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반 대항전 : E반 대 F반(02)
* * *
화려한 함성소리나 환호소리는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나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려퍼질 뿐.
기세가 오른 E반의 학생들이 목이 터져라 응원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내 적이 될 학생을 보았다.
남학생. 사일리안과 같은 평균체형, 그것도 검사나 기사 출신에서 평균이지 나에 비하면 머리 하나는 큰 모습이었다.
한손에는 우아하게 얇은 목검을 들고 나타난 좋은 집의 귀족기사 같은 느낌이었는데 나는 구태여 상대의 상태창을 보려고 신경을 집중하지 않았다.
상대도 내가 누구인지, 어떤지 파악하려는 생각없이 히죽 웃으면서 힐끔힐끔 레베카 선생님과 하이디 선생님들 돌아보는데 이 모습으로 보았을 때 녀석은 성인모드가 열려있어서 그 의미를 확실하게 파악한 모양이었다.
'벌써부터 그런 생각이나 하고있고!'
아예 대놓고 무시하는거겠지.
'능력치는 나보다 강하겠지. 저쪽은 전문 기사이니까. 허나, 능력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야'
나도 지금 능력치는 꽤 자신있었다. 적어도 중간 정도는 간다고 자부할 정도로.
최상위권 학생들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적어도 싸움이 성립하지 않는 수준은 아니었고 그렇다면 나는 내가 마리안에게 배운 검술과 기량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삐이익!
열 한 번째 대전을 알리는 휘슬소리가 울려퍼지며 상대가 기세를 타고 먼저 나에게 달려들었다.
멀리에서 볼 때에도 나보다 크다고 느꼈지만 가까워질수록, 서로 몸이 다가갈수록 그 키 차이는 절실하게 느껴지는 법.
마리안보다 키가 크고 팔이 긴 상대였기 때문에 안 그래도 몸이 작은 나로써는 상대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나보다 크고 긴 상대를 토대로 경험을 쌓았지만 상대는 아니지!'
가장 먼저 견제를 위해 상단으로 횡베기를 시도하는데, 나는 살짝 허리를 숙이는 것만으로도 무게중심을 잃지 않고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격투 게임에서 단신 캐릭터가 가만히 있어도 상단 장풍을 피하는 것처럼, 작은 몸을 역이용한 것이다.
물론 상대도 바보는 아닌지라 무릎을 차올리면서 내 접근을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기세에서 밀린 것은 마찬가지인지라 나는 바로 명가의 검술을 사용해 하반신을 공략해 들어갔다.
빠악!
"으윽!"
정강이에 목검을 맞고 순간 다리가 휘청이며 그제서야 '이 자식... 이런 몸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라고 경악하는 모양이었는데, 그래도 체력수치가 꽤 높은지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그대로 목검으로 내 등을 내려찍으려 했다.
빙글.
하지만 나는 손목을 기울이면서 검을 비스듬하게 낮추고 손잡이를 세워 옆구리에 그대로 박아넣었는데, 상대가 몸을 맞을 걸 각오하고 내 등을 내려찍으면 체중을 실은 공격을 받은 내가 더 손해를 보기 마련이었지만.
"커흑!"
상대가 그 정도로 악과 깡이 있어보이지는 않아서 그냥 후려친 것이다.
숨이 안 쉬어지는지 헐떡이는 놈은 발악적으로 검을 휘둘러 나를 물러나게 만들려고 했지만 나는 그 공격을 모조리 마리안에게 배운 검술을 사용해 쳐냈다.
정교하지도 않고 힘도 마리안보다 약하며 속도도 느리다.
마리안의 검을 받아내기 위해 어제 그토록 고생했는데 고작 이 정도에 당하면, 누나한테 궁둥이를 까이고 찰싹찰싹 팡팡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따아악!
중간에 목검이 느려지는 타이밍을 노려 양손으로 강하게 쥐고 쳐내자 녀석은 손아귀가 터져나가면서 비명을 질렀고, 그 순간 내 목검이 녀석의 콧잔등을 겨누었다.
"그만!"
승부가 났다고 생각했는지 심판을 맡고 있는 교사가 손을 들어올리며 중단을 외쳤고 나는 그대로 검을 빙글 돌려서 회수하며 몸을 돌렸다.
"F반의 아렌 승리!"
"......오..."
"우와아아아아!!"
내가 이길 것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인지 방금 전까지 시무룩해져 있던 F반의 학생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죽했으면 멜리사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살짝 홍조가 오를 때까지 소리를 지르다가 콜록거려서 부축을 받겠는가.
물론 레베카 선생님이 동행해서 위험한 일은 없겠지만 그만큼 기쁘다는 거지.
'이 기분... 나쁘지 않은 걸?'
12회전에서 수호술사 안나가 패배했지만 이미 승점은 8대 4.
토너먼트 결과에 관계없이 F반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 * *
토너먼트가 시작되기 전에 잠시 휴식시간이 있었다.
몇몇 흥분한 F반 학생들이 몰려들어서 난리를 피우거나 이번에 수고한 엔트리 멤버들에게 이것저것 선물도 건네는 것을 보니 다들 많이 기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달콤한 사탕]을 선물받았습니다
[약초]를 선물받았습니다
[약초]를 선물받았습니다
[해독초]를 선물받았습니다
[6 포인트]를 선물받았습니다
소매넣기 그만해라. 그보다 다 잡템들 밖에 없잖아!
다들 포인트가 거지라서 가진 것은 없는데 기쁨은 표해야 되겠고, 그래서 짜잘한 동전을 넣어주거나 약초나 사탕 같은 선물을 계속해서 넣어주고 있었다.
"자자. 다들 쉬어야지 토너먼트에서 활약할 수 있으니까 조금 진정하고."
사일리안이 나서서 자제를 부탁하고 나서야 흥분한 학생들이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아, 그렇지. 토너먼트도 이겨야지."
"사일리안! 믿고 있다고!"
어차피 우승은 사일리안이라서 별 생각이 없었지만, 마리안은 결의를 다진 채 굳은 표정으로 눈을 감고 컨디션을 조절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서 E반 학생들은 그야말로 우중충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승리를 거둬서 토너먼트에 진출한 몇몇 남학생들은 토너먼트라도 이겨서 보상을 받으려고, 혹은 1점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졌다고 하자면서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토너먼트 진출자가 12회전의 우승자를 합쳐서 12명이라 6강, 3강까지 진행한 다음 거기에서 제비뽑기로 부전승을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전의 반 대항전 경기에서 다쳤던 사람이 기권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경기가 그렇게 길어지지 않았지만.
"아렌은 첫번째 대전 기권승이네. 부럽다."
세리는 부럽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지만, 막상 세리도 승리자였지만 기권의 의사를 표시한 상태였다.
아까 전에 빨빨거리면서 도망다니며 체력소모가 심해서 토너먼트 참가를 포기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그렇게 예선전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데이츠를 상대로 이긴 E반의 여학생 한 명, 그리고 사일리안, 케이, 마리안, 오필리아, 나.
여섯명이서 다들 대전을 벌이는데 의외로 E반 여학생에게 케이가 패배, 정확히는 자기 목검으로 여학생 얼굴을 후려칠 수가 없으니 적당히 피하다가 그냥 항복했고 오필리아랑 내 경기가 두 번째로 있었는데.
"흐응......"
검을 들고 서 있는 나를 보고 오필리아가 지팡이를 내렸다.
"나 오늘 마나 바닥나서 기권할래. 지쳤어."
상태창에 보이는 그녀의 마나는 아직도 70%는 남아있었지만, 오필리아는 나랑 싸우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뭔가 좀 아쉬운데'
기권승에 가깝게 승리해서 약간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자리로 돌아오니 마리안이 출전준비를 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나 응원해 줘?"
"사일리안도 친구인데..."
"누.나. 응.원.해.줘?"
"그래. 꼭 이겨 누나."
그렇게 말하니 마리안은 내 머리를 자기 품에 꼬옥 안으면서 뭔가를 흡수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고 무대에 나섰다.
"어휴. 누구 애인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사일리안이 옆에서 투덜거리면서 목검을 들고 무대에 나서는데 내 등을 한대 팍 후려치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응원해라."
"아까 전에 마리안 응원한다고 약속했는데."
"번갈아가면서 응원하면 되지."
"굳이 사내녀석 응원하기는 좀."
사일리안은 상처받았다는 연기를 하면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이제 실질적인 결승전이었다.
E반의 여학생은 이미 마나가 고갈되어 있었는데 생각보다 케이가 잘 버티는 바람에 안 그래도 부족한 마나를 다 쥐어짰기 때문이었다.
케이가 조금만 더 버티면 이겼을 수도 있는데 새파랗게 얼굴이 지쳐서 E반 학생들의 염원 때문에 비틀거리면서도 마법을 쓰려고 하는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서 항복했으니, 다시 대전을 벌이면 그녀는 마나 고갈로 쓰러질 가능성이 높았다.
어차피 둘 중 누가 이기더라도 나보다는 강하니까 나랑 겨뤄도 승리가 확정이었고.
'양패구상을 한다거나 부상을 입는다면 가능성이 있지만 굳이 그런 상황을 바라지는 않고'
그리고 사일리안이 생각보다 수준차이가 나기 때문에 무난하게 이길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 함께, 휘슬소리가 울려퍼지며 두 사람이 번개와도 같이 빠르게 달려들어 검을 교차시켰다.
빠아아악!!
단숨에 목검이 부러지듯 휘어버린다.
양쪽의 목검이 부러지지 않은 이유는 둘 다 검술적인 기량이 뛰어나서 무기가 파손되지 않도록 상대의 공격을 받아냈기 때문이겠지.
사일리안의 금발과 마리안의 백색에 가까운 은발이 뒤섞이면서 정신없이 번쩍일 정도로 두 사람은 빠르게 공방을 교환하고 있었다.
'저게... 두 사람의 진심모드인가?'
응원이고 뭐고 다들 압도당하고 있었다.
공중에 목검이 부서지면서 파편이 튀고 두 사람의 얼굴과 몸에 나뭇조각이 박힐 정도였는데, 나는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면서 두 사람의 검을 쫓으려고 해도 눈이 따라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단지 뒤늦게 자세가 변한 것이나 소리, 서로의 몸이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공방을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아챌 뿐.
'강해!'
나는 마리안이 케이보다 조금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당장 케이는 지능이 떨어져서 그렇지 힘은 압도적이었고 민첩성도 마리안보다 살짝 낮은 정도에 체력은 두 배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마리안은 자신의 검술, 기량으로 사일리안이 케이를 상대할 때 보여줬던 전력보다 한 단계 위의 모습을 끌어내고 있었다.
'사일리안의 표정이 굳었다'
항상 실실 웃으면서 힘을 빼고 있던 녀석이 지금은 이를 악물고, 눈쌀을 찌푸린 채로 싸우고 있었다.
마리안의 표정은 오히려 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모습이나 상태창에 표시되는 표정으로는 무표정에 가까웠는데, 두 사람 다 전력을 다해서 움직이느라 공격이 몸에 닿지 않아도 생명력이 깎여나갈 정도로 격렬하게 움직이고 검술로 방어해도 충격이 전해지며 몸이 닳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표정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누나... 대단해..."
나도 모르게 감탄성이 나온다.
사일리안도 대단하고 마리안도 대단했다.
심지어 하이디 선생님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두 사람의 격돌을 지켜보면서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는데 전직 여기사로써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모양이었다.
쩌억!
"무슨 일이야?"
홀리오와 세리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수십합을 교환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술에 조예가 있는 교사나 학생들을 제외한 사람들은 잠깐 두 사람이 공방을 나눈 것으로 알 뿐 일격일격이 필살의 의지를 담아 교환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대단해 반장. 이 정도까지 실력을 끌어올릴 줄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사일리안은 힐끔 내쪽을 돌아보았다.
"역시 사랑의 힘은 위대한 건가?"
"......"
마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목검을 잡은 오른쪽 손가락이 부들거리면서 벌어지려는 것을 다른 손으로 꽉 눌러서 고정시키고 다시 자세를 고쳤다.
"원래는 적당히 싸우다가 져줄 생각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반장이 필사적이라면 이쪽도 제대로 하는게 예의겠지."
사일리안도 손바닥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바지에 슥슥 묻어서 닦아내고 다시 목검을 쥐었다.
검세가 변했다.
사일리안은 한 손으로 휘두르던 자신의 목검을 양손으로 쥐고는 검을 낮게 내렸는데, 그 모습을 보고 마리안의 눈썹이 꿈틀거리면서 무언가 알아챈 모양이지만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다시 명가의 검술을 사용해 사일리안에게 공격해 들어갔다.
"훌륭한 공격이야. 틈도 없고. 하지만."
빠아악!
"이쪽도 이걸 꺼낸 이상... 윽!"
마리안의 목검을 쳐내면서 그녀의 자세를 흔들었지만, 마리안은 그 반동까지 예상한 것인지 빙글 몸을 돌리면서 자신의 다리를 사일리안의 무릎에 걸었다.
퍽!
사일리안의 자세가 무너지는 순간 마리안은 눈을 크게 치켜뜨면서 사일리안의 목을 향해 목검을 찔러넣었는데, 아무리 목검이라고 해도 저대로 맞으면 죽을 위력인지라 심판이 경기를 멈추려고 할 때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빠르게 사일리안의 목검이 마리안의 검을 쳐내면서 자세를 무너뜨리고 그녀의 코 앞에 목검을 세웠다.
"오히려 아까보다 쉬웠어. 반장."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