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그럴 때는 문을 잘 잠갔어야지(03)
* * *
우리 둘 다 잠시 그대로 멈춰있었다.
아까부터 들썩거리던 별의 마법사라는 칭호, 후끈한 열기가 흘러나오는 천막.
약간 비릿하게 느껴지면서 내 신경을 자극하는 그녀의 체취.
그리고 그 안에서 치마 속으로 손을 넣고 있는 앨리스는 자신의 다리 사이에 손가락을 대고 있는 그 상태로 마비된 것처럼 굳어있었다.
펄럭
지주핀이 하나 뽑혀버리자 강풍을 버티지 못하고 천막이 다 벗겨지면서 벌러덩 뒤집혔지만 그 안에 있는 앨리스나 밖에 있는 나나 천막 따위는 신경쓰지 못할 정도로 서로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거... 그거지?'
내가 너무 안 좋은 타이밍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아니면 더럽게 좋은 타이밍에 찾아왔거나.
얼굴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땀방울과 함께 앨리스의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무언가 휙휙 변하는데, 중간중간에 그녀의 표정이 사납게 변하는 모습을 보니 나를 죽여서 살인멸구를 할까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고속사고로 인해 빠르게 움직이는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특유의 골뱅이 눈동자를 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전체적으로 크게 놀라서 굳어버린 모양이었다.
'사고의 속도가 빠르면 뭐하나'
몇 번을 생각해도 빠져나갈 방법이 없으면 그냥 계속해서 괴로워할 뿐이라는 걸 앨리스의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서로간에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서로 부끄럽지만 차마 누가 먼저 돌리지 못해 마주하고 있는 동안,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치태를 보면서 발기하고 있는 작은 아렌의 방향을 돌려두었다.
"......"
부르르르...
결국에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한 앨리스는 울먹거리면서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면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전학생군은... 그... 때 보았던 것처럼... 나에게 야한 일을 시킬 생각이지...?"
그녀의 얼굴 옆에서 망상가가 계속해서 빛나고 있었다.
"어떤 일?"
정말 순수하게 무슨 얘기 하는지 머리가 멈춰버려서 물어본 거였지만, 앨리스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입술을 꽉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앨리스의 입으로 야한 말을... 시키려고..."
띠링
그녀는 울먹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애정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벌써 2번째 하트를 다 채우고 3번째 하트의 밑바닥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는데, 자신의 오므린 허벅지 사이에 낀 손을 빼지도 못한 채로 내 눈치만 보면서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모습이 은근히 야해서 나도 꽤나 곤란한 지경이었다.
꿀꺽.
서로 군침을 삼키면서 몇 번이고 말을 못하고 있다가, 일단은 이런 상황을 만든 내가 먼저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에 품으로 손을 넣었다.
움찔.
그러자 앨리스가 눈에 띄게 화들짝 놀라면서 자신의 몸을 가리려 했지만.
"나는 단지 포인트를 나눠주러 왔을 뿐이야."
"......"
내 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포인트 주머니를 보면서 예상 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음... 노예화의 환단을 꺼내려 한다 생각한 건가?'
그건 제압상태가 아니라면 못 먹인다. 그리고 그건 정말 최후의 수단으로 써야한다.
'초급 노예 1호로 실험해보니 꽤나 버그가 많이 터지는 것 같거든'
물론 그거야 윌리엄이 원래는 남캐인데 적당히 여도적의 모습으로 변경당한 상태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 때 우... 아니, 내 뒤를 따라왔지?"
앨리스 입장에서는 나로 변장한 이노리를 보고 쫓아다녔다가 중간에 이노리가 변장을 풀고 나서 내 뒤를 따라왔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내 뒤를 따라온 셈이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지만 도움을 줬으니 네 몫은 나눠줘야지."
물론 본인이 별의 마법을 시전한 순간 자신이 몰래 따라왔다는 것을 숨기는 건 포기했겠지만, 이렇게 대놓고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앨리스는 당황하고 있었다.
"여기에 두고 갈게. 그럼 좋은 시간... 보내."
나는 날려간 천막의 끈을 붙잡아서 다시 지주핀을 새로 박아주면서 옥상을 떠나려 했다.
띠링
앨리스의 호감도가 '불편'단계가 되었습니다
'와... 정말 호감도 올리기 쉽네'
달빛에 비춰진 천막 안에서 내가 있는 방향을 빼꼼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지만, 나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은 채 옥상에서 물러났다.
지이익
마지막으로 마법진을 가리고 있던 신발을 회수하면서 옥상을 내려가는데, 그 동안에도 앨리스는 계속해서 내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일단은 공략할 상태로는 만들어뒀다는 것에 만족하자'
호감도에 비해서 애정도가 좀 많이 오른거 같긴 한데, 그건 마리안도 그러니까 넘어가도록 하고.
* * *
포인트를 정산받고 다음 날, 일요일은 다들 여독에 못이겨서 정신없이 잠들었다.
우리 임무는 빨리 끝났지만 나중에는 1주일을 통으로 쓰는 임무도 생기기 때문에 주말에 출장갔다가 다음주에 돌아올 때까지는 시스템적으로 휴식기였다.
그 동안은 수업도 없이 휴식시간이 주어진다.
일요일을 푹 쉬고 월요일 오전이 되자 남자기숙사의 모든 학생들이 모였고 기숙사 시설 업그레이드를 위한 회의가 시작되었다.
게임에서도 첫 임무가 끝나면 소모된 아이템을 구매하거나 무기를 바꾸고 남는 돈으로 시설을 업그레이드 하게된다.
일단 소모품은 별로 필요가 없었고, 임무를 수행하러 가면 기본적으로 약초나 포션을 주기 때문에 급하게 도구가 필요한 일도 없었으며 이노리만 추가되어 있어도 한 동안 도구 없이 임무수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남는 돈을 모조리 시설개선에 때려넣었다.
"남자기숙사 수리. 500포인트. F반 식당 메뉴개선, 300포인트."
1000포인트를 받았지만 시설 업그레이드 두 개를 써버리니 벌써부터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F반 식당 메뉴개선 같은 경우 식재료를 납품하는 상단을 재선정하는 경우였는데 내가 포인트를 투자해서 새로운 상단을 제안하자 데이츠의 호감도가 올라갔다.
짬처리 수준의 음식물에서 좀 구린 음식 정도로 올라갔는데, 이 정도만 해도 제대로 손질도 안 된 내장요리만 먹던 상황에서 조금 질긴 새구이를 먹는 수준이라면 꽤나 개선된 편이 아닐까?
남자기숙사 수리 같은 경우는 셀레스티얼 아카데미 게임화면에서는 뚝딱거리면서 금방 끝났지만 막상 실제로 겪어보니 의외의 방식으로 수리가 되고 있었다.
깡. 깡. 깡.
큰 구멍이나 건물 자체의 결함은 고용한 목수가 고치고 나머지는 각자 재료를 들고가서 자기 방을 고치는 식으로.
덕분에 나도 나무판자 몇 개와 못, 그리고 망치를 받아서 내 방에 들어와 열심히 수리를 하고 있었다.
"으아악!"
민첩성이 20은 넘겼기 때문에 데이츠처럼 내 손가락을 찧어버리는 실수는 나오지 않았다.
관련된 기술도 없었고 민첩성이 낮아서 정교한 작업을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중간에 판자를 삐뚤게 박아버려서 문을 못 열게 된다던가, 바닥에 생긴 구멍을 메우려고 하다가 주변을 부숴서 구멍을 더 키운다던가 하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끄으응...... 엿차!"
양손으로 판자를 잡아당겨서 겨우 뜯어내고 나서야 문을 다시 열고닫을 수 있었다.
'하... 이걸 언제 다 하냐'
문 옆에 난 구멍하나 메우는데 이 개고생을 하는데 다른 건 어떻게 메우냐 싶었다.
차라리 이노리를 불러서 부탁할까도 생각했지만...
"아니, 남자는 목공! 목공하면 남자지!"
솔직히 말해서 능력치라도 높은 이노리가 더 잘할 것 같기는 한데, 일단은 내가 스스로 개조하고 싶었다.
퍼어어억!
"케이이이이이!!"
"내 잘못이 아니다. 벽이 너무 약하다."
"넌 그냥 가만히 있어!"
"남자면 목공을..."
"그 입도 닥쳐!!"
크게 구멍이 뚫린 부분이나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부분의 수리를 맡고 있는 건축전문가의 아들 갈렌이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면서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민첩성이 바닥에 가까운 마법사형 캐릭터나 케이처럼 힘만 무식하게 세서 수리가 아니라 철거작업을 수행하는 방마다 찾아가서 대신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 정도면 그래도 중간은 간다고.
"휴우...!"
이제 욕실도 어느 정도 개선될 것이니 최소한 몸에 살얼음이 달라붙은 채 밖으로 나오지는 않겠지.
게다가 날씨도 더워질 것이라서 좀 시원해도 씻기에 편해질 것이고.
'이제부터는 여자기숙사랑 냉수 가지고 경쟁하는거 아닌가 몰라'
확실히 다른 친구들의 방보다는 내 방이 멀쩡해서 몇 군데만 메우니 수리가 완료되었다.
"오, 아렌도 끝났나?"
"아니. 조금 더 해야 하는데 잠깐 쉬러 나왔지. 사일리안은 벌써 끝났어?"
"그럼."
그렇게 말하면서 사일리안은 자기 방을 보여줬는데 오히려 이전보다 구멍이 더 늘어있는 모양이었다.
"수리가 하나도 안 됐잖아?"
"수리가 아니라 개조다."
사일리안이 웃는 얼굴로 슬쩍 내 귀에 속삭였다.
"벽에 숨겨온 술병을 숨기기 좋도록 개조했지. 총 128개의 와인병을 수납 가능한 정도지."
'미친 놈이다'
몇 개 숨기는 것도 아니고 128병...
갈렌의 속이 터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은데, 오늘 저녁에 뒤통수에 망치와 못이 꽂힌 채로 암살당해도 할 말 없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복도라던가 휴게실 같은 곳은 갈렌이 직접 손을 써서 수리하고 있었는데 판자의 색이 조금 다를 뿐 완벽하게 구멍이 메워지고 이전처럼 판자가 덜렁거리는 일도 없어서 역시 전문가가 손을 대니 다르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렌은 좀 기다려. 대충 막아놓으면 내가 가서 정리해줄 테니... 끄아아악! 케이이이이이!!"
전체적으로 자기가 수리를 하고 갈렌이 마무리를 지어주는 형식인데, 아무래도 케이가 또 시설을 부숴서 갈렌이 눈을 뒤집고 달려드는 모습을 보니 오늘 저녁까지 내 방에 올 일은 없어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렌, 네 방에도 보조창고를 만들어도 될까? 되겠지? 우리는 같은 공범이잖아?"
"꺼져."
결국 내 방에도 구멍을 뚫어 놓고 술을 넣어놓겠다는 말인데 망치를 휘둘러서 사일리안을 쫓아낸 후 방금 전에 수리한 문을 닫아버렸다.
"하... 뭐 갈렌이 오기 전까지 대강 끝내놓으면 알아서 다듬어주겠지."
그래서 일단 판자를 덧댄다는 생각으로 대충 못질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벽에 생긴 구멍을 하나하나 메우고 있는데, 내 침대의 머리맡에 생긴 구멍을 보고 그곳에 판자를 덧댄 뒤 망치를 두들겼다.
찌잉!
앎쟑태?홁 방을 해금하겠나?
포인트 100 필요 Y/N
"......"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누군가 찾아올 수 있는지 시선을 집중해서 상태창이 이 방에서 멀리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다시 한번 망치를 두들겼다.
포인트가 100 소모되었습니다
"으어!"
망치로 두들기는 순간 갑자기 벽이 열리며, 기숙사 방과 비슷하지만 침대나 다른 가구가 하나도 없는 방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창고 같은 것인가? 해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니 한쪽 벽에 지난번 노예화의 환단을 구체화시킬 때와 같이 반투명한 모습의 물건들이 띄워져 있었다.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이지?'
앉기에는 불편할 정도로 뾰족해 보이는 목마라거나, 1인용 감옥이라거나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둘 수 있는 받침대라거나 여러가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의 반투명한 모습이 보였다.
"아...!"
여기가 바로 조교 기능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인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