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여자기숙사 욕탕 잠입사건(02)
* * *
오필리아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다 씼었다면서?'
이 늦은 시간에 두 번 연속으로 사람이 들어올 줄이야.
문을 열고 들어온 건 경영수영복 같은 복장을 입고 있는 한 여학생이었다.
처음에는 세계관과 어울리지 않는 복장에 당황하다가 얼굴 옆에 하트 게이지가 비활성화 되어있는 모습을 보고 대강 현재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성인모드가 적용이 안 되어서 저 모습인 건가?'
성인이 안 된 남학생들에게 옷을 벗고 몸을 씻어도 무조건 속옷차림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녀는 몸매가 도드라지지는 않는 수영복을 입은 모습으로 욕실에 들어왔다.
'아...!'
부스스하게 떡진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눈가에는 진한 다크서클이 새겨져 있었다.
쉴 새 없이 불안하게 주변을 살펴보는 눈동자와 엉거주춤하게 구부정한 자세를 보면서 나는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앨리스'
무조건 데려가야 하는 필수 캐릭터로 꼽히는 [별의 마법사] 앨리스였다.
탄탄한 몸과 체형을 자랑하는 검술반과는 다르게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자기관리도 살짝 무너져 있어서 뺨이나 팔뚝에 약간의 군살이 올라와 있었지만, 셀레스티얼 아카데미 캐릭터 특성상 대놓고 통통한 캐릭터에서 미소년으로 변하는 데이츠를 제외하면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캐릭터들, 특히 이노리가 허리가 너무 가느다래서 불안해 보일 정도로 날씬한거지'
그녀의 흐릿한 눈동자가 욕실을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욕탕에 대놓고 앉있는 이노리를 보고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저... 저기... 언제까지 쓸 예정..."
"......"
"미, 미안해......"
내 몸에 걸터앉은 이노리에게 말을 걸었다가 대답이 없자 앨리스는 몸을 쭈구리면서 욕실 가장자리에서 물을 퍼내면서 몸을 씻기 시작했다.
내 시야에서는 수영복에 물을 끼얹는 것처럼 보이고 만화캐릭터처럼 금방 거품에 몸이 감싸이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앨리스... 쭈구리 캐릭터였지'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같은 F반에서 지내온 학생들에게도 말을 제대로 못 건다.
애초에 앨리스는 수업참여율이 굉장히 낮기도 했지만.
원래 마법교육을 받더라도 자신만의 별의 마법에 적용할 수는 없어서 참고 수준이라 수업이 절실하지 않기도 했고, 또한 F반에 떨어진 이유도 마법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수업태도가 너무 불량해서 F반급이 아니면 학업분위기를 망친다는 이유로 떨어진 캐릭터였다.
초반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전학생인 주인공이 무섭다는 이유로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수업거부를 할 정도였는데 생일선물과 함께 부모님에게 친히 경고장이 날아오기 때문에 다음주 수업부터는 제대로 들어올 예정이었다.
다른 학생들 있는 곳에서 말을 걸면 호감도가 팍팍 까이기 때문에 무조건 옥상으로 찾아가서 도망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말을 걸어야 하지만.
'그래서 내가 1회차 때 신기하다고 바로 말 걸었다가 불편단계로 들어섰지...'
마치 길고양이를 다루는 것처럼 조심해서 다뤄줘야 하는 캐릭터다.
'그래도 앨리스는 조건이 까다로울 뿐이지 한 번 대화를 틀면 금방 친해지는 타입이니까......'
앨리스는 이노리의 눈치를 보면서 허겁지겁 거품을 씻어내면서 나가려고 했는데, 여전히 거품덩어리로 보이는 걸 보니 제대로 씻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노리가 불편해 도망가려는 모양이었다.
드르륵!
하지만 입구로 도망치려던 앨리스는 그 순간 문을 열고 들어온 다른 사람과 정면으로 마주치면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안 그래도 낯을 더럽게 가리는데 정면에서 누군가와 마주치면 메두사에게 석화라도 당한 것처럼 멈춰버리는 것이다.
'다 씻었다더니!'
벌써 3명이다 3명. 오필리아는 전학생이라 아직 제대로 정보수집이 안 됐고 앨리스는 워낙 기숙사에 나타났다 말았다 하니까 그렇다고 쳐도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뭔데?
부정확한 정보를 준 이노리에게 뭐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동안 입구에서 들이닥친 수영복... 이 아니라 진짜 알몸의 여인을 보면서 나는 입을 틀어막고 숨을 멈췄다.
내가 벗어놓은 옷을 한 손에 들고 있는 마리안이 난입했던 것이다.
'저건 어떻게?'
다행히 사이즈만으로 남학생용 복장이라는 것이 들키지는 않았지만 대놓고 내 속옷이 들려있고 그것의 냄새를 맡으며 유심히 욕실을 둘러보는 모습에서 나는 따뜻한 온수 안에서도 소름이 돋았다.
"아까 씻고 가지 않았어?"
욕실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해 이노리가 먼저 마리안을 제지했지만 마리안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알몸을 드러내며 이곳에 다가오고 있었다.
"동생의 냄새가 나."
"......네 동생은 아카데미에 재학중인 1학년인데 이곳에 있을 리 없어."
"다른 동생."
이미 버그덩어리 자체가 되어버린 마리안은 이노리의 논리정연한 반박도 가볍게 무시하면서 욕실을 뒤져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앨리스가 조심스럽게 이노리와 마리안 사이에서 벌어지는 신경전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했지만 양쪽 다 앨리스에게는 관심이 하나도 없어서 가볍게 무시당했다.
다행히 그림자 인법으로 인해 숨겨진 상태인데다가 이노리가 자신의 몸으로 내 몸 위로 올라타서 가려주고 있는 상황이기는 한데.
'침착하자 침착해. 일단 이노리의 그림자 인법이라면 의심은 할지라도 확실하게 잡히지는 않......'
"하아... 하아..."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이노리의 몸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면서 점점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전부터 이노리는 나에게 알몸이 보일까봐 욕탕 내부에서 어깨까지 담근 채로 계속 있었는데, 지금은 그림자 인법까지 유지한 상태로 나를 숨기기 위해 계속 욕탕에 앉아있었다.
나야 중간에 씻겠다고 밖에 나갔다 왔는데 이노리는 그 시간 동안에도 머물러 있었으니 거의 25분 가까이 욕탕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점점 열기가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이노리는 체력수치가 낮은 편인데...'
어차피 회피와 특수능력, 스피드로 먹고사는 캐릭터라서 체력수치는 한 대만 맞으면 삼도천이 아른거리는 수준이었다.
물론 독보적인 최약체인 주인공의 능력치를 제외하고 최약체지만 그래도 회피, 부분회피에 실패하고 정통으로 맞으면 한 방에 비명횡사하기 좋은 체력부족 캐릭터임은 확실했다.
상태창으로 확인해보니 이노리의 컨디션이 좋음에서 보통을 향해 순식간에 떨어지고 있었는데 이대로 있다가는 기절......
꾸욱...
이노리는 자신의 입술을 꽉 물고는 그림자 인법을 유지하고 있었다.
앨리스와 마리안에게 내 정체를 들키면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는데 컨디션이 보통에서 나쁨으로, 그리고 위험단계까지 내려가려 하고 있는데도 나를 숨기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쩝......'
현재 앨리스는 슬금슬금 마리안과 이노리를 피해 빠져나고 있었고 이제 남은 것은 마리안 밖에 없었다.
이노리는 이를 악물고 버티려고 했지만 마리안은 포기할 생각이 없이 물통까지 뒤져보면서 나를 찾고 있어서 절대 포기할 것 같지가 않았고.
나는 이노리의 컨디션이 위험단계에 들어서기 전에 가느다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잡았다.
'원래 스탯이면 이렇게 하지도 못하겠지만'
현재 나는 오행무경심법으로 인해 그럭저럭 일반 청년 정도의 신체능력은 갖추고 있으니까 날씬하고 가벼운 이노리 정도는 쉽게 들어올릴 수 있었다.
쏴아아
두 사람 분량의 물이 빠져나가자 수위가 순식간에 내려가고, 나에게 번쩍 들어올려진 이노리가 나에게 안긴 상태로 같이 일어나게 되었다.
"......주군?"
열기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가있던 이노리가 욕탕에서 몸을 빼내자 두뇌가 급속도로 냉각되며 정신을 차렸는데, 내 무릎에 걸터앉아 있던 상황에서 그대로 일어나니 남녀가 알몸을 겹치고 있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일어서는 과정에서 그녀의 다리 사이의 공간으로 나의 작은 주인님이 들어가 있어서, 내 물건을 고정대 삼아 그 위에 엉덩이를 걸쳐두고 있는 절묘한 상황이...
"우리 동생!"
방금 전까지 바닥에 숨었나 확인하고 있던 마리안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욕탕으로 뛰어들었다.
'흔들린다 흔들려!"
와 겉에 옷이나 속옷이 없이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흔들리면... 아프겠는데?
"누나 만나러 온 거야? 누나 보고 싶었어?"
내가 지금 이노리를 안아올린 채라는 사실을 마리안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 응? 그것도 있고, 좀 씻고 싶기도 했고..."
"누나가 씻겨줄까?"
아까 전에 한번 씻었지만 여기서 거부한다면 또 사람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순순히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고맙지...?"
"잠깐만 기다려, 누나가 금방 세면도구 준비해 올게!"
신이 나서 알몸으로 욕실을 뛰쳐나가는 마리안을 보면서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주... 주군..."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 끼워져 있는 내 물건을 느끼면서 이노리는 그대로 굳어있었다.
여체의 부드러운 살로 이루어진 절묘한 삼각공간에 들어가 있는 상태라서 좀... 위험한데......
"튀자!"
"예?!"
"마리안이 돌아오기 전에 튀어야 돼. 안 그러면 나 여기 갇힌다고!"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 끼어있는 작은 주인님 때문에 다리도 움직이지 못하고 굳어버린 이노리를 번쩍 들어서 떼어놓아 주었다.
"빨리빨리!"
진짜 온 몸을 구석구석 씻겨지고 마리안의 개인실로 잡혀갈 위험에 처했기 때문에 나는 앞 뒤 가릴 것이 없었다.
마리안이 돌아오기 전에 빠르게 옷을 입기 위해서 이노리와 함께 탈의실로 달려가고, 이미 속옷은 마리안에게 탈취당해서 어쩔 수 없이 바지와 상의만 허겁지겁 몸에 걸친 뒤 이노리의 옷을 입혀주었다.
'아 씨 나비모양 끈은 어떻게 묶는...'
꾸우욱!
일단 그냥 매듭을 지어서 옷을 묶어주고 허겁지겁 이노리의 등 뒤에 손을 얹으니 그녀는 다시 그림자 인술로 내 몸을 감춰주었다.
"우리 동생, 많이 기다렸지?"
마리안은 다행히 슬금슬금 움직이는 이노리는 신경도 쓰지 않아서 내 몸만 감춘 것만으로도 숨어서 도망갈 수 있었다.
그렇게 여러사건 끝에 욕실에서 밖으로 나가는 동안, 나는 뒤통수가 따끔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
욕실 출구를 나오니 앨리스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이상한 표정으로 내... 가 아니라 이노리의 옆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음... 안에서 일어난 소란은 못 들었겠지?'
잠시 후 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챈 마리안이 알몸으로 욕실에서 뛰쳐나와 나를 찾아다니면서 동생을 찾기 시작했지만, 이미 나는 이노리와 함께 전력으로 남자기숙사 방향을 향해 도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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