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산맥의 주인
* * *
"녀석이 이렇게나 대단한 줄 알았다면 만나자마자 엘프의 저주를 풀어달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 판단되어 현재는 결국 모든 정보를 까놓고 공유하기로 했다.
파탈리테에게는 '신에게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힘을 원한다'라고 대충 둘러댔었지만, 이번 기회에 약오름의 신에게 능력치를 빌렸던 일을 까놓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걸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 모험의 진정한 목적을 알 수 없고, 그래서는 지금 당장 사막에 가지 못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모든 걸 이야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과 초반에 죽도록 고생한 이야기까지 해버린 것은, 파탈리테를 믿을 수 있는 동료라고 여기게 되어서겠지.
"진짜, 미안하다. 내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어."
현재는 자신의 모험의 진정한 목적 뿐 아니라 드래곤 벨딜과 만나 있었던 일까지 모두 이야기해주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드래곤의 제안을 무시했던 일, 엘프의 구원을 떠올리지 못했던 일. 만일 그가 드래곤의 부탁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엘프의 저주를 풀어달라 했었다면, 그건 이루어졌겠지.
비록 현재의 성향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더라도, 가능성이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램프의 요정이 주는 소원권을 날려먹은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현재는 긴장했다. 파탈리테가 그토록 원하던 엘프의 구원이 바로 눈 앞까지 다가왔었는데,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그걸 손에 넣지 못한 것이다.
파탈리테가 허무함이나 박탈감에 돌아버려도 이상하지 않다고 그렇게까지 각오했다.
"아니, 그런 극한의 상황에 아무 정보도 없이 무언가를 이루어내라는 건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업적이겠지. 나라고 해도 그런 상황에는 대처하지 못했을 거다. 오히려 그런 일을 겪고서도 숨기고 혼자 짊어지려 했던 그대의 상냥함에 감동 받았다."
파탈리테는 웃었다. 현재는 그런 패배를 겪고도 동료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혼자 숨기려고 했었다. 비록, 미아를 안전한 곳으로 쫓아내겠다며 상처를 주고 싸우는 일이 일어났지만, 그건 여러 가지 안 좋은 일들이 겹쳐 벌어진 불운한 사고였다.
그녀는 오히려 이전에 했던 말 실수를 떠올려 그것을 사과하기까지 했다.
"은총이 없는 삶을 모른다고 함부로 비난했던 일도 사과하겠다. 너는, 그런 힘든 일을 겪었었구나."
"너에 비하면 별 거 아니지. 그보다 정말 괜찮은 거냐?"
엘프가 받은 저주에 비하면 은총이 없는 것 정도야 하찮은 일. 현재는 파탈리테가 했을 실망이 더욱 신경 쓰였다.
"오히려 이런 행운에 감사한다. 아무리 레벨 300에 도달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해도, 일단 드래곤이 저주를 풀 수 있다는 걸 알아낸 것만 해도 대단한 수확 아닌가? 그리고, 엘프의 수명은 인간보단 길다. 그대가 죽고 나서라도 소원을 이룰 수 있다면 그걸로도 괜찮지 않은가?"
"재수 없게 벌써 나 죽는 소리 하지 마."
"그래. 부디, 오래 살아다오. 나는 그대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나보다는 훨씬 오래 살아주길 바란다."
"너 죽는 소리도 하지 말고."
농담을 하는 걸 보니 정말 괜찮은 모양이지, 현재는 그리 생각하며 그녀의 말을 대충 넘겼다. 파탈리테가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의 죗값을 치러야겠노라 생각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런데, 벨딜이 받은 저주를 푸는 건 어떻게 해야 하지? 애초에, 그 저주의 진짜 정체는 뭔가?"
여기도 저주, 저기도 저주. 신하고 원수 진 녀석들이 참 많구나, 하고 현재는 생각했다.
"제게 걸린 저주는 자신보다 약한 생물이 자신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 아무래도 본래의 힘인 채로는 만나는 것만으로 모두 죽어버리고 말더군요."
너무나 심하게 강한 나머지 두려움의 크기도 커 보는 순간 미쳐버리거나 죽어버릴 정도의 괴물. 본래의 벨딜은 그런 생물이었다.
"그래서 아티팩트인 복종의 고리를 통해 제 힘을 주인님 정도로 제한했죠. 그만큼 두려움이 작아져서 절 봐도 미치거나 죽지 않게 된 것이죠."
"왜 하필 나를 주인으로 고른 거야."
"저를 보고 미치거나 죽는 사람을 주인으로 삼을 수는 없잖아요? 무슨 이상한 명령을 들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치면 나한테도 무슨 이상한 명령을 들을지 모르잖아?"
"하지만 그때 주인님의 마음 속엔 여자들을 지켜야겠다 그 생각 밖에는 없었잖아요?"
"마음을 읽을 수 있었지, 너……."
현재는 당시의 속내가 전부 읽혔다고 생각하니 상당히 부끄러워졌다.
"그러니까 주인님의 여자가 되면 위험할 일은 없겠다 싶었죠!"
"맞아. 현재는 엄청 상냥한 주인님이야."
"그 이상으로 변태지만."
미아와 파탈리테가 한 마디씩 했다.
"하지만 그러면 너는 내가 강해지지 않는 편이 좋겠네? 내가 강해지다 보면 결국 다시 주변의 생물들이 다 죽어나가기 시작할 테니?"
"그렇다 해도 방법은 있답니다. 불의 신, 바람의 신, 대지의 신, 셋 중 둘 정도만 죽이면 그들이 건 저주도 풀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거에요."
"갑자기 스케일이 우주로 갔잖아."
현재가 생각한 첫번째 목표는 세 주신 중 하나의 다시 4분의 1 정도 되는 힘이었다. 그쯤 되면 한 세력에 붙기 충분하여 함부로 대해지지는 않으리라 생각했으니.
세 주신이 묶여불리지만 서로 사이가 매우 나쁜 것을 생각하면 연합하여 공격할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생각했다.
하지만 벨딜을 구하기 위해선 셋 중 둘을 죽여야 한다고 하니, 적어도 주신보다 강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주신이란 한 종족에게 전부 은총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 그런 신화적인 존재가 얼마나 강할지 현재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럼 주신을 레벨로 따지면 어느 정도인데?"
"350정도일까요?"
"뭐야, 그래선 너와 별 차이도 없잖아. 정말이야? 온대륙에 은총을 내릴 수 있을 정도의 존재가 그 정도 밖에 안된다고?"
"아까 말씀 드리지 않았나요? 신 중에서도 저를 위협할 존재는 거의 없다고. 저도 본신이라면 엘프 전체에 내릴 저주를 풀 힘 정도는 있답니다?"
"그게 전부 다 사실만 말했었던 거냐."
놀랍게도 아까부터 벨딜이 했던 말은 전부 과장 하나 없는 이야기였던 거다. 현재는 주신이라 하면 대충 만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세계의 신은 전능과는 거리가 상당히 먼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엘프가 주신 중 하나를 죽였겠지.'
뭔가 갑자기 앞으로의 여정이 희망차질 것 같은 느낌.
'잠깐 그러면 약오름의 신에게 바치는 레벨 210 분량의 능력치란 건 정말 엄청난 것인 게?'
이제 와서 생각해봤자 무얼 할까. 이미 계약은 성립됐는데.
'약오름의 신이 강해봤자 주신보다 강하겠어? 만약 내가 그 녀석보다 더 강해진다면? 계약 따위 이행할 필요 없지 않아?'
생각할 의미가 있었다. 현재는 강대한 드래곤 조력자와 함께 여신을 쓰러뜨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근데 그 신은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데?'
현재는 계약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입을 열지 않고 마음으로 간절히 빌었는데 신은 응답해왔다. 그렇다면 신은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게 분명했다.
"벨딜. 약오름의 신에게 능력을 받은 나는 언제든지 그녀에게 생각을 읽힐 수 있는 건가?"
"아니요. 이쪽도 말을 걸 마음이 있어야 하고 저쪽도 받아줄 마음이 있어야 해요. 양쪽 다 그럴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통신은 이어지지 않죠."
"그건 참 다행이군."
여행 도중 때때로 기도 올려봤지만 응답이 오지 않았던 이유가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쪽에서 계속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면, 신화적인 힘에 의해서 읽혀버릴지도?"
'역시 신을 죽일 생각을 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건가?'
현재는 긴장했다. 힘이 제한된 벨딜조차 아까 동굴 속에서 바깥에 있는 미아의 생각을 읽었다. 신의 능력이 그것보다 못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럼, 읽히지 않게 대처하는 방법은?"
"신력에 의한 간섭이니까 마력을 키우면 저항할 수 있겠죠."
결국은 강해지기 전까지는 꿈도 꾸지 말라는 소리였다.
'당분간은 그런 불경한 생각은 하지 말아야겠다.'
현재는 다짐했으나, 속 깊은 곳에서는 이렇게도 생각하고 있었다.
'굳이 전부 갚을 필요는 없는 거잖아? 애초에 말도 안되는 이자율이니.'
사람이란 간사한 존재라서 반드시 다 갚아야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자마자 그런 생각이 마음 속 깊숙이 자리잡았다.
아무튼 모두의 목적이 이렇게 명확해졌다.
현재는 1차적으로 아티팩트를 모아 능력치가 떨어진 후에도 위협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힘을 원했다. 그리고 모든 채무를 정산했을 때 능력치가 0 밑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한 충분한 능력치.
'신보다 강한 힘, 신에게 휘둘리는 게 아니라 휘두를 수도 있는 힘.'
마지막으로 신에게조차 비밀이지만, 혹시 그 능력치를 갚지 않아도 된다면 갚지 않아도 될 정도의 힘을 원했다. 그와 동시에 강해지는 조력자 벨딜이 있다면 마냥 불가능하기만 한 일은 아닐 것이다.
파탈리테는 여전히 엘프의 저주를 푸는 것이 목표였지만 선택지가 상당히 늘어났다. 하나는 이전 그대로, 파탈리테가 몸에 집어 넣은 아티팩트의 힘으로 저주를 떨쳐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는 것.
다른 하나는 벨딜의 힘을 빌리는 것, 그를 위해선 현재가 강해지거나 죽거나 둘 중의 하나가 이루어져야 했다.
'하지만 나는 역시 그대가 오래도록 살아남기를 바란다.'
물론 파탈리테는 현재를 죽게 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벨딜은 저주를 풀기를 원했지만, 일단은 누구든 함께 있고 소통하는 게 목적인 듯 했다. 앞의 두 사람에 비하면 참 태평한 소망이 아닌가 싶지만, 그 고독의 무게가 4천년에 달한다면 결코 장난 같은 이야기로 넘길 수는 없겠지.
그리고 최종적인 목적은 주신 셋 중의 둘을 죽이거나 굴복시켜 저주를 푸는 것인 듯 하니, 전체적으로 보면 가장 커다란 스케일의 목표를 가진 존재였다. 그녀 본신의 힘보다도 더욱 커다란 목표.
그리고 미아의 목표는 현재의 곁에 있는 것, 현재를 돕는 것, 현재와 사랑하는 것. 그것 뿐이었다.
"그럼 목표를 이루기 위한 첫걸음으로 아까 하던 걸 계속 해야겠지?"
여기서 아까 하던 것이란 바로 벨딜의 모유 수유였다.
"뭐라 투덜댈 수 있는 처지가 아니네……."
파탈리테는 매우 거부하고 싶었으나 종족의 구원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벨딜의 젖을 물어야 했다.
"응애! 맘마조!"
그리고 현재도 한쪽 젖을 물어 쌍둥이처럼 함께 식사를 했다. 한쪽은 거인이라 불릴 정도의 덩치 큰 남자고 다른 한쪽은 어린애와 착각할 정도의 체형이었지만.
"미아, 너도 와서 먹어."
심지어는 한쪽 젖을 연인과 나눠 먹기도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파탈리테는 기기묘묘한 상황에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젖을 먹이는 것도 꽤나 재밌네요. 보람도 있고. 모성애라는 게 막 피어오르는 기분?"
정작 젖을 물리는 벨딜은 그것조차 즐거운 모양이었다. 모두가 외눈박이인 마을에선 눈이 두 개면 병신이라더니, 파탈리테는 꼭 외눈박이 마을의 두눈박이가 된 기분이었다.
* * *
수유가 끝나고 마침내 현재 일행은 산을 내려왔다. 산맥의 아래는 드디어 고블린의 영역, 저주 받은 대지. 신에게 버림 받은 고블린들이 끝없이 번식하고 죽어가는 끔찍한 땅이었다.
"이제부터 진정한 싸움이 시작되는구나."
앞으로 펼쳐질 것은 길고도 길게 펼쳐질 싸움의 길. 현재는 등에 걸린 검의 무게를 실감하며 앞으로 나섰다.
"초입부터 고블린이 쫙 깔렸는데?"
"조심해. 하나하나는 약한 놈들이지만 어떤 함정을 깔아놨을지 모르니."
숲의 초입부터 멍청하게 생긴 눈에서 질척질척한 살기를 뿜으며 덮쳐드는 고블린들. 그 수는 서른 정도. 정찰병이라 치기엔 너무 많은 숫자 같지만, 저주 받은 대지에서 이 정도의 고블린은 그냥 기본 단위라고 보아도 좋았다.
"제가 요격할까요?"
"아니."
현재는 벨딜을 일단 제외한 채 셋이서 합을 맞춰보기로 했다. 고블린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
"짐이나 지키고 있어줘."
현재와 미아 파탈리테는 배낭을 내려놓고 무기를 꺼내들며 전투 태세를 취했다.
피슝, 싸움을 알리는 효시가 된 것은 고블린 궁수가 조잡한 활에서 쏘아낸 화살이었다. 의외로 실력자인지 현재의 머리를 노리고 똑바로 날아왔다.
팅, 그러나 아티팩트인 방패를 뚫을 수는 없는 법. 화살은 허무하게 막혔고 현재는 앞으로 돌격했다.
"크샤악!"
비명 같은 기합을 지르며 달려드는 고블린 전사, 현재는 놈이 든 나무방패 째로 몸통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이어 작고 둥근 한손 방패와 애용하는 검을 들고 미아가 달려나갔다. 그녀가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고블린의 목 혹은 심장이 하나씩 달아났다.
파탈리테는 뒤에서 활을 쐈다. 벌써부터 화살을 소모할 필요는 없지만, 이 상황을 보면 전투가 끝나고 회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화살은 백발백중. 심지어 모조리 미간에 꽂히는 탓에 추가타도 필요 없이 한 발에 하나의 고블린이 죽어나갔다.
너무도 완벽한 전투였다. 시시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