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그림자 일족의 저택(01)
* * *
주르륵.
이노리가 가지고 있는 [그림자 주머니]가 강제로 개방되면서 안에서 끈적끈적한, 그리고 바로 얼마 전까지 사용한 것처럼 뜨끈뜨끈한 열기가 새어나오는 모습이 보이자 나는 바로 찻잔을 얌전히 내려두고 편안하게 앉아있던 자세에서 불편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림자 주머니]는 분명히 같은 일족이 아닌 이상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로 사용하라고 당부했을 터인데, 어째서 이곳에 이런 것이 들어있는지."
부르르륵...
사오리 어머님이 자신의 그림자로 찌를 때마다 이노리의 [그림자 주머니]에서 정액이 퓻퓻 쏟아져 나오는 모습에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머님, 그러니까 이게 말이지요..."
예전에 이노리에게 들었던 설명을 곰곰히 떠올리며 지금부터 내가 꺼내야 할 말을 천천히 골라서 얘기해야 한다.
머릿속으로 말을 정리한 나는 이런 결론이 나왔다.
'답이 없다'
뭐라고 말해도 그냥 나는 이노리를 성적으로 사용한 변태새끼가 된다. 어떻게 핑계를 대려고 해도 답이 없었기에 그냥 나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말했다.
"예 좀 썼습니다. 왜요. 뭐요."
이럴 때일 수록 뻔뻔해야 한다.
"안 됩니까?"
내 당당한 표정을 보면서 사오리 어머님과 이노리의 표정이 똑같이 놀란 토끼 눈을 하는데, 모녀지간이라서 그런지 정말 많이 닮아있었다.
약간 눈화장의 색이 다르다거나 눈매가 조금 더 가느다란 점을 제외하면 표정까지 똑같아 보였으니까.
하지만 이노리의 얼굴이 빨개진 채 푹 숙여지는 것과는 다르게 빠르게 표정을 다시 관리하면서 무표정으로 자신의 찻잔을 들어올려 한 잔 마시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세상물정을 다 겪은 어머님답다고 해야 할까.
"안 되는 것은 아니옵니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옵니다. 이 아이가 설명해주지 않았던 것이옵니까?"
"듣기는 했습니다. 주군으로 모시는 대상과 필요 이상으로 얽히면 안 된다?"
"예. 잘 알고 계시오니 긴 말은 생략하겠사옵니다."
꾸우욱...
사오리 어머님은 이노리의 얇은 팔과 다리에 파고드는 느낌이 날 정도로 [그림자 인법]으로 만든 줄을 강하게 조여오고 있었다.
"이 아이가 주군으로 선택한 남자를 확인하였고, [그림자 일족]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그 본거지에서 거리낌 없이 상대하는 배짱, 거기에 잠시나마 [그림자 인법]을 상대하는 능력까지. 아직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림자를 가지기에는 충분한 가능성이 보이옵니다. 그렇기에, 당신은 잘못한 것이 없사옵니다."
다행인 건가?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라는 듯이 사오리 어머님은 이노리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다만 아직 어린 그림자의 주인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것이옵니다."
이노리의 무릎을 결박해서 꿇어앉힌 채 그녀의 어머니는 우아한 모습으로 찻잔을 들어올려 한 모금 들이켰다.
"부디 착각하게 하지 마시옵소서."
"......"
"설마 [그림자 주머니]를 그런 용도로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조금 놀라 힐난하는 조로 말하기는 했으나, 그림자는 결국 주군의 것. 기밀문서를 숨겨놓건 자신의 보물을 숨겨두건, 아니면 하찮은 무언가를 품게 만들건 그것은 당신의 자유이옵니다."
생각외로 그 일에 대해서는 큰 불만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당신의 가장 큰 잘못은 다른 곳에 있사옵니다. 바로 이 아이를 흔들어놓는 것이지요."
"흔든다?"
"예. 본인은 스스로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 가문의 어른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미숙한 그림자이기에 필연적으로 주군에 대한 충성심과 남녀간의 애정을 착각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하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이노리의 성향 중 하나인 [충성욕망]을 돌아보았다.
"[그림자]는 평면적이어야 하는 법이옵니다."
내가 끼어들 틈도 없이 사오리 어머님은 말을 이어나갔다.
"주군을 위해서라면 그 몸도, 생명도, 목숨도, 순결도 바칠 수 있어야 하는 것. 하지만 아직까지 미숙한 가문의 일원이기에, 주군께서 내려주시는 흥미 위주의 은총을 애정으로 착각하고 정말로 허락받았다 생각한 것이 이 아이의 잘못이옵니다."
"이노리가 잘못했단 말입니까?"
그 말에 사오리 어머님의 그림자가 어느 순간 내 입술을 가로지르며 막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진명을 부르는 것이 정말로 위험한 일이온지라."
정확히는, 그녀가 내 입을 지켜주고 있었다. 내 입술을 그림자로 덮어서 막으면서 양 옆에서 그림자 일족이 함부로 [그림자 인법]을 사용해 내 입을 막지 못하도록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주군이 아니었다면 입을 꿰뚫도록 방치했을 것이옵니다."
"......"
"이렇게 된 일 빠른 진행을 위하여 이대로 말을 이어 나가겠사옵니다."
그 말에 내 눈썹이 꿈틀거리며 불만으로 움츠러들자 사오리 어머님은 오해하지 말라는 듯이 바로 말을 덧붙였다.
"본래는 주군으로써의 가치가 없는 자라면 이곳에서 처리하고 가문의 수치로 반성시켰을 것이지만, 주군으로써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였기 때문에, 그림자 가문에서도 당신을 그림자의 주인이 될 자로 인정하였사오니."
짝짝.
사오리 어머님이 작은 박수소리를 내자 뒤에서 대기중인 이노리와 엄청나게 닮은, 하지만 남자인 그림자 일족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림자로써 부족한 모습을 보인 이 아이를 대체할 이를 드리겠사옵니다. 동등한 격을 가진 [그림자 가문]의 일원을 하나 드리겠사옵니다."
꾸벅.
나에게 머리를 숙이는 그 모습은 이노리를 대신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 불쾌함, 심지어 귀찮음마저 존재하지 않고 그저 무덤덤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다른 방면으로써의 필요성을 요구하신다면 당신이 원하는 취향의 여인을 하나 구해다 드리겠사옵니다. 아쉽게도 나이가 찬 그림자 일족의 여성이 없기에 평범한 인원이겠지만, 어차피 [그림자 인법]은 그리 쉽게 유전되지 않으니 자손에게 [그림자 인법]을 물려주고 싶다는 요구는 받아들이기 어렵사옵니다."
즉, 이노리를 회수하고 그녀를 대신할 [그림자 일족]과 내 시중을 들 여인을 주겠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굉장히 불쾌함을 느끼며 치를 떨고 있었다.
"지금부터 다시 입을 열어드릴 것이온데, 긍정의 의사를 표시하신다면 약속을 지켜서 새로운 당신의 그림자와 함께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낼 것이옵니다. 하지만 만약 거부하신다면..."
스르륵...
입을 가로막던 그림자가 풀려나자 나는 바로 불쾌한 표정을 드러내며 물었다.
"죽이기라도 할 겁니까?"
"그림자 일족이 주군으로 인정하였사오니 그리할 수는 없사옵니다. 다만, 마음을 바꾸실 때까지 이곳에서 계속해서... '설득'을 할 뿐."
즉, 가택연금을 시키겠다는 얘기였다.
그 말을 들은 이노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면목이 없다는 듯이 있었고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사오리 어머님에게 중지손가락을 들어올려 주었다.
팡팡팡팡!
순식간에 주변의 빛이 사라지고 찻주전자를 데우기 위한 작은 불씨만이 남아있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스르륵.
이 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림자에서 솟아나온 밧줄이 내 입과 몸을 둘둘 말기 시작하면서 포박형 그림자의 주인인 이노리를 닮은 남자가 한숨을 푹 내쉬며 나를 들쳐업었다.
"아직 수면가루의 영향이 남아있는 것 같사옵니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다시 말씀하시지요."
"주... 주군..."
"읍읍! 읍읍읍읍!"
이노리가 왜 그랬냐는 듯이 나에게 눈빛을 보냈지만 나도 할 말이 있었다.
아니 저쪽이 먼저 꼴받게 했잖아!
* * *
'옮겨진거 맞나?'
온통 어두침침한 암실이라서 솔직히 방을 옮겼다고는 하는데 잘 구별이 가지 않는다.
방이 좁은 곳도 아니고 처음 내가 잠들었던 곳처럼 푹신한 이불에, 옆에는 조촐한 일본식 식사까지 차려져 있었으며 이곳으로 옮기는 순간을 제외하면 나를 강제로 묶지도 않았다.
"수면가루 같은 걸 타지는 않았겠지."
게다가 바로 내 앞에 이노리를 닮은 남자가 지켜보고 있으니 혼자 있어서 미쳐버릴 위험도 없었고.
"대답해주지 말아야 한다 이런 규정은 없을 텐데."
이노리를 닮은 사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입을 열었다.
"이곳으로 모실 때에는 사용했지만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반찬이 조금 부실한데."
"그나마 많이 챙겨드린겁니다. 원래 일족이 먹는 식사는 정말..."
"꼬박꼬박 대답은 성실히 해주는군?"
"앞으로 모실 주군이니 대화 정도는 터도 되겠습니다만."
눈 앞에 있는 이 사내는 이노리를 대신해서 자신이 내 그림자 역할을 수행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둘이 무슨 관계지?"
"생각하시는 것처럼 남매는 아닙니다. 정확한 촌수 계산이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그림자 인법]을 타고나려면 꽤나... 혈통보존이라는 것이 힘드니 말입니다."
밥 먹는데 별로 유쾌한 얘기는 아니라서 나도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별다른 일이 없으면 일족이 정해준 짝이 될 예정이었습니다만."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이 밥에 뭔가가 걸쭉하게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올려다보니 녀석은 복면을 쓴 상태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가문에서 정한 내용이지 별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그림자 일족]에서 동년배의 남녀가 둘 밖에 없으니 별 수 없지요."
"끄응......"
하긴 이 세계관에서 동양계의 외모와 특징을 가진 캐릭터는 이노리의 [그림자 일족]밖에 없으니 대략... 그러니 다들 닮을 수밖에 없겠네 젠장.
"이번 일은 리타가 잘못한 겁니다. 숨기려면 잘 숨기다가 나중에 아카데미 졸업 이후에 도주했으면 가문에서 찾지 못했을 것을 안주인께서 편지에 주군 험담을 좀 했다고 진심으로 화를 내면서 서신을 보내는 바람에 사적인 감정이 있다는 것을 들켜버렸으니 말입니다."
"......그랬나?"
"그래서, 어떻게 하실 예정이신지. 식사를 하고 안주인께 잘못을 빌면서 저와 같이 복귀하실 예정입니까?"
그 말에 나는 사오리 어머님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중지손가락을 들어주었다.
"그러시다면 좀 오래 뵙겠군요. 주군의 정신상태를 신경쓰는 것도 그림자의 의무이니 말벗이 필요하다면 불러주시면 됩니다."
내가 반쯤 먹고 남긴 밥그릇을 치우며 사내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어떻게 부르는지도 안 알려줬지 않나'
이곳은 그들의 영역이니 내가 조금만 이상행동을 보여도 바로 확인하러 오겠지만.
'좋아. 그렇다면 어떻게 탈출하느냐인데......'
일단 나를 위해서 작은 호롱불을 만들어 두었을 뿐, 이곳은 광량을 철저하게 조절해서 외부인이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다만 나에게는 상태창이 있었기 때문에 방금 전의 사내의 상태창이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확인한 후, 나는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턱.
몇 걸음 옮기지 않아서 걸려버리고 말았지만.
"참, 이 방은 [그림자 인법]으로 문을 열지 않으면 빠져나갈 수 없으니 포기하시지요. 눈을 감고 손으로 더듬어서 움직인다고 빠져나갈 정도면 감금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오!"
쾅!
발로 방문을 걷어찼는데 꿈쩍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니 실제로 어떤 트리거를 통해 막혀있는 공간인 모양이었다.
'자, 그럼 어떻게 하느냐인데......'
"화장실......"
"싸십시오. 제가 치우겠습니다."
이거 틈이 없네?
일단은 한 발자국 물러나서 다시 빛이 있는 호롱불 옆에 들어와 곰곰히 생각하며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떠올렸다.
'일단 이노리와 합류하고 도주한다. 중요한 것은 이곳의 위치가 어디냐는 것인데......'
오행무경심법으로 인해 올라가는 스탯으로 계산해 보았을 때 아직 만으로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의외로 아카데미와 가까운 곳일 것이다.
이노리와 같이 합류한다면 뭔가 수가 보일 텐데, 일단은 받아들이겠다고 사오리 어머님을 뵙게 해달라고 한 다음에 작별인사라도 하던가... 아니면 이노리가 몰래 탈출해서 이곳으로 오기를 바래야 한다고 하던가...
'머리가 아픈데...'
게다가 밥을 먹고 나니 긴장감이 풀려서 그런지 아니면 지금 또......
'어쩐지... 밥이 쓰더라...'
이 자식들이 치사하게 수면가루를 먹어서 그런지 나는 비틀거리다가 이부자리에 엎드려서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밥을 절반 밖에 먹지 않아서 엄청나게 졸린 상태로 잠에 들었다가 깨는 정도였지만, 점심식사를 먹고 계속 꾸벅꾸벅 졸면서 일어나려는 것을 반복하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주군. 주군."
익숙한 얼굴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혹시나 몰라서 가장 먼저 그녀의 얼굴 옆 상태창을 확인해 보았다.
상태창조차도 파란색이니까 아군, 그 안에 적혀있는 정보도 타마미 이노리, 특성 [그림자 인법]이었다.
"......이노리..."
"예. 접니다."
"어떻게 여기에..."
"안주인께서 잠시 시간을 주셨습니다."
"......"
"주군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장본인인 제가 가야한다고..."
이노리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
복면을 쓴 채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그녀의 얼굴 옆에는 하트 게이지가 시스템적으로 잠긴 것처럼 닫아져 있었다.
'내가 대응을 실패해서 이노리의 애정도가 닫혀버린 것인가?'
지난번에 마리안과 약속을 어겨서 그녀를 실망시켰을 때 네 번째 하트칸이 잠겨버린 것처럼.
'아니... 아니야. 이노리라면 이렇게 쉽게 할 리가 없어'
"주군. 안타깝겠지만 이번에는 안주인의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나는 잠시 졸음을 이기지 못한 것처럼 눈을 비비면서 이노리의 상태를 다시 확인해 보는 것으로 그녀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성기레벨 : Lv.11(+20)
= 자위횟수 : 0회 =
= 경험인수 : 1명 =
= 보유 정액량 : 0cc =
= 누적 정액량 : 2875cc =
이 이노리는 가짜였다.
'그러니까, 아마 내가 예측하기로... 한 명 밖에 없지?'
내가 판단을 내리는 순간 그녀의 진명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키타자와 사오리]
'여기서 뭐하세요 어머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