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배신자는 가까이에 있다(03)
* * *
'뭔데 이게!'
혹시나 몰라서 방으로 도망친 나는 내 얼굴을 자세히 보면서 마리안에게 보였던 상태창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본인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여자 캐릭터가 아니라서 그런지 개방되지 않고 있었다.
'이상한데...? 호감도 시스템은 오필리아에게도 있을 텐데 개방되지 않았는데...?'
일단 시스템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오필리아는 호감도 '친구'에서 시작하고 아무리 낮추는 선택지만 고르고 홀대해도 그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보통은 스토리 진행을 따라 절친 단계에 도달하기는 하지만 제약은 없어서 다른 캐릭터 쳐내고 오필리아한테 몰빵하면 연인까지 올릴 수는 있지만 반역 루트를 탈 것이 아니라면 어차피 스토리상 의미없어지게 되어버리고.
'그 장대한 삽질을 했던게 1회차였지'
아니 나는 소꿉친구가 성능도 좋고 끝까지 갈 줄 알았지.
반란을 일으켜서 적대할 줄 알았나 뭐.
어쨌거나 호감도 시스템은 아까 보았을 때에도 마리안이 친구단계였고 나머지는 지인단계가 되었으니 호감도와 별개로 존재하는 시스템인 모양이었다.
일단 나에게는 뜨지 않는 시스템이란걸 확인하고 다시 밖으로 나가서 이번에는 3급 기숙사를 관리해주는 메이드 아가씨에게 다가가니 그녀에게도 하트 모양과 성향에 붉은색 글씨로 ???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지나가다 보이는 다른 학생 NPC들에게는 빈 하트가 보이지 않았다. 아주 가끔가다가 한 두 명에게 보이기는 하는데 혹시나 싶어서 가까이 다가가보면 여교사나 아카데미에서 일하는 직원들이었다.
당연히 내가 기억하는 복장보다 더욱 몸매를 강조하거나, 가슴이 트여있으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유륜의 색이 살짝 도드라지는 옷으로 변경되어 있어서 이 성인모드 제작자가 어디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몇 가지 사례를 통해 곰곰히 생각한 결과 이 하트가 공개되는 조건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성인 여성에게만 나타나는 건가?'
이 기능은 아무래도 성적 취향을 드러내는 모양인데, 마리안처럼 하트가 차오르면서 ???가 공개되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하트가 차오르면 성적취향이 하나씩 추가되는 모양이었다.
'성인모드 주제에 복잡한 시스템 넣지 말라고!'
이름조차 제대로 출력되지 않아서 셁어쩌구로 나오는 주제에 왜 하트가 차오르는 기능은 멀쩡하게 돌아가는 건데?!
"그나저나 감금욕망이라니... 미친 거 아닌가?"
남동생애호가 왜 나에게 걸리는지 모르겠는데 그대로 증가하다가는 어딘가에 갇힐거라는 위기감이 들어서 일단 탈출했다.
그대로 가다가는 하트가 계속 차올라서 이상한 사고가 터질 것 같았거든.
"마리안이 초반 강캐인데다가 호감도도 올리기 쉬워서 좋았는데 이게 뭐야!"
와, 하필이면 성인이 되는 바람에 운도 없이 마리안에게 접근하기 힘들어지고 말았다.
물론 마리안 말고도 쓸만한 캐릭터는 많고, 아예 마리안처럼 추천캐릭터 수준이 아니라 필수 캐릭터로 손꼽히는 캐릭터도 있으니까.
1회차에서는 못 얻어서 개고생하면서 깼지만.
"그래... 이상한 모드를 깔라고 한 내가 나빠."
이걸 깔게 만든 아래쪽 뇌를 한 대 후려치려고 했다가 그러면 나만 아플 뿐이니까 그냥 참고 잠자리에 들었다.
어차피 마리안 데려오기도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으니까 내버려두자고.
수면시 오행무경심법의 효과로 모든 능력치이(가) 1 증가한다
아렌은(는) 동반수련공의 습득조건을 충족하였다. 사용하겠는가?
벌떡.
잠에 들려고 하는데 귀를 간지럽히는 시스템 알림에 벌떡 일어나서 여행가방에 처박아 둔 비급서를 꺼내들었다.
"동반수련공?"
동반수련이 뭔데... 라고 생각하려 했는데 책 표지에서부터 남자와 여자를 실루엣만 그려놓고는 서로의 몸을 만지면서 힘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거 대놓고... 그거지?
"와 하여간... 그래 무공이 나올거면 이 정도는 나와야지 젠장!"
이런 무공 왜 안 나오나 했다 진짜.
겉표지는 간략화되어 있었는데 내부에 들어있는 그림은 생각보다 굉장히 야릇해서 슬쩍, 몰래 야한 책을 보듯이 몇 장을 넘겨보았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아렌은(는) 동반수련공을 익혔다!
"아니 잠깐 사라지지 마!"
다만 제대로 감상하기 전에 무공비급이 사라지면서 내 몸에 흡수되어버린 것이 문제였지.
하지만 다행히, 오행무경심법과는 다르게 동반수련공은 사라지지 않고 앞장의 내용만이 지워진 채 책의 나머지가 남아있었다.
"오...?"
주인공은(는) 아직 조건이(가) 부족해서 해당 스킬을 습득할 수 없다
알았으니까 닥쳐. 지금 중요한 부분이니까.
* * *
3일차 아침이 밝았다.
거울을 보고 내 스탯이 8로 늘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오행무경심법의 효과로 매일 같이 모든 능력치가 1씩 증가하면 게임이 끝나는 2년 후에는...
'아, 그래도 잘 키운 캐릭터보다는 못하네'
역시 이 게임 주인공은 망캐다.
그래도 별다른 지원나 노력없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나쁘지 않았고, 오행무경심법이 나중에 더 많은 능력치를 올려줄 수는 있으니 늘어나서 나쁠 것은 없었다.
위험하다 싶으면 안되면 목검 꺼내들고 칼춤추면 되고. 최종보스 피가 5만쯤인데 99999강 목검을 어떻게 막을 건데.
똑똑똑.
"아렌~ 아직도 자는 건 아니지?"
"일어났어. 금방 나갈게."
오늘은 전학수속 절차를 밟아야 하기 때문에 오필리아랑 같이 F반의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야 했다.
게임에서는 한 두 줄 정도로 오늘 오전 내내 수속을 밟으면서 기다렸다고 하지만, 막상 그 일을 실제로 겪으니 중간중간에 사인하고 질문에 대답도 하고 하는 사람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아... 스킵하고 싶다...'
다른 편의성 모드는 거의 적용되는데 스킵은 왜 없을까.
시간 가속이라던가 이런 이름으로 하나쯤은 존재할 것 같은데.
"둘 다 수고했어. 셀레스티얼 아카데미에 전학생이라니, 전례가 없던 일이라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았지 뭐야."
진한 보라색의 기운이 감도는 짙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묶은 사람이 F반의 담임인 카렌 선생님이었다.
당연히 성인이기 때문에 성인모드가 적용되어, 원래도 꽤나 몸매가 드러나는 섹시한 여성의 복장이었지만 지금은 무슨 악의 조직에서 등장하는 여간부처럼 수영복에 가까운 복장을 입고 있는 바람에 처음 보는 순간부터 당황하기는 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이 복장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지나다니고 있어서 나도 최대한 티를 안내려고 노력하고 있기는 한데......
딱 사람의 눈이 닿기 좋은 위치에서 적갈색의 옅은 무언가가이 아른거리고 있으면 남자로써 다른 일에 집중하기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셀레스티얼 아카데미에 온 것을 환영해."
카렌의 호감도가 '지인'단계가 되었습니다
혹시 몰라서 카렌 선생님의 얼굴 옆에 떠오른 하트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첫 번째 하트의 가장 밑을 살짝 채우고 있기는 하지만 마리안 같은 버그성 사태와는 다르게 새로 차오르지 않는 상태였으니 안심하고 일상생활에 전념할 수 있겠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카렌 선생님."
"그래 그래. 앞으로도 잘 해보자? 아렌, 그리고 오필리아."
카렌의 호감도가 '친구'단계가 되었습니다
호감도가 오르는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데 하트는 아주 살짝 오르기만 할 뿐 여전히 밑바닥에서 찰랑거리는 수준이었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마리안이 버그 터진거고'
원래 이 아카데미의 선생님 캐릭터는 한 명을 제외하면 공략할 수 없는 캐릭터지만 하트가 떠있다는 것은 다른 방면으로는 공략이 된다는 거겠지 싶었다.
그렇게 오전 내내 붙잡혀서 등록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오필리아가 잠시 나와 거리를 벌렸다.
"혼자서 돌아갈 수 있지?"
"어디 다녀오게?"
"으응... 신전에. 어제 짐 정리하다가 손목을 삐끗했나봐."
그렇게 말하면서 혀를 살짝 내밀면서 실수했다는 표정을 짓는데 저걸 실제로 하는 사람 처음 본다.
근데 왜 또 이게 어울리냐고. 얼굴이 미형이라 그런가?
"그래. 다녀와."
어차피 오필리아가 가는 곳은 이미 알고 있었다.
르넬리안 공작가에서 보낸 사람과 접촉해서 이야기를 들으러 가는거다.
그래서 1회차 때에는 오필리아 어디갔지 하면서 다닐 수 있는 곳을 모조리 돌아다녀도 찾을 수 없었는데, 잠깐 무대에서 퇴장한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애초에 지금은 능력치가 차이나서 몰래 미행해봐야 걸릴거고'
"그럼 저녁에 봐~"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몸을 돌린 오필리아가 빠른 걸음으로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곧 있을 첫번째 전투를 대비해서 99999목검을 대신할 새로운 무기를 찾아야 했다.
"아."
아주 우연히, 하트 두 개가 가득 차있는 마리안과 정면으로 마주치지 않았다면 말이다.
쿼터뷰 시점으로 구별하기 쉽게 만들기 위해 주요 캐릭터들의 머리색은 중복되지 않도록 알록달록하게 만들었으니 색으로도 구별이 쉬웠고 무엇보다 다른 학생들에 비해 사복이 굉장히 아슬아슬하게 드러나 있어서 보는 순간 달랐다.
마치 총싸움 게임에 헐거벗은 여자가 나오는 것처럼 이질적인 느낌이라고 할까.
'어째서 여기에.....'
아니지, 생각해보면 여기는 교사들이 일하는 건물이니 반장자리에 있는 마리안이 담임 선생님인 카렌에게 호출되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원래 반장이라는 자리는 학생과 선생님의 중간 단계에 있는 박쥐 같은 위치니까, 교실에서 등장할 확률 절반 교무실에서 등장할 확률이 절반인 슈뢰딩거의 반장 같은 것이 아닌가.
"안녕. 아렌이었지?"
"마리안."
"응. 기억해주고 있었네?"
약간 거리를 둔 채 인사를 나누니 하트도 차오르지 않고 무난하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처음 안면을 트고 두 번째로 만날 때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 수준?
애초에 붙임성도 좋고 주인공과 몇 마디만 해도 호감이 오르는 쉬운 캐릭터니까 특별한 대사도 나오지 않지만.
'휴우... 안심해도 되려나...?'
"아카데미 내부에 대해서 잘 모르지? 직접 안내해줄까?"
"아니."
혹시라도 저 하트가 차오르면 안 되기 때문에 나는 딱 잘라서 거절해버렸다.
하지만 서로의 거리가 내 걸음 기준 다섯걸음 이내로 가까워지는 순간 그녀의 하트가 또 다시 미친 듯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띠링!
시스템 알림음이 이렇게 불길하게 들리기는 처음이었다.
마리안의 호감도가 '지인'단계가 되었습니다
'어라... 대답을 잘못했나?'
나는 가장 먼저 거리를 벌리려고 했지 차갑게 대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선택에서 실수하는 바람에 마리안의 호감도를 친구에서 지인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원래 이런 거부의사로 호감도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극히 미미한 수준일텐데 친구 단계로 오른 마리안의 호감도가 아슬아슬하게 친구 단계를 넘을 정도였나보다.
약간만 떨어져도 바로 지인으로 강등되는 수준이었나보다.
'하지만 오히려 좋아. 호감도가 떨어졌으면 하트는...'
아까 카렌 선생님의 사례로 보아서 호감도와 저 하트가 별개라는 사실은 알았는데, 나 지금 마리안에게 대놓고 거절하면서 불쾌하게 만들었잖아?
그러면 자연스럽게 하트도 떨어지지 않을까 했는... 데...
'왜 저 하트는 벌써 세 번째 끝까지 차오르냐고!!'
띠링!
셁겕겪 3단계 : 너 will see 너의 opponent more often
......시스템이 너무 흥분했나보다. 갑자기 영어를 쓰는거 보니.
'그리고 왜 호칭이 '너'인 건데. You를 번역기로 돌린 거냐?'
게다가 글자로 알려줘도 번역기로 해석할까 말까인데 빠르게 시스템 언어로 지나가는 바람에 제대로 못 들었어!
내가 시스템 메시지를 듣고 당황하는 동안 눈동자 전체에 하트가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마리안은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남동생 애호에 다른 글씨가 덮여지면서 변경되고 있었는데, 변경되는 내용을 보고 있으니 당장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남동생집착]
남동생집착 : 남동생이라고 생각한 상대에게 집착한다. 남동생으로 판단한 상대에게도 같은 성향을 보인다
아 그게 나야? 왜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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