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음란한 잡초(02)
* * *
"끼에에에엑!!"
푹.
고블린 샤먼이 도망가기 전에 이노리가 먼저 움직여서 암살자의 직검을 가슴에 박아넣었고 정확하게 바늘을 찔러넣는 것처럼 심장을 뚫고 나오자 고블린 샤먼은 가슴에서 뿜어지는 녹색 피를 막으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나도 당황해서 제대로 보지 못하는 동안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이노리가 암살자의 직검에 묻은 녹색 피를 천으로 닦는 동안 나는 쓰러진 고블린의 상태창을 확인해 보았다.
고블린 노예
"그 놈이 아니야!"
"예?"
지금 향로를 들고 도망가는 고블린에게 신경을 집중하니 얼굴 옆에 붉은 상태창에 녹색의 생명력 수치와 그 밑으로 푸른색의 마나 수치가 보였다.
"저 녀석이 진짜야!"
이노리가 [그림자 인법]을 사용해 일격에 참살하려 했지만 화재가 점점 격렬해지면서 주변의 광원이 흔들리며 그림자가 흐트러졌고, 이노리는 [그림자 인법]을 포기하고 나와 같이 뛰기 시작했다.
"끼에엑! 끼에에엑!!"
저 놈을 잡으면 추가 포인트다. 당연히 그냥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쩔렁쩔렁쩔렁!
도망치는 와중에도 향로를 소중하게 껴안고 도망치고 있었는데, 안에는 아직 불씨가 남아있어서 음란한 잡초로 이루어진 잡초밭에 불똥을 튀기고 있었다.
'저 향로 뭔가......'
달려가는 도중에도 정신을 집중해 변장한 고블린 샤먼이 들고 도주하는 향로의 정보를 확인한다.
낡은 향로
너무 낡아서 별 효용성은 없어보인다
그냥 향로인 모양이다.
팟!
이노리는 날렵하게 나를 앞지르면서 전력질주하기 시작했는데 거의 땅에 붙어서 날아가는 제비처럼 날렵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단순히 민첩성 수치가 아니라 확실히 개개인의 기술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이노리의 민첩성이 나보다 높기도 하지만 만약 비슷한 능력치를 가졌더라도 그녀의 날렵하게 움직이는 기량에 비해서 나는 그냥 학창시절에 배운 주법대로 달리고 있으니 거리가 심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고블린 샤먼은 나름 열심히 도망가고 있기는 했지만 5초도 지나지 않아 이노리가 뒤를 잡으며 자신이 들고 있던 암살자의 직검을 몸에 박아넣었다.
"쿠헤엑!!"
마치 벌이 쏘고 지나가는 것처럼 깔끔한 일격이 고블린 샤먼의 목을 꿰뚫는다.
정확하게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만 박혀든 칼날은 마치 주사를 놓은 것처럼 깔끔하게 빠져나가면서 이노리에게 회수되었고 고블린 샤먼은 도망치던 자세 그대로 엎어진 채 자신의 향로를 바닥에 쏟아버렸다.
화르륵...
향로 내부에 남아있던 불씨와 뜨거운 재가 쏟아지자 안 그래도 말라있던 음란한 잡초밭이 불타기 시작한다.
"이노리! 위험해!"
지금 고블린 마을에 난 화재는 오필리아의 화염마법으로 인한 것이라 우리에게 피해가 없었지만, 지금 고블린 샤먼이 만든 화재는 적대적 공격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이노리에게 화상을 입힐 수 있었다.
"주군! 이쪽으로!"
"엉?"
"뒤에서 불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나는 오필리아의 화염마법인줄 알고 가만히 있으려다가 갑자기 내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타는 냄새에 기겁하면서 전력질주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뭐야 이거! 오필리아의 마법이 아니었어?!"
아무래도 마을 후방에서 발생한 화재는 오필리아의 화염마법이 아니라 고블린들이 정면에서 쳐들어오는 오필리아와 마리안이 추격하지 못하게 일부러 지른 불인 모양이었다.
지금 고블린 샤먼이 일부러 향로에서 잿가루와 불똥을 떨어뜨려 이 건조한 풀밭에 불을 지르면서 도주하려 했던 것처럼!
'젠장 완전 산불이 되겠네!'
거기에다가 오필리아가 정면에서 불을 지르고 있으니 현재 이 필드는 완전히 불바다나 마찬가지였다.
"켈록켈록!"
"주군!"
오필리아의 불길은 우리에게 위험하지 않도록 특별한 시스템 처리가 되어 있었지만 고블린들이 지른 불길은 그냥 순수하게 아무나 죽어라 하면서 주변을 불태우고 있었다.
심지어 이 음란한 잡초밭은 내 손으로 잡았을 때 바삭바삭하게 느껴질 정도로 잘 말라있었기 때문에 불똥 몇 개로 시작한 화재가 급격하게 커지고 있었고, 이노리는 내가 도착하자 바로 자신의 직검으로 주변의 땅을 파헤치면서 불길이 이곳까지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으려 하고 있었다.
"이노리, 비켜!"
내가 '목소리'로 이노리에게 명령하자 그녀는 바로 옆으로 빠져나왔고 나는 목검을 꺼내들어 바닥으로 기울인 뒤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콰가가가가각!!
드릴로 땅바닥을 갈아내는 것처럼 99999강화 목검에 닿은 땅이 갈려나가면서 주변 땅이 뒤집어졌고 촉촉하게 젖은 흙이 밖으로 나오면서 나와 이노리가 대피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콜록! 이노리, 일단 너라도 그림자 속으로 숨어서..."
"그림자는 항상 빛 아래에 있는 법입니다. 그런 말씀 하시지 마시지요."
'아니 지켜보고 있던 호위들을 불러서 산불을 꺼달라고 부탁하려던 건데...'
그래도 주변에 탈 것이 없어서 그런가 연기가 엄청나게 피워오를 뿐 지금 당장 우리가 불에 타죽을 위험은 없었다.
다만 그 연기가 문제였을 뿐.
"콜록콜록!"
맵다 매워. 내 폐가 다 훈연되는 기분이었다.
"주군. 이것을."
이노리는 자신의 복면을 풀고 나에게 양보했다.
"아니야, 이건 조금만 버티면 돼. 그리 심한 화재도 아니고 안전지대도 확보했으니까 그냥 마른 풀들이 다 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호흡기를 보호하고 독무를 막아주는 복면입니다."
아, 방독면 같은 물건이었어?
"콜록... 괜찮아. 이건 이노리가..."
"주군."
굳은 표정으로 내 입에 복면을 씌워주는 이노리는 지금만큼은 내 명령을 듣지 않겠다는 듯이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복면을 굳이 뒤집어쓰지 않고 나에게 씌워주는데 앞면과 뒷면 어느쪽으로 써도 문제가 없는 물건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보니까 이노리도 누나 같네...'
이노리는 나이를 속여서 아카데미 다니고 있으니 나이상 누나가 맞지만.
마리안이 동생의 응석을 받아주는 다정한 누나라면 이노리는 약간 엄한 누나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콜록... 이노리가 위험해지면 바로 바꿔쓰는 거야."
"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군."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내 입에 복면을 고정해주니 확실히 방금 전까지 나를 괴롭히던 매운 연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마치 공기청정기를 통해 걸러내는 것처럼 숨을 들이쉴 때에는 약간 뜨거운 느낌만 날 뿐 아까처럼 매운 연기로 느껴지지는 않았으니까.
단순한 복면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기능이 있다니, 역시 판타지 세계......
'오필리아랑 마리안은... 잘 대피하고 있군'
화재가 커지고 있으니 두 사람이 걱정되어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저 멀리서 분홍색 하트 게이지가 엄청 작은 크기로 보이고 점점 작아지는 모습을 보니 일단 고블린 마을에서 물러나는 모양이었다.
"콜록... 이노리? 괜찮아?"
"문제 없습니다."
이노리는 무표정하게 화재로부터 나를 보호하며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아가보다 연기가 점점 심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해 보였다.
'끄응... 좀 좁기는 한데...'
급하게 만들어낸 안전지대가 조금 좁아서 얕은 구덩이에 이노리랑 같이 몸을 기대고 있는 셈인데 그 덕분에 이노리의 상태가 괜찮은지 안 좋아지는지를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제가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이노리의 표정이 조금씩 더 굳어가고 눈쌀을 찌푸리는 모습이 보여서 내가 복면을 풀려고 할 때였다.
"이노리가 다시 복면 써. 교대하자. 둘 다 안전하게 나가야지."
"잠깐... 주군..."
뭔가 이노리의 눈동자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동공 깊은 곳에서 진한 하트 문양이 보이고 있었는데 원래 애정도가 오를 때에만 잠깐 보여야 하는 하트 모양이 눈동자에 비춰보인다는 것은 마치 마리안이 나를 남동생이라고 생각해서...
'어...? 왜...'
물론 마리안보다는 하트가 작았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노리의 검은 동공 안에서만 살짝 보이는 크기였다.
게다가 갑자기 나를 덮치려고 하는 등의 이상행동을 보이지도 않았고.
하지만 마리안의 전례가 떠오른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고 형형색색의 음란한 잡초들이 타들어가며 사방에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고 있다는 사실과 내 손에 남아있는 한 가닥의 음란한 잡초를 들어서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말려서 태우면 약한 흥분효과를 가진다... 아!'
즉, 지금 이곳은 음란한 잡초들이 타들어가며 만드는 흥분제의 도가니탕이었단 얘기였다.
"이노리! 얼른 이거 써!"
"싫습니다...!"
"아니 그대로 이 연기 마시면 위험하다니까!"
"안 됩니다. 주군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내가 복면을 벗으려고 하니까 이노리가 자기 손으로 내 복면의 이음새를 꽉 누르면서 제압하는데, 처음부터 자신에게 복면을 돌려주지 못하게 하려던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노리의 입가에서 살작 침이 흘러나오고 그녀의 눈동자에서 조금씩 하트가 커져가는 것과 함께, 내 몸 위에 올라타 있는 이노리의 몸에서 군데군데가 조금씩 볼록하게 융기되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이노리. 주군으로써 명한다."
"안전에 관한 명이라면 들어드리지 않을 겁니다."
"이거라면 괜찮겠지?"
나는 이노리의 뒷머리를 잡고 내 얼굴로 끌어당겼다.
"주군...?"
당황한 이노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것과 함께, 나는 이노리의 입술에 복면을 쓴 채로 입을 맞췄다.
'먹힌다!'
아까 전 이노리는 자신의 복면을 벗어서 나에게 양도할 때, 그녀가 평상시 사용하던 입이 닿는 부분이 아니라 바깥쪽 면을 내 입에 붙여주었다.
즉, 이 복면은 천 자체에 공기정화 기능이 있는 것이지 앞면 뒷면이 다르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서로 입을 맞추고 양면을 같이 사용해도 문제가 없는 것이다.
'탈만한 물건이 없어서 화재는 금방 끝난다'
고블린들이 가져온 잡동사니와 작은 마을 하나, 그리고 이 근방의 음란한 잡초밭이 끝이었다.
이것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에 나는 이노리의 얼굴을 붙잡고서 서로 같이 복면의 효과를 받으며 숨을 쉬고 있었고 이노리의 입술에 정화된 숨결을 계속 불어넣어 주었다.
음란한 잡초는 바싹 마른만큼 몇 분 지나지 않아 전부 타들어가며 더 이상 연기를 내뿜지 않았고 주변에 검은 연기가 걷혀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노리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하아..."
복면을 통해서 서로의 침이 살짝 교환되어서 그런가 이노리의 입술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눈에 띄게 붉어진 그 얼굴을 보면서 나는 복면을 벗어서 이노리에게 건네주려고 했지만, 이노리는 살짝 묻혔을 뿐인데 내쪽에서는 침으로 범벅을 해놔서 차마 바로 쓰라고 돌려줄 수가 없었다.
'수통으로 한번 빨기라도 하고 돌려줘야 되겠네...'
"괜찮아?"
"주군......"
이노리는 나에게 손을 뻗으려 하다가, 갑자기 자신의 얼굴을 감싸쥐더니 스스로의 양팔을 [그림자 인법]으로 묶어버렸다.
"안 돼, 그림자 주제에... 주군에게... 이런 마음은..."
"이노리?"
"우리는... 그저 충성심만으로..."
갑자기 이상현상을 보이길래 아까 마신 음란한 잡초의 연기 때문인가 하고 그녀의 하트 게이지를 확인해 보았다.
역대 지금까지 마리안도 도달한 적이 없었던, 하트 게이지가 다섯번째를 거의 채워서 끝에 다다르려 하고 있었다.
"제발... 더 이상... 상냥하게 대하지 말아주세요 주군..."
평소와는 다르게 이노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모습으로 나에게서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부디, 이 미천한 그림자가 착각하지 않을 수 있도록 거리를......"
내가 손을 뻗으려 하니 이노리는 더 멀리 물러났다.
"이러시지 않아도 제 몸은 마음대로 취하시고 버리셔도 괜찮으니까, 부디 이런 식으로... 그림자 주제에 착각하지는 않도록..."
뭔가 이노리의 애정도가 오르면 오를수록 조금 거리감이나 망설임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거였나?'
공은 공이고 사는 사, 즉 주종관계이기 때문에 명령하면 자신의 몸은 거리낌 없이 바칠 수는 있지만 애정을 품지는 않아야 한다고?
"주군게서는... 소중한 연인이 있으시니까... 그건 저도 이해하고 있지만..."
울면서 입술을 깨물며 한 마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이노리의 슬픔이 전해져온다.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다시 주군께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드릴 테니까... 지금처럼 총애받고 있다는 착각을 하지 않도록, 주군께 불순한 감정을 품지 않도록 잠시만 시간을..."
아니 근데 우리 사이에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거였나 싶은데...... 내가 너무 애무만 하고 이노리가 민감체질이라서 그것만으로 올라버리니까, 막상 애정도는 오르는데 내가 가지고 노는 것 같고 자기는 애정도가 올라서 마음이 흔들리니까 고민하고 있던 건가?
'이렇게 따지니 내가 나쁜 놈이구만......'
생각해보면 나도 이노리에게 한 것처럼 약올림 당하면 미쳤을 것 같은데. 새삼스럽게 반성하게 된다.
하나하나 다 받아주니까 나도 모르게 이노리라면 괜찮겠지, 라고 생각해버렸어.
"품어도 돼."
"......주군?"
"그게 뭐 나쁜 거야?"
불타오르는 숲 가운데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가문의 규칙에 따라 나를 주군으로 섬기고 지키는 것이 운명, 이라고 했지."
"예. 그것이 그림자 가문의 운명."
"거기에 개인적인 사심을 조금 추가하면 어때서."
그 말을 들은 이노리는 자신의 심장을 손으로 누르면서 움찔했다.
"이노리가 좋아해준다면..."
솔직히 이 말을 직접 꺼내기에는 부끄러워서 그런가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대답해 주었다.
"좀 많이 기쁘겠는 걸."
아. 하트가... 다섯칸 다 차버렸다.
"어라...?"
갑자기 발 밑이 꺼지는 느낌과 함께 내 몸이 기울어지며 그림자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아... 또 이런 방식...?'
근데 이노리한테는 좀... 당해도 쌀 것 같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