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여신
* * *
'어째서 이 인간은 사라지지 않는 거지?'
물의 여신 알파니는 당황했다. 자신은 아무리 몰락했어도 한때 주신의 일익을 담당했던 존재, 그런 정신체가 몸에 강림하면 인간의 인격 따위 순식간에 소멸해버리는 게 당연했다.
"내 몸속에 거대한 신력이 침입했어. 바깥에서 들어오는 거라면 처단할 수 있겠지만, 안에서부터 퍼져나가는 건 해결하는데 시간이 필요해!"
"다 나를 강간한 탓이라는 거잖아! 미친 창녀 여신!"
대지의 여신 헤레니의 대답에 현재는 화를 냈다. 그러자 헤레니도 현재에게 화를 냈다.
"다 네가 좆대가리를 막 놀린 것 때문에!"
순식간에 소멸했어야 마땅한 현재는 대지의 여신과 서로 투닥일 정도로 확고하게 의식이 남아 있었고, 심지어는 물의 여신과 몸의 주도권을 두고 다툴 정도로 멀쩡했다.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 건데!"
"추가 공격을 받지 않는다면 30분!"
"존나게 기네 시팔! 그 시간이면 물의 여신 30명은 잡을 듯!"
"신들의 30분은 인간으로 치면 1초보다 더 짧은 시간이거든!"
"또 좆같은 수명론! 30분은 30분이지 뭔 1초야 시발년아!"
'이 천박한 인간의 대체 어디가 특별해서?'
물의 여신인 자신이 현재의 자아를 지배하지 못하는 게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무어냐, 너는, 어째서 사라지지 않는 거냐?"
"억울하니까!"
현재는 부르짖었다.
"아직 내 새끼도 못 봤고, 친구 소원도 못 이뤄줬고, 여자친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도 못했으니까! 아직 못 뒤진다!"
"웃기는 소리! 그런 건 모든 인간이 다 가진 소망이다! 그러나 그 중 누구도 나의 존재를 버틸 수는 없어!"
"그럼 내가 제일 간절한가 보지!"
물의 여신의 대부분의 힘은 대지의 여신을 공격하는데 쓰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현재와 주도권을 두고 싸우는 부분은 극히 일부.
그러나 너무도 쉬우리라 확신했던 그 부분에서 현재에게 태클을 걸리고 있던 것이었다. 고려조차 하지 않았던 가장 쉬운 부분이, 지금 이 순간 물의 신이 수천 년간 세워온 계획을 전부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안돼! 나의 원한은 이 세계를 무너뜨릴 정도로 깊다! 겨우 인간의 욕망에 지는 건 있을 수 없어!"
믿었던 엘프에게 배신 당해 죽어버렸던 기억, 모든 힘을 잃었던 상실감, 그 후에 느껴야 했던 무력감, 몰락이 가져다준 치욕감, 그 모든 것을 원동력 삼아 그녀는 끈질기게 이 세계에 남아있었다.
자신이 죽도록 내버려둔 주신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엘프한테 좆같은 저주를 걸었으면 됐지! 미련 진짜 심하네!"
"나를 죽인 종족은 그 존재 자체가 절멸해야만 한다!"
"그 세대는 전부 다 죽었잖아! 지금 태어난 놈들은 아무 상관 없는 후손들이잖아!"
"그런 건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신의 계율은 다르다!"
"신이 인간보다 백 배는 쪼잔하다는 거냐!"
"그만! 이 몸에서! 사라져!"
물의 여신은 대지의 여신에게 쏟아붓던 신력 일부를 빼서 현재를 공격했다. 현재를 빠르게 마무리한 후 대지의 여신에게 집중하는 게 훨씬 나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오! 좋아! 조금 부담이 줄었다! 이 정도라면 금방 회복할 수 있겠구나!"
대지의 여신이 좋아라 했다.
"굿!"
그리고 현재는 멀쩡했다.
"왜냐! 왜! 왜 사라지지 않는 거냐!"
수천 년의 원한, 신의 의지, 그 모든 게 하나의 인간에게 막힌다는 것을 여신은 믿을 수 없었다.
"돌려보내주마! 네가 살던 세계로! 그러니 잠깐만 내게 몸을 넘겨!"
"응! 안 믿어!"
현재와 알파니가 서로 몸의 주도권을 두고 싸우고 있어, 현재의 몸은 제 자리에서 춤을 추듯 둠칫 두둠칫 떨렸다.
"문명도 문물도 생활도 모든 것이 그쪽 세계가 훨씬 나았을 거다! 이 세계 따위 돌아가면 금방 잊지 않겠느냐!"
"이 세계에서 벌써 소중한 게 잔뜩 생겼는데, 그걸 두고 돌아가겠냐고!"
"네 여자들도 같이 보내주마!"
현재는 솔깃했다. 그 순간 여신의 의식이 현재의 의식을 침범해 모든 걸 집어삼키려 했다.
'아차!'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쳐버린 것이 승부를 가른 요인이었다. 몸을 빼앗긴 현재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아오! 저 병신!"
대지의 여신은 달라진 현재의 기운을 눈치챘고 주도권을 물의 여신이 다 가져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훨씬 더 큰 위험에 처했음도.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다면 됐는데!"
"걱정 마. 언니. 나와 함께 하자."
물의 여신은 현재의 몸을 써서 그리 말하며 웃었다. 덩치 큰 남자가 예쁜 목소리를 내며 여자처럼 웃는 게 보기에 영 미적으로 좋지 않았다.
* * *
세 여자는 빠르게 미궁을 돌파했다. 대충 비틀린 천사 같이 생긴 괴물과 대충 뒤틀린 악마 같이 생긴 괴물들이 막아섰지만 그녀들은 강했다.
던전의 진짜 주인인 대지의 여신이 아닌 이상 그녀들을 막을 수는 없을 듯 했다.
그렇게 한시간 반 뒤, 그녀들은 마침내 대지의 여신이 기거하는 침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에 있을까?"
놀랄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었다. 하늘을 떼어다 가져다 둔 것인지 지하의 공기가 전혀 탁하지 않았다. 웅장한 신전 위로 파란 하늘빛이 세상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현재가 고대 그리스에서 입었을 법한 천 한 장짜리 옷을 입고 앉아있었다. 원래 주인인 대지의 여신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현재야!"
미아가 현재에게 달려들려 했으나 파탈리테가 그녀를 붙들었다.
"저건 이미 현재가 아니야. 신……, 분명 신에 해당하는 존재야."
"뭐?"
파탈리테의 말에 미아가 이해하지 못하겠단 표정을 보였다.
"감히 내게 칼을 꽂았던 배신자의 후예가 건방지게도 두 다리로 서있구나."
현재가 여신의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흔들자 파탈리테가 그대로 쓰러져 바닥에 머리를 쳐박았다.
"그윽!"
"속죄하면서 죽어라."
알파니는 손을 쥐었고 그러면 파탈리테가 터져 죽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부숴지지 않았다.
"고작 흡혈신의 아티팩트로 나의 권능에 저항했다고?"
의아해하던 그녀는 이내 자신의 힘을 막은 게 파탈리테가 아님을 깨달았다.
"쓸 데 없는 짓을 하는구나, 드래곤의 아이야. 너는 결국 영원히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을 지언데."
"나의 힘을 두려워해서 넷이 모여 합작을 했던 주신의 일원이 뻔뻔스럽게 설교하는 건 마음에 안 드는데?"
베르딜리온의 시선은 그 어느때보다 싸늘했다.
"나를 묶어두는 건 되고, 자기가 당한 건 그렇게 억울했냔 말이야."
"한 번 패배한 개가 다시 덤벼드는 것도 웃기는 일인데."
"주신은 넷에서 셋으로 줄었고, 너는 힘을 흡수하는 도중이라 불안정해. 이쪽에 승산이 없어보이지는 않는데?"
베르딜리온은 목에 걸려있던 목줄을 뜯어버렸다. 그녀의 억눌렸던 힘이 드러나며 순식간에 주변의 분위기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벨딜……?"
"역시 이렇게 되나."
그 분위기를 느끼는 것만으로 미아와 파탈리테는 크게 위축됐다. 그 기에 눌려 죽지 않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둘 모두 굉장히 많이 성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를 되찾고 싶다면, 저 여신을 쓰러뜨리는 수 밖에 없어. 하지만 솔직히 승산은 그리 높지 않겠지. 도망 가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지 모르는데, 어떡할래?"
베르딜리온은 두 여자에게 물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미아의 대답은 뻔했다.
"나를 도와주겠다더니, 내가 도와줘야하게 생겼잖아. 정말 허당 같은 남자야."
파탈리테는 피식 웃었다. 대답은 미아의 것과 같았다.
"도망쳐 수그려 몸을 사리면 살 수 있을 텐데, 굳이 덤벼들어 죽겠다는 거냐? 베르딜리온? 겨우 만난지 일 년도 되지 않은 미물들을 위해서?"
물의 여신 알파니는 계속 현재의 행적을 주시했기에 그 일행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같이 한 시간이 길냐 짧냐가 중요한 거야? 그보다는 얼마나 소중했는지가 중요한 거 같은데? 하긴, 그런 것도 모르니 제가 아끼던 자식들에게 뒷통수 맞고 죽기나 했겠지. 바보 여신."
베르딜리온은 오히려 알파니를 조롱했다.
"엘프에게 걸린 저주를 풀고 싶다면 그런 말도 안되는 확률의 승리에 거느니, 나한테 무릎 꿇고 비는 게 맞지 않겠느냐? 배신자의 후예야."
"이제 와서 빈다고 풀어주지도 않을 거면서."
파탈리테 또한 흔들리지 않았다.
"너를 죽이기 위해 나와 계약했던 남자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거냐? 정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인간의 아이야."
"인간의 사랑이 뭔지 모르면 말을 하지 마. 신 주제에."
미아는 여신을 비웃었다.
"그럼 결국 전부 죽이는 수 밖에 없구나."
여신 또한 그녀들을 비웃었다.
"신의 힘이 어떤 것인지 조금만 보여주마."
현재의 몸이 박수를 치자 공간이 찌그러졌다. 지하 궁전 사방에서 동시에 벽이 덮쳐들었다.
그것은 대지의 여신의 권능. 물의 여신이 방금 제 언니를 죽여서 빼앗은 힘이었다.
"크오오!"
베르딜리온이 포효하며 변신 마법을 풀었다. 아리따운 여성의 몸은 어느새 거대한 용의 현신이 되어 광택 있는 검은 비늘과 거대한 몸체를 뽐냈다. 그 입에서 냉기가 뿜어지자 다가오던 대지가 얼어붙었다.
"가세요!"
베르딜리온이 외치자 무기를 든 미아와 파탈리테가 현재에게로 쇄도했다.
바닥으로부터 기다란 금속을 뽑아낸 여신은 그것을 즉시 검으로 삼았다.
캉!
검을 부딪혔을 때 미아는 전혀 밀려나지 않았다.
베르딜리온이 동시에 미아와 파탈리테에게 힘과 속도를 불어넣어주는 버프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어떡하지! 현재 몸을 죽일 수는 없잖아!"
"적당히 뺨을 때리면 알아서 정신 차리지 않을까!"
미아와 파탈리테는 그런 소리를 했다.
"어리석긴! 너희가 사랑한 남자는 이미 죽었다! 여신의 강림을 겪고도 자아가 남아 있을 리 없지 않느냐!"
여신은 그런 말을 하여 미아와 파탈리테를 동요케 하려고 했다.
"개소리! 그럼 아직도 현재의 모습 그대로인 건 그쪽 취미란 말이냐?"
파탈리테는 단언했다. 여신이 현재의 모습을 아직 취하고 있다면, 그 몸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 것이 확실한 것이라고.
그도 그럴 것이, 드래곤도 잘만 하는 신체 변형을 여신이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너희 동료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 공격하지 못하리라 판단한 것이지. 봐라, 너희 검에 이렇게 망설임이 가득하지 않느냐?"
변명하던 여신의 뺨, 실제로는 현재의 뺨에 파탈리테의 단검이 칼자국을 남겼다. 여신이 피했기에 망정이지, 실제로는 입 길이가 다섯 배는 늘어날 뻔 했다.
"그럼 실수였네! 그 남자한테 당한 게 너무 많아서 언제 갚아줘야겠다고 생각했거든!"
파탈리테는 능욕 당하던 옛 기억을 떠올리며 의욕을 불태웠다.
"아니! 우리 현재 얼굴에 상처를 내면 어떡해!"
그런데 미아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단 정신 차리면 상처야 어떻게든 될 거다! 드래곤의 마법도 있으니까!"
"그래도 우리 현재 아야하잖아!"
"결전 중에 할 소리냐고!"
"이게 내가 노린 거다!"
당황하는 파탈리테와 콧대가 선 여신.
"꼭 내야 한다면, 내가 낼 거야."
그때, 갑자기 미아의 눈이 돌아갔다.
"현재는 나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까, 나한테 다 물들었으니까, 그 몸의 상처도 흉터도 다 내가 낸 거여야 해. 그렇지?"
여지껏 현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은 명백하게 미아. 하지만 그 몸을 여신에게 빼앗겨버리면 여신이 가장 큰 영향을 준 게 된다. 미아는 그게 참을 수 없었다.
"네 처음도 마지막도 전부 나여야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정신 차려!"
미아는 당황하는 여신의, 현재의 팔을 찔렀다. 그 아픔에 현재의 의식이 조금 부상했다.
"으윽!"
현재는 이마를 잡으며 신음했다.
"현재야! 정신 차려!"
미아가 소리쳤고 여신은 당황했다.
"뭐냐! 왜 사라지지 않은 거냐!"
"현재는 특별하니까!"
"이 별 거 아닌 인간의 어디가 특별하다는 건데!"
"그 인간 몸을 탐내는 신이 할 소리냐고!"
현재의 의식이 얼마나 많이 돌아왔는지, 그는 여신에게 따져물었다.
"너 밖에 선택할 기회가 없었으니까! 다른 신이 눈치 채지 못하는 곳에서 힘을 키우려면, 너 밖에는!"
"역시 존나게 특별한 거 맞네!"
"그건, 그냥, 다른 세계에서 왔기 때문에!"
"다른 세계에서 온 놈이 몇 명인데! 왜 나는 한 명도 못 봤는데!"
"……!"
여신은 그제서야 왜 현재가 다른 세계에서 여기까지 날아왔는지 깊이 통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세계에 있는 수많은 신비, 이변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남자는 어째서 다른 세계로 날아온 거지?'
현재는 뭔가 이상했다. 그건, 다시 말해 특별하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