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배신자는 가까이에 있다(04)
* * *
분위기가 변했다.
갑자기 장르가 야릇한 연애물에서 무언가 목숨이 간단간당한 공포요소가 추가된 것처럼 서늘한 감각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게임오버의 직감이 든다'
주인공에게 적이 접근하는 긴박한 배경음악이 귀에 살살 울려퍼지는 것 같았는데, 내 착각인가 싶어서 이를 악물어보았는데도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봐서 실제 시스템이 나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뭔가 잘못 깔았다.
아니면 내가 깔아야 하는 추가 모드를 안 깔아서 그런 것일까.
눈 앞에 있는 마리안의 하트가 실시간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는데, 분명히 애정을 나타내는 하트인데도 불구하고 내 본능은 경고를 표시하고 있었다.
아니, 무엇보다 약간 풀린 표정으로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시스템의 도움이 없어도 엄청나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얘가 원래... 이렇게 컸나?'
게임화면으로 볼 때에는 대화창에 어느 정도 보정이 있었는데, 안 그래도 검의 명가에서 자라난 마리안은 여자치고 키가 굉장히 큰 편이었고 주인공 캐릭터는 성장이 끝나지 않아서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마리안이 가까이 다가오니 정말로 누나 동생처럼 올려다보게 되는데, 가까이에서 마리안의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보고 있으니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하트는 순식간에 4번째 칸을 넘어가려 하고 있었는데, 저걸 넘어가는 순간 무언가 해금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게임의 편의성을 도와주는 기능이 아니라 굉장히 성인모드가 주축이 되는 무언가가 해금될 것 같은데?
무엇보다 내 의사와 관계없이 실행될거 같은데?
'위험...!'
내가 오행무경심법의 영향으로 처음보다 능력치가 많이 오르기는 했지만 현재로써는 마리안과 붙으면 민첩성 차이로 선공부터 빼앗기고 한 대 맞으면 그대로 끌려간다.
목검이라도 있으면 반격이 가능하겠는데 지금 상황이라면 꼼짝없이 당한다!
"누나, 라고 불러볼래?"
하트가 네 번째 칸을 넘어서려 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아주 약간을 채우지 못하고 찰랑거리는 중이었는데 시스템적으로 막아둔 한계치인 모양이었다.
더 이상 가까이에 있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물러나려고 했지만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미 소매를 붙잡히는 바람에 도망갈 기회조차 놓쳐버리고 말았다.
"누나... 라고 불러주기만 하면..."
얼굴 옆에 떠있는 감금욕망 글자가 무지막지하게 깜빡거려서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게다가 표정은 일반적인 지인 단계에서 보이는 기본 표정인데 눈동만 아예 진한 하트가 남아있어서 제 정신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었다.
"잠깐만 마리안... 진정하고... 일단 침착하게 심호흡을 먼저..."
"하아... 하아..."
"아니 그런 심호흡 말고 임마!!"
누가 봐도 뜨거운 입김을 얼굴에 쏘아보내고 있으면 딱 봐도 발정하는게 티가 나잖냐!
'글렀어. 이미 심각한 버그야...'
만약 이 게임을 강제로 종료할 수 있다면 일단 끄고 욕을 박아준 다음에 다시 정품을 실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라도 메뉴창을 열어서 끌 수 있는 게임과는 다르게 나는 이곳에서 현실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강제종료라던가 다시 게임을 시작할 방법이 없었다.
'F반 캐릭터 중에서 변태는 많았지만 설마 마리안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원래 얌전한 모범생 반장 스타일이기 때문에 조금만 진정시키면 대화가 통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상태를 보니까 이미 모드에는 이길 수 없었다.
내가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틀면, 그럴수록 내 소매를 꾸깃꾸깃 잡으면서 나를 끌어당기려 하고 있었다.
줄다리기를 하듯이 내가 체중을 뒤로 넘기면서 물러나려 했지만 마리안이 현재로써는 신체적 조건도 좋았고 능력치도 나보다 몇 배는 높았기 때문에 질질 끌려가고 있었지만.
"아레엔...?"
게다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도 친구를 부르는 평범한 목소리가 아니라 뭔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변해있는데다가 입꼬리가 살살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 히죽히죽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잠깐만 조용한데로 가지 않을래?"
이미 감금욕망은 새빨갛게 반짝이는 수준이 아니라 검붉은 핏빛으로 가장 첫 번째 칸으로 이동해 있었다.
'각이 나왔다는 건가?'
큰일났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게임오버 각이 나왔다.
나에게 목검이라도 있었다면 버틸 수 있었겠는데 지금은 맨손으로 저항하려 해도 이미 양손을 붙잡혀버렸다.
"누나랑 같이 가자?"
다른 캐릭터들은 호감도가 거의 없거나 얼굴 정도만 아는 지인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게임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이 세계에서,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 않은 튜토리얼 상태에서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것이다.
"흐응?"
그 이전부터 호감을 쌓아온 단 한 명의 '친구'를 제외하면.
질질 끌려가던 내 몸을 뒤에서 감싸안으며 내 소매를 쥐어짜듯 붙잡고 있던 마리안의 손길을 뿌리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후에 같이 아카데미 둘러보기로 했는데 까먹고 있던 거야?"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등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몸을 맡기며, 내 손을 잡고 있는 마리안의 손을 뿌리쳤다.
"하아... 하아... 넌... 뭐야?"
방금 전까지 황홀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고 있던 마리안의 표정이 매섭게 일그러지면서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따졌다.
원래 모범생에 얌전한 캐릭터였기에 저런 모습은 처음이라 놀랐는데 그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필리아는 평상시와 같은 웃는 표정으로 내 앞을 가로막아 주었다.
"아렌의 소꿉친구 오필리아!"
당당하게 가슴에 손가락을 얹으며 자신을 소개한 오필리아는 이번에는 반대로 손가락을 들어올려 마리안을 가리켰다.
"너는 뭐니?"
"나는...... 아렌의 누나..."
마리안의 시선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오필리아가 아니라 그 뒤에 숨어서 상황을 살펴보고 있는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슬금슬금, 마리안을 두려워하면서 물러나고 있는 나를.
"내 동생... 빼앗아가는 사람은..."
허리춤에 걸려있는 명가의 검에 손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오필리아도 자신의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용서 못......"
대략 5m정도의 거리를 물러나자 마리안의 눈에 떠올랐던 하트가 사그라드는 것처럼 사라진다.
아직까지 눈동자 하트의 잔상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몇 번 눈을 깜빡이고 나니 정상적인 눈동자로 돌아오고 홍조를 띄고 있던 뺨도 안정되어 가면서 평상시 자주 보던 마리안의 모습으로 변했다.
"아...!"
그제서야 지인단계의 평범한 마리안으로 돌아온 그녀는 반쯤 뽑아내고 있던 검을 확인하고는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 놀라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당황하면서 물러나던 마리안은 다시 나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얼굴에 홍조가 돌더니 그대로 등을 보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늦지 않았네."
오필리아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감금되었겠지라고 생각하니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는데 그녀는 센스있게 내 등 뒤에서 안아들면서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주었다.
"위험했다......"
원래는 마리안과 중간에 만나더라도 인사만 하고 서로에 대한 소개만 하기 마련이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어디서 시비라도 붙었어?"
"그런 건 아닌데..."
정확히는 시비가 붙거나 사이가 나빠진 것이 아니라 오류가 생긴 것이지만 그런 내용을 게임세계 내부의 인물인 오필리아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전학생이라고 텃세라도 부린 걸까?"
"글쎄......"
"셀레스티얼 아카데미는 안전하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실제로 와보니 생각보다 위험한 곳이었네?"
오필리아의 말을 듣고 순간 몸을 움찔하기는 했다.
정말로 위험한 일이 6일차에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오필리아는 벌써 볼 일 마치고 온 거야?"
"으응? 기도는 나중에 다시 가면 되겠지?"
원래 지금쯤 공작가에서 심어놓은 심복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할 텐데 갑자기 등장하다니, 솔직히 나도 좀 놀랐다.
"지금 여기서 믿을 사람이라고는 우리 둘 밖에 없으니까."
아무래도 심복과 접선하려다가 마리안과 내가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를 듣고 다급하게 돌아온 모양이었다.
'고맙기는 하지만......'
"신전이 문을 닫기 전에 어서 가 봐."
"하지만 아까 그 여자를 다시 만나면 위험하지 않을까?"
지금 그녀를 보내서 심복에게 정보를 듣게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6일차에 미리 대비를 하고있지 않으면 쥐도새도 모르게 당할 수 있으니까.
"방에 들어가서 쉬고 있을게. 설마 기숙사까지 들어오지는 않겠지."
가능하다면 일주일의 시간 동안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 F반 학생들을 만나러 다니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일단 안전이 우선이기도 하고 마리안을 제외하면 튜토리얼 때 반드시 만나야 하는 캐릭터도 없으니까.
"그러면 데려다 줄게. 아렌은 가까운 길도 자주 헤매는 길치잖아?"
"내가 애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리안이나 다른 캐릭터에게서 비슷한 버그가 터지면 곤란했기 때문에 순순히 오필리아의 손을 잡았다.
어차피 전학생이라 남녀기숙사를 나누지 않고 1주일 동안은 바로 옆 방에서 생활하니까 말이다.
그녀는 나를 데려다주고 지금이라도 심복을 만나러 갈 거라 생각했지만, 옆 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오늘은 심복을 만나지 않고 나를 지킬 모양이었다.
"하... 자기부터 챙길 것이지."
* * *
튜토리얼 5일차가 되었다.
밖에서 다른 캐릭터들을 찾아다니는 걸 포기하고 방에서만 있었지만 의외로 심심하지는 않았다.
침대에 정좌를 취하고 앉아있으면 오행무경심법의 창이 뜨는데 몇 가지 미니게임을 하나씩 클리어하고 있으면 보상이 주어진다.
띠링
아렌의 힘이 1 상승하였습니다
그래봐야 아직까지는 능력치가 1씩 오르고 있어서 튜토리얼이 끝날 때까지 의미있을 정도로 스탯이 높지는 않겠지만, 꾸준히 반복하고 고난이도의 미니게임을 해결하게 된다면 나중에는 큰 차이를 만들어낼 것이다.
'오늘까지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겠지만'
튜토리얼 5일차, 셀레스티얼 아카데미 게임의 첫 튜토리얼 전투를 시작하게 된다.
힘과 마법이 지배하는 판타지 세계에서 고등교육기관이라는 곳은 곧 사관학교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 결과 이곳에서 요구되는 능력은 검술과 마법능력, 즉 전투력이었다.
원래는 입학 당시부터 반을 분류하고 그 동안 성장하는 학생들을 성적으로 분류하는데 우리는 전학생들이라 제대로 된 정보가 없었다.
그래서 전학생들의 수준을 파악한다는 명목에서 벌어지는 가벼운 대련이었는데 여기서 우리의 능력을 증명한다면 F반이 아니라 E, 혹은 그 이상까지도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셈이다.
'그것도 원래는 닥치고 F반으로 보내려던 것을 공작가문에서 강하게 요구하면서 승급의 기회를 주는거지만......'
어차피 내가 너무 약하기 때문에, 그리고 스토리상 오필리아가 나를 따라오기 때문에 F반에 들어가는 것이 확정이었다.
애초에 주인공의 능력치가 저질이라서 오필리아가 2 : 1을 벌여야 하는데, 튜토리얼 주제에 난이도가 미쳐 날뛴다.
셀레스티얼 아카데미는 다수의 인원으로 적을 포위하면 공격력이 오르고 숫자에 따라서 기회공격을 얻게되기 때문에 포위당하는 일을 절대적으로 피해야 하는데, 튜토리얼에서는 실질적인 전투인력이 오필리아 밖에 없으니 매번 포위당하게 된다.
후반에도 적들이 다수 나와서 포위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중반을 지나면 잘 키운 캐릭터 하나가 회피와 반격력을 키워서 다굴을 맞아도 역으로 전부 썰어버리는 플레이가 가능하지만 지금은 극초반이라 그 정도의 능력이 없으니 난이도가 미쳐날뛰는 것이다.
보통 이런 튜토리얼은 실패해도 어차피 F반인데 하면서 넘어가주는데 이 악랄한 게임은 그냥 게임오버를 시켜버린다.
즉 다굴을 맞으면 정말 끊임없이 쳐맞는건데 이 게임이 악랄한 이유는 어떠한 경우에도 주인공네 파티보다 적들의 숫자가 많다는 거다.
그나마 국지적으로 전력을 우세하게 만들어 각개격파하는 RPG의 정석으로 플레이하게 되는게 기본인 셈이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막상 튜토리얼 전투에 들어가는 순간 오필리아는 자신의 검을 뽑아들어 단신으로 두 명의 검술조교를 때려눕혔다.
원래는 턴제 SRPG였기 때문에 몇 턴 동안 공방을 나눠야 하지만 실제로 스탯에서 차이가 나고 검술이라는 수치로 드러나지 않는 기량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오필리아는 여유롭게 첫 번째 전투를 정리해버렸다.
물론 게임 플레이상으로도 오필리아 혼자서 활약하고 나는 뒤에서 숨어다니거나 보조를 하는 수준이었지만 내가 나설 것도 없이 몇 번 검도 나누지 않고 조교 두 명이 쓰러질 줄은 몰랐다.
"괜찮아? 어디 다치지 않았고?"
"이런 전투에서 다칠 리 없지..."
"응, 다행이네!"
튜토리얼 전투이기도 하고 게임 내용과도 큰 차이가 없어서 그러려니 했다.
나름대로 첫 실전이라 걱정하고 있었는데 오필리아가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면서 안심했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 날에 생겨버리고 말았다.
"오필리아?"
오늘이 바로 튜토리얼의 두 번째 전투날이었다.
원래는 어제 시험을 봤으니 나름대로 피곤함에 휴식을 취하는데, 오필리아는 교사로 위장한 거짓 편지를 받고 밖으로 나가고 그녀를 죽이려는 암살자들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원래는 심복이 교사 중에서 몇 명이 그녀를 암살하려 한다는 정보를 미리 알려주었기 때문에 무기를 가지고 나가서 응전했고, 그 상황에서 오필리아를 찾던 내가 도착하면서 포위당한 그녀를 도우면서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내용인데...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오필리아의 옷걸이에는 그녀의 검대와 검집이 걸려있었다.
원래 게임에서는 미리 암살에 대비해서 챙겨갔던 물건이 방에 남아있는 것이다.
'설마... 설마?'
그 때 마리안에게 잡혀가려던 나를 구해주기 위해 심복과의 접촉을 포기하고, 그 결과 정보를 듣지 못한 채 암살자들의 계략에 그냥 당해버리고 만 건가?
"아... 젠장!"
나는 머릿 속이 새하얗게 변하면서 그 자리에 멈춰섰다가 다시 내 방으로 들어갔다.
지이익!
그리고 내가 꺼낸 것은 99999강화가 붙어있는 낡은 목검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