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그럴 때는 문을 잘 잠갔어야지(01)
* * *
내 눈 앞에 떠있는 반투명한 빛의 구슬을 잡으려고 하니 색이 진해지면서 실체화되려 하는데, 손을 떼니 다시 투명하게 흐려지기 시작한다.
다른건 다 좋은데 3/3이라는 수치가 눈에 걸린다.
'횟수제한이 있다는 건가?'
눈 앞에 이런 기능이 떠오른 것까지는 좋았지만 횟수제한이 있다는 점에서 지금 이걸 써도 되는가 망설여지기는 하는데...
"......써보자."
이 기능을 확인해봐야만 했다.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쓴다 할지라도 초급 노예화의 환단은 레벨 15까지라는 제한이 있었다.
다음 임무에서부터 보스 몬스터가 레벨 15를 찍고 나오고 친구들은 평균 10을 넘기며 그 다음으로 들어가면 약간만 경험치나 훈련을 몰아주면 15를 넘길 수 있으니 조금만 지나면 초급 노예화의 환단은 쓸 수가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당장 지금 눈 앞에 있는 산적두목 윌리엄의 레벨이 15였고 도주한 다음에는 레벨이 18이 되며, 세 번째로 만나면 레벨 25를 찍고 나온다.
나중에 중급이건 상급이건 나왔을 때 어떤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지 확인해봐야 하기 때문에, 게다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레벨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서 제대로 쓸 수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나는 허공에 생겨난 빛의 구슬을 잡아챘다.
초급 노예화의 환단을 획득하였습니다 –
환단을 획득했다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빛의 구슬이 형상화되면서 거무튀튀한 모양의 동그란 환약이 손에 생성되었는데, 나는 이제 1분도 남지 않은 제압시간이 끝나기 전에 빨리 이걸 먹여야 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먹이지?'
기절한 사람에게 약을 먹일 때에는 먹이려는 사람이 입으로 씹어서 전해주는 방식으로 해야하나 싶었지만 이걸 먹었다가 내가 내 자신의 노예가 되는 버그가 터지면 망한다는 생각에 내 입에는 절대 넣지 않기로 결심했다.
'모르겠다. 그런 고증에 신경쓰는 게임은 아니니까'
전투중에 약초를 99개 먹어도 풀독 안 오르고 포션만 99병을 마셔도 화장실 안 가는 게임인데 뭐.
'그리고 잘못되면 내 몸이야? 윌리엄 몸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윌리엄의 입에 환약을 밀어넣었다.
"우응......"
내가 억지로 입을 벌리자 작은 신음소리를 내는데, 묘하게 색기 있는 음성이라 좀 두근거렸다.
다행히 환약을 씹게 해줄 필요가 없이 입술로 들어가는 순간 사르르 녹으며 몸에 흡수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몸 속에 녹은 환약이 흡수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윌리엄의 제압이 풀려났다.
0으로 고정되어 있던 생명력이 1로 변하는 것과 함께 윌리엄이 정신을 차리며 자신의 머리를 붙잡았다.
"끄으응... 머리야. 어제 술을 너무 진탕 퍼먹었나... 야 이 놈들아! 두목님 일어났는데 뭐라도 가져오지 않고 뭐하냐!"
분명히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듣기 좋은 고음의 목소리였는데 대사 패턴은 키가 2m짜리 산적두목 윌리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갑자기 불이 번쩍하더니 정신을 잃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주변을 둘러보던 윌리엄의 눈동자가 나에게 향한다.
"치, 침입자다!"
제대로 일어날 수 있도록 한 발자국 물러나주니 윌리엄이 벌떡 일어나면서 나뭇조각과 먼지가 떨어지며 제대로 된 복장이 드러났다.
'지금 생각해도 여도적 복장은 미친 복장이구만'
원래도 몸에 달라붙고 배꼽은 노출하는 야릇한 복장인데, 원래 입고다니는 가죽바지가 지금은 너덜너덜하게 찢겨져 있으니 오히려 몸을 강조하는 이중구조의 속옷처럼 되어버렸다.
게다가 성인모드가 깔려있는데다가 성인취급을 받아서 원래 가슴을 가려야 하는 부분이 없으니 찢어진 천 사이로 슬쩍슬쩍 흔들리는 덩어리가 보이는데, 원본이 윌리엄이라는 걸 알아서 그렇지 몰랐다면 나도 혹할 정도의 야릇한 모양새였다.
"헤헤... 형씨, 여기까지 오다니 꽤 실력이 있나봐?"
윌리엄은 바로 정해진 패턴대로 자신의 무기인 거대한 철퇴를 들어올리더니 주변을 돌아보는데, 자신의 수하들은 아직까지 제압 상태에서 풀리지 않은 모습을 보고 슬그머니 자신의 퇴로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어이쿠, 부하놈들 꼬락서니를 보니 이거 아주 강한 분들이 오셨구만. 그런데 이거 어쩌지? 이 몸은 상대하기 쉽지 않을 걸?"
확실한 도주대사다.
게다가 슬쩍 자세를 낮추는 척 하면서 발 끝으로 바닥에 설치된 비밀의 고리를 잡아당기려 하면서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연막가루를 꺼내려한다.
'어떻게 하지?'
여기서 도주해버리면 다음 임무 때 다시 찾아가서 제압해야 한다.
어차피 윌리엄을 데려올 생각도 없었으니 깔끔하게 지금 처리해서 보상금을 받을까 하면서 목검에 손을 얹는 순간.
"하윽!"
갑자기 윌리엄이 철퇴를 떨어뜨리며 주저앉았다.
"아... 아아...!"
훤히 드러난 자신의 배를 감싸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은 윌리엄의 상태를 자세히 관찰한다.
이제 슬슬 노예화의 환단이 효과를 보이고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배... 배가... 갑자기 왜 이렇게...!"
방금 전까지는 매끈했던 복부에 불타오르는 것처럼 새빨간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지기 시작하는데, 배꼽 아래쪽으로 하트 형상으로 문신이 새겨지고 있었다.
"타들어가는 것만 같아......"
놀라운 점은 고통어린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눈동자가 마리안이 폭주했을 때와 비슷하게 선명한 하트가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으... 으으윽...! 형씨, 형씨! 우리 말로 하지! 조금만 시간을... 그래, 내가 구해둔 보물을 줄..."
덜컹!
고통어린 표정을 참아가면서 윌리엄은 발 끝에 걸쳐두었던 고리를 잡아당겨 비밀통로의 문을 여는데, 그 순간 특유의 사악한 웃음을 지으면서 비밀통로를 향해 뛰어들려 했다.
콰앙!
"끼야아아악!!"
물론 미리 대비하고 있던 내가 목검으로 바닥을 내려치자 비밀통로의 입구 자체가 무너져 내리면서 무효화 되었지만.
'저 안으로 들어가면 전투이탈 처리가 되어서 상태창을 확인할 수 없을 테니'
"으... 으그극..."
자신의 배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필사적으로 참으려 했지만 윌리엄의 배에는 이미 하트 안쪽에 두 번째 하트가 새겨지고 있었다.
"이... 이렇게 나오시겠다? 그렇다면... 이 놈!!"
전투시의 대사가 튀어나왔지만 윌리엄은 막상 공격도 못 하고, 철퇴를 들어올리지도 못한 채 다리에 힘이 풀린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왜 그러지? 비틀거리고 있는데?"
"어, 어딜! 이 몸은 말이야 태어나서 지금까지... 오그극...!"
대사 패턴은 윌리엄인데 중간중간에 복잡한 신음소리가 들어가면서 부들거리던 윌리엄은 결국 철퇴를 완전히 떨어뜨리면서 털썩 주저앉아 자신의 배를 보였다.
"아... 아파... 아니... 기분 좋아..."
세 겹의 하트가 겹쳐져 있고 그 근처에 번개가 치는 듯한 모습이 뻗어나가는 문신이 하트 게이지와 같은 분홍색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걸로 끝?'
제압되기는 했지만 뭔가 기능이 사라지지 않았다.
가장 외곽의 큰 하트로부터 중간에 끼어있는 하트, 마지막 가장 안쪽에 있는 하트 순서로 빛나고 있었는데 마치 저곳에 손을 대달라는 것처럼 느껴져서 목검을 왼손으로 고쳐들고 손을 뻗었다.
"힉... 히익...!"
그러는 동안에도 윌리엄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여기를 건드리면 되나?'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려 가장 작은 하트 안쪽을 톡 하고 건드려 주었다.
[아렌의 노예]
아무 특성도 없는 평범한 NPC였던 윌리엄의 상태창에 새로운 특성이 등록되었다. 혹시나 싶어서 자세히 확인해보니 이런 글귀가 떠오른다.
그녀는 당신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
"힛... 히잇...!"
방금 전까지 분홍색으로 빛나던 문신이 점점 빛을 잃어가면서 윌리엄의 아랫배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마침내 바닥에 누워서 신음소리를 흘리던 윌리엄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나오는 것과 함께, 눈동자에 하트가 선명하게 새겨진 상태로 내 앞에 엎드려 고개를 숙이며 빌었다.
"주인님... 주인님을 뵙습니다..."
노예로써의 새로운 이름을 지어줄 수 있습니다 –
"이름......?"
시스템에 의해서 추천되는 이름은 [초급 노예 1호]였다.
'일단 윌리엄이라고 부르면 그 2m짜리 털복숭이 아저씨 생각나서 좀 바꾸고 싶기는 한데...'
무슨 이름으로 바꿔줄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앨리스의 호감도가 '공포'단계가 되었습니다 –
"......!!"
시스템 메시지를 듣고 다급하게 돌아보는 순간 수풀 사이로 도주하는 검은 색의 후드를 뒤집어 쓴 누군가가 보였다.
정신없이 도주하는 그 뒤통수에서 [별의 마법사]라는 특성이 보였으며 방금 전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나는 지금 내가 노예를 만드는 광경을 앨리스에게 보여졌음을 알 수 있었다.
"아... 이거 완전히 망했다......"
차라리 불편단계에서 적대단계로 들어섰다면 서로 티격대면서 싸우다가 미운 정이 드는 방식으로 감정을 해서하고 친해질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적대도 아니고 '공포'단계에 들어섰다면 조심스럽게 다가갈 기회가 없었다. 내가 보이면 패닉에 빠져서 도망가거나 대화를 거부할 테니까.
게다가 그런 과민반응을 보이는 앨리스를 보고 다른 친구들의 호감도도 연쇄적으로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는데 앨리스는 그나마 교우관계가 거의 없어서 호감도 하락이 덜하다는 점이 다행이라고 할까.
물론 앨리스 없다고 게임을 깨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3턴만에 깰 수 있는 임무를 120턴씩 끌어가면서 깨야하니 문제가 되는 거지만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같이 임무도 수행하고 포인트도 나눠주면서 친해지려고 했는데...'
앨리스는 칭찬에 매우 약하기 때문에 이번 활약에 감명받았다고 하면서 불편단계에 들어선 호감도를 올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어서야 나를 보는 순간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하... 이런 윌리엄 쓰레기 한테..."
윌리엄 쓰레기로 이름을 지으시겠습니까? –
"아니. 기본 이름으로."
노예의 호칭을 명명하였습니다. 산적두목 윌리엄 〉 초급 노예 1호
'기본이 그거냐...'
그렇게 멀어져가는 앨리스의 모습을 허망하게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뭔가 이상한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응?'
공포단계에 들어선 앨리스의 얼굴 옆에서 하트 게이지가 벌써 2번째 하트를 절반 이상 채우고 있던 것이다.
'지금까지 가까이 있지도 않았는데 하트 게이지가... 애정도가 올랐다고?'
"버근가? 아니면..."
하지만 만약 이 버그가 잘만 사용된다면... 이 곤란한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아... 하아... 주인님..."
그리고 정 안되면 최후의 방법도 있었고.
"앨리스. 아직 레벨이... 14였던가?"
아무래도 더 수련을 하기 전에 승부를 내야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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