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양호실은 그런 곳이 아니야(01)
* * *
"오늘따라 아렌이 비틀비틀하네~"
어쩐지 아까부터 나한테서 뒤쳐진다 싶었는데 오필리아가 내 걸음걸이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확인하고 있던 모양이다.
"어디서 다리를 다치기라도 한 거야?"
문제가 있기는 하다.
정확히는 다리의 문제가 아니라 고간의 문제지만.
"아니. 그냥 조금 힘이 없어서..."
"흐응... 어제 수업 듣고서 개인연습을 열심히 했구나?"
'다른 의미의 수련을 열심히 하기는 했지...'
아침부터 이노리에게 쪽 뽑힌 덕분에 후들거리는 것이지만 성인모드가 해금되지 않은 오필리아는 내가 왜 비틀거리는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 F반 안에서 성인모드가 해금되어 있는 캐릭터는 나, 마리안, 이노리, 사일리안이고 이틀 뒤에는 홀리오가 성인모드 해금될 텐데.
'사내자식이 해금되거나 말거나...'
지금은 다들 씻고 나올 때 속옷을 입고 돌아다니는데 덜렁거리는 녀석이 하나 추가되는게 좀 눈이 아프겠지만, 다행히 홀리오는 기본 개념을 알고 있는 모범생인지라 성인모드가 해금되어도 덜렁덜렁하는 일은 없겠지.
드르륵.
문을 열고 평소와 똑같이 교실에 들어서려고 하니 총 인원이 변경되어 있었다.
원래 인원이 22명, 거기에 나와 오필리아가 전학오면서 24명으로 늘어난 인원이 지금은 최대인원 26명으로 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아, 신전 개방의 시기인가?'
그러고 보니 첫 번째 실습이 끝나고 두 번째 실습을 나가기 전의 중간에 신전 기능이 개방된다는 것이 기억났다.
신전의 기능은 부상을 입은 인원의 회복 및 중독치료, 상급 포션의 판매인데 어차피 초반에는 약초를 쳐발라서 생명력을 채우면 그만이었고 유용한 기능이라고 한다면 5일 정도 입원해 있으면 모든 부상이 회복되는 정도?
'지금까지야 여유롭게 넘겼지만 이제부터 고난이도의 의뢰를 수행하려면 부상도 감수해야 될 테니까...'
후들거리는 다리로 비틀거리며 내 자리로 들어서니 그림자 인법으로 몸을 숨긴 채 대기중이던 이노리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아침에 나에게서 한 발 뽑아줄 때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막상 하고 나서 다시 얼굴을 보니 새삼스럽게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면 남은 두 명의 F반 학생도 돌아오겠구만'
둘 다 신전에 관련된 캐릭터들이었다.
남자 캐릭터는 에릭. 특성은 [ADK]인데 Anti Divine Knight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신성력을 사용하는 캐릭터의 힘을 역이용하고 홀리 오오라에 의한 방어강화를 무시하고 방어무시 공격을 가하는 특성이다.
여성 캐릭터는 멜리사, 특성은 [골렘메이커]로써 몸이 약해서 신전에 요양차 입원해 있다가 다시 아카데미 내부에 신전이 열리게 되면서 요양과 등교를 반복하는 병약 캐릭터다.
둘 다 캐릭터성은 신선하지만 특성이 별로라서...
'[ADK]는 아예 반역루트 아니면 쓸 일이 없으니'
반역루트로 간다면야 신전과도 싸우니까 미친 방어력을 자랑하는 신전기사를 해치울 에릭이 필수라고 하지만 아카데미 루트에서는 그냥 자리만 차지하는 평범한 캐릭터.
멜리사는 그냥 어느 루트를 가도 별로 쓸모가 없었다. [골렘메이커]라는 특성은 사실 제대로 된 보정이 없이 골렘 2호라는 로봇형 히로인을 완성시켜주기 위한 특성에 가까우니까.
오죽했으면 별명이 '멜리사랑 골렘 2호 두 명을 합쳐서 하나짜리 히로인'이라고 하겠는가.
"자, 자. 다들 조용히~"
카렌 선생님이 안으로 들어오면서 조용히 하라 했으나 F반 학생들이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카렌 선생님도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익숙한지 자신의 가슴골 사이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들며 아침조회를 시작했다.
"오늘 오전에는 간단하게 이론수업을 거치고 오후에 있을 검술반은 하이디 선생님의 개인사정으로 인해서 취소되었으니까 미리 알아두고 검술반 학생들은 휴식을 취하거나 2급 지역에 개별적으로 연락해서 수업을 들으렴."
그 말에 마리안과 사일리안, 케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범생이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저 세 명도 D반의 검술반에 합류하려다가 쫓겨난 경험이 있으니 실질적으로 오늘 검술반 수업은 취소나 다름이 없었다.
'쩝. 운이 안 좋구만'
가끔씩 랜덤패턴으로 선생님들 개인사정으로 인해서 수업이 취소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검술반이 걸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있던 사고로 신전의 개방이 조금 늦어졌는데, 다행히 내부수리가 끝나서 오늘 오후부터는 들어갈 수 있으니까 그렇게 알아두도록 하렴."
오필리아는 그 때의 암살사건이 떠오르는지 살짝 표정이 굳었지만, 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무슨 일이냐는 듯이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 공백기간 동안에 다친 사람 있으면 미리 다녀오도록 하고. 참, 그리고 2학년 시절에 신전을 담당하시던 카알 사제님을 습격해서 근신처분을 받았던 에릭이 오늘로 다시 수업에 복귀하게 되었으니 모두 박수~"
하지만 카렌 선생님의 기대와는 반대로 학생들 대부분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사정을 모르는 오필리아랑 적당히 그녀와 분위기를 맞추는 나만 박수를 치고 있을 뿐.
이런 일에는 온전히 따라주는 마리안조차 약간 꺼림직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케이는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에릭이 복귀하는 지금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에릭~"
카렌 선생님도 이런 분위기를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에릭을 부른다.
하지만 나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
'튀었겠지'
1회차에서도 이렇게 기대시켜 놓고서는 그냥 도망가거든.
기숙사에도 들어오지 않고 겉도는 녀석이라 1회차 때에는 신경쓰지 않고 있다가 두 번인가 얼굴 마주치고 출연이 종료된 캐릭터였다.
"그리고 멜리사도 신전이 재개방하면서 양호실에서 쉬고 있으니까 다들 병문안 한 번씩 다녀오렴! 이걸로 조회 끝!"
카렌 선생님은 활기찬 말을 마지막으로 교실을 나갔다.
"마법반 수업은요?"
다급하게 데이츠가 손을 들자 카렌 선생님이 교실 내부로 고개만 빼꼼 내밀고서 답변해 주었다.
"잠깐만 물어볼게. 응... 오늘은 카렌 선생님도 쉬고 싶거든? 그러니까 오늘은 자습!"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는 연기를 하면서 도망쳐버리는 카렌 선생님을 보면서 앨리스와 데이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걸로 마법반 수업도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숙사에서 쉴 걸이라고 투덜대는 사일리안을 보면서 전체적으로 반을 둘러보니 갑작스러운 자유시간으로 인해 다들 할 일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오필리아에게 다가온 세리와 몇 명의 여학생들은 이렇게 시간이 남는거, 신전에 가서 멜리사를 만나보자고 의기투합하기 시작했다.
마리안도 홀리오와 대화를 나누더니 반장으로써 멜리사의 상태를 확인하러 가려는 모양이었고.
"아렌? 혹시 같이..."
"그래. 가자."
뭐 멜리사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신전에서의 기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확인하고 싶었다.
게임에서야 5일간 요양시키면 모든 병이 회복된다고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실제로 치료를 하는 것인지, 기간이 동일하게 적용되는지도 모르겠고, 마리안도 애정도는 높지만 호감도가 낮은 상황이라 이런 이벤트로 조금씩 호감도도 올려둬야 나중에 정식으로 파티에 들어오지.
그리고 내가 가니까 자연스럽게 이노리도 따라오면서 우리 F반 인원 총 6명(나, 오필리아, 마리안, 이노리, 세리, 홀리오)이 신전으로 향했다.
마리안은 남들 앞이라고 최대한 자제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방향이 같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곧바로 홀리오와 세리를 버리고 나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보니까.
"같이 갈까?"
지난번 이후 안정된 것인지 다섯번째 하트가 10%정도 남아있는 마리안이 나에게 다가오며 손을 잡았는데, 그 순간 오필리아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내 몸을 낚아챘다.
"마리안? 언제부터 아렌과 그렇게 친했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게 거짓이 아니라는게 놀랍다.
시작부터 애정도가 버그성으로 증가하기는 했지만...
'사실 호감도적으로 친한 것은 아니고 애정도가 높을 뿐인데...'
"흥! 나는 더 전부터 알고 있었거든? 아렌은 이쪽으로 와!"
아예 오필리아가 마리안을 밀어내면서 나를 자신쪽으로 끌어당기는데, 평소라면 마리안이 발끈하며 나를 잡아당기거나 오필리아와 기싸움을 해야하지만 오늘따라 싱긋 웃으면서 내 손을 놓아서 오필리아에게 보내주었다.
'응? 뭐지?'
이전에 나에게 집착하던 것과는 다르게 조금 여유가 생긴 듯한 반응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좀 안정이 된 건가?'
다른 학생들 앞에서 이상할 정도로 폭주하며 나를 습격하던 모습보다는 훨씬 나았다.
물론 그러면서도 오필리아가 잡고 있는 내 손을 눈에서 레이져가 나오면 지져버릴 기세로 노려보기는 했고 계속해서 [감금욕망]이 반짝거리고 있기는 했지만 이전처럼 미친 듯이 깜빡이는게 아니라 조금씩 잔잔하게 깜빡거리는 수준이라.
'자극받고 있지만 참을 수는 있는 수준인가?'
어찌되었거나 꽤나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홀리오... 이상하게 주변이 차갑지 않아?"
"그러게... 왜 이렇게 싸늘한 기분이 들지."
막상 그 옆에 있는 홀리오와 세리는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지만.
그렇게 오필리아의 손을 잡고 신전에 도착했을 때.
"아... 이건..."
"......"
신전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와 마리안은 입구에서 말문이 막힌 채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왜 그래?"
"아니 오필리아. 뭔가 이상한거 못 느껴?"
"이상한거? 그냥 신전이잖아? 저기에 여신상도 있고."
그래 여신상이 있기는 했다.
원래는 몸을 가리는 길다란 천옷을 몸에 두르고 있어야 하는 여신상인데, 그 천옷 부분이 없이 마치 성 박물관에 비치되어 있는 조각상처럼 알몸이라서 문제지.
"......"
마리안도 얼굴에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성인모드가 해금되어야만 이 진정한 모습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니 뭐... 그럴 수 있지?'
다행히도 다른 시설은 큰 변화가 없이 돌로 만들어진 여신상만 홀라당 벗겨져 있었고 왠지 옷을 입었을 때보다 가슴이 커진 느낌이지만.
"마리안~ 아렌~ 빨리 와~ 멜리사가 기다리고 있다고?"
'성인모드에서 이 정도면 얌전한 거니까......'
먼저 들어가면서 우리를 부르는 세리를 보면서 나와 마리안은 잠시 서로를 마주본 뒤 긴장한 상태로 안에 들어갔다.
"어서오시지요. F반의 학생분들. 새롭게 단장한 신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원래 이곳에서 우리를 맞이해주는 NPC는 선생님들과 비슷한 20대 후반 정도의 약간 굳어있는 표정을 하고 있는 여성 성직자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녀도 성인이라 성인모드가 적용되는 대상이었다.
기본적으로는 흔히 생각하는 판타지 속 여성 성직자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허벅지를 강조하듯이 치마의 옆트임이 심하게 내려와 있었고 하얀 스타킹도 투명도가 올라가 있어서 땀에 젖은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제외하면 성인모드가 적용되어 조금만 몸을 숙여도 유륜이 노출되는 카렌 선생님이나 다른 NPC들에 비하면 정숙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가리고 있다고 해서 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살갗은 가렸지만 오히려 몸매가 더 도드라져 올라오면서 옷을 입은 것인지 몸 위에 색칠을 해놓은 것인지 헷갈릴 수준이었으니까.
그리고 당연하지만 브래지어는 없어 보여서 옷 위로 살짝 도드라지는 부위가...
'크흠! 그래, 성인모드니까...'
"무슨 일로 오셨나요?"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하는 검푸른 머리색의 여사제의 머리 위에 떠오른 특성을 살펴보았다.
히로인이라고 할 수 있는 F반 학생들에게는 개인의 특성이 나타나지만, 다른 NPC들에게는 '산적대장 윌리엄'처럼 자신의 직책을 소개하는 글씨가 드러나는 곳이었다.
[의무교미사 베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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