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몬스터라고 성인모드 예외가 아니다(02)
* * *
'약해'
단 일격, 멱살을 잡고 바닥에 내려치는 것만으로도 단숨에 제압상태가 되었다.
'총... 일곱명인가? 최소 숫자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극초반 임무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단신으로 임무를 수행하러 왔기 때문인지 도적단의 숫자는 고작 7명 밖에 되지 않았다.
'감각이 예민해진다'
전투시의 긴장감 때문인지 아니면 성인모드가 버그로 터진 것인지, 혹은 전투시에도 이런 예민한 감각이 원래 발휘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방금 전까지 평범했던 내 몸이 긴장하면서 움츠러들고, 동시에 주변의 모든 사물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암살자나 늑대를 상대로는 이렇지 않았는데?'
내가 성인모드의 기능을 완전히 개방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전에 벌였던 전투보다 훨씬 실감나는 전투를 시작하게 된 셈이다.
기습을 당한 도적단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자신들의 낡은 단검과 숏 소드를 꺼내드는 모습을 보고 나도 오른손에 들고있던 낡은 철검을 들어올리며 대응했다.
"쳐!"
셀레스티얼 아카데미의 시스템상 캐릭터가 보고 있는 정면에서 날아오는 공격은 회피율이 올라가고 높은 확률로 반격이 터진다.
하지만 측면에서 공격을 받으면 회피율이 낮아지고 반격도 횟수가 줄어들고 후방은 특별한 특성이나 훈련을 받지 않으면 반격불가에 회피도 어지간히 수준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싸움의 머릿수가 중요하고 적을 끌어들여 속칭 다굴, 우아하게 말해서 포위공격을 시도해야 하는데 나는 반대로 여섯명이나 되는 도적들에게 후방을 제외한 정면과 양측면에서 다굴을 맞을 예정이었다.
'쉽게 당해줄 생각은 없지만'
마차를 등지면서 후방에서의 공격을 차단하고 아까 내가 걷어찬 문에 얻어맞아 코피를 흘리는 도적에게 먼저 달려들었다.
"으윽!"
내가 자신의 소매를 낚아채서 바닥에 찍어누를까봐 당황한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무기를 휘둘러 나를 물러나게 만들려고 했지만, 그 동작이 너무나도 느려서 나는 그녀가 휘두르는 검로에 낡은 철검을 가져다대는 것만으로도 공격을 차단할 수 있었다.
'완벽방어 판정이라면 반격 가능!'
퍼억!
서로 양손이 얽혀있는 상황에서 무릎으로 가슴을 걷어차는 것으로 쓰러뜨린다.
상대도 나름대로 회피를 띄워서 피하려고 했지만 살짝 무릎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제압상태가 되어버렸고 남은 도적은 다섯.
'턴제 RPG라면 상대가 다섯 번 움직일 때 나는 한 번 움직이겠지만...'
지금은 실시간 전투였기 때문에 진형을 갖추지도 않고 순차적으로 달려오는 도적들 따위, 그것도 내 맨손에 스치기만 해도 제압당하는 수준은 우스을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이렇게 공격이 둔했나?'
그녀들이 휘두르는 단검이나 숏소드 공격은 매서운 기세가 전혀 없었다.
검술반 훈련시 마리안이나 오필리아가 휘두르는 검술에 비해서는 정교함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고 케이의 공격처럼 매서운 기세도 없었기 때문에 마치 일부러 나에게 맞아주려고 어설프게 틈을 노출하나 싶을 정도였다.
촤악!
"끼얏!"
원래는 가볍게 무기를 쳐내고 공격을 가하려고 했지만 내 몸이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는 바람에 검이 직접 살에 닿아버렸다.
'이 감촉 꽤나...!'
섬뜩하다.
목검은 위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인지 암살자나 늑대에게 휘둘러서 때리면 그냥 맞고 날아가는구나 했는데 실제 낡은 철검으로 상대하며 살을 베어보니 그 감촉이 손 끝에 전해지는 것이 너무나도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사람을 죽인다면 심리적인 거부감이 들겠지만, 다행히도 나에게는 여성 캐릭터 한정으로는 '제압'상태로 만드는 시스템이 있었다.
즉 내가 아무리 심한 공격을 가해도 죽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마음이 편하지'
손에 느껴지는 리얼한 감촉에 순간적으로 놀라기는 했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면서 검을 휘둘러 뒤이어 달려드는 두 명의 도적들의 공격을 쳐냈다.
까앙!
낡은 철검의 내구도가 줄어든다.
맨살에 휘두를 때에는 내구도의 변화가 없었으나 무기와 부딪치는 순간 서로의 무기 내구도가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무기 내구도도 신경써야 하는군'
턴제라면 그냥 한 번 휘두르면 내구도가 줄어들지만 지금은 전투방식이 달라져 있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할까.
목검의 경우는 아예 파괴불가라서 신경쓰지 않아도 되지만 일반무기를 들고 싸울 때에는 꽤나 귀찮아질 것 같았다.
"흡!"
무기를 마주대고 있는 두 명의 도적을 힘으로 밀어낸다.
마리안을 상대로는 손만 잡혀도 제압당하던 내가 처음으로 한쪽 팔의 힘만을 사용해서 밀어낸다는 점이 놀라웠지만, 그만큼 마리안이 능력치 괴물이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할 수 있다'
아니, 할 수 있다가 아니고 벌써 승기는 나에게 넘어왔다.
벌써 도적단에서 세 명은 제압당한 상태였고 나머지 네 명은 기회를 노리면서 신중하게 나를 포위하려 했으나, 능력치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났으니 내 입장에서는 그냥 밀어붙이면 그만이었다.
만약 내 능력치가 멜리사의 음기를 흡수해서 강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 정도의 허술한 기량이라면 다른 친구들에게 배운 검술로 힘들지라도 상대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아... 안 오면 내가 간다."
팟!
후방을 커버하고 있던 마차 근처에서 벗어나 오히려 도적들 사이로 파고드니 그녀들도 본능적으로 진형을 열면서 나를 포위하려 했지만 이미 돌입 당시부터 한 명을 노리고서 검을 휘둘러서 바로 제압시킬 수 있었다.
그 이후의 전투는 내가 늘어난 능력치에 익숙해지자 순식간에 제압이 가능했는데, 여도적 일곱명은 다들 어디 한 군데에 상처가 생긴 상태로 제압당해 내 근처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아... 하아...!"
해냈다.
아무리 극초반 임무라고는 하지만, 원래는 마주치는 순간 무조건 도망쳐야하는 상대들을 나 혼자서 일곱이나 쓰러뜨린 것이다.
그것도 오필리아나 이노리, 혹은 마리안의 개입 없이 나 혼자서 이뤄낸 전공이라 도적단을 전부 제압하는 순간 몸에서 느껴지는 성취감에 하반신이 발기할 지경이었다.
"푸... 크흐흡...!"
이곳에서 제압당한 여도적들을 상대로 이 기쁨을 풀어도 되지만, 어차피 돌아가서 이노리의 도움을 받거나 아니면 마리안을 찾아가서 다시 부탁해도 되기 때문에 아껴두기로 했다.
사정량은 한정되어 있었으니 이런 잡몹들에게 써봐야 개인적인 만족감만 있지 이득되는 것이 없으니까.
'참... 성인모드 치고는 꽤나 귀찮게 만들었단 말이지'
물론 나중에 성기레벨이 올라간다면 정액재생력도 올라가서 빨리빨리 차오를 수도 있지만 레벨이 다운되어 1로 돌아간 지금으로써는 정력을 꽤나 신중하게 소비해야만 했다.
게다가 이번 임무가 끝나면 마리안을 찾아가서 [검의 명가]특성을 더 올릴 생각이기도 했고.
'참... 거시기도 바쁘게 써야하는구만'
"성공했구만! 역시 아카데미 학생들은 다들 실력이 좋다니까."
방금 전까지는 겁먹어서 한참 도망갔다가 뻔뻔하게 돌아온 마부의 말에 나는 피식하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도적단을 제압했으니 이번 임무는 끝이네. 예상했던 지역이 아니지만, 뭐 결과만 놓고보면 상관이 없겠지."
도적단의 근거지 소탕도 아니고 눈 앞에 보이는 도적들만 잡으면 되는 퀘스트라 여기서 종결판결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잠시만 기다리게. 포박용 밧줄을 가지고 올 테니."
인간형 적들은 죽이거나 포박해야지 퀘스트 완료를 할 수 있었는데 마부도 나와 같이 제압된 도적들을 묶는데, 마부가 묶게 되면 평범하게 손목을 묶고 몸을 감싸서 포박된 모습을 보인다면 내가 밧줄을 드니까 이상한 가이드라인이 뜬다.
여체의 가슴과 고간을 자극하도록 만들어지는 그 특유의 묶기 방법 말이다.
"......"
나는 깔끔하게 가이드라인을 무시하고 내가 알고 있는 포박법으로 손목을 묶고 허리에 줄을 말아서 제압된 도적들을 포박했다.
안 그래도 전투 후의 흥분으로 인해 발기된 상태인데 여기서 그런 모습으로 묶었다가는 100% 성인모드를 발동시킬 것 같거든.
'양산형 여도적 정도야 언제라도 구할 수 있으니까......'
최소한 허접한 특성이라도 있는 여도적을 상대로 써도 되니 이런 잡몹들에게는 굳이 필요가 없겠지.
"됐네. 이제 아카데미로 돌아가겠는가?"
"그러죠."
도적들을 근처의 실습 담당 호위들에게 넘기고 마차를 타고 돌아가던 중이었다.
피유우우웅!
시끄러운 파공음과 함께 하늘에 붉은 색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폭죽이 떠올랐는데, 저건 내가 셀레스티얼 아카데미 게임을 하면서 이벤트로 몇 번 보았던 모습이었다.
'긴급구조신호!'
누군가가 실습시에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의 힘으로 해결이 안 되는 상황에서만 발동하는 구조신호였다.
아카데미 뱃지를 뜯어서 반으로 쪼개면 자동으로 발동되는데 전투복장으로 갈아입고 나갈지라도 아카데미 뱃지만은 따로 챙겨가는 이유가 바로 저것이었다.
"허허, 누군가 실습 실패한 모양이구만."
가까운 곳에서 터져서 눈이 아프기는 했지만, 나는 하늘에서 타오르는 붉은 불꽃을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불꽃 옆에 설명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구조신호 : 앤
앤이라면 마리안과 같이 실습을 나간 E반의 여학생이었다.
'마리안과 앤의 임무... 숲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몬스터 퇴치'
이 임무는 보통 몬스터 자체가 없이 착각이었다거나 약한 몬스터인 경우가 많았지만 아주 가끔 재수없으면 현재 수준으로 감당 안 되는 몬스터가 등장해서 캐릭터를 요양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담당자들이 알아서 출동할테니 우리는 돌아... 어? 자네 어디가는가!"
앞뒤 가릴 것도 없이 나는 구조신호가 쏘아진 곳을 향해 숲을 가로지르며 뛰기 시작했다.
'게임에서는 설정상 바로 옆이라 할지라도 해당 임무 수행시에 옆으로 넘어갈 수 없었지만......!'
내가 게임세계에 들어온 이후로는 그렇지 않았다.
앨리스의 별의 마법이 늑대굴만이 아니라 산적소굴까지 박살낸 것처럼, 나도 바로 근처에 있으면 물리적으로 달려가서 마리안의 임무에 난입할 수 있었다.
일부러 눈을 가늘게 뜨고 상태창을 최대한 멀리서부터 찾으려 하는데 5분 정도를 죽어라 달리고 나서야 겨우 하나의 글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수습기사]
황금색이 F반 학생들에게 주어진 유니크 특성, 그 이후 붉은색, 파란색, 초록색 순서대로 특성의 희귀도가 나타난다.
파란색으로 떠 있는 앤의 글귀를 발견한 나는 방향을 바꾸어 그곳을 향해 달려갔고, 그 자리에는 부상을 입지도 않고 멀쩡한 상태의 앤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지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앤!!"
내가 이름을 부르며 난입하자 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권총을 나에게 들이밀었으나, 내가 입은 아카데미 정복을 보고는 다급하게 총구를 위로 올렸다.
"누구...? 아!"
같은 3급 지역에서 2년 동안 익숙해진 얼굴이 아니라 처음 보는 얼굴이라 그런지 앤은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나에게 물어보았지만 내 얼굴이 특색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마리안에게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바로 내 정체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마리안은?"
"투명한 몬스터에게 잡혀갔어!"
투명화? 초반 지역에서 그런 상급 몬스터가 있을 리 없는데?
"정체불명의 몬스터를 찾으라고 해서 왔는데 못 찾아서 주변을 순찰하고 있었을 뿐이야. 그런데 갑자기 마리안의 몸 상태가 안 좋아지더니 투명한 무언가에게 공격을 받아서 같이 사라져버렸어."
"앤은?"
앤은 습격받았다고 치기에는 옷차림도 멀쩡하고 생명력도 최대치였다.
호감도가 없어서 권총에 총탄이 얼마 남아있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총구에서 화약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을 때 전투를 벌이지 않은 셈이다.
"나는... 모르겠어. 마리안은 자꾸 공격받는데 그 투명한 몬스터가 나는 전혀 손대지 않아서 당황했는데 그대로 마리안이 사라지고 어찌할 줄 몰라서..."
앤에게는 하트 게이지가 표시되지 않았다.
성인모드가 적용되지 않았다는 얘기인데, 그렇다는 것은......
'성인모드 특유의 몬스터인가?'
성인모드가 적용된 몬스터나 캐릭터의 변화점은 성인모드가 해방되지 않은 캐릭터에게 보이지 않는다.
즉, 투명한 몬스터가 아니라 성인모드가 적용된 몬스터였기 때문에 앤은 볼 수도 건드려지지도 않은 것이라면......
"그곳이 어디야?"
"이쪽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바닥이 질퍽한 곳이야. 그냥 흙냄새나는 물이라서 지하수라도 터진 줄 알고 방심하고 있었는데..."
앤에게 안내를 받아 들어간 장소에는 코가 아려올 정도의 짙은 체액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이대로 호위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돌입하는 것이지만...'
머리는 이성적으로 판단하라고 하지만 내 가슴은 지금 끌려간 마리안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성인모드가 적용된 몬스터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생각이 안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미쳤지."
목검이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을 하면서 나는 앤을 두고 질척질척한 체액의 늪으로 뛰어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