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신전은 무서운 곳이야(03)
* * *
[A.D.K]. 안티 디바인 나이트.
신성력을 사용하는 적이 드물기는 하지만, 나타날 경우 신성한 가호로 데미지를 차감하고 본인은 마음대로 공격하며 튼튼한 갑옷과 귀찮은 신성마법을 사용해 까다로운 적이 된다.
물론 나는 싸워본 경험이 없었다. 아카데미 루트로 진행하면 신전이 지원군이 되어주거든.
오히려 오필리아와 함께 반역 루트를 탔을 때에는 신전과 적대하기 때문에 꽤 쓸모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강한 성기사가 극히 드물어서 그냥 잘 키운 캐릭터들로 때려잡으면 되니까 굳이 데려갈 필요가 없는 그런 캐릭터라고 할까.
게다가 한달 뒤에 등장하니 처음에 등장하지 않아서 호감도 관리가 귀찮은 것도 있고.
무엇보다 이 놈을 내가 굳이 친하게 지낼 생각이 없는 이유가 있었다.
'건방져......'
쪼끄만 주제에 건방지다.
아니 물론 에릭이 나보다 조금 크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도긴개긴의 꼬맹이 캐릭터이긴 한데, 내가 병약하고 슬퍼 보이는 인상의 작은 미소년 타입이라면 이 놈은 딱 귀찮은 꼬맹이 스타일이었다.
무릎과 코에 반창고를 붙이고 변성기도 안 지났는지 고음의 목소리로 나한테 너 누구냐, 새끼사제냐, 안 그래도 사제 쓰레기들이 너무 많아서 구역질나는데 더 늘어나는 꼴을 볼 수 없다 막 이런 악담을 퍼붓고 있었는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알아 들었어?"
사실 하나도 안 듣고 있었다.
"내가 신전 녀석들을 감시하는데 요즘들어 네가 가장 깊은 곳까지 들락거린단 말이지."
"그래서?"
"아무래도 새끼사제가 되려고 수작을 부리는 모양인데, 내가 보는 앞에서 저 광신자들에게 빠지는 꼴을 볼 수는 없지. 좋은 말로 할때 다음부터 안 온다고 맹세해. 그러면 그냥 보내주지."
"F반 전학생 아렌이고, 사제가 될 생각은 없고 지금은 베아체 여사제님께 교육받을 것이 있어서 자주 들르는 것이고. 괜한 시비걸지 말고 그냥 가라."
"교육? 그렇다면 역시 네 놈도 사제가 되려는 건가?"
에릭이 씨익하고 웃음짓는다.
"그렇다면 놔둘 수 없지. 이 세상을 좀먹는 광신자 놈들은 혼내줘야...!"
더 이상 이 놈의 땍땍거리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그냥 목검을 들고 휘둘렀다.
[A.D.K]라고 해도 상대가 신성력을 가지고 있을 때 효과가 발휘되는 것이지 나 같은 일반 캐릭터에게는 효능이 하나도 없는 무능력 특성이나 마찬가지인지라 가볍게 때려눕힐 자신이 있었다.
"어?"
빠아아악!!
주변 공기가 터져나가는 굉음이 울려퍼지고 에릭의 머리는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레이터를 만들면서 처박힌 에릭을 보면서 나는 괜히 목검을 사용했나... 생각이 들어서 잠시 후회했지만 곧 속에서 10년 묵은 체증이 풀리는 것처럼 시원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뭐 죽지는 않았겠지?"
죽었다면 F반 학생들의 호감도가 실시간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겠지만 시스템 메시지가 잠잠한 것으로 보았을 때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제압되지도 않은 모양이지만.
"거 참 시끄러운 꼬맹이야."
목검에 의해서 터져나온 굉음을 듣고 신전에서 몇몇 사제들이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는데, 땅에 처박힌 에릭과 내 모습을 보더니 학생들 끼리의 가벼운 결투라고 생각하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시스템상 대련으로 취급된 건가?'
여성 캐릭터를 제압하고 노예화를 시킬 수 있도록 피를 최소한 1만 남겨놓고 제압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는 것처럼, 대련시 친구가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피가 1이 되면 데미지 산정이 멈추고 승패가 갈리는 시스템이 적용되어 있었다.
"영차."
다리를 잡아당겨 머리를 꺼내보니 코피를 줄줄 흘리고 눈이 맛이 가있기는 했지만 중상을 입거나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대련한다고 중상을 입으면 아무도 그 기능을 안 쓰지'
다리를 붙잡고 질질 끌어서 양호실에 던져 놓았다.
"어머? 부상자야?"
양호실에서 책을 읽고 있던 레베카 선생님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쓰러진 에릭을 살펴보고 있었다.
다급하게 치료마법을 펼치거나 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까 위급한 상황은 아니고 그냥 기절상태로 취급되는 모양이었다.
'양호선생님한테 넘겼으니 이제 끝이지?'
나는 응급조치까지 할거 다 했다. 이제 죽으면 그냥 의료사고지 내 탓 아니야.
양호실에 에릭을 던져놓고 가기에 뭔가 불안한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내가 뭘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죽기야 하겠어?"
"후후. 걱정 마. 절대 안 죽을 테니까."
레베카 선생님은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양호실을 떠나는 나와 같이 밖으로 따라나오더니 신전의 중앙 홀에서 방향을 틀어 안쪽으로 들어갔다.
집중치료실로 들어가나 하던 그녀는 그곳에서 우회전을 하면서 도구상점에 들려서 무언가를 구매하고 있었는데, 혹시나 싶어서 기다리던 나는 뭔가... 뭔가 위험한 물건이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머, 아렌. 아직 안 갔어?"
그렇게 말하면서 주머니에 집어넣었지만 나는 그걸 어딘가에 꽂는 도구임을 알 수 있었다.
정확하게 전립선을 자극하기 위해 특수제작된 물건임을.
"오해하지 마. 치료 도구니까!"
그제서야 레베카 선생님의 얼굴 옆에 떠 있는 성향을 다시 인지할 수 있었다.
[동정사냥]
난 못 봤다. 난 모르는 일이야.
* * *
반 대항전의 엔트리가 나왔다.
반 대항전 엔트리는 내가 기억하는대로 검술반에서 상위 6명, 마법반에서 상위 6명 해서 총 12명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검술반
[빛의 왕자] 사일리안
[용살자] 케이
[검의 명가] 마리안
[중량파괴] 고르돈
[의무교미사] 아렌
[재빠른 몸놀림] 세리
마법반
[다재다능] 오필리아
[마탄사수] 올리비에
[대지술사] 판코르
[수호술사] 안나
[눈보라 마술사] 데이츠
[모범침착] 홀리오
"......버근가?"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엔트리를 살펴보았다.
분명히, 검술반 다섯번째 엔트리에 내가 들어가 있었다.
심지어 그것도 특성 중에서 가장 높은 의무교미사로 적혀서.
엔트리를 보는 순간 마리안이 기뻐하고 오필리아가 깜짝 놀랐으며, 이노리도 당황해서 나를 돌아보고 있어서 나는 바로 손을 들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의있습니다!!"
"그래 아렌. 무슨 할 말 있니?"
"제가 왜 검술반 엔트리에 있습니까?"
"그거야 아렌이 잘 해줬으니까? 그리고 세리는 부상으로 인한 대리 출전이야. 에릭이 이번 반 대항전에 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거든."
그러니까 원래는 저 자리에 [A.D.K] 에릭이 들어가야 하는데 지금 내가 에릭을 목검으로 후려쳐서 인사불성 상태로 만드는 바람에 반 대항전에 내가 나가야 한다?
'하필이면 내가 에릭과 출동한 시점이 엔트리를 선정하는 시간이었나?'
게다가 엔트리 다섯번째라는 것은 에릭이 있더라도 내가 5~6번째 엔트리에 포함되어서 세리를 제외하고 들어갈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이고.
'이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앨리스는 능력치가 마법반 1순위인 오필리아보다 높았지만 [별의 마법사] 특성 때문에 도저히 대련을 할 수 있는 마법체계가 아니라서 예외처리 되는데 주인공 캐릭터도 그런 줄 알았더니 순수하게 능력치가 낮아서 엔트리에 못 들어갔던 모양이었다.
당연히 검술에 필요한 능력치인 힘, 민첩, 체력을 기반으로 전투력을 산정하여 상위 6명을 뽑았을 것인데, 원래대로라면 능력치가 5라서 일부러 실습을 나갈 때마다 친구들을 다 부상입혀도 부상 상태에서도 5보다는 높아서 나갈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가 지금은 오행무경심법으로 인해서 능력치가 올라가는 바람에 상위 6명 안에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연전으로 이어지는 이번 반 대항전에서 상대의 능력치를 파악하고 우리의 최고 전력을 아낀다음에 상대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내가 직접 참가해야 한다.
'그럼 검술반에 내가 아니라 이노리를 넣어야... 윽. 능력치가 낮구나'
이노리는 민첩성이 높았지만 힘과 체력이 낮았고 원래 특성인 [그림자 인법]으로 전투하는 타입이라 지금처럼 능력치만으로 잘라낼 때에는 손해를 많이 본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에 내가 놀라고 있는 동안 엔트리에 올라가 있는 내 이름을 보면서, 항상 구경만 하던 반 대항전에 내가 직접 나서서 승리로 이끄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해진 무기를 써야하기 때문에 내 목검을 쓰지 못해서 살짝 자신감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목검이 없이도 지난번에 여도적들을 상대로 다수를 일방적으로 제압한 기억을 떠올리면 조금씩 가슴 속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마리안 같은 괴물 같은 능력치에 비해서 떨어질 뿐이지, 나도 평균보다는 잘 싸우니까 엔트리에 들어간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져서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엔트리를 보는데, 다시 내 이름을 확인하니 고개를 푹 숙일 수 밖에 없었다.
내 특성이 [의무교미사]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간고사 끝나면 마리안에게 붙어서 [검의 명가]를 첫번째 특성으로 만들던가 해야지 원......'
반 대항전이 끝나고 우리가 E반에게 승리하면 상금이 나오는데, 그게 대략 3000포인트 정도씩 받을 수 있고 엔트리에 뽑혀서 활약하는 것에 따라 포인트가 추가되기 때문에 내가 활약하는 것에 따라서 다량의 포인트를 획득할 기회였다.
1회차 때에는 내가 직접 참가를 못하니 내가 밀어주는 친구들이 활약할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응원할 수 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직접 돈을 받을 수 있다고 할까.
내가 원하는 방향이 있으면 직접 구매해서 선물해버리면 되니까 앞으로 육성이 더 편해지는 셈이다.
"그럼 이제부터 5일 뒤에는 반 대항전이 열릴 예정이니까, 엔트리에 뽑힌 친구들은 오늘부터 열심히 해주기를 바래. 다들 박수~!"
짝짝짝짝...
엔트리에 뽑히지 않은 친구들의 박수를 받으며 나를 포함한 12명의 F반 대표들은 부담감과 각자의 생각을 가진 채 앞으로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만 했다.
"아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성적도 중요하지만 몸이 우선이니까."
"걱정하지 마. 대련인데 안 죽어."
에릭으로 시험해보니까 99999짜리 목검으로 대가리를 땅에 박아버려도 안 죽더라. 나도 똑같이 안 죽겠지 뭐.
"그래도 조심해 줘. 특히..."
오필리아는 아직도 마리안을 못 믿는 눈치였지만, 이번에는 사일리안에 케이에 힘이라면 최강이라 할 수 있는 고르돈까지 있어서 사고는 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남동생집착]에서 [동남애호]로 변경된 이후로는 나름대로 온건하게 변하기도 했고.
"그럼 엔트리에 포함된 인원들은 각자 수련하러 가고, 우리는 오늘도 자습이야~!"
"와아아아!"
그냥 기숙사 돌아가도 아무 말도 안 하니 5일간 탱자탱자 놀 수 있다는 말이었다.
'부럽다'
검술반 엔트리에 뽑힌 나로써는 쫄래쫄래 무기를 챙겨서 검술반 연습실로 들어갔는데, 원래 같이 사용하던 E반의 학생들은 먼저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우리를 보고서는 경쟁심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지난번에 보았던 마리안의 친구 [수습기사] 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쪽은 마리안을 보고 인사하려다가 E반 친구들 눈치보고서 살짝 턱만 끄덕일 뿐이었지만.
"그럼 가볍게 몸풀기로 대련을 할까."
검술반 엔트리 1위인 사일리안이 대표로 나서서 일행을 이끄는데 사람이 총 여섯명이니 두 명씩 붙여서 싸우게 할 예정인 모양이었다.
"원래는 에릭이 있으면 검술 합만 맞춰볼 예정이었지만, 에릭이 부상 중이니까. 아렌이랑 내가 파트너를 하고 케이와 고르돈, 그리고 마리안이 세리를 맡아줘."
마리안은 나와 파트너가 되지 못한 것이 아쉬운지 살짝 사일리안에게 눈을 흘겼지만, 그녀도 지금은 당장의 욕망보다 이번 반 대항전의 1위, 즉 MVP가 중요했기 때문인지 군말없이 세리를 데리고 대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사일리안의 싱글싱글 웃는 얼굴 앞에서 느슨하게 긴장을 풀면서 물었다.
"술 한잔 하고 시작하자는 얘기는 안 할거지?"
"나도 매일 술에 찌든 놈은 아니라고. 특히나 반 대항전을 앞두고는 말이야."
"그래서?"
사일리안은 대련장 위로 올라가며 한 자루의 목검을 나에게 던져주었다.
"일단은 내 술친구 실력을 좀 볼까?"
F반 최강자를 상대로 내가 얼마나 할 수 있는가......
"사실 나도 궁금하던 참이었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