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신
* * *
비행기 추락에 휘말린 순간, 현재는 분명히 죽었다. 그 몸을 이루던 모든 것은 산산이 부숴져 남김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 영혼만은 남아 흩어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한 채 무구한 세월을 지나 차원을 넘어서 다른 세계에까지 전해졌다.
그의 영혼은 특별히 튼튼하고 선명했기 때문에. 어째서 그리 튼튼하고 선명했는가 하면, 태어날 때부터 그랬을 것이다.
그 누구도 가지지 못했을, 살아있을 때는 드러나지 않았던 현재만의 특별한 재능. 그것은 '이세계 전생의 재능'이었다.
다른 누가 불러주지 않아도,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삶을 이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영혼. 긴 세월이 흘러 다른 세계로 전이된 영혼은 깊이 잠들어있던 여신의 신력과 합쳐져 그 몸을 재현해냈다.
즉, 신체가 통째로 차원을 넘어온 것이 아니라 영혼이 가지고 있던 기억으로 몸이 재구성된 것이었다. 모르던 세계의 언어와 문자를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신체의 재료를 제공한 여신의 덕분인 것이다.
그러나 당시 물의 여신은 정체를 숨기고 힘을 비축하느라 의식이 깊게 침잠한 상태. 그래서 그녀는 현재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다.
3년간 구르며 분노와 고통과 복수심, 악의를 키워낸 현재는 마침내 '자신의 안에 원래부터 있던 여신'을 깨웠다. 엘프에 대한 분노, 복수심과 악의만이 가득한 복수의 여신을.
그때 물의 여신은 착각한 것이다. 자신이 그 부름에 의해 '바깥으로부터' 들어왔노라고.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현재와 함께 했다.
"이건?"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은, 신의 현체가 강림해도 사라지지 않은 현재의 영혼이 이번에는 반대로 여신에게 기억을 쑤셔넣었다.
"으으윽!"
엘프의 신에게 살해당해 산산조각났다가, 수천 년의 세월에 걸쳐 이어 붙인 여신의 영혼이, 하필 방금 대지의 여신을 삼키는 바람에 불안정해진 그 영혼에 균열이 갔다.
"그아악!"
그 충격이 현재의 영혼에도 들이닥쳤다. 무려 두 여신의 영혼을 한 몸에 품은 탓에 차원 이동보다도 훨씬 거대한 부하가 영혼에 걸렸다.
"현재야!"
미아는 괴로워하는 현재를 보며 무언가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옆에서 응원을 하는 것 뿐.
"힘내! 지지 마!"
그리고 베르딜리온이 앞으로 나섰다. 검은 비늘과 파충류 특유의 섬뜩한 세로 눈, 그러나 외로움을 많이 타는 드래곤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거야?"
"애초에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답니다. 하지만, 이건 당신들이 짊어져야 할 무게가 아니에요. 모든 것은 다, 신들의 수장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저의 잘못."
파탈리테의 물음에 베르딜리온은 담담히 답했다.
"그러니까 제가 모두 해결해야 한답니다."
"신화고 전설이고, 전부 믿을 게 못되네."
드래곤은 애초에 다섯번째 인류가 아니었다. 신들보다 위에 있던, 그들을 이끌던 존재. 그녀는 반란으로 제압당하고 힘을 빼앗겨 한 단계 낮은 존재가 된 뒤, 누구에게도 다가갈 수 없도록 유폐당하고, 전설마저 날조당해 그 격의 드높음과 긍지마저 훼손당했다.
네 주신이 힘을 합쳐 겨우 봉인한 존재가, 그마저도 완전히 없애지 못한 존재가 겨우 인류의 한 측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드래곤은 지금, 책임을 지기 위해 모든 일을 떠맡겠다고 나섰다.
그런 각오에 인간과의 유대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녀는 이 모든 일을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기로 했던 것이다.
"내가 절반 맡을게."
그런 베르딜리온에게 파탈리테는 제안했다.
"신이 아닌 몸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일 텐데요?"
"이 몸은 일만이 넘는 엘프를 제물로 바쳐, 신이 되는 것을 목표로 개조한 신체야. 그러니까 하나의 신은 분명히 담을 수 있어."
"아아."
"공짜로 하겠다는 것도 아니야. 나는 엘프의 구원을 위해. 엘프가 받은 저주를 전부 풀기 위해 신의 힘이 필요해."
"그렇다면 좋아요. 제가 절반, 당신이 절반. 그렇게 하죠."
그것은 베르딜리온에게 매우 반가운 제안이었다. 아무리 신들의 수장이었던 그녀라 해도 몸에 주신 둘 만큼의 힘을 품는 것은 해선 안될 짓이었다. 아무리 한쪽은 약화된 상태라 해도, 받아들이는 순간 견딜 수 없는 중압과 힘의 격류로 인해 자아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일 터.
하지만 절반, 나눠가준다면 감사할 일이다. 주신의 힘이 영문 모를 타인에게 넘어가는 것은 허락할 수 없지만, 파탈리테가 어떤 이인지는 여태까지의 모험으로 충분히 알았다.
파탈리테는 동료를 사랑하고 일족을 사랑하고 한 남자를 사랑한, 아주 사랑이 넘치는 엘프였다.
'그녀라면 분명, 이 시련을 이겨내 줄 거야.'
인류, 엘프의 몸으로 주신의 힘을 견뎌내는 시련. 그것을 파탈리테라면 분명 견뎌내주리라고 믿으며, 베르딜리온은 여태까지 사용했던 모든 마법을 합친 것보다 훨씬 거대한 마법을 펼쳤다.
"그으으아아아악!"
현재의 몸으로부터 신의 기운이 빨려나갔다. 절반은 베르딜리온, 절반은 파탈리테에게로.
"꺄아아아아아악!"
물의 여신 알파니가 지르는 비명이 현재의 입에서 흘러나오다가, 뚝 끊겼다. 그녀의 힘은 모조리 베르딜리온에게 흡수되었고, 그 자아마저 빼앗겼다.
"미안하구나. 나의 아이야. 제대로 너희를 이끌지 못한 나를 용서하지 마렴."
베르딜리온은 그 영혼을 제 몸에 온전히 품었다.
그리고 파탈리테는, 나머지 반쪽, 대지의 여신 헬레니의 힘을 모조리 받았다.
고블린에게 배신 당해 그 종족 전체를 증오하게 된 미친 여신, 알파니의 증오를 나눠받아 엘프 또한 증오하게 된 그 여신은 파탈리테를 죽이고 그 몸을 빼앗으려 했다.
"내놔! 나의 몸! 나의 영혼! 내 몫의 원한!"
"안돼."
그 몸 내부에서 일어나는 격한 싸움, 그것은 본래 신의 수장인 베르딜리온과 심각하게 약화된 알파니의 싸움처럼 쉽게 끝나지 않았다.
명백하게 불리한 쪽은 파탈리테, 겨우 13만 분의 영혼을 지닌 쪽. 다른 한쪽은 대지의 여신, 이 대륙의 모든 땅을 지배하는 주신.
"나는! 모든 땅을 황폐하게 해 모든 생물이 죗값을 치르게 할!"
"안돼."
그러나 파탈리테는 지지 않았다. 질 수 없었다.
"한낱 엘프 주제에!"
"미안하지만, 나는 하나가 아니야."
1만의 엘프를, 10만의 인간을 죽인 파탈리테의 혼은 그 죗값만큼 무거웠다. 겨우 그런 숫자가 주신의 힘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내가 져버리면, 엄청 민폐니까, 그래서 안돼."
이대로 사라지고 싶지 않아서, 누군가와 계속 함께 하고 싶어서 그녀는 싸웠다.
"이제 그만 잠들도록 해."
너무 대단한 이들을 만났다. 자신 같은 건 초라해보일 것 같이 강한 사람들을. 그들을 보고서 생각했다. 나도, 저 그림의 한 켠에 끼어있을 수만 있다면 정말로 행복할 텐데.
잠시, 엘프의 숙원을 잊어버릴 정도로 빠져버렸었기에, 이제 와서 그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13만의 목숨값보다 그녀 자신의 욕망이 더 강렬하게, 지금 그녀를 지탱하고 힘을 주고 있었다.
"나는, 절대로 양보 못해."
"그아아아아앗!"
대지의 여신은 느릿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주도권을 파탈리테에게 빼앗기고 있었다.
애초에,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기만 하는 신이 모두를 열렬히 사랑하는 엘프를 이길 수는 없었던 거다.
"아……."
파탈리테는 제 몸을 빼앗으려 날뛰던 여신의 의지가 사라지고, 대신 전능에 가까운 무한한 힘이 몸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녀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사라져라."
그녀가 땅에 손을 짚었을 때, 거대한 신력이 몸으로부터 빠져나갔다.
대지를 통해 전해진 축복은 이 대륙에 발을 딛고 있는 모든 엘프가 받은 저주를 사라지게 했다.
처음엔 하나, 이내 수십, 수백 수천 수만, 이윽고 모든 엘프가 제 몸을 얽매이던 저주가 사라졌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몇몇은 기억하겠지. 엘프에게 걸린 저주를 풀기 위해 모든 동족의 희망을 혼자 짊어지고 싸웠던, 그들의 여왕이며 대전사고 산제물이었던 엘프 하나를.
그 작은 몸에 너무 많은 무게를 업었던 엘프들의 대표자를.
"후우……."
숙원을 달성한 파탈리테의 눈에 눈물이 주르륵 타고 흘렀다.
"축하해요."
파탈리테와는 달리 매우 쉽게 물의 여신을 지배한 베르딜리온은 박수를 치며 파탈리테를 축하해줬다.
"물의 여신 된 자로서, 사막에 다시 호수가 차오르고 강이 흐르며 비가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베르딜리온이 선언하고 신력을 풀자 저멀리 서쪽에 있는 사막지대에 급격하게 비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너무나 먼 곳, 지금 보일리 없는 그곳에서 엘프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파탈리테는 들을 수 있었다.
모든 땅, 모든 흙이 다 그녀의 귀이기에, 특별한 누구를 찾는 건 애먹을 일이지만 그저 수많은 엘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
그녀는 얼떨떨했다. 항상 품고 있었지만 실은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런 약한 마음을 떨쳐내기 위해 수만 번은 자신을 학대해야 했던 숙원이, 이곳에서 이렇게 이루어졌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서.
꿈이 아닌가, 자신의 몸을 꼬집어 보고, 지금 쉬는 이 숨과 몸을 흐르는 신의 힘 하나하나를 애절히 느끼다가, 눈가에 흐르는 물을 닦아내고 간신히 눈을 똑바로 떴다.
"됐구나. 정말로."
"그래요."
우는 파탈리테를 베르딜리온은 품에 안아주었다. 꼭, 자애로운 어머니가 놀란 딸을 달래듯이. 그러나 나쁜 일이 아니라, 너무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기에 기쁜 딸을 달래주듯이. 기쁨을 함께 나누듯이.
"그런데 현재는?"
숙원의 기쁨을 재빨리도 떨쳐내고, 파탈리테는 현재를 향해 다가갔다.
현재는, 매우 당황스러운 표정을 하고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의 미아는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짓고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현재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기억이, 거의 없대."
그 말대로 현재는 상당히 얼 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치, 이런 세계 따위는 처음 본다는 듯이.
"뭐?"
"그의 몸을 만들고 유지해주었던 것은 물의 여신, 그 힘이 송두리째 뜯겨 나갔으니 몸이 멀쩡하지 못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겠죠."
베르딜리온의 설명에 미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되돌릴 수는 없는 거야?"
"그 부분을 돌려줬다간 또 여신과 주도권을 두고 싸움을 해야 할 테니, 지금으로써는 방법이 없네요."
"그럴 수가!"
미아는 슬퍼했다.
"여긴 대체 어디죠? 당신들은 대체, 누구?"
"저는 당신의 마법 스승이랍니다."
베르딜리온이 웃으며, 새로이 자신을 현재에게 소개했다.
"나는 너의 꿈을 반쪽 나눠 가진 동료."
파탈리테는 간질거리는 마음을 다 숨기지 못하고, 걱정 반 기쁨 반 쯤 되는 감정으로 그렇게 현재에게 전했다.
"나는, 네가 가장 사랑하던 정실부인이야."
마지막으로 미아의 소개에 현재는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실부인이라니? 내가 일부다처제를?"
"무슨 소리야. 현재가 살던 세계에서 그건 당연한 일이라 했잖아."
"아니, 한국은 일부일처제인데."
갑자기 현재 자신에 의해 드러나는 과거의 거짓말. 그 말에 미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나쁜 새끼."
미아는 현재에게 딱 달라붙어 그를 잔뜩 노려보며 말했다.
"내 가슴에 피어싱도 달고, 배에는 낙인을 새기고, 몸은 이렇게 야하게 만들었으면서 전부 잊어버렸다고 할 거야?"
"아니, 내가 그런 짓을?"
3년분, 어쩌면 그 이상의 기억이 날아간 현재는 당황했다. 그는 이 세계로 처음 떨어지던 때처럼, 준법시민 유현재로 돌아와있었기 때문이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해."
물론, 전부 다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기억은 조각조각, 일부는 사라지고 일부는 남아있었기에.
"미아 너 주인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응?"
미아는 현재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그녀는 기억을 잃은 후의 현재에게 자기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리 와."
현재는 미아를 불러, 꼭 끌어안았다가, 포옹이 끝나기 무섭게 입을 맞췄다.
"여전히 건강하시네요."
"봐봐, 기억 좀 날아간 거 별 일 아니라니까? 본성이 그대로인데 뭐 어때."
베르딜리온과 파탈리테는 그리 말하고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드넓은 신전, 여신의 침소, 그 어마어마하게 넓은 침대는 통째로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절대 도망 못쳐."
미아는 씨익 웃었다.
"죽으면 지옥까지, 다른 세계로 가버리면 그 세계까지, 절대 놓치지 않고 따라갈 테니까."
현재는, 왠지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뭔가, 절대로 놓지 않는 개에 물린 듯한 느낌?
'하지만, 아주 귀여운 강아지네.'
그것은 아주 행복한 소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