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순애조교 위강력간물-92화 (92/119)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산맥의 주인

* * *

"누구와도 섞일 수 없어 4천년간 너무나 외로웠던 벨딜은, 자신을 바깥에 데려가 줄 수 있는 현재의 존재를 알게 되고 스스로 노예가 되기로 선택했다? 요약하자면 이렇게 되는 거야?"

"아주 훌륭한 요약이에요, 미아."

자초지종을 들은 미아의 요약에 벨딜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미아는 그 몸동작조차 무서워서 현재의 등 뒤에 숨은 채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흡사 사자 앞의, 아니 드래곤 앞의 토끼 같구나.'

현재는 미아의 그 모습에서 전에는 보지 못했던 귀여움을 느꼈다.

'내가 꼭 지켜줘야 하는 아이.'

미아 또한 성인이지만 160의 키 정도는 초등학교때 진작에 넘어버렸던 현재에게 있어 그녀는 마냥 작게만 보였다. 마치, 반드시 지켜줘야 할 어린 소녀처럼. 어쩌면 그냥 사랑의 콩깍지가 씌인 걸지도 모르지만.

'그러니까 이런 위험한 모험에 데려가서는 안돼.'

현재는 생각했다. 그녀를 기꺼이 지켜낼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은 스스로의 자만이고 오만이었다고. 이번에 만난 강적이 노예가 되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변태 드래곤이 아니라 남을 노예로 만드는 게 취미인 악질 드래곤이었다면? 운이 좋아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모든 걸 다 빼앗길 뻔 했다.

"현재가 데려왔다면 믿어도 되겠지. 잘 부탁해."

두려움을 간신히 극복하고 앞에 나가 악수를 청하는 미아. 벨딜이 그 손을 마주잡아 두 사람은 악수했다.

'나는 그런 신뢰를 받아도 될 사람이 아니야.'

그 장면을 보는 현재의 마음은 착잡하고 눈빛은 그에 걸맞게 칙칙한 회색빛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미아."

길게 끌어봤자 좋을 것 없다. 마침 두 사람을 푹 재우고 난 참이니 출발하기 딱 좋은 때. 즉, 헤어지기 좋은 시간이었다.

"응?"

"역시 너는 이쯤에서 돌아가는 게 좋겠어."

"뭐라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미아였다. 그야, 이제 와서 돌아가라고 하면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당연했다. 한달 반을 넘는 시간동안 머나먼 아르젠타에서 이곳까지 계속해서 이동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돌아가라니.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서도 그 뜻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게 미아의 잘못만은 아니리라.

"그만, 아르젠타 시로 돌아가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현재야?"

미아는 이제서야 알아들었다. 이리도 정확히 설명해줬는데 알아듣지 못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납득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는 전혀 단 한 치도 현재의 말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게 그렇잖아. 나는 반드시 싸워야만 할 이유가 있고, 파탈리테도 종족의 구원을 위해 가야만 해. 그런데 너는, 이런 위험한 모험에 따라와야 할 이유가 없잖아."

"네가 있잖아. 현재야. 네가 있는 곳이 바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미아는 애써 웃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도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숨기지 못한 동요가 국물이 끓은 냄비처럼 바깥으로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주인에게 몽둥이로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까놓고 말해 너는 너무 약하잖아. 우리 싸움을 따라올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돌아가. 케이트가 순순히 돌아간 것처럼."

미아를 상처 입히는 것은 자신을 상처 입히는 일. 미아가 몽둥이로 맞는 기분이었다면 현재는 제 심장을 칼로 쑤셔 후비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이 정도가 딱 좋다. 정이 떨어져서 환멸해서 실망해서 삐져서 미워져서 아무튼 미아가 돌아간다면, 안전한 인간 제국의 땅으로 간다면 그걸로 좋다.

"너무 약하니까 거슬린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내 옆에 유능한 드래곤 마법사가 생겼는데, 굳이 너를 데리고 다닐 필요가 있겠어? 마법에 걸려 잠들기나 하는 짐덩이를 내가 챙기고 다녀야겠냐고."

짝!

뺨을 치는 소리가 동굴 가득히 울렸다. 현재의 뺨을 친 것은 미아가 아니라 파탈리테였다.

"머저리 같은 인간,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라."

"마음에도 없기는? 나는 생각한 그대로 말한 것 뿐인데."

현재는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심장이 칼로 저며지는 것 같아도, 포를 뜨듯 얇게 썰려나가는 것 같아도 웃어야 했다. 그래야만 미아가 더 아파하고 그로 인해 떠나갈 수 있을 테니까.

"아……."

미아는 혼이 빠져나가기라도 한듯이 굳어서 아무 말도 못했다. 너무 놀랐는지 울부짖는 마음과 달리 눈에서 눈물조차 흘리지를 못했다.

"아……."

미칠 것 같았다.

"병신아! 네 약함을 네 애인한테 떠넘기지 말아라! 미아가 이 모험이 위험한줄 몰라서 따라온 것 같나? 설령 죽게 되더라도 네 곁이 낫겠다고 결심하고서 따라온 거잖나. 그런데 왜, 너는 그런 미아의 결심을 비참하게 만드는 거냐?"

파탈리테는 날을 잔뜩 세우고 현재를 윽박질렀다.

"결심이 무슨 소용이야. 마음은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는데. 간절하든 비장하든 절실하든 적들은 아무 사정도 봐주지 않아. 죽고 죽이는 사이에 그런 것은 전부 사족이다. 남는 것은 강하냐 약하냐 뿐이고, 강하면 이기고 약하면 지는 거야. 그러니까 약한 놈은 여기서 돌아가란 말이다."

현재는 침착하게 자기 할 말을 모두 했다. 방금 싸움에서 절실하게 느꼈던 이야기를. 그것은 미아와 동시에 또한 자신에게 내뱉는 설득이었다.

'곁에 두고 싶다는 욕심 하나로 미아를 위험하게 해선 안돼.'

"너, 졌구나? 드래곤과 싸워서 졌지? 그래서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고 겁 먹었었구나?"

현재는 드래곤에게 졌다고는 한 마디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파탈리테는 현재의 표정과 몸짓과 태도만 보고서 드래곤에게 패배했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너는 겨우 한 번 진 걸로 마음이 꺾일 정도로 약해뻐진 인간이었나? 나는 열 번도 넘게 졌어! 만 명도 넘는 동족을 잃었어! 그래도 다시 싸우겠다 마음 먹고 여기 있는데, 너는, 겨우 한 번 지면 그걸로 끝나는 버러지였나?"

"자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기는 누가 져? 나는 그냥 약해빠진 녀석을 내 파티에서 쫓아내려 하고 있을 뿐인데."

"미아가 죽는 게 너무 두려워진 거잖나? 네가 계속 영원히 이길 수는 없는 것이라고 느껴서,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겁이 난 거잖나? 그러면 그렇게 말하면 될 것이지, 왜 미아를 상처 입히려 하는 것이냐."

'괜히 나를 쫓아오겠다고 위험에 빠지지 않으면 좋겠으니까. 그냥 내게 정 떨어져서 멀리 가버렸으면 좋겠으니까. 미아가 안전한 곳에서 행복하기를 바라니까.'

너무 깊게 눌러붙은 마음을 떼어내는 것은 아프기 마련이다. 두 사람의 심장이 하나가 되었다면, 붙은 부분을 도려내지 않으면 떨어질 수 없다.

"필요 없어서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도 죄냐? 나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현재는 끝까지 연기를 계속했다. 괜히 우는 모습을 보이면, 미아에게 속내를 다 들켜버릴까봐. 쓰레기 냉혈한을 연기했다.

"그러네……. 약한 내가 따라가면 민폐지……. 여태까지 실례 많았어……."

미아는 등을 돌려 조용히 동굴 밖을 향하기 시작했다.

"기다려!"

미아를 쫓아 세우려는 파탈리테에게 현재는 이렇게 말했다.

"배웅이 끝나면 너는 돌아와라. 엘프를 구해야하는 사명이 남았잖아? 괜히 무섭다고 도망치지 말아라."

"네 연기 전부 다 티나거든? 개짓거리 좀 그만하지 그래?"

파탈리테는 미아의 옆에 붙어 그녀의 팔을 붙잡았지만, 미아는 계속 앞으로 걸어나갔다.

"미아! 너도 알잖아! 현재는 널 지키지 못할까봐 겁 먹은 것 뿐이고, 지금 얘기한 건 전부 널 돌려보내기 위한 거짓!"

미아의 손이 파탈리테의 입을 막았다.

"내가 약하고 쓸모 없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어. 그래도 옆에 계속 붙어있었던 건 내가 지은 죄에 대한 속죄 때문이었어. 그런데 내가 옆에 있는 게 현재에게 도움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부담이고 속박이 된다면, 나는 곁에 있지 않는 게 맞아."

"왜 너도 거짓말을 하나? 그런 거 다 핑계잖나?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했던 거잖나?"

파탈리테의 말에 미아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네가 그런 이야기를 해? 얼마 전만 해도 사랑이 뭔지 전혀 이해 못하겠다고 생각했었으면서. 네가 배운 사랑은 너무 미화되어있고, 거짓된 모습이야. 사랑은 원래 그런 거지. 질척질척하고, 추잡해. 아프기도 하고, 더러워."

미아는 참아왔던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사랑하게 되면, 항상 상대를 생각하지. 그리고 비교하게 돼. 나는 그 사람의 옆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인가? 나는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인가?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닫는 거야. 나는 정말로 무능하고 쓸모가 없어서, 그 사람에게 짐 밖에는 되지 않겠구나."

"그런 거 진작에 다 극복해낸 거 아니었어?"

"사랑을 빌미로 내 이기심을 강요한 거지. 저기요 나는 가진 게 사랑 밖에는 없는데, 사랑하니까 일단 받아주세요. 안 받아주면 죽어버릴 거에요. 그게 얼마나 애 같고 이기적인 짓인지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데. 자기 마음 때문에 현재에게 못할 짓을 강요했던 거야."

"너, 항상, 속으로, 그런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전혀 몰랐다. 파탈리테는 미아가 사랑을 구걸하던 비참한 모습도 보지 못했고, 그렇기에 둘 사이가 마냥 아름다운 신혼부부 같은 줄로만 착각하고 있었다.

"결국 급이 맞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는 거야. 내가 따라다니기에 현재는 너무 강했던 거야. 그것 뿐이야."

"……."

"자, 배웅 고마웠어. 이제 그만 따라와. 산 하나 내려가는 것도 못할 정도로 얼간이는 아니다? 그래봤자 파티의 짐덩이고 걸림돌이었지만."

짐은 잃었지만 신의 은총이 있는 베테랑 모험가인 그녀라면 산을 내려가기만 하는 것 쯤은 하루 안에 가능할 거다. 일단 만년설이 있는 고산지대를 벗어나면 식량이든 잠자리든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겠지.

"아니야. 아니. 나는 정말 이해가 안돼. 너희 사이에 이만한 위기도 한 번도 없었단 말이야? 겨우 한 번으로 사이가 완전히 찢어질 만큼?"

파탈리테의 당황에 미아는 고개를 살살 저었다.

"으응, 완전히 반대야. 그 모든 위기에도 불구하고 겨우 이어졌기 때문에, 아주 작은 문제만 생겨도 유지할 수가 없는 거야. 처음부터, 우리 관계는 비틀리고 꼬여서 절대로 사랑으로 맺어질 수가 없는 관계였어. 그리고 그건 전부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추하게 매달릴 수 없는 것이지. 미아는 후회하며 이야기했다.

'처음부터 다시할 수 있으면, 이번엔, 정말 그딴 일은 일어나지 않게 잘해줄 텐데.'

현재가 여신에게 힘을 빌렸던 것은 모두 미아가 강하기를 강요한 탓이었다. 즉 모든 문제의 근원은 미아이므로, 벌을 받아야 할 것은 그녀 자신 뿐.

미아는 그리 생각했다.

'그만 할까.'

죽어야겠다. 그런 결론이 미아의 마음 속에 내려졌다. 다만, 근처에서 죽었다가는 현재가 알게 될지도 모르므로 함께 가본 적 없는 먼 곳으로 훌쩍 떠나 죽어야겠다고 그렇게 결심했다.

"안돼. 못 보내."

파탈리테가 미아의 어깨를 붙잡고 절대로 보낼 수 없다고 결심을 전했다.

"당사자 두 사람 사이에 끝난 이야기를 왜 네가 붙잡고 늘어지는지 전혀 모르겠다? 대체, 왜야?"

"너희 둘의 이야기 끝자락에는 반드시 서로가 함께여야 해. 떨어진 채로는 분명 어느쪽도 행복해질 수 없어."

"그딴 걸, 네가 어떻게 알아?"

"바보야? 옆에서 보면 둘이 좋아 못살겠는 꼴이 너무 선명하고 똑똑하게 보이니까 그렇지! 그런데 서로 너무 좋아하니까 헤어진다니 그런 병신 같은 선택이 도대체 어딨어!"

"말했잖아. 나는 현재의 짐이고, 걸림돌이야. 현재는 분명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아갈걸? 이미 아이를 밴 여자도 있고. 그렇네. 내가 곁에 있으면 괜히 여자 꼬시기도 힘들어질 텐데. 나는 정말 하나도 도움이 안되잖아! 방해만 되지!"

어느새 두 사람은 동굴을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눈보라가 그친 설산은 하얗기만 해 너무나 눈부셨다. 현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따라나오지 않았다.

"나는, 애초에, 현재를, 사랑해선 안됐던 사람이야. 실컷 괴롭혀 마음을 망가뜨린 죄인이면서 감히 이 사랑을 받아달라고 한 것 자체가 또다른 커다란 죄악이였어."

"답답해서 돌아가시겠네! 네가 없으면 현재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고!"

"그걸, 왜 네가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데?"

미아의 지적에 파탈리테는 비장한 표정으로 답했다.

"꿈을 나누어 꾸었으니까."

현재는 맹세했다. 만약 파탈리테가 죽어 비원을 이루지 못한 채 끝난다고 하면, 그때는 현재가 이어서 엘프들의 구원을 이루어주겠다고.

그렇다면 파탈리테도 그에 걸맞는 약속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파탈리테는, 현재와 현재가 너무도 사랑해마지않는 미아의 행복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노라고 아무도 몰래 맹세했다.

그러니까 이런 결말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여기서 헤어지면, 양쪽 다 불행해질 것이라는 너무도 강렬한 확신이 그녀의 머리를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겨우 이제 한 달 현재와 알고 지낸 주제에, 뭘 그렇게 잘 안다는 듯이 얘기하는 거야? 나는 3년을 넘게 함께 지냈어! 내가 훨씬 더 잘 안단 말이야!"

"왜, 질투나?"

파탈리테는 조금이나마 안도했다. 완전히 마음이 떠났다면 저런 질투하는 반응을 보일 리가 없으니까.

미아는 너무나 현재 곁에 있고 싶지만, 계속해서 고민해왔던 자신은 짐덩이라는 생각 때문에 이를 악물고 억지로 떨어지려 하는 모습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누가 봐도 멍청하다고 손가락질 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럼 덤벼. 덤벼서 입을 다물게 해봐."

파탈리테는 단검을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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