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닌자는 주군의 편리한 도구(03)
* * *
이노리는 갑자기 불려와서 그런지 평소의 깔끔한 묶음버리가 아니라 뭔가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고 비녀도 평소와는 다르게 머리를 반 정도 묶다 말은 상태로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암살자의 직검을 든 상태로 나에게 등을 대고 보호하면서 지키고 있었고 손에 들고 있는 호롱불이 흔들릴 때마다 다른 인원들이 [그림자 인법]을 사용해서 숨어들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있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 그림자 사이에서 얼마나 치열한 격전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바닥에서 그림자가 뿜어져 나오면서 이노리의 오른팔을 묶는 순간, 나머지 네 개의 회색 상태창이 나에게 다가오려 하고 있었다.
'이노리가 정면을 막아주고 있으니 내가 신경쓸 곳은 후방 뿐!'
"이노리, 검!"
오른팔에 힘을 풀고 놓아준 검을 내가 받아들어서 뒤에서 덤벼드는 그림자 일족의 검을 받아치고 옆구리에서 덤벼드는 한 명을 발로 걷어차니, 이노리도 자신의 몸을 옥죄려는 그림자를 자기 그림자로 덮어서 풀어버리고는 반대로 주변의 인원들을 묶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숫자 차이를 이기지는 못하는지 이노리의 몸에 하나 둘 그림자로 이루어진 실이 그녀의 몸을 묶기 시작하고 내 발목에도 하나가 감겨드는 순간.
"후!"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호롱불을 아예 꺼버렸다.
완전한 어둠에 처하게 되면 [그림자 인법]을 사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 순간 내 발목에 걸려있던 그림자 밧줄이 풀려나는 것을 확인.
하지만 [그림자 일족]이라면 모를까 일반인인 내가 이 어둠 속에서 시야를 확보할 수 있을 리 없지만......!
'이런 근거리라면 보이거든!'
사각에서 파고드는 순간 정확하게 날아드는 내 검을 보면서 화들짝 놀라 기겁하며 피하는데 [그림자 인법]은 완전한 어둠 속에서는 본인에게도 사용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검을 휘두르며 방어하는 동안.
드르르륵!
미닫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에서 달빛이 스며들면서 다시 그림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끼기기긱...!
이노리는 맨손으로 자기보다 어려보이는 두 명의 소녀를 제압하고는 발로 자신에게 날아드는 밧줄을 쳐내고 있었고 나는 두 명의 사내를 상대로 시간을 벌고 있었다.
민첩성은 빠르지만 이곳이 실내여서 그 특징을 살리기 어려운지 아니면 너무 빨리 움직여서 나에게 치명상을 입히면 안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달빛 아래에 그 모습이 드러난 순간 그들은 나와의 대치를 멈추고 뒤로 점프하며 달빛이 비춰지는 미닫이 문으로 도망쳤다.
"으읏!"
두 소녀도 다시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지만 오직 한 명, 이노리와 비슷한 체형의 그림자 일족만이 물러서지 않고 이노리와 맞붙고 있었다.
서로의 그림자가 교차되고 싸우면서 둘의 몸이 겹쳐지는 순간, 그림자에서 뿜어져 나온 밧줄이 이노리의 허리부터 어깨까지 묶어버리면서 제압하고는 그 상대가 이노리의 등을 잡았다.
"그만."
펄럭!
누군가 제지하려는 목소리와 함께 입구에 펼쳐진 풍경... 아니, 달빛의 풍경을 묘사한 커튼이 걷어지고 나자 완전히 밝은 태양빛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그림자 안에 모습을 숨겼던 이노리를 제압한 그림자 일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노리?'
이노리의 몸을 묶고 있는 이노리가 있었다.
물론 그쪽에서는 상태창이 [???]로 표시될 뿐이라서 금방 구별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자세히 보면 복면의 입 부분에 새겨진 문양도 이노리가 날카로운 윗 송곳니와 비슷한 모양이라면 이쪽은 반대로 아래에서 올라오는 뾰족한 가시 같은 모양이었으니 구별할 수 있었고.
결정적으로, 이노리처럼 몸이 가늘기는 했지만 약간의 여성적인 굴곡이 있는 그녀와는 다르게 굴곡이 거의 없었고 살짝 목젖이 튀어나와 있었다.
즉, 남자라는 거다.
파바밧
아까 나를 상대하던 두 사내가 달려와서 이노리를 잡고 있는, 이노리를 닮은 사내의 손을 낚아채니 그 녀석은 항복하겠다는 것처럼 양팔을 들어올리며 이노리에게서 물러났다.
전히 그림자 밧줄은 풀어주지 않았지만 이노리가 자신의 [그림자 인법]으로 만들어낸 뾰족한 가시를 그의 고간에 겨눈 상태로 노려보자 그제서야 밧줄을 풀었다.
투둑!
자기의 몸을 묶은 밧줄을 끊어낸 이노리가 내 옆으로 다가와서 다시 전투자세를 취하고 있는 동안 그림자 일족들은 새로 열린 입구 근처에 모여서 우리와 대치하고 있었고 나는 이노리의 보호를 받으면서 그들을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긴장된 상황에서 다시 달빛 모양의 커튼이 살짝 열리며 아까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울려퍼졌다.
"무대를 열거라."
입구에서 대기중이던 두 명의 사내가 커튼을 완전히 걷고 줄을 잡아당기자, 동시에 사방의 닫혀있던 나무창이 개방되면서 눈이 부셔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빛이 이 안에 새어들어왔다.
그와 함께 이 자리에 있던 모든 그림자 일족들의 표정이 파랗게 질리고, 이노리를 포함한 전원이 비틀거리면서 힘을 잃기 시작했다.
내가 불을 질러서 [그림자 인법]을 무효화시켰던 것처럼 사방에서 불빛을 쏘아보내서 그림자를 형성하기 어렵게 만들어 버리는 장소였다.
"아무래도 우리 아이들이 실례를 저지른 모양이군요."
수수한 검은 옷을 입고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통 검은 복장에 우울한 분위기, 게다가 얼굴까지 가리는 베일로 인해 마치 상복을 입은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몸에서는 기품과 함께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하지 않을까 하는 본능적인 위기감이 나에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본래는 이렇게 서로 존재를 인지하지 않고 모르는 것처럼 넘어가려 했으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은 소개를 드리는 것이 예의인지라."
그녀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베일을 벗는다.
성숙해 보이는 모습과 함께 눈 밑에 점이 있는 것만 제외하면 이노리랑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그림자 가문의 안주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 * *
'원래 이런 이벤트가 있는가?'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물론 내가 플레이를 했을 때 이노리를 손에 넣어본 적이 없으니 알 수는 없지만, 각종 공략 사이트나 다른 방식으로 이노리를 손에 넣는 방법에 대한 글을 몇 번 떠올린 결과.
이런 이벤트는 없었다.
다만 짐작가는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노리와 친분이 쌓여가면 어느 순간 갑자기 꿈 속에서 누군가가 속닥거리면서 악몽을 꾸는 이벤트가 있는데, 그것이 그냥 이노리가 [그림자 가문]으로 불려가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알고보면 실제로 [그림자 가문]에 불려가서 이리저리 관찰을 당하는 모습인 모양이었다.
그 이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노리가 가문으로 끌려가고 그녀를 되찾기 위해 이노리가 남겨둔 흔적을 쫓아서 가문으로 친구들을 데리고 쳐들어가는 것이 정석 공략법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그건 이노리의 호감도가 꽤 높아져 있을 때의 이야기인데......'
이노리의 호감도는 [주군]단계이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
애정도가 요즘 많이 올라가기는 했지만 이건 성인모드로 추가된 것이라... 그냥 시기가 맞아 떨어져서 발생한 이벤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정상적으로 발생한 이벤트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한 잔 드시지요."
강요에 가까운 그 말에 차를 한 잔 삼키는데, 내가 워낙 차를 안 마시는 타입이라 떫은 맛만 느껴지고 별로 맛있지는 않았다.
"수면가루를 해독하는 약차이기 때문에 차를 마시면 정신이 맑아질 것이옵니다."
해독제라면 다 마셔야지.
"존대 안 하셔도 됩니다."
이노리의 어머님이자 그림자 가문의 안주인이시라면 반말을 뱉거나 명령조로 말을 해도 그러려니 할 텐데 오히려 예의바르게 존대를 하고 있으니 내가 다 불편할 지경이었다.
당장 내 옆에서 무릎을 꿇은 채 대기중인 이노리도 엄청나게 불편해 보였고.
"저는 이쪽이 편합니다. 그리고 그쪽은 제 주군이 아니기 때문에.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지요."
단호하시군. 이빨도 안 먹히겠어.
"본래는 아카데미 내부의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 리타를 보낸 것인데. 요즘 들어서 보고서의 질이 낮아지지를 않나, 정기 보고가 늦춰지지를 않나. 그리고 가문으로 돌아와서 회의에 참가를 시키려고 했더니 이 아이가 놀라운 말을 하더군요."
서늘한 기분과 함께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그림자가 스멀스멀 뻗어나오기 시작한다.
"이미 주군이 결정되어서 굳이 본가로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이 광량에서 그림자를 쓰다니......'
일부러 그림자 일족의 능력을 제어하기 위해 빛을 스며들게 만들어둔 장소에서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능력을 알 수 있었다.
당장 이노리도 지금 능력을 쓰기는 커녕 몸 상태까지 안 좋아지고 있었으니까.
"어머님, 그러니까..."
"키타자와 사오리라고 하옵니다."
"예, 그러니까 사오리 어머님..."
그 호칭이 불만스러운지 어머님의 표정이 조금 찌푸려지기는 했지만 그녀도 한발 양보한 것인지 더 이상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잠시 눈치를 보던 나는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그림자 일족들을 훑어보았다.
이노리와는 복식이 비슷하지만 한참 어려보이는 쌍둥이 소녀 둘, 이노리와 비슷해 보이는 남자 닌자 하나, 그리고 아저씨 둘.
적대적인 태세를 취해보이지는 않고 오히려 쌍둥이 소녀들은 나에 대해 궁금한 점을 참고 있느라 힐끔힐끔 이곳을 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사오리 어머님이 손짓을 하면서 두 쌍둥이 소녀를 내보냈다.
"아직 미숙한 아이들인지라 미덥지 못한 모습을 보여드렸사옵니다."
"제가 불려온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질문하고 싶습니다만."
"안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사옵니다. 본래, 그림자 가문의 일원이 주군을 선정하기 위해서는 정해진 절차가 있습니다."
"시험을 하지요. 맞습니까?"
"......"
그 말에 사오리 어머님은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었지만 살짝 이노리를 노려보는 모습을 보니 '가문의 비밀까지 말해준 것이냐?'라고 힐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시험인지 아시옵니까?"
"가문의 일원을 실종으로 위장하고 약간의 정보를 남겨둔 뒤 그곳까지 찾아올 수 있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과 관련된 그림자 일족의 정보를 수집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
애초에 생각해보면, 이노리의 주군이 되기 위해 발생하는 이벤트 자체가 [그림자 가문]이 이를 악물고 납치했다면 정보가 남아있는 것이 이상하고 또한 자신들의 집에서 침입자들이 찾기 쉬운 곳에 힌트를 일부러 보기 좋게 남겨둔 것도 이상하다.
물론 게임 시스템상 어느 정도 힌트를 줘야하니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셀레스티얼 아카데미라는 게임이 그렇게 친절했으면 난이도 하락 패치 같은게 나올 리 없었다.
내가 예측하기로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예측하기로는 그 이벤트 자체가 [그림자 가문]에서 벌이는 하나의 시험이라면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즉, 이노리 납치사건 자체가 자작극이고 그 상황에서 그림자 가문을 찾을 수 있는지, 그녀의 이름을 맞출 수 있는지를 시험받고 통과하게 될 경우 주군이 될 자격을 얻는다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그 모든 과정을 뛰어넘었으니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예측이 안 되지만 말이지......'
하지만 그림자 가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정보력과 판단력. 나는 이곳에서 힘을 보이는 것보다는 이런 상황조차 예측하고 있었다면서 여유를 보이는 것이 정답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여유롭게 차를 한잔 더 부탁하자 사오리 어머님은 내 찻잔에 마시기 좋게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대접해 주었다.
'어차피 이노리의 이름도 알고 있고 그림자 가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 자격이 부족할 일은 없을 터. 오히려 친구들을 이끌고 그림자 가문으로 쳐들어가는 난리를 피우지 않아도 이렇게 간단한 이벤트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렇군요. 확실히, 이 부족한 아이가 주군으로 모실만한 통찰력이 있다는 것이 느껴지옵니다. 다만."
사오리 어머님의 그림자가 뻗어나오더니 무릎을 꿇고 있던 이노리의 몸을 붙잡더니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긴다.
내가 손을 뻗기도 전에 이노리는 무장이 해제되고 묶여버리는데 양팔 양다리를 그림자에게 결박당한 채 입도 벌리지 못하도록 그림자로 재갈까지 물려져 버렸다.
당황한 내가 손을 뻗으려고 하는 순간 날카로운 그림자 칼날이 솟아나오더니 이노리의 가슴팍에 박혀들었다.
"으윽!"
깜짝 놀라서 찻잔이라도 들고 휘두르려고 했으나, 이노리의 가슴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다만, 그녀의 그림자 주머니가 쩍 갈라지면서 그 안에는 말라붙는 걸쭉한 누런 액체가 조금 배어나오고 있었다.
"다만, 이쪽이 묻고 싶은 것은 왜... 우리 그림자 일족을 '이렇게'쓰고 있는지를 물으려 데려온 것이기 때문에."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기는 했지만 나는 그 안에 숨어있는 딸 가진 엄마의 분노를 느꼈다.
이거 지금이라도 머리를 박고 잘못했다고 빌어야 하는건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