 굳이 죽으려 들까.

─이 군? 듣고 있나?

내가 통 말이 없자 정비소 사장이 되물었다.

─이 군이라도 와서 한잔하지. 안 그래도 소개시켜 줄 일도 있고. 나도 이 군 필요한 일이 있어.

“지금은…….”

저 여잘 뭐라고 불러야 할까.

“지금은 손님이 계셔서 안 되고. 급한 일 아니면 내일 아침에 가서 할게요.”

손님. 우리 여관에 들일 사람이니 손님은 손님이었다. 나는 되는대로 지껄이고 전화를 끊었다.

“방은 이 뒤로 나가면 있어.”

여자는 아무 말도 않고 나를 따랐다. 미용실 뒷문을 열고 마당을 가로질렀다. 손님에게 내어 주는 방은 마당을 둘러싸고 있었고, 엄마가 자는 방은 가장 안쪽이었다. 나는 손님방을 지나 일부러 내가 자는 건넌방을 내어 주었다.

손님방이 아니었다. 엄마 방을 제외하고는 가장 따뜻해서 내가 겨울에 쓰는 방이었다. 눅눅하거나 으슬으슬할 일은 없을 거다. 어차피 안에 있는 거라곤 빨아서 잘 말려 둔 이불뿐이고, 내 물건은 아무것도 없다.

여자는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불 켜는 소리도, 방문 잠그는 소리도 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신경이 쓰여 그날 밤엔 잠드는 데 한참 걸렸다.

“내가 누군 줄 알고 따라왔냐?”

“그러는 넌 내가 누군 줄 알고 데려왔어?”

이튿날 밤, 그러니까 그 여자가 우리 집에서 지낸 지 겨우 하루만이었다.

잠 못 이룬 전날 밤이 억울할 정도로 여자는 심드렁한 얼굴로 우리 집을 어슬렁거렸다. 여자는 죽을 사람처럼 비를 쫄딱 맞고 우리 집에 기어들어 와서는 제집처럼 잘만 지냈다.

지금도 내가 부친 파전 하나를 주는 대로 받아먹곤 술은 없냐고 묻는 것이었다. 이런 여자가 죽을까 걱정했던 나 자신을 비웃을 정도로 여자는 뻔뻔했다.

“내가 지인 줄 알고 데려왔나. 화투 쳐 주러 갔더니 떠맡겨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온 거지. 우리 집 여관 안 했으면 어쩔 뻔했냐?”

나는 파전을 뒤집으며 빤히 들으란 듯 말했다. 여자는 대꾸도 없이 내가 부친 파전을 물끄러미 봤다. 손이 부러졌나. 지 손으로는 먹지도 못해? 조금 전처럼 손으로 쭉 찢어 주니 냉큼 받아먹었다.

“비 튀니까 안으로 앉아. 괜히 젖은 발로 마루 밟지 말고.”

“좀 젖어도 상관없어.”

그새 거세진 비가 마당을 맞고 튀어 마루 안까지 들어왔다. 마루 바깥으로 비죽 튀어 나간 종아리가 젖는데도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 말이나 지껄이며 파전을 나눠 먹고 각자 방에 들어갔다.

그 여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보냈다. 아침, 저녁으로 내가 차려 준 밥상을 받고, 낮에는 낮잠을 자고 저녁에는 멍하니 마루에 앉아 있었다. 가끔은 미용실에 나가 있기도 했는데, 우리 엄마랑 수다를 떠는 것 같지도 않았다.

우리 엄마는 미용실을 하는 여자치고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고, 말 많은 사람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 여자도 똑같은지, 두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미용실에 앉아 몇 시간이고 라디오를 들었다.

심부름이 뜸한 점심에는 나도 시원한 미용실에 들어앉았다. 엄마가 화투를 치러 나가면 빈 미용실을 지키는 것도 내 일 중에 하나였는데, 그 여자가 있는 동안에는 미용실을 지킬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엄마가 나에게 샴푸를 시켜서 내가 여자의 머리를 감겨 주었다. 샴푸 하는 내내 눈을 멀뚱멀뚱 뜬 채로 나를 올려다보는 꼴이 웃겼다. 그러더니 두피를 꾹꾹 눌러 주자 병든 닭처럼 노곤한 얼굴로 온몸에 힘을 쭉 빼고 늘어지는 것이었다.

“야, 눈 뜨고 일어나.”

겨우 눈만 떠 거울 앞으로 옮긴 여자는 잠에 취해 꾸벅거렸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자 가는 목이 이리 휘청, 저리 휘청했다.

도대체 나양에는 왜 왔을까. 와서는 남의 집에 며칠이고 이러고 있을 이유가 뭘까.

머리를 대충 말려 주고 소파에 누워 여자를 빤히 봤다. 잠이 다 깼는지 여자는 멀뚱거리며 나를 봤다. 눈이 계속 마주쳤다. 둘 다 눈을 피하지 않았다.

“너, 왜 자꾸 나한테 너라고 해?”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살면서 연상의 여자를 누나라고 불러 본 일이 거의 없었다. 여자 형제도 없었고, 연락을 하고 지내는 또래의 친척도 없었다. 동네에는 할머니들 말고는 여자가 거의 없었다.

어릴 때 건넛집에 살던 누나는 생선 가게를 차리고 내가 돈을 받고 일을 거들어 주게 된 뒤론 사장님이라고 부르게 됐다. 나이가 찬 다른 누나들은 서울로 시집을 가고 나면 나양엔 거의 오질 않았다.

내가 누나라 부를 여자는 없었다. 차라리 아줌마였으면 아줌마였지.

“설마하니 나한테 아줌마 소리 듣고 싶은 건 아니지?”

“아줌마 소리 들어도 별로 이상할 나이는 아냐.”

“웃기고 있네. 너라고 부를 때 고마워해라.”

내가 웃자 그 여자가 따라 웃었다. 보통은 존대를 하라며 꾸짖기라도 해야 정상이 아냐? 알면 알수록 이상한 여자였다. 그래도 아줌마라고 부르고 싶진 않았다.

“밥 차렸으니까 나와서 먹어.”

나는 내키는 대로 그 여자를 대했다. 그 여자가 어떻게 하나 보고 싶어서였다. 밥상을 차려 그 여자 방으로 들여 주다가 나와서 먹으라고 해 봤다.

여자는 낯을 잔뜩 가리게 생겨서는 밥을 먹을 때는 생판 모르는 나하고 둘이 마주 앉아서도 잘만 먹었다. 그러면서 TV를 볼 때는 둘이 있기가 싫었는지 엄마가 자러 들어가고 나면 보던 프로그램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지 방에 들어가 버렸다. 그런가 하면 내 방 앞, 마루에 떡 드러누워 낮잠을 자기도 했다.

“혹시 책 같은 거 없어?”

“몰라. 내 방 가서 뒤져 보든가.”

어쩌나 보려고 던진 말에 그 여자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방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알아서 책을 집어 나오는 것이었다. 아무 책이나 갖다 달라고 할 줄 알았더니, 남자 방엘 막 들어간다. 도대체 뭐야? 일부러 이러나 싶을 정도로 여자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굴었다.

“너 언제 가냐?”

“나도 모르겠는데.”

“왜 안 가는데?”

“갈 때 되면 가겠지.”

제일 이상한 건, 어쩌다 내가 뭘 물으면 남 일 말하듯 한다는 거였다. 지 일에 그러니 남 일엔 어떨지 빤하지. 그런데 난 멍청해서 그걸 몰랐다.

“너 내 방에 있던 거 봤어?”

“뭘?”

내 방에서 가져갔던 책이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있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대충 그린 그림들이 널려 있던 걸 보곤 뜨끔했다. 내가 그린 게 그 여자였기 때문이다.

처음 만난 비 오던 밤, 비에 젖은 그 여자가 겉옷을 벗는 모습이었다. 겉옷에서 한쪽 팔을 빼내는 뒷모습. 가는 목덜미와 어깨. 아무리 대충 그린 거라지만 누가 봐도 그 여자였다. 본인이 모를 리 없었다.

“몰라. 못 봤어. 그리고 봤어도 기억 안 나. 나 원래 그래.”

진짜 못 봤을까 아니면 보고도 모르는 척하는 걸까.

아니. 그 여자는 내가 뭘 하든 신경도 안 쓸 여자였다.

그걸 알고 나자 기분이 더러웠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날 신경 쓸까.

나는 그 여자 앞에 어슬렁대며 시비를 걸어 보기도 하고, 그 여자에게 종일 말 한마디도 안 하고 무시해 보기도 했다. 일부러 밥을 늦게 차려 주는 유치한 짓거리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병신같이 자존심 상하는 줄을 몰랐다.

저 여자가 대체 뭔데. 뭔데 이렇게까지 해?

그때는 몰랐다. 진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은 따로 있다는 걸.

그 여자가 우리 집을 떠나던 날에서야 알았다.

“여기서부터는 갈 줄 알아.”

“…….”

“가방.”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여자는 내게 고맙단 말도, 잘 가란 말도, 또 보잔 말도 하질 않았다. 나를 안 보면 그만일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그때까지 그 흔한 통성명도 하질 않았다. 내 이름을 알 거라고 생각한 내가 병신이지. 나양에서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미용실 집 예쁜 아들, 키 크고 잘생긴 이종하는 온 나양 사람들이 알았으니까 내가 누구랑 이름을 묻고 말하는 일은 없었다.

근데 그 여자는 그렇다 쳐. 나는 왜 안 물어봤는데? 고작 나흘이지만 한집 살면서 왜 이름 물어볼 생각을 못 했는데?

나한테 그 여자는, 여자라는 말 말고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그 여자라는 한마디로도 충분했다.

여자. 궁금한 여자. 그리고 싶은 여자. 만지고 싶은 여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 여자를 생각하며 자위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꿈에서 그 여자를 안았다.

그날부터 그 여자는 매일 꿈에 나왔다. 자면서는 그 여자를 만졌고, 일어나면 그 여자를 그렸다. 나는 질리게 풍경을 그려 본 적은 있어도 사람을 이렇게 그려 본 적은 없었다.

“씨발, 짜증 나. 그 여잔 나 알지도 못하는데.”

몇 번이고 돌아보는 나와 다르게 그 여자는 끝까지 날 돌아보지 않았었다. 그 뒷모습이 어른댔다.

“김수연.”

손바닥 반의반도 가리지 않는 종이에 쓰인 이름을 읽었다. 소리 내어 읽으려던 게 아니었는데, 말은 생각보다도 빨랐다.

그 여자가 미용실을 다시 찾아온 건 보름이 지나서였다. 나는 형들이랑 술을 마시러 나가던 길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그 여자를 보고 놀라서 미용실을 나섰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다시 들어갔다. 뭐라도 놓고 온 척을 해서라도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었다.

“남의 이름 읽어 놓고 넌 왜 가만히 있어? 소개할 줄을 몰라?”

아, 진짜 엄마는! 내가 알아서 말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내 이름을 말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엄마가 끼어들었다. 내가 애야?

그리고 그때, 눈치 없는 아랫도리가 꿈틀댔다. 그 여자를 생각만 하면 이러던 게, 실제로 눈앞에 나타나니 주체가 안 됐다. 이 상태로 통성명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용실 귀신. 그렇게 부르기 싫으면, 이 군.”

“이 군?”

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고 도망쳤다. 쪽팔려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아, 씨발.”

미용실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담배를 물었다. 진정시키는 데는 담배만 한 게 없었다. 급하게 담배를 뻑뻑 피우는데 그 여자가 미용실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구두 소리를 따라 저절로 발이 움직였다.

나는 그 여자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발만 보고 걷던 것이 어느덧 등줄기를 타고 목까지 올라갔다. 내가 그렸던, 꿈에서 핥고 빨았던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그 길로 그 여자를 등지고 걸었다. 죄를 지는 것 같았다.

그 여자를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보고 싶지가 않았다. 거지 같았다.

가장 거지 같은 건 나였다.

나는 꼬박 이틀을 앓아누웠다. 내 평생 가장 병신 같은 몸살이었다. 그런데 웃긴 건, 그렇게까지 쪽팔리고 아프기까지 하고 나니 이상하게 용기가 나더라는 거였다. 나는 가진 옷 중에 가장 멀쩡한 옷을 입고 그 여자를 보러 갔다.

예상대로 그 여자는 미술관에 온 나를 보고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기뻐 보이지는 않았다. 빤히 쳐다보는 건 이상했지만, 원래가 이상한 여자니까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긴장해서 일부러 딱딱하게 굴었다.

“뭘 그렇게 봐. 설명해 준다며. 들으러 왔으니까 해 보라고, 그 설명.”

그 여자는 들어 본 적 없는 말투로 그림을 설명했다. 제목은 무엇이며 나양의 어디를 어떻게 그렸는지, 이 그림은 멀찍이 떨어져서도 보고 가까이서도 봐야 좋다든지. 그 여자가 해 주는 설명이 재밌어서 다행히 긴장이 풀렸다.

전시된 그림이 멋진 것도 한몫했다. 풍경을 이렇게 그릴 수 있다는 건, 엄청난 거였다. 내 키보다 큰 그림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이 정도 묽은 농도로 붓만 이용해서 풍경을 표현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세상 어떤 멋진 나무를 봐도 이 그림보다 나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림을 보고 들뜬 나를 알았는지 여자는 내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나는 실컷 그림을 보고 나서 여자를 구경했다. 벌써 질리게 봤을 그림을 아끼듯 보는 눈빛이 좋았다. 여자도 이 그림을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언제 끝나?”

나는 그 여자가 말한 두 시간을 기다렸다. 누굴 그 정도로 기다려 본 건 처음이었다.

누구랑 어딜 갈까 고민해 본 적도 없었다. 갈 만한 데라고 해 봤자 딱 두 군데뿐인데, 고깃집엘 갈까 치킨집엘 갈까 수도 없이 생각했다.

우리는 치킨집에 가서 각자 마실 소주와 맥주를 시켰다. 그 여자는 닭은 거의 안 먹었고, 나는 반 마리쯤 먹었다. 그러고 보니 별로 할 말이 없었지만, 여자가 그다지 말이 많지 않았기에 나도 억지로 말을 하진 않았다. 침묵은 편하기도, 불편하기도 했다.

밤길이 어두워 데려다주려는 나를 여자도 딱히 말리지 않았다. 혼자 지내는 것이 어떤지 묻자 여자는 심드렁히 고개를 끄덕이더니만 금세 투덜댔다.

비워 놓은 집이니 고장은 당연했다. 내가 바로 고쳐 줄 수 있는 것들이라 냉큼 고쳐 주겠다고 나섰다. 뭐라도 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평소에 불편하긴 했는지 여자는 예의로라도 거절하지 않았다.

부엌과 욕실뿐만 아니라 집 안 곳곳을 손봐 주고 나자 시간은 훅 흘러갔다. 씻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땀이 났는데, 그렇다고 벗을 수는 없어서 망설이고 있자 여자가 먼저 씻으라고 해 주었다.

이럴 때는 벗어서 창피할 몸은 아니라는 게 천만다행이다. 시간 남아돌 때 해 둔 운동이 이럴 때 쓸모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하여튼 그 여자는 여러모로 날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씻는 동안 나는 오늘이 바로 ‘그날’일까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생각했다.

나랑 만나 볼래? 난 솔직히 맨날 니 생각밖에 안 해.

“아, 모르겠다. 죽겠네, 진짜.”

남들은 이럴 때 뭐라고 하는 거야. 꽃이라도 사 올 걸 그랬나. 편지라도 쓸 걸 그랬어.

나는 욕실에서 나가지 못한 채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더 시간이 지나면 이상할 것 같아 슬그머니 나갔더니, 목이 타 죽을 것 같은 내게 그 여자가 맥주를 쥐여 줬다. 그 여자는 이미 마셨는지 얼굴이 약간 발갰다.

우리는 자연스레 거실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여자는 내 속도 모르고 TV만 봤다. 여자의 옆모습을 훔쳐보는데, 거실 바닥에 놓인 크로키북이 보였다. 나는 허락도 받지 않고 크로키북을 열었다.

크로키북을 몇 장 넘기자 내 모습이 나왔다. 그림 속의 나는 까만 후드를 뒤집어쓰고 걷고 있었다. 그 여자를 미용실로 데리고 가던 날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림을 봤다. 나를 그린 그림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그 여자를 그렸던 것처럼 그 여자가 나를 그렸다는 게, 그리고 그 그림을 내가 본다는 게 너무 이상했다. 속이 간질간질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또 좋기도 하고 그랬다.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림.”

“응.”

“나야?”

“응.”

그 여자는 나를 뚫어지게 보았다. 조금 취한 것 같았다.

나는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 여자의 취한 모습은 평소와는 또 달라서 잘 기억해 두고 싶었다. 돌아가서 그릴 생각이었다. 나를 빤히 보는 눈을.

날 보던 여자가 웃었다. 웃는 걸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넌 겁 많게 생겨서 겁이 없다.”

아무리 그래도 이 밤에, 남자가 집에 들어와 있는데, 취해서 그렇게 웃어?

나는 속이 타서 괜히 짜증을 냈다. 앞에 있는데도 못 만지는 건 그것대로 고역이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면서, 할 짓이 있고 안 할 짓이 있지. 연애는 안 해 봤어도 그 정도는 알았다.

사귀자는 말을 하려면 지금 해야겠지.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너무 처음처럼 보이면 안 될 텐데.

그때, 그 여자가 내 목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온몸이 떨렸다. 그 여자를 쳐다볼 수도 없었다. 꾹 참고 그 여자의 눈을 마주한 순간, 나는 그 여자가 이런 나를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여자는 내 목에서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가라고.

여자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나는 이대로는 갈 수가 없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내게 그 여자가 물었다.

“수리비 줘?”

“…….”

사귀자는 말에 싫다고 했어도 그 말보다는 나았을 거였다.

나랑 만나 볼래? 난 솔직히 맨날 니 생각밖에 안 해. 잘해 줄게.

그렇게 말했다면, 넌 뭐라고 했을까.

싫다는 말이 꼭 나쁜 말은 아니라는 걸 배웠다. 나는 싫다는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나는 일도 하지 않고 매일 술을 마셨다. 하루도 빠짐없이 들이붓고 나면 취한 채로 잠들고, 잠에서 깨면 또 들이부었다.

술에 취해 있을 때는 그 여자 생각이 안 났다. 그러다 어떤 날은 그 여자가 눈앞에 나타났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시장 골목에 서서 나를 빤히 보고 있기에 나도 같이 봤다. 그 여자가 날 그렇게 볼 리가 없어서 착각인 게 확실했다.

“너 나와 봐. 엄마랑 얘기 좀 하게.”

그런 날이 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오늘부터는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게 되는 날.

“나 일 나가.”

열흘 정도 진창 마시고 나니 이제는 멀쩡히 살아야지 싶었다.

“진짜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소도 하고, 운동도 하고, 밥도 차려 먹었다. 정오가 되기 전에 연장을 챙겨 나가서 종일 밀린 일을 했다. 하던 대로 청소도 하고, 짐도 날라 주고, 저녁땐 오락실에서 화투도 쳤다.

집에 가려고 오락실에서 나오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마도 없는 오락실 앞에 서서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는데 터미널 안으로 버스가 들어섰다.

서울 ─ 나양

그 팻말을 보자 마음이 덜컹거렸다.

그 여자는, 김수연은 언제까지 나양에 있을까? 언젠가는 저 버스에 실려 서울로 가 버리겠지. 서울로 돌아가면 만날 일이 다시는 없을 거다.

하지만 그 여자는 아직 돌아가지 않았다. 여기 나양에 있다.

내가 있는 나양에.

그런데 왜 그 여자를 보지 않으려고 이렇게까지 애를 써야 하는 거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뿐인데. 그 여자를 볼 수 있고, 그 여자가 보고 싶다. 어차피 지금이 지나면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할 여자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버스의 시동이 꺼지고 헤드라이트가 꺼졌다. 나는 불붙인 담배를 버렸다. 그리고 달렸다. 그 여자가 사는 빌라 앞에 서서 그 여자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빗줄기가 굵어질 때쯤, 그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의 그림자를 보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여자는 나를 보고도 멈춰 서지 않았다.

그대로 나를 지나치려는 여자를 붙잡았다. 잡으려고 왔으니 잡아야 했다. 지금 보내면 다시는 찾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수리비 내놔.”

나는 다짜고짜 수리비를 들먹였다. 여자는 곧바로 수리비를 건넸다.

달란다고 주는 그 여자가 정말 미웠다. 그런데도 그 망할 놈의 수리비를 받아서라도 같이 있고 싶었다. 동네 사람들한텐 몇 번이고 받은 수리비인데, 이 여자라고 못 받을 것도 없었다.

온 집 안에 고장 난 부분을 전부 뜯어고치고, 하루에 세 번씩 밥상을 차리고, 온갖 잡일을 해서라도 같이 있고 싶었다. 같이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면 못 할 일은 없었다.

나는 그 여자가 내민 돈을 쥐었다. 그 돈은 그저 빌미였다.

“나한테 왜 그랬어?”

그 여자에게 물었다. 그 여자는 그냥 그랬다고, 하고 싶어서 키스했다고 말했다.

“근데 왜 먼저 건드려 놓고 하다 말았어?”

“책임지기 싫어서.”

그 여자는 이미 내가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순간의 충동으로 나한테 입 맞췄을 때 알았을 것이다.

내 마음은 충동 같은 게 아니라는 걸, 나는 그 여자의 마음과 같지 않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나를, 내 감정을 책임지기 싫어서 수리비를 주겠다 말하며 집에서 내쫓았다.

그런 여자를 내가 좋아했다. 나 혼자 좋아했다. 나는 그 여자가 좋았고, 좋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 말을 하기도 전에 쳐내는 꼴을 보고도 여전히 좋았다.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서러워질 수도 있다는 걸 처음 배웠다. 혼자 좋아하는 게 서러운 게 아니라 좋다는 말도 못 하게 해서, 그게 서러웠다.

좋아하는 마음을 말해서는 안 될 때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 여자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면 좋아하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채로 그 여자를 안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섹스를 할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어떤 관계는 섹스로 이어질 수도 있고, 사귀지 않으면서도 섹스로 그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 여자로 인해 알게 된 것들 전부가 나에게는 처음이었다. 그걸 다 몰랐던 때로 돌아갈 거냐 물으면 나는 절대 아니라고 답할 수도 있었다.

“여긴 밤이 진짜 까매.”

“밤이 까맣지 그럼.”

김수연 눈엔 뭐가 다른가.

“서울은 달라?”

밤은 까맣다. 낮도 그렇다. 새벽도, 해가 뜰 때도, 해가 질 때도 온통 새까맣다. 덜 까맣고, 더 까맣게만 보이는 내게 색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색을 전혀 보지 못했다. 날 때부터 그랬다. 눈으로 색이란 걸 본 적이 없으니 색에 대한 갈증이나 미련은 없었다. 내가 보는 것들이 남들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그런 건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다른데.”

그런데 김수연이 나양에 오고 나서는 김수연이 보는 것들이 알고 싶었다. 김수연이 보는 모든 것들을 김수연이 보는 것처럼 보고 싶었다.

“나중에 서울 와서 직접 보든가. 어떻게 다른지.”

김수연은 항상 이런 식으로 말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처럼.

매일 나를 만나고, 나와 밥을 먹고, 입을 맞추고 서로 몸을 만지면서도 나를 철저하게 아무도 아닌 것처럼 대했다. 김수연은 지금 나와 같이 있지만 언제라도 나를 떠날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알아도 몰라도 전혀 상관없을 말만 하고 내키는 대로 굴었다. 그조차도 싫을 땐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가 묻는 말에는 되는대로 대답했고,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나에게 뭘 묻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나는 김수연이 내게 관심 가질 만한 일을 만들려고 애썼지만, 김수연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건, 김수연이 그림에 관심이 많다는 거였는데 그림은 내가 잘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김수연을 만난 뒤로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김수연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그 여자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집에는 김수연의 그림이 쌓여 갔다. 언젠가 보여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먼저 보여 줄 결심은 들지 않았다. 관심을 받으려고 떼쓰는 것처럼 보일까 봐서였다.

나는 내 그림을 보여 주는 대신, 김수연의 집에 갈 때마다 습관처럼 김수연의 크로키북을 열어 그 여자가 그린 나를 봤다.

“빈 데에 그려도 되는데.”

나는 연필을 쥐었다. 그렇게 그리고 싶었던 김수연인데, 그리고 싶은 모습은 눈앞의 모습이 아니다. 내가 처음 안았을 때, 그날의 달뜬 얼굴을, 내가 만졌던 몸을 그리고 싶었다. 그리고 안고 싶었다.

“다 입고 있으니까 그릴 맛이 안 난다.”

괜한 말을 던졌을 때, 김수연이 마시던 맥주 캔을 놓고는 옷을 벗었다. 그러더니 나에게도 옷을 벗으라고 했다. 뚫어지도록 빤히 보기에 하는 수 없이 벗었다. 나는 김수연의 말에 아니라고 할 줄을 몰랐다.

어릴 때 동네 형들이 야한 사진을 들이밀며 똑같이 그려 달라 했을 때도 응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싶은 것 말고 그린 것이 없었다. 그리기를 포기하고 한참 그리지 않다가 다시 그리고 싶다는 감각을 깨운 건, 김수연이었다.

너는 뭘까.

나는 그리던 것을 접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꼭 만지고 싶어진다.

그림이 궁금했는지 김수연이 크로키북을 펼치려 들려고 해서 손으로 꾹 눌렀다. 나는 김수연의 목을 감쌌다. 잘 그려지지 않아 애가 탔던 곳이었다.

“정말 그리고 싶었는데.”

“알아.”

“근데 널 보다 보면, 자꾸만 만지고 싶어져.”

나를 그릴 때, 김수연도 나와 같았을까.

아니. 안다고 말하지만, 너는 날 모른다.

나는 항상 김수연을 기다렸다.

내색한 적 없었지만, 김수연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김수연을 알게 된 후로 나는 내 모든 시간을 김수연에게 맞췄다.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김수연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고, 김수연이 밥을 먹어야 할 시간엔 같이 밥을 먹고 싶었다. 김수연이 일하지 않는 날엔 종일 같이 보내야 직성이 풀렸다.

아무도 없이 둘이 있을 때면 입부터 맞췄고, 눈을 감을 때부터 눈을 뜰 때까지 살을 맞대고 있었다. 하루에 서너 번씩 몸을 섞어도 한참 모자라게만 느껴졌다. 김수연은 내가 파고드는 걸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지만, 먼저 섹스를 부추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김수연은 아무렇지 않게 내게 장난을 걸었고, 야한 농담도 했다. 내가 쑥스러워하는 걸 알면서 추근대는 아저씨처럼 굴 때도 있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내 앞에서 옷을 벗고, 벗은 몸을 보여 주기도 했다.

섹스를 하자고 하면 언제고 나를 들였고, 내가 안는 동안에는 숨김없이 굴었다. 하지만 나는 김수연의 속마음을 본 일이 없었다. 나와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난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뭐가 됐든 나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면 어차피 싫었다.

김수연을 알게 된 뒤로 나는 김수연만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나 아닌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아무래도 불공평했다.

모든 게 불공평했다.

김수연은 나양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다행이라고도, 불행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떠날 사람인데, 나양에 정을 붙여서 뭐할까.

그렇지만 나는 순간의 변덕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그래서 김수연에게 나양을 실컷 보여 주었다. 청보리밭도, 들판도, 산도 내가 좋아하는 곳은 전부 보여 줬다. 그때마다 김수연은 지금껏 내가 보지 못한 얼굴을 보여 주곤 했다.

계곡에 간 날, 김수연은 웬일인지 순순히 내 손에 끌려다녀 주었다. 흠뻑 젖은 꼴로 돌아오는 길에 옆 동네 시장에 들렀다.

“골라 봐. 너 입고 싶은 걸로.”

“옷은 왜?”

“너 감기 들어.”

“적당한 걸로 네가 골라 줘.”

내가 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걸 김수연은 몰랐다. 김수연이 알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알게 된다고 해도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저건 어때.”

나는 평소에 김수연이 입던 스타일과 가장 비슷한 것으로 골랐다. 원피스였다. 무슨 색인지 알 수가 없어 불안했지만, 김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티셔츠를 하나 집어 내게 내미는 것이었다.

“너 이거 어때? 네가 더 많이 젖었잖아. 윗옷이라도 갈아입어.”

“난 괜찮은데.”

“이 색은 어때?”

“……난 무슨 색 잘 어울리는지 그런 거 잘 몰라.”

“색이 뭐가 중요해. 넌 무슨 색을 입어도 다 잘 어울릴걸.”

이걸로 해. 김수연은 내 대신 티셔츠를 계산했다. 내가 고른 원피스 값도 내려는 걸 기어이 막아 내가 냈다.

“넌 무슨 색 좋아해?”

돌아가는 길에 김수연이 불쑥 물었다.

“난 좋아하는 색 없어.”

“나도.”

“왜?”

“몰라, 나도. 난 지금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그림처럼 색이 없는 게 좋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김수연이 할 말을 이었다.

“남들 다 보는 색 같은 거 없이도 남들 보는 전부를 표현해 내는 거잖아.”

“나도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어.”

늘 생각만 하던 것이 말로 튀어 나갔다. 남들 다 보는 색 없이도 남들 보는 전부를 표현해 내는 것. 김수연의 말을 듣고 나니 내가 그리고 싶은 게 뭔지 알게 됐다.

그런데 색이 중요하지 않은 그림을, 내가 그릴 수 있을까.

“그릴 수 있어.”

김수연이 말했다.

“네가 그리고 싶은 건, 네가 그리고 싶은 대로 다 그릴 수 있어.”

그렇게 말해 준 사람은 김수연이 처음이었다.

내가 색맹이라는 걸 알게 돼도 그렇게 말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나도 김수연의 말은 계속 기억할 것 같았다.

김수연은 내가 사 준 옷을 입고 내 옆에서 자고 있었다. 난 잠든 김수연을 보는 걸 좋아했다.

김수연이 날 좋아하지 않는 게 용서되는 유일한 순간이다. 잘 때는 누군가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김수연이 잘 때면 모든 게 공평해진다. 조금 비참한 공평함이다.

“김수연.”

자는 김수연은 말이 없다.

“나랑 만나 볼래? 난 솔직히 맨날 니 생각밖에 안 해. 잘해 줄게.”

치사하지만 말하려면 지금뿐이다.

“지금 싫다고 말 안 하면 나랑 사귀는 거다. 무르기 없어.”

나는 김수연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우리 이제 사귀는 거야.”

귀에 대고 아주 작게 말했다.

“그러니까 가지 마라.”

나쁜 년.

친구 녀석들은 김수연을 그렇게 불렀다. 그놈들이 김수연을 그렇게 부른 이후로 나는 친구들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어차피 김수연만 보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미술관에 붙은 포스터에 적힌 마지막 전시일까지는 한 달도 남지 않았다. 김수연은 떠날 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나양에 왔듯 그렇게 나양을 떠나겠지. 내가 오라고 청해서 온 게 아니듯 내가 빌어도 갈 거다.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왜 왔을까. 불청객처럼. 왜 떠날까. 내 전부가 돼 놓고는.

여름이 끝나면 너는 떠난다.

여름이 끝나도 나는 너를 잊지 못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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