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반 대항전 : E반 대 F반(03)
* * *
둘 다 손이나 몸에 자잘한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이 정도 상처는 레베카 선생님의 간단한 치료만으로도 회복되는 수준이었다.
다만, 사일리안은 무언가 표정을 굳힌 채 고민하고 있느라 냉담한 상태였고 마리안은 약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돌아와 있을 뿐이었고.
'패배한게 큰 충격인 건가...?'
솔직히 나도 처음에는 사일리안이 이길 것이라 생각했는데 중간부터는 아직 모른다 상태가 되었다고 봤다.
하지만 마음이 조급해진 마리안이 중간에 승부수를 던졌고 그것이 실패하면서 패배한 셈이었다.
세리나 다른 친구들이 그래도 멋진 경기였다고 칭찬해주는 와중에도 마리안은 입까지 살짝 벌린 채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내가 슬쩍 다가가 마법의 단어를 불러줘야 했다.
"누나 괜찮아?"
"......"
그제서야 눈에 빛이 돌아오고 마리안의 시선이 나에게 향한다.
"미안해... 누나 져버리고 말았어..."
패배로 인하여 분하다는 말보다 먼저 마리안은 나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그깟 1등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열심히 했느냐고 하고 싶었지만, 마리안의 손에 묻어있는 피딱지와 굳은살이 가득한 그녀의 손을 잡고 있으니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나한테 소원을 빌고 싶었어?"
내 질문에 마리안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다치지 않았으니까 된 거야. 이번에는 좀 위험해 보였다고."
"하지만......"
마리안은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거리면서도 망설이고 있었다.
"......누나의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
"......"
시무룩해진 마리안을 보면서 뭐라 위로를 해야할지 모르겠다.
능글맞게 마리안에게 애교를 부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사람들의 시선도 있고 마리안도 평상시에 누나라고 불러주기만 하면 애정도가 오르면서 표정부터 달라졌는데 지금 그녀는 내가 꼬박꼬박 누나라고 불러도 시무룩한 상태였으니.
'참... 여러가지로 인간관계라는게 힘들구만'
이럴 때는 잠시 시간을 줘야한다는 생각에 잠시 마리안에게서 떨어져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 사일리안은 부전승으로 처리, 나와 E반 여학생의 경기가 있었지만 그녀는 졸도하기 직전까지 마나를 쥐어짠 상태라 도저히 무대에 올라올 수 없는 상태라 이쪽도 기권승이었다.
결과적으로 결승전은 나와 사일리안의 대전이 되었다.
'뭐... 다들 기대하지 않는 것 같지만'
슬쩍 관객석쪽을 보니 각자 포인트를 걸어서 사일리안이 이길지 내가 이길지 내기를 하는 모양이었는데, 경기가 성립되지 않을 정도로 일방적인 사일리안의 승리가 예측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라도 엔트리 5번과 1번을 붙여놓는다면 1번에다가 걸겠다.
무엇보다 마리안과 싸우던 모습은 다른 학생들이 보여주는 모습과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인지라......
쩔렁.
"아렌. 5000포인트."
"리타?"
"리타가 이런 걸 한다고?!"
"......"
복면을 쓴 이노리가 약간 화난 얼굴로 5000포인트를 나에게 걸었는데, 그녀도 내가 이긴다에 거는 것이 아니라 주군이 이렇게 저평가받고 있다는 것에 분노해서 그냥 저 돈을 날릴 생각으로 건 것에 가까웠다.
'아이고... 그 포인트 아껴서 다른데다 쓰지'
E반 학생들도 서서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마지막 토너먼트 결승전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고, F반의 참가자들도 다들 각자의 표정을 갖춘 채 밖으로 나와서 나와 사일리안의 마지막 결승전을 관람하고 있었다.
"이거 꽤나 부담되는 걸."
"어차피 예상했던 내용 아닌가? 어차피 우승은 사일리안..."
"3학년 정도 된다면 슬슬 F반도 대우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토너먼트 우승은 가져가자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
주변을 둘러보면서 사일리안은 친구들 하나하나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렇다고 이 정도로 보여줄 생각은 없었지만. 반장이 생각보다 실력이 좋아서 밑천을 드러내고 말았으니 손해인 걸."
투덜대는 말투였지만 사일리안은 약간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실력을 숨기고 있었는지 안 물어봐?"
"어차피 술자리에서 지겹게 반복할 내용을 지금 물어봐서 뭐해?"
"푸하핫!"
사일리안은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의 목검을 양손으로 쥐고 자세를 낮췄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아렌."
나는 반대로 한손으로 검을 들고 왼쪽 다리를 뒤로 당기며 검을 비스듬하게 겨누어 사일리안의 목검과 궤도를 교차시키고 있었다.
마리안이 나에게 알려준 명가의 검술 기본자세였다.
어차피 검술반에서는 검의 명가 출신인 마리안에게 검술을 호신용으로 배운 학생이 많아서 특이하지는 않은 모습이었지만, 나는 내 특성을 끌어올린다는 생각으로 아랫배에 힘을 주면서 내 특성, [검의 명가]와 지금 사용하려는 검술에 동기화를 시작했다.
'완벽하지 않아. 오히려 군데군데 소실되어 있다'
마치 세절기에 돌려버린 종이마냥 군데군데가 비어있었다. 하지만 그 빈 부분은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눈에 익혀온 마리안의 움직임을 기억하며 복구시킨다.
친절하게 검술과 움직임을 내 앞에 보여준 교관이 있는데, 배우지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따아악!
양쪽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강해!'
사일리안은 검세를 바꿨을 뿐이고 약간 진지하게 마음을 먹었을 뿐인데 예전에 대련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기백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것이 [빛의 왕자] 사일리안!
단순히 특성만 강한 것이 아니라 검술과 기량, 능력치마저도 절정에 달하는 F반의 현존하는 최강자였다.
'하지만!'
상대할 수 있다.
검을 부딪치는 순간 팔이 아파오고 다리가 밀려나는 기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략적인 승률을 직감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3%.
내가 이길 확률은 3%정도 될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 확률이면 완전 높은거 아니냐?!'
사일리안의 검은 느릿하게 움직였다가 그 속도에 익숙해지면 다시 2차 가속을 하면서 시야에서 벗어나는 방식이었는데 일부러 내 시야를 교란시키는 것처럼 느릿하게 오는 검에 신경쓰지 않고, 가속하여 튀어나오는 순간에만 검을 파악하면서 목검을 움직였다.
떠억!
하나 하나, 사일리안의 공격을 흘려낸다.
할 수 있다. 이미 앞에서 마리안이 모범답안은 다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는 소중한 누나가 보여주는 모범답안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두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컨닝을 한 것처럼 그녀보다 힘도 약하고 몸도 둔했지만 사일리안의 검을 받아칠 수 있었다.
'아무리 강한 패를 쥐고 있어도 그 손패가 까였으면... 져야지...!'
검을 나누는 것조차 할 수 없는 능력치 차이라면 모를까 최소한의 공방이 성립되는 수준이라면 상대의 패를 알고 있는 이상 질 리가 없었다.
3%라고 생각했던 승률은 점점 사일리안의 손이 어지러워지면서 점점 오르는 기분이었고 나는 서서히 목까지 차오르는 숨을 뱉어내고는 폭발적으로 숨을 들이켜고 신선한 산소로 뇌를 강제 각성시키며 당황한 사일리안에게 달라붙었다.
"웃!"
팔다리가 길다는 것은 근접전에서 유리하게 작용하지만, 그것도 너무 가까이 붙어버리면 반대로 짧고 작은 쪽이 유리한 법!
이미 마리안의 모범답안을 사용해서 접근한 순간 사일리안은 내 거리에 휘말리고 있었다.
몸 속에서 고양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사일리안이 몸을 뒤로 날려서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나는 머리를 들이밀면서 무작정 따라 들어갔다.
이제 사일리안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개였다.
자신에게 불리하고 나에게 유리한 거리에서 검술을 겨루느냐 아니면 자신의 유효거리를 줄이느냐!
"꽤나...!"
마침내 사일리안이 결정을 내렸다.
그는 목검을 버리고 이번에는 오히려 내 아카데미 정복 옷깃을 잡고 역으로 격투전을 시도한다.
퍼억!
어깨에 주먹을 맞는 순간 뼛 속까지 고통이 전해지면서, 사일리안은 나에게 무기가 들려있고 자기는 맨손인 상황에서도 만만치 않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고개가 움츠러든다. 몸은 슬슬 한계에 달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이 정도면 할만큼 했지. 나름대로 분전했으니 다른 친구들도 나를 다르게 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가슴이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아직 끝까지 안 해봤잖아...!'
검을 쥘 수 있다. 숨은 헐떡이지만 멎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약해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통스럽지만 나는 아직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목소리'를 사용했다.
원래 아렌도 플레이어가 조작 가능한 캐릭터였으니까 스스로 통할 것이라 생각하며, 내 머릿 속에 직접 울려퍼지도록 했다.
"물러서지 마."
가슴 속에 다시 용기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너는 할 수 있어."
남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처럼 나 자신에게 스스로 '목소리'를 거는 순간, 내 검은 이미 사일리안의 주먹을 교차하며 날아들고 있었다.
검을 회전시키면서 사일리안의 팔을 얽히게 만들고 사일리안은 살을 주고 뼈를 친다는 생각으로 내 얼굴을 후려쳐 기절시키려 했지만, 나는 검에 회전을 주면서 방향을 틀었다.
마리안의 검술이 그러하듯이. 직선으로 날아오는 사일리안의 주먹을 차단하고 역으로 상대의 빈틈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쿡.
사일리안의 텅 비어버린 가슴을 목검으로 누르면서 말했다.
"체크메이트."
그 순간 사일리안의 눈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것처럼 안광이 번쩍이며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일리안의 호감도가 '친구'단계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에 굴욕감을 느낀 것인지, 혹은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의 눈빛에서는 살기가 감돌고 호감도가 내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사일리안은 안광을 감추고 눈을 지그시 감으며 양손을 들어올렸다.
"내가 졌다."
사일리안의 호감도가 '절친'단계가 되었습니다
이 자식, 지금 나한테 졌다고 삐졌다가 다시 풀린 거지?
"와... 정말...?"
"이걸 이겼다고...?"
아직까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학생들이 서로에게 물어보고 있다가, 이내 양손을 들어올린 사일리안과 검을 겨누고 있는 나를 보면서 최종결과를 확인했다.
"토너먼트 우승자, 아렌!"
와아아아아아!!
무대가 떠나갈 정도의 함성소리가 울려퍼진다.
모든 학생들과 교사진을 합쳐서 50명을 조금 넘는 정도인데도 불구하고 그 함성소리만은 수천명이 있는 A,B반 대항전에 밀리지 않았다.
"이겼다아아!!"
특히나 우리 F반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는데, 어느 정도냐고 하면 다들 서로간의 호감도를 잊고는 옆에 있는 사람을 얼싸안고 남녀불문 소리를 질러서 머리가 멍할 지경이었다.
'이제 한 걸음이야'
아카데미 파트의 4분의 1을 성공적으로 마친 셈이었다. 그것도.
"하... 좀 자존심이 상하지만..."
파앙!
사일리안이 내 등을 강하게 후려쳤다.
"축하한다! 중간부터는 진심으로 했는데, 이 녀석 아주 철저하게 나 하나 잡으려고 연습했구만?"
"콜록...! 그거야 네가 제일 세니까..."
다들 이번 반 대항전에서 활약한 학생들에게 감사와 축하의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마리안만이 약간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기실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마리안도 챙겨야지'
안 그래도 이번 승리는 누나가 길을 닦아주고 나는 그 뒤로 달려간 것 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내가 우승해서 그런지 아까보다는 밝은 표정인 마리안을 보면서 다른 학생들이 듣지 못하게 그녀의 귓가에 살짝 속삭여 주었다.
"우승하면 소원 들어주기로 했지?"
"응......"
원래 내가 생각한 소원은 마리안에게 [명가의 검]을 받고 그것을 사일리안이나 오필리아에게 장착시킬 생각이었다.
실제로 마리안이 초반에 유용한 이유가 명가의 검을 두 자루 구할 수 있다는 점인데 본인이 하나 쓰고 한 자루는 다른 인원에게 들려주면 초반을 든든하게 공략할 수 있기 때문이지만.
'한 번은 양보하도록 할까'
"나 땀이 많이 났어."
"응... 열심히 했어 우리 동생."
"그럼 같이 목욕하러 가자."
"으응...?"
"누나가 직접 씻겨줘."
자신이 소원으로 빌려고 했던 내용을 내가 먼저 제안하자 마리안은 잠시 벙찐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내 손을 꽉 붙잡았다.
"누, 누나 열심히 할게!"
뭘 열심히 하는데. 가죽이라도 벗기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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