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배신자는 가까이에 있다(02)
* * *
"그럼 실례할게. 갈 곳이 있거든."
튜토리얼이 끝났으니 오필리아랑은 바이바이다.
초반 튜토리얼이라 할 수 있는 두 개의 전투에서는 오필리아랑 둘이서만 지나가야 하겠지만 육성을 최대한 주인공, 즉 내쪽으로 몰아줘야지.
잔인해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오필리아는 나중에 보스 보정받고 나오면 아군 캐릭터를 한 턴에 3명씩 갈아마시는 미친 년이 되거든.
그래서 초반 전투 난이도라도 낮추려면 최대한 성장의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얼마나 호감도를 올리더라도 오필리아의 생일이 되면 스토리상 무조건 배신한다는 점이 가장 컸고.
"아렌."
하루가 빠진만큼 바쁘게 호감도를 쌓기 위해 몸을 돌리던 나를 오필리아의 목소리가 멈춰세웠다.
지금도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기에 효율을 위해서라면 대화를 무시하고 떠나야 했지만무언가 애절한 듯한, 그리고 아쉬운 듯한 그 눈동자를 보면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초반부에는 항상 밝고 활발하게 주변 분위기를 좌우하던 그녀에게서 왠지 모르게 후반부 오필리아에게서나 느껴지는 슬픈 기운을 느꼈기 때문일까.
"조금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아..."
그러고 보니 주인공은 생일이 빨라서, 게임 시작되는 시기가 성년식을 치르는 날이었다.
하필이면 그 날에 셀레스티얼 아카데미에 전학오는 바람에 아무도 생일을 챙겨주지 못했지만.
1회차에서 오필리아와 말을 해도 생일을 지나가서 미안하다는 소리만 했지 아무것도 없었지만 2회차 특전인지 아니면......
'게임상에서는 생략되고 넘어간 것일지도 모르지'
오필리아의 손에는 작은 브로치가 들려있었다.
곳곳에 흠집이 나 있고 보석도 떨어져 나가서 흉물스러워 보이는 물건이지만, 원래 이 물건은 오필리아가 공작영애에서 스스로 반역을 선포하고 공작, 아니 공왕이 죽으면서 여왕을 참칭할 때에도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주인공도 무음으로 처리된 이벤트를 끝내고 이 낡은 브로치를 따로 챙겨서 손수 보관하는 장면이 나오고.
반역 루트를 진행하지 않아서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보통 이런 특별한 물건에는 숨겨진 사연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걸... 준다고?"
"왜? 너무 낡아서 싫은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그렇다면 아렌이 받아주면 기쁠 것 같아."
배시시 웃으면서 내밀어진 손을 보면서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응. 고마워 오필리아."
환하게 웃는 오필리아를 보면서 왠지 미래를 아는 것도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반역 루트는 안 갈 거지만.
* * *
오필리아와 헤어진 아카데미 분수대 인근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여학생 NPC들의 대화를 주워듣는다.
게임에서는 근처에만 가도 이벤트로 대사창이 뜨지만 지금은 아니었으니까, 직접 해당 대사를 주워들어야 해서 주변에서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정도로 NPC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
다행히 5분 정도 철판을 깔고 기다린 끝에 F반 주제에 생일파티를 한다, 라는 소문을 들었다.
'아카데미 내부의 3급 카페...'
원래는 전학온지 얼마 안 되었다는 명목으로 다른 지역은 출입금지가 되어 있었지만 왜 이곳만 해금되어 있는지 1회차에서 궁금하게 여겼는데, 이 이벤트 때문에 만들어진 장소였나보다.
아, 그리고 여기서 3급이란 1급 2급 3급의 그 3급이 맞다.
애초에 셀레스티얼 아카데미는 철저하게 급수를 나누기 때문에 A반과 B반은 1급, C반과 D반은 2급, E반과 F반은 3급시설만 이용할 수 있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시설이 더 좋아지고 제공하는 서비스나 물품들도 좋아지지만 당연히 어느 정도 공적을 쌓지 않으면 이용할 수 없는 구역이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더니. 3급 시설 낡은거 봐...'
모니터로 볼 때에는 나름대로 엔틱한 감성이니 뭐니 하면서 3급 시설을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헌데 막상 실제 사용해보니 일단 의자부터 삐걱거리고 테이블도 군데군데 벌레구멍이 나 있으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꾸준히 노가다해도 1급 지역 이용하려면 2학기는 되어야 하겠지'
아무일 없이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마다 반 대항전을 벌여서 승리하더라도 3급에서 2급, 2급에서 1급 시설 사용권으로 올라가려면 최소 2학기다.
뭐 그건 나중의 일이고, 이런 초라한 카페에서 즐거운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세 명의 학생들이 보였다.
오늘이 휴일이라 그런지 각자 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게임상에서는 휴일에 만나면 자주 보았던 복장이라 보는 순간 왠지 반가운 기분이 먼저 들었다.
가운데에서 미소짓고 있는 옅은 생기를 띄고 있는 흰 머리의 여학생이 반장 마리안.
맞은편에서 박수를 쳐주고 있는 키 큰 남학생이 홀리오.
옆에서 자기 생일인 것처럼 즐거워하고 있는 어린애 같은 여학생이 세리였다.
마리안은 [검의 명가]스킬을 가지고 있어서 검을 들 경우 공격력도 강해지고 회피와 방어율도 올라간다.
덕분에 초반부터 필요한 능력치만 빠르게 올릴 수 있어서 초반에 레벨을 많이 올려두면 후반에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홀리오나 세리는 성능이 별로 좋지 않았기는 했는데 마리안을 공략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때문에 전력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지금 상황에서는 친해져서 나쁠 것이 없었지.
다만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끼어들지?'
게임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벤트가 발생해서 생일파티에 끼어드는데, 막상 실제로 끼어들려고 하니 다가갈 방법이 없었다.
엉거주춤 카페에서 눈치를 보면서 마리안네 일행을 힐끔힐끔 돌아보고 있을 때, 생일선물을 받고 있던 마리안과 정확하게 눈을 마주쳤다.
"어라, 너 우리 F반으로 들어오는 전학생이지?"
다행히 내가 어떻게 끼어들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리안이 먼저 내 복장에 붙어있는 F반의 표식을 알아보고는 말을 걸어주고 있었다.
"입학부터 졸업까지 직통으로 구성되는 아카데미에 전학생이 들어와?"
"이번만 예외로 적용되는 특별 사항이라고 합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혼자 있으면 같이 차라도 한 잔 하겠어?"
마리안이 붙임성 좋게 나를 불러주었는데, 당연히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서 온 나로써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마리안이야."
이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애써 모르는 척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며 나도 가볍게 자신을 소개했다.
서로의 이름을 소개하는 순간, 오필리아의 얼굴 옆에 상태창이 뜨는 것처럼 마리안의 얼굴 옆에도 상태창이 떠올랐다.
'의외로 지금은 오필리아보다 낮네'
오필리아가 2인분 역할을 해줘야 하니 초반 보정을 받는다 치면 이 정도도 낮은 것은 아니었고, 검의 명가 특성으로 검을 들었을 때 능력치가 1.3배로 적용되니까 실제 성능은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
다만 무언가 신경쓰이는 점이 있다면, 원래 게임창에서 보지 못했던 특성 아래쪽의 흐릿한 글자가 마리안에게서는 조금씩 진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성향?'
질서 선, 중립 선, 혼돈 악... 뭐 그런 건가?
혹시라도 정신을 집중하면 보일까 싶어서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설명만 보이고 내용은 보이지 않았으니 일단은 포기하고 마리안에게 먼저 생일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생일이라고 들었어. 축하해 마리안."
띠링.
그 순간 경쾌한 시스템 알림음과 함께 취향 옆쪽에 [???]라고 적힌 붉은 글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리안의 셁겕겪 기능이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셁겕겪이 뭔데 시발. 이래서 외국어를 외국어로 바꾸고 또 한국어로 번역하면 안 되는 거다.
그리고는 왠지 모르게 마리안의 치마가 말려 올라가면서 원래는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스커트가 거의 허벅지를 겨우 가릴 정도로 짧아지고, 가슴골이 깊이 패이기 시작했다.
마리안의 사복은 모범생답게 펑퍼짐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 조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리가 잘록하게 잡아당겨지고 그에 비해서 가슴은 천이 조여들면서 조금씩 가슴덩어리의 질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원래도 옷차림 밖으로 드러나는 흉부 그림자가 짙은 마리안이기는 했지만 '숨겨진 글래머'같은 복장이라면 지금은 대놓고 가슴과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고, 그 아래로는 잘 단련된 탄탄한 허벅지를 강조하고 있었다.
'아... 그렇지. 그러고 보니 나... 성인모드 깔았구나...'
지금까지는 다른 캐릭터들의 변화가 없어서 몰랐는데, 마리안이 생일축하를 받고 성인으로 인증받는 순간 바로 복장이 변한 모양이었다.
물론 이 사복이 천박할 정도로 벗겨진 물건은 아니었지만, 막상 눈 앞에서 이렇게 변하니 가슴도 크게 패이고 치마도 짧아서 눈을 어디다 둬야 하는지 모를 상태가 되어버렸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하니?"
"아니... 아무것도 아닌데..."
해금된 기능 셁겕격이 성인모드 관련된 기능인가보다.
기능이 해금되면서 그녀의 상태창 옆에 무언가 비어있음을 드러내는 듯이 검게 칠해진 입체적인 하트가 5칸 등장했는데, 그 중 하나가 지금 실시간으로 차오르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호감도를 드러내는 건가?'
하지만 호감도는 중간에 대화나 이벤트가 끝나면 시스템 설명으로 관계가 변경되었음을 알려준다.
원수 적대 불편 중립 지인 친구 절친 연인의 순서로 진행되게 되는데?
만약 이 하트가 호감도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8칸으로 나누어져 있어야 하는데 왜 5칸으로 나누어져 있는 걸까?
아니면 여러 편의성 모드로 인해서 세분화된 호감도인가?
"앞으로도 잘 부탁해 아렌."
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다시 게임 시스템 특유의 띠링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마리안의 호감도가 '친구'단계가 되었습니다
홀리오의 호감도가 '지인'단계가 되었습니다
세리의 호감도가 '지인'단계가 되었습니다
이벤트가 성공적으로 적용되면서 마리안과 그 일행의 호감도가 상승했다는 소리가 들렸지만 하트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이렇게 옆에 있으니까 아렌이 마리안 동생 같네!"
'그렇게 따지면 너도 홀리오 동생 같아...'
세리는 어차피 나랑 비슷비슷하게 작은 주제에 나를 놀리고 있었는데, 생일도 가장 느린 꼬맹이에게 이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봐야 9개월 정도 차이이기는 하지만.
'응?'
담소를 나누는 동안 마리안의 첫 번째 하트는 거의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어, 하나가 다 차올랐다'
마침내 하트 하나가 다 차오르는 순간 마리안의 눈동자에 잠깐 작은 분홍색 하트가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으로 가려져 있었던 붉은 글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동생애호]
마리안은 설정상 셀레스티얼 아카데미 1학년에 재학중인 여동생만 있는데 남동생애호라니?
역시 모드를 마구잡이로 깔았더니 뭔가 버그가 난 모양이었다.
뭐 생각해보면 마리안의 분류를 따지자면 누님계 캐릭터이기는 하다. 어차피 캐릭터 설정상 주인공과 동년배라서 큰 의미는 없지만.
남동생애호 : 남동생을 좋아한다. 남동생 의외의 존재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다
그리고 하트가 채워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는데 이것도 버근가 싶어서 고민하는 동안 벌써 두 번째 칸이 채워지고 있었다.
"어?"
그리고 ???로 가려진 붉은 글씨가 새로 등장하면서 하트가 채워지는 속도가 더욱 가속되어서 벌써 2번째 하트가 완전히 차올라버리고 말았다.
"아!"
마리안의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그녀의 눈동자에 아까보다 커다란 하트가 떠올랐다가,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랜 잔상을 남기면서 사라졌다.
그와 함께 아까처럼 ???로 가려져 있던 붉은 글씨가 공개되었는데, 그걸 보는 순간 나는 바로 몸을 일으켜서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 그럼 불청객은 이만!"
내 눈에 보이는 마리안의 상태창을 보면서 하트가 더 채워지기 전에 도망가듯 자리를 비웠다.
새롭게 공개된 붉은 글씨는 [감금욕망]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