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가족끼리 그러는거 아니야(02)
* * *
마리안이 나를 풀어주고 나서야 겨우 가슴골 사이에서 손을 회수할 수 있었다.
'악! 손가락 하나 꺾였어!'
얼마나 강하게 압박했으면 손가락이 휘었냐...! 그보다 가슴골의 모양으로 관절 역방향으로 동그랗게 꺾여있는 모습을 보니 아직까지 감촉이...
"괜찮아? 누나가 미안해. 우리 동생이 너무 귀여워서..."
방금 또 위험하게 마리안의 눈동자에 하트가 떴는데, 다행히 바로 달려들지는 않고 안절부절하면서 내 손가락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여기 의료진... 의료진 와주세요!"
내 굽어진 손가락을 호호 불면서 의료진을 부르고, 마리안이 먼저 의료진을 부르면서 전투의사를 포기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련은 내가 이긴 셈이 되어있었다.
'이걸 이겨서 뭐하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강제 패배 이벤트가 승리로 바뀌고 대신 내 손가락이 휘어버렸다.
하지만 의료진이라고 해도 원래는 신전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오필리아 암살미수 사건으로 인해서 신전 내부가 엉망이 되었으니 한 동안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직 신전에 성직자가 배치되지 않아서 말이야... 임시조치만 해야 되겠는 걸."
뿌드득.
"으아아악!"
하이디 선생님이 손가락을 꽉 쥐어서 다시 맞춰주니 마리안은 울먹울먹하고 있었고 오필리아는 독기어린 표정으로 선생님을 노려보는데 하이디 선생님은 두 여학생의 눈빛은 신경도 쓰지 않는지 무시하면서 내 손가락을 만지고 있었다.
"사내 자식이 그 정도로 소리지르지 마라. 대련하다 보면 손가락 한 두개 부러지기도 하고, 나처럼 잃기도 하는 거지."
'알았으니까 잘려나간 왼손 보여주지 말라고...'
"가 봐. 부상자는 내가 돌볼 테니까."
"하지만......"
"일단 마리안은 가서 다른 검술반 자습시키고. 오필리아?"
"......"
찬 바람이 불 정도로 표정이 굳어있는 오필리아가 마리안을 노려보고 서 있으니 하이디 선생님은 턱으로 옆에 있는 케이를 가리켰다.
"케이와 대련해봐. 조교를 상대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케이는 만만하지 않을 걸?"
"꼭 해야 되나요?"
"해야지. 검술반 교육을 받으려면 너희 수준을 알아야 하니까."
"그렇다면 마리안을 상대로 지목할 수는?"
"안 돼. 그런 감정으로 대련에 들어가면 누군가는 크게 다치게 될 테니까."
오필리아는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나를 걱정하며 물러나는 마리안과 하이디 선생님을 노려보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수업거부를 할 수도 없으니 자신 몫의 훈련용 목검을 꺼내들고 케이가 허수아비를 부수고 있는 대련장으로 향했다.
"누나가 미안해... 우리 동생이 너무 귀여워서 힘이 들어갔나봐."
힘 많이 들어가기는 했지.
그보다 하이디 선생님도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그녀의 성향이 보일락말락 하는데.
[가학성향]
시발 이거 왜 이래. 왜 주변 인물들의 성향이 다 이렇게 극단적이냐?
"많이 아파?"
"예... 으윽...!"
"고통이 느껴지면 멀쩡한 거지. 나도 처음에는 아픈게 너무 싫었는데 나중에 가니까 고통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주 잘 알게 되었으니까."
아니 그러면서 왜 의수로 내 손가락을 잡는 거지.
"그리고 다른 애들은 잘 못봤는데 말이야... 너, 아까 마리안에게 당하면서 발기했지?"
"예에...?"
"의외로 그런거 좋아하는거 아니야?"
"으으읏...?"
방금 꺾였던 손가락을 의수로 움켜쥔 채 내 귓바퀴를 살짝 물고 있었다.
"여자한테 강제로 깔리고 제압당해서 발기하다니... 아무것도 못 하는 채로 묶인 채 능욕당하는게 취향인 나쁜 아이로구나?"
'경험담이냐?'
뭔가 이 대사... 자기가 직접 들었던 내용을 나에게 똑같이 물어보는 기분인데?
"아닌데요."
"하지만 네 하반신은 솔직한 걸? 상대가 없다면 선생님이 빼줄까?"
슉슉슉.
그녀는 일부러 내 고간 앞에서 자신의 의수를 흔들어보였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의수이기 때문에 남자들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언제라도 변경할 수 있거든."
여기서 밀리면 하이디 선생한테 매번 괴롭힘을 당할 거라는 생각에 나는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원래 자주 섭니다. 강하거든요."
"......"
미처 생각지 못했던 답변이었는지 하이디 선생님의 표정이 벙찐 상태가 되자 나는 몸을 일으키며 스스로 손가락을 만져보았다.
아프기는 하지만 움직이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럼 이만. 연습하러 가겠습니다."
휴.
근데 자주 서는 건 사실이긴 하다.
이제 갓 성인이 된 한창 나이니까 말이지.
'어휴......'
근데 뭔가 의수로 슉슉하면 기분이 좋을... 으흠!
오필리아 옆으로 가려고 했는데 지금 한창 케이랑 바쁘게 대련하고 있어서 일단 사일리안의 옆으로 들어갔다.
"푸하하핫!"
그러면서 내 어깨를 툭툭 치는데 좋아 죽는 표정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그냥 우리가 서로 붙어서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일리안은 생일이 지난 성인이라서 마리안이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다 봤겠지.
"웃지 마."
"아니 어떻게 안 웃어? 우리 모범생 반장이 그런 모습을 보였는데 말이야."
끅끅... 하면서 눈물까지 흘리며 웃음을 참는다.
"우리 아렌 참 능력 좋아? 전학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반장이 죽고 못 살게 만들었어?"
그러게 말이다.
생일파티 때 축하해주고 나서는 최대한 피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2년간 지켜봤는데도 불구하고 성실하고 착하기는 한데 뭔가 재미없는 그런 성격이었지. 그런데 의외의 귀여운 면이 있었네?"
"응?"
하기야 나도 1회차 때 끝까지 같이 깼어도... 저런 버그성 문제가 터질 줄은 생각도 못했으니 말이다.
"어때? 우리 반장."
"뭐."
"괜찮지 않냐?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잖아?"
몸매라는 얘기에 아까 휘어졌던 손가락 모양을 떠올리면서 곡률을 계산해 보았다.
디따 크다. 손으로 잡아도 다 안 들어갈 거 같다.
"몰라."
그래, 커봐야 그건 가슴이 아니라 근육이야 근육.
그 사이에 끼어서 손가락 휘어진거 봐라. 거기에다가 다른 걸 꽂는다면......
"음? 음... 흐음......"
잠깐. 생각보다 감촉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너무 꽉 압박해서 그렇지 적당한 수준으로 조여본다면......
"......"
셁겕겪... 기능 좀 쓰다가 잠가버릴 걸 그랬나...
'그런데 애정도 5단계가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마리안은 내가 직접 누나라고 불러주고 동생 연기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4단계까지는 금방 차올랐지만 5단계는 아래쪽에 정말 티끝만큼 차올라 있었다.
여러가지 조건을 미리 파악하고 있어서 금방 올릴 수 있었던 이노리의 애정도로 비교해 보았을 때에도 마리안이 훨씬 빠르게 올라가는데, 그런 마리안의 취향을 절묘하게 노렸어도 거의 차지 않는다.
'그보다... 애정도 4단계가 되면 성 기능이 해방되는 것만이 아니라...'
이노리의 상황이나 마리안이 4단계에서 오히려 잠겨버리는 것을 생각하면 개인마다 애정도에 따라 개방되는 시기가 다를 것 같았다.
일단 기본은 4단계를 넘어야 하는 것 같지만.
* * *
샤워가 끝나고 모습을 드러낸 케이가 보였다.
다행히 케이가 아직 성년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반신에 속옷이 입혀져 있었는데, 성인이었다면 덜렁거리는 모습을 대놓고 봤겠지.
나는 지금 굉장히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몸에 살얼음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상태로 나온 케이라던가, 벌벌 떨면서 셋이 들어가서 쓰러진 한 명을 둘이서 겨우 끌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찮냐?"
"냉수샤워는 체력단련에 좋지."
앞으로 케이 이 놈에게 뭘 물어보는 것은 관두자.
이 놈은 근손실 생긴다고 밥도 안 먹고 여자도 안 사귀는 헬창 같은 놈이라는 걸 머리에 새겨둬야겠다.
"어흐... 춥다."
사일리안은 대충 얼굴만 씻은 채 밖으로 나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 끝이 새빨갛게 부어있었다.
'왕자라는 놈이 좀 씻어!'
"아직 그렇게까지 추운 날씨가 아닌데 왜 이런 거야?"
"3급 지역에는 온도교환장치가 설치되어 있거든."
"그게 뭔데?"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여자기숙사는 더운 물이 나오고 그만큼 우리는 추운 물이 나온다."
"그럼 두 개를 합치면 냉수와 온수를 합쳐서 쓸 수 있는거 아니야?"
"시설의 크기가 건물 두 개 분량으로 커서 문제지."
그러니까 한쪽은 온수, 한쪽은 냉수가 나온다는 거였다.
"원래 여자기숙사나 남자기숙사에서 먼저 온수를 트는 쪽이 그 날 따뜻하게 씻는 편인데 오늘은... 우리가 좀 늦었어."
'나... 오늘 씻어야 하는데?'
검술반에서 훈련한 것도 있지만, 오늘 마리안한테 입술이랑 턱을 있는 대로 빨려서 침이 발라져 있었다.
미소녀의 침이라니 평생 세수 안 하고 살겠다 우효~! 같은 소리 하지 마라.
계속 빨고 빨리면서 내 침도 같이 섞여서 덕지덕지 붙었으니 결국 침 줄줄 흘린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
'근데 확실히 마리안 침에서는 냄새가 안 나기는 하네'
성인모드가 적용이 안 되어서 체취가 안 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미소녀의 침이라서 괜찮은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흘린 침냄새는 남아있었기 때문에 꼭 씻어야만 했다.
"게다가 오늘은 단체로 같이 목욕이라도 하나... 온수 엄청 돌리나보다. 차가운 정도가 다르네."
"흐음......"
마리안의 침이 묻은 턱을 쓰다듬으며 나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밖에 나가서 씻고 와야겠다."
"샘물에서 얼굴 닦지 마. 그거 우리 마실 물이다."
마실 물이 극도로 부족해서 작은 샘물 하나로 12명... 나를 포함해서 13명이 식수를 해결하는데 확실히 마실 물도 부족해서 음료수를 따로 사오지 않으면 안 된다.
'첫 임무를 어떻게 해서라도 최고 등급으로 깨야 되겠어...'
기숙사와 식당의 열악함을 동시에 업그레이드하지 않으면 도저히 못 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밖으로 나온 나는 조용히 구석으로 숨어들어가 이름을 불렀다.
"이노리. 이쪽으로 와줘."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이노리가 그림자 속에 숨어서 나에게 찾아왔다.
사복으로 전환되어서 그런가 그 특유의 야한 쿠노이치 복장이었는데, 어둠 속이라 그런가 검은색이 잘 가려져서 밝은 곳에서 볼 때처럼 야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주군. 이건 대체..."
"다 방법이 있지. 내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은 없으니까."
"역시 대단하십니다."
게임 시스템이 적용되어서 내가 의지를 가지고 누군가를 부르면 바로 호출이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할 수는 없으니 그냥 내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로 해뒀다.
"오늘 여자기숙사에서는 뭐 하고 있지?"
내 질문에 이노리는 굉장히 의심하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주군께서 요구하신다면 말씀해드릴 수는 있지만..."
호감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다행히 이노리는 주종관계라 떨어질 일이 없었지만.
"아니, 자세하게 얘기할 필요는 없고 간략하게만."
"목욕제계를 마치고 각자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좋아, 딱 내가 바란 상태였어.
"그럼 나를 여자기숙사의 욕실 안으로 데려다 줄 수 있어?"
이노리의 표정에서 순간적으로 경멸감이 그대로 묻어나왔지만 그녀는 그림자고 나는 주군이었다.
"아니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고. 씻어야 하는데 남자기숙사는... 상황 알지?"
"오늘 특별히 더 차가워서 기절한 사람도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진짜로 다 알고 있네.
"그래서 좀 씻어야 하는데 온수를 빌리려고. 어차피 다들 씻고 왔다면서? 그러면 문제 없는거 아니야?"
"......"
이노리는 잠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어차피 주군의 명이라서 거부할 수는 없지만 '하기 싫은데 억지로 명령해서 하는' 것과 '주군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다만..."
"다만?"
"그림자 인법으로 몸을 감추는 일은 한 명만 가능합니다."
"뭐 그래. 어차피 이노리는 여자기숙사 들어가도 문제 없잖아."
"또한 타인에게 적용할 경우 멀리 떨어질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거리지?"
"일반적인 그림자가 닿는 거리입니다. 사람 키 정도."
그 말을 듣고 고민해 보았다.
"......욕실에 같이 들어가야 한다는 거지?"
"......네."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는 이노리를 보면서 나는 잠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간다."
침이 묻은 얼굴피부가 점점 트기 시작해서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씻어야 되겠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