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음란한 잡초(01)
* * *
아침식사는 다들 간단하게 끝내버렸다.
이노리는 복면을 남들 앞에서 벗을 수 없다면서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서 빠르게 식사를 끝내고 돌아왔고 나는 마리안이 동생 밥 먹여준다면서 옆에 달라붙어서 반 강제로 아침식사를 든든하게 끝내게 되었다.
오필리아는 그 모습을 보면서 뭔가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리고 있었고.
어차피 간단하게 요기를 위한 식사인지라 추가 식사는 없이 끓여낸 음식을 나눠먹는 것으로 끝, 밤새도록 신세진 모닥불을 정리하고 식기류는 대충 천으로만 한번 닦아낸 뒤 가방에 때려박았다.
이런 야영에 사용하는 식기류야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 반납하면 아카데미의 사용인들이 알아서 정리해서 걸어둘 테니까. 음식물이 흘러넘치지 않게 정리만 해두면 된다.
"그럼 오늘 내로 고블린 마을을 처리하고 돌아가도록 할까?"
오늘 이상으로 시간을 보낼 생각은 다들 없었기도 했고, 이노리가 밤에 그림자 사이를 오가면서 마을까지 통하는 길을 확인해두었기 때문에 오늘 내로 실습이 끝날 것 같았다.
'애초에 이곳 지형을 대략 외우고 있지만'
이노리의 안내를 따라서 숲 사이로 걸음을 옮기는데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오솔길도 사라지고 나뭇가지가 얼굴을 할퀴는 각도에 많이 나 있어서 마리안이 일일이 검집에 넣어둔 자신의 장검으로 부러뜨리면서 진행하고 있었다.
"누나가 길을 뚫어줄 테니까 조심해서 와."
"응."
"우리 다 동갑 아니었어?"
"그냥 넘어가."
나도 죽어라 따지는데 본인이 애써 무시하는 걸 어쩌겠는가.
사실 여기서 굳이 누나라고 한다면 이노리가 2살 연상이지만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었고.
푸스스슥.
"마리안 발 밑을 조심해."
마리안은 내가 경고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는지 자신의 발목 높이에 걸려있는 썩어가는 밧줄을 발견하고는, 몸을 옆으로 기울이면서 자신의 검집으로 툭 하고 쳐냈다.
푸스스스슥!
밧줄로 만들어진 함정이 낙엽과 쓰레기를 흩날리며 발휘되고 마리안은 얼굴 앞에 날아드는 먼지를 손으로 홰홰 저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슬슬 마을이 가까워지나봐."
저 함정은 사실 우리 같은 인간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을 근교에 나타나는 작은 짐승들을 잡으려는 함정이었다.
즉, 고블린들의 사냥권에 들어왔다는 이야기였다.
"리타. 얼마나 남았지?"
평소에 맨날 이노리라고 부르다가 리타라고 대외적인 명칭으로 부르니 잠깐 답변이 늦기는 했지만 성실하게 대답해줬다.
"안까지 들어가보지는 못했지만 15분 정도 진행하면 나와."
그리고는 살짝 나를 돌아보며 뒤에 작게 '요'라고 붙이는 걸 보니 쓸데 없는 곳에서 충실하다.
'15분 거리라면 이제 본격적인 전투 시작인가?'
슬슬 외곽에 순찰을 도는 고블린들이 나타날 예정이었다.
"지금 진행속도로 15분이라면 달려가면 금방 끝나겠네. 내가 먼저 돌입하고 끝낼 테니까 동생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위험할지도 몰라."
그 말에 마리안은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이곳에서?"
'뭐... 성인모드 특전 몬스터라도 나오지 않는 이상 마리안 혼자서 다 처리가능하겠지만'
"그래도 혼자서는 위험해. 동시에 진입하자."
"걱정하지 마. 누나는 강하니까."
그래도 전략적으로 만에 하나를 위해서 말리려고 했는데 마리안은 이미 자신의 검집에서 장검을 뽑아들고는 고블린 마을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와... 어휴... 오필리아!"
"반장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열정적이구나. 다른 친구들이 말하기로는 얌전하고 차분한 성격이라고 하던데."
나랑 같이 있어서 그런 걸까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이걸 굳이 내 입으로 설명하기에는 부끄러워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아렌이랑 리타는 여기에서 천천히 와. 반장은 내가 지원할 테니까."
"부탁할게 오필리아."
"걱정 마."
둘 중 한 명만 있어도 고블린 마을 정도는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테니 둘을 한꺼번에 보내면 별 문제가 없겠지.
"휴우... 이제 복면 벗어도 돼 이노리."
"안 벗습니다 주군.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니 쓰고 있겠습니다."
뭐 본인이 그렇다면야... 어차피 고블린 정도야 나나 이노리가 한 대 치면 끝날텐데 말이지.
"우리는 천천히 진입하자고. 어차피 마리안이랑 오필리아 둘이면 고블린 마을 정도는 쉽잖아."
"네."
이노리도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사실 이 정도 임무는 전투가 주력이라 할 수 없는 이노리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으니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바스락.
고블린 마을을 향해 길을 들어가니 중간중간에 뭔가 신경쓰이는 글씨가 보였다.
'아이템인가?'
셀레스티얼 아카데미는 전투 맵에 보물이 숨겨져 있거나 아이템을 채취할 수 있었다.
약초지대에 가서 약초를 캐오거나 부서진 연금술 학회에서 싸우다가 포션을 구하거나 이런 식이었는데, 이런 고블린이 사는 마을 근방이라면 잡동사니나 작은 도구, 혹은 숲의 특성상 약초나 나무열매를 구할 수 있었다.
"응? 이건 뭐야?"
바닥에서 흐릿하게 뜨는 [???]표시를 발견하고 찾아가보니 검은 색의 얇은 매생이 같은 풀이 불규칙하게 심어져 있었는데, 그 위를 살짝 발로 밟아보니 별로 위험한 물건은 아니었다.
약간 약초 부근의 땅이 푹 꺼져있는 느낌이기는 했는데, 무슨 함정인가 싶어서 한 발로 조심스럽게 밟아보니 토끼굴처럼 약간 꺼져있기만 할 뿐 별다른 위험은 보이지 않았고.
'그럼 이 풀은 뭐지? 약초인가? 이런 약초는 처음 보는데?'
"킁킁... 좀 가느다랗고 꼬불꼬불해 보이는데."
주변에 비슷한 ???표시된 약초가 많이 보이는데 군데군데 잔디처럼 돋아나 있는 모습과 각각 색이 어떤 것은 검고 어떤 것은 붉고 어떤 것은 녹색처럼 보여서 컬러풀한 느낌을 준다고 해야 할까.
'일단 채취를 해볼까?'
쓸만한 도구가 없어서 가지고 있던 낡은 철검을 꺼내서 이 풀을 채취해 보았다.
서걱서걱.
뭔가 머리카락을 자르는 듯한 기분 좋은 서걱서걱 소리와 함께 풀을 채취하고 손에 쥐어보니 정말 머리카락이나 사람의 털을 잡은 듯한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져왔다.
"이노리, 이게 뭔지 알아?"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호위하고 있던 이노리에게 물어보니, 그녀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잡초입니다."
"잡초?"
잡초도 아이템으로 쓸 수 있나...? 싶었는데 이노리의 설명을 듣고도 내 손에 들려있는 아이템 이름이 ???에서 잡초로 변하지 않았다.
내가 이 아이템의 이름을 제대로 인지하면 ???가 풀리고 정보가 나타날 텐데?
"다른 이름은?"
"잡초는 맞습니다. 다만..."
"다만?"
"......음란한 잡초..."
"......응?"
"음란한 잡초가 정식 명칭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눈을 비비고 다시 땅바닥에 심어져 있는 잡초들을 돌아보았다.
"......우거진 잡초지?"
"음란한 잡초입니다."
"어째서?!"
왜 잡초가 음란해? 아니 잠깐만, 이 형형색색에다가 제각각의 모습, 어떤 것은 숱이 많고 어떤 것은 숱이 적고를 하나씩 보고 있으면서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체모 같은 꺼끌꺼끌한 감촉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다시 내 손에 들려있던 검은 잡초를 살펴보니 [음란한 잡초]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으아악!"
음란한 잡초
말려서 태우면 약한 흥분효과를 가진다
부적으로 만들어서 보유시 행운을 올려준다
깔끔하게 뽑아낼 경우 땅이 매끈해 보이는 효과가 있다
'음모잖아!!'
이렇게 보니 땅바닥에 음모를 붙여놓은 것처럼 생겼다.
형형색색의 풀로 자라난 이유가, 이곳 세계관은 판타지 세계관이라서 애들 머리색도 형형색색으로 다르게 표현되어 있으니 그에 맞춰서 이런 색인 모양이었다.
만약 동양계가 컨셉이었다면 다 검은 색으로 덮여있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로.
'아니 무슨 이게 대자연의 그곳이라도 돼?'
볼록한 바위 같은게 솟아 올랐으면 손을 잘라내고 싶었을 건데 그나마 구덩이라 다행이었다.
"몸에 나쁜 잡초는 아닙니다. 조금 용도가 불순할 뿐."
"으윽...!"
이름모를 대자연의 음모를 만졌다는 생각에 나는 손수건을 꺼내서 손바닥을 슥슥 닦아 내었다.
'성인모드에 적용되는 아이템이었구만...'
어쩐지 감촉도 뽀송뽀송하더라... 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시선을 돌리니 이노리는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고간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왜?"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욕탕에서 보았을 때부터 이노리는 음란한 잡초가 없는거 다 아는데 굳이 가려봐야.
처음에는 기분이 나쁘기는 했는데 이 약초들을 캐서 어딘가에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는 나는 색깔별로 음란한 잡초를 채집하기 시작했다.
색이 조금 빠져서 하얀색을 띄고 있는 것을 뽑을 때에는 왠지 마리안에게 미안하고 붉은색의 음란한 잡초를 뽑을 때에는 왠지 오필리아한테 미안하고 검녹색의 잡초를 뽑을 때에는 앨리스한테 미안해지고 한다.
'확실히 사람 그곳 같기는 해'
물론 이런걸 뽑으면서 흥분하지는 않는다. 변태새끼도 아니고.
아니 내가 아무리 변태새끼라도 대자연의 음란한 잡초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하는 놈은 아니라고.
그렇게 음란한 잡초를 적당히 채취하는 동안 저 멀리서 시끄러운 고블린의 고함소리와 무언가 고함소리, 그리고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시작했나보네."
"예. 지원하러 갈까요?"
"가야지. 마리안이나 오필리아가 정면에서 시선을 끌어주는 동안 우리는 후방을 급습하도록 할까?"
이른바 양동작전이라는 거다. 어차피 정면으로도 충분히 상대 가능하지만 그래도 일망타진을 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고블린들은 기본적으로 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홉 고블린과 고블린 샤먼을 무찔러야 마을을 전멸시키는 것인데 고블린들이 겁이 많은만큼 정면으로 쳐들어가면 쫄따구들을 방패로 삼아 시간을 버는 동안 수뇌부가 도망갈 수 있으니 우리는 후방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여왕개미를 잡지 못하면 개미가 계속 등장하는 것처럼, 대가리를 잡아야 완벽히 해결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무식하게 정면만 공격해서 전멸시켜도 보상이 최대치가 안 나오고 나중에 같은 임무가 재등장하길래 버그인 줄 알았지'
이 임무가 [고블린 퇴치 30/30]이라면 히든 미션으로 [홉 고블린 혹은 고블린 샤먼 퇴치 0/1]로 끝내는 셈이다.
"이 방향으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이노리의 안내를 받으면서 천천히 고블린 마을의 후방으로 우회해서 돌아가고 있었는데, 마을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오필리아의 화염마법으로 고블린 마을이 불타는 모습이 멀리서 보이는 것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내 코를 찔렀다.
"어휴... 불 좀 적당히 지르지."
물론 나와 이노리는 같은 파티원이라서, 앨리스가 사용한 [별의 마법]이 지형을 날려버릴 위력을 가졌어도 피해가 없던 것처럼 오필리아가 만들어낸 불길에 화상을 입지는 않았다.
[별의 마법]으로 날아가는 파편에 너덜너덜해지는 일이 없던 것처럼 이 불이 옮겨붙어서 벌어지는 간접피해도 시스템상 막히고 있으니까 우리는 안전하게 불길이 타오르는 고블린 마을의 후방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다.
"그륵?"
그러자 화염을 피해서 도망치는 일련의 고블린 무리와 마주쳤는데, 동물의 뼛조각이나 깃털로 몸을 감싸고 있는 고블린 샤먼과 그 옆에 시종처럼 보이는 못생긴 고블린이 커다란 향로를 손에 든 채로 멈춰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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