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3학년 F반에는 닌자가 있다(05)
* * *
내 시선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이노리의 몸으로 향했다.
가느다란 목을 타고 흐르는 한 줄기의 땀방울과 머리카락과 하얀 목이 만나는 부분에 군데군데 보이는 솜털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복면을 벗어서 뾰족할 정도로 가느다란 턱선에 그 얼굴은 무표정하게 유지하려고 하지만 입술이 말을 듣지 않았고, 최대한 숨을 고르려고 해도 나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후욱후욱하는 깊은 숨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괜찮... 습니다."
"뭐가?"
"이런 몸이지만 주군께서 원하신다면..."
내 앞에 엎드려 있으니 자연스럽게 가슴골을 내려다볼 수 있는 각도가 되었고, 다른 여성 캐릭터에 비해서 조금 빈약한 가슴이기는 했지만 서양과 동양의 신체적 차이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만 되어도 훌륭한 몸이었다.
게다가 날씬하고 가느다란 이미지에 어울려서 이것도 나름대로...
'앗,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이미 바지가 꽉 조이는 느낌이 드는 것과 함께 슬쩍 바지에 손을 넣어서 위치를 변경하려고 했다.
정면에서 약간 왼쪽 다리구멍으로 넣어서 나의 검을 수납해두려고.
하지만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이노리의 시선은 바지 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자신의 작은 주인님에게 향해 있었고.
이노리에게서는 무언가 기분 좋은 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로 꺼내입은 듯한 예쁜 옷에 나를 뫼시러 왔기 때문인지 머리카락도 평소와는 다르게 윤기가 흐르도록 무언가를 바른 모습이었고, 그 입술은 비록 지금까지 몇 번이나 자신의 이로 우물거려서 흩어지기는 했지만 살짝 분홍색으로 칠해놓은 모양이었다.
'된다고...?'
한 번 가능하다고 인식을 해버리니 하반신의 흥분을 참기가 힘들었다.
사일리안도 이곳에 이노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상태만 확인해본 뒤 자리를 피해준 모양인데, 일단 점심시간까지는 여유가 있기 때문에......
'하지만...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시스템에서 알려주기를 애정도가 4단계를 넘어서면 기능이 해방되는데, 이노리 같은 경우는 주군이기 때문에 애정도와 관계없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럼 이거 그냥, 내가 직책으로 찍어누르면서 강제로 몸을 요구하는 거잖아?
이노리는 이미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가 요구한다면 받아들여주는 것이고?
적대하는 상대를 지금 당장 취해야 하는 상황도 아니고 앞으로도 나를 도와줘야 하는 사람에게 굳이 억지로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후우우우...!"
물론 머릿속에서는 지금 당장 앞으로 옆으로 뒤로 위로 아래로 말 그대로 사방으로 할 수 있는 자세를 계산하고 있었지만, 일부러 입 안쪽을 살짝 깨물면서까지 겨우 참아냈다.
"됐다."
내가 이노리에게 됐다고 거절의 의사를 밝힌 순간 민감해진 감각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감각 증폭조차도 성인모드 덕분인가?'
모드의 영향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스럽게 느꼈는데, 지금은 여러가지 사정이 있거나 익숙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만약 조금이라도 시스템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다면 이미 나는 침대에 뛰어들어 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주군께서 원하신다면 그림자로써..."
자신의 옷을 고정하고 있는 등의 나비모양 끈을 잡아당기려는 모습에, 그녀의 손을 잡고 먼저 진행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여기서 한 꺼풀 벗는다? 그럼 이미 성인모드를 뭔 수를 써서라도 발동시켜버릴 상황이니까.
"주군께서 걱정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응?"
"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됐다고. 어차피 지금 내가 요구해봐야 진짜로 원하는 상황도 아니잖아?"
"개인적인 감정으로써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로써 그저 주군의 육신을 완벽하게 만들어드릴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런게 싫다는 얘기야. 그 정도로 고픈 상황도 아니고."
사실 고프다. 그래도 애정도 2단계도 채우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몸을 요구할 정도로 굶주린 것도 아니었다.
"......그러십니까. 알겠습니다."
이노리의 표정은 의외라는 듯이 변했고 그녀의 얼굴 옆에 있던 하트의 두 번째 칸이 80%까지 차올랐다.
'역시나 이게 정답인 건가......'
애정도가 낮은 상태에서 다른 특성이나 시스템의 도움으로 강제로 취하게 된다면 저 하트 게이지가 깎이는 모양이었다.
저게 높아지면 마리안처럼 폭주하는 모습으로 보았을 때, 저게 일정 이하로 낮아지면 또 뭔가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예측할 수 있겠지.
"휴우......"
아주 원래 게임도 함정투성이의 악랄한 게임인데 성인모드마저 조금만 선택 잘못하면 골로 보내려고 하네.
"그런데 내가 예상했다는게 무슨 의미지?"
그 말에 이노리는 얼굴을 다시 붉히면서 입술을 오물거렸다. 뭔가 대답하기 곤란한 내용인 모양인데...
"오늘이 안전한 날은 아니지만 기합으로 미뤄보겠다는 얘기였습니다."
그게... 기합으로 밀리는 거였어?
* * *
어찌어찌 3교시 시작 전에 하반신을 가라앉히고 교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어차피 교실 내부에서도 사일리안과 마리안을 제외하면 내 하반신이 불룩해진 상태라도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문제는 마리안이 알아차리고 폭주하면 골치아프기 때문에 나름대로 주의해서 진정시킨 다음 도착한 것이다.
"수상해."
"뭐가."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
바로 옆 자리에 있는 오필리아는 내가 매고 있는 넥타이를 잡아당겨 냄새를 킁킁 맡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 깔끔하게 묶여있잖아. 아렌은 넥타이도 잘 못 묶는데."
"배웠어."
"하루만에?"
사실 내가 넥타이를 잘 못 묶자 이노리가 주군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서 직접 묶어준 것이기 때문에 오필리아의 촉감이 맞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금 전까지 이노리, 아니 리타가 내 옷을 입혀주고 있었어... 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발뺌하는 수 밖에.
'이노리는... 자리에 잘 있군'
다시 아카데미 정복에 복면을 쓰고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당연히 투명망토를 착용하고 있어서 그녀가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 다른 학생들은 알지 못했다.
빛의 왕자 사일리안은 이노리가 있는 자리를 힐끔 돌아보는 것으로 봐서 기척을 알아차린 모양이지만.
"그러고 보니 아렌은 어떻게 할 거야?"
"응?"
"오늘 오후부터 수업이 시작되면 검술반과 마법반을 나누어서 수업을 하잖아? 아렌이 관심있는 쪽이 어디인지 궁금해서."
생각해보니 그랬다.
주인공의 능력치가 안 올라서 그렇지 원래 수업내용은 검술반과 마법반으로 나누어지고 각자 특성에 따라서 양쪽을 옮겨다니게 된다.
원래 A, B, C, D반은 각각 반마다 검술,마법 담당의 선생님이 담임과 부담임으로 있지만 3급 지역은 돈을 아낀다는 명목으로 E반 담임 선생님이 검술, F반 담임 선생님이 마법을 맡고 있었다.
마법반은 F반의 담임인 카렌 선생님과 배우고 검술반은 E반의 담임인 하이디 선생님에게 배우게 되는데 여기에서 오필리아는 주인공을 따라오고 주인공은 친해지고 싶은 학생들이 있는 곳으로 수업을 배우러 가면 된다.
'원래 생각하고 있던 건 필수 캐릭터로 꼽히는 [별의 마법사] 앨리스지만...'
앨리스는 현재 수업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마법사반에서 데리고 올만한 캐릭터는 딱히 없었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다.
그렇다면 당장 검술반에 들어가면 되지 않느냐고 해도......
'마리안이 문제란 말이지...'
검술반으로 가면 [검의 명가] 특성으로 검술반으로 향하는 마리안과 마주쳐야 한다.
아직까지는 거리를 두고 있어서 괜찮기는 하지만......
'일단은... 초반에 사일리안과 친해진 김에 쭉 이어나가볼까'
적어도 나중에 사일리안이 적대나 혐오로 돌아서지 않을 정도까지는 올려둬야 한다. 그렇게 말한다면 역시나 검술반인데...
'괜찮겠지? 오필리아도 있고 갑자기 이상반응을 보이면 하이디 선생님이 있으니까'
"검술반으로 갈게."
"그럼 나도 검술반 갈게."
넌 당연히 따라와야지.
"그러니까... 신들께서 세계에 함께 수육하고 계시던 육신의 시대를 지나쳐... 어둠과 죽음으로 가득찬 언데드의 시대를 지나... 빙하의 시대, 기계의 시대, 마법의 시대를..."
4교시에는 간단한 역사학 교육이 있었는데 세계관 설명이나 마찬가지라 이미 다 꿰고 있는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옆 자리의 오필리아랑 같이 교과서에 낙서나 하고 있었다.
역사쪽 책은 초상화가 많아서 하나씩 개조하는게 재밌거든.
"우풉!"
선대 국왕의 초상화에 멋드러진 카이저 콧수염을 그려주고 있으니 오필리아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 순간 머리가 반쯤 벗겨진 역사 선생님이 불쾌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시작했다.
"크흠! 흐흠! 아무리 학습태도가 좋지 않은 F반이라고는 하지만... 전학왔다고 해서 수업태도는 멀쩡할 줄 알았더니..."
다 알아서 그래... 나 이거 다 깼고 위키와 팬사이트도 탐방한 사람이야...
"거기 둘! 다음 시간까지 숙제를 내주겠다."
"왜요?"
"자네들의 수업태도를 보니 진도를 제대로 따라올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걸 어떻게 하나? 신살의 시대에 벌어진 대표적인 사건을 아는 대로 정리해오게."
'하, 3급 지역에서는 도서관도 이용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조사하라고? 그야말로 악질이구만'
하지만 나는 다 방법이 있었다.
'이노리 시켜야지'
주종관계는 이럴 때 써먹는 것이다. 게다가 나보다 2살이나 누나니까 교과과정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겠지.
그렇게 4교시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3급 지역에서는 식당의 질이 굉장히 좋지 않아서 검술반에 자주 가는 학생들에게는 내장으로 만든 요리와 빵과 수프를, 마법반에 자주 가는 학생들에게는 어디서 많이 본 잡초 샐러드와 빵과 수프를 주었다.
"......"
포인트 얻으면 식당부터 개조하자... 아니 씨, 포인트 왜 이렇게 쓸 데가 많냐?!
"이걸... 먹어야 돼...?"
둘러보니 사일리안은 그냥 마법반 식단 받아서 풀과 빵이나 뜯고 있었고 대부분은 마법반 식단을 먹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면 개인이 도시락을 싸오던가, 외부에서 반입한 음식을 곁들여서 빈약한 마법반 식단에 추가해서 먹고 있었고.
오필리아 같은 경우도 미리 귀뜸을 들은 것인지 마법반 식단을 받아서 풀을 적당히 고르고 빵과 수프만 먹고 있었는데 나는 생각없이 검술반으로 가는 케이 뒤에 섰다가 내장만 한 접시를 받았다.
솔직히 한국인으로써 내장? 그거 그냥 곱창이랑 순대, 간과 허파면 맛있는거 아니냐? 라고 하겠는데...
'그건 손질을 잘 했을 때의 이야기고!'
손질이 안 되어 있는 내장이 앞에 있으니 구린내가 상상을 초월했다.
"안 먹나?"
나는 조용히 내 앞에 놓여있는 접시를 케이에게 넘겨주었고, 케이는 냄새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내장접시에 들어있는 질긴 물건들을 입에 넣고 씹었다.
케이의 호감도가 '지인'단계가 되었습니다
"넌 그게 맛있어?"
"아니. 하지만 몸을 키우려면 먹어야지."
'대단하다...'
이론시간에는 하루 종일 잠만자고 검술시간에만 정신을 차린다는데 그 덕분에 키는 2m에 가깝고 어깨도 떡 벌어져서 어지간한 교관이나 조교들도 케이보다 덩치도 작고 근육도 약했다.
'뭐... 근데 이 놈은 유용하기는 하지만...'
드래곤의 계곡과 안 싸우면 필수까지는 아니라서. 게다가 호감도 관리가 엄청 귀찮기 때문에 굳이 이 놈을 노리느니 사일리안을 절친 끝단계까지 키워서 아군 엔트리에 넣는게 이득이었다.
"다들 점심은 잘 먹었나!"
"예!!"
E반의 담임이자 검술을 맡고 있는 하이디 선생님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사로써 나름대로 유명했었지만 산적토벌중에 생긴 사고로 인해서 한쪽 눈과 왼손을 잃은 설정이었는데, 셀레스티얼 아카데미에서 마법 의수를 제공하는 대가로 몇 년간 아카데미의 검술 선생님을 맡은 캐릭터였다.
그런 사람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성인모드 적용 대상이라지만...'
비키니 아머를 입고 내 앞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원래는 체인 메일을 입고 몸에 노출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캐릭터인데, 지금은 배를 훤히 드러내고 온 몸에 새겨진 고문의 흔적과 흉터를 보여주고 있었다.
심지어 비키니 아머 상반신의 한쪽 끈은 끊어져 있어서 가슴이 덜렁거리면서 드러나고 있는데 그 위에는 잇자국이 흐릿한 흉터로 남아있어서 어지간히 거칠게 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심? 아무리 성인모드라지만 저 몰골로 돌아다니는데 나 빼고 아무도 문제삼지 않는다고?'
그보다 산적들에게 잡혀갔다가 탈출했다는 설정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알몸에는 칼자국이나 무언가로 지진 자국, 심지어 허벅지 안쪽에는 짧은 작대기 네 개를 긋고 관통하는 하나를 긋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동양의 바를 정(?)자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3개나 새겨져 있었다.
"전학생!"
"아렌. 아렌!"
"아, 네!"
하이디 선생님의 몸을 감상하면서 설정을 되새기고 있다가 지적받다니. 아니 아무리 그래도 비키니 아머는 너무하잖아!
"지난번에 실력을 시험할 때 오필리아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증명했지만 너는 증명하지 못했지. 맞나?"
"나설 틈도 없었는데요..."
"그러니 일단 수준을 확인해봐야 되겠지."
시작부터 대련이라도 시키려는 생각인가?
아마 여기서 이벤트로 대판 깨지고 '주인공은 약함'이라는 설정을 되새기게 해 줄텐데.
'뭐... 져 줄까'
어차피 훈련장에서 개인무장은 사용하지 못하고 훈련용 목검을 새로 빌려주는데, 덕분에 꼼수로 내 목검을 써서라도 승리한다... 이런 건 불가능했다.
능력치는 꽤 오르기는 했지만 검술반에 오는 놈들이랑 비빌 정도는 아니거든.
오필리아도 튜토리얼 끝나고 최소 능력치가 30 이상으로 올랐는데 나는 아직 10대 초반이라서...
'져주면 되지 뭐'
어차피 패배 이벤트인데 빨리 지고 쉬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나는 여기서 사울리안이나 다른 검사들과 인연을 쌓으러 온 거라.
"그래 마리안! 네가 한번 시험해봐라."
아니 잠깐. 강제 패배 이벤트에서 제일 나오면 안 되는 사람이 나왔는데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