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산맥의 주인
* * *
한쪽은 다섯번째 종족, 너무 많은 힘을 원해버린 탓에 신들에게 저주를 받고 남들과는 섞일 수 없게 되었다는 강대하며 고독한 왕.
다른 한쪽은 신의 사도,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다고 맹세한 이후 신에게 힘을 보내기 위해 강해져야 하는 숙명을 짊어진 대전사다.
그 싸움은 분명, 신화적일 수 밖에 없다.
현재가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제자리 멀리뛰기만 100미터를 넘게 뛸 수 있는 그에게 겨우 10미터의 높이를 오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용은 포효했다. 저주 받은 종족 용의 포효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종족의 원초적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꼼짝할 수 없게 만드는 권능에 가까운 힘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현재는 그 포효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뛰어오른 그의 검이 용의 이마를 찍었다. 쿠우웅! 공성추가 성문을 두드리는 것 이상의 폭음, 그 충격이 어찌나 컸는지 주변의 대기가 밀려나며 후폭풍이 불어올 정도였다.
'이피아의 창을 쳤을 때와는 달라. 힘을 없앤 게 아니라 순수하게 받아내고 버틴 것이다.'
현재는 긴장했다. 순수하게 육신의 강도가 이 정도인 것이라면,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쓰러뜨릴 수 없으리라.
"졌습니다."
그리고 용은 항복했다.
"뭐?"
이상한 빛을 뿜으며 인간 크기로 줄어든 용의 그림자는 어느새 아까 보았던 하얀 드레스의 여자로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에 난 혹을 손으로 쓸며 왠지 기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냐, 너?"
현재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속임수를 쓰는 건 전투의 기본이자 필수 소양. 저렇게 인간의 몸으로 돌아간 것도 무언가 속임수나 다른 기술을 쓰기 위함이라고 현재는 확신했다.
"정말 강하시네요 검사님. 저의 포효에 겁 먹지 않고 머리를 때린 사람은 처음이니까. 맞는 건 너무 아프고 무섭기 때문에 항복하겠습니다."
맨 이마로 검을 막아내고 혹 하나 달린 드래곤이 할 법한 소리는 아니었다. 현재는 매우 황당했다.
"뭐, 뭔 소리야?"
현재는 자신에게 계속해서 주문을 걸었다.
'속지 마라. 방심시키려는 거다. 속지 마라. 함정이다. 속지 마라. 뭔가 마법을 준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시간을 끌리는 것 자체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현재는 그대로 돌진하여 검으로 드래곤의 팔을 때렸다.
"악!"
팔을 세워 검을 막아낸 드래곤은 아프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너무해요! 항복했는데 때리다니!"
'이 새끼, 또 맨살로 내 칼을 막았어? 저런 모습이 돼도 피부 강도는 드래곤 상태랑 똑같다는 건가?'
쾅! 쾅! 쾅!
현재는 연속해서 검을 휘둘렀으나 드래곤의 맨살을 뚫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피부는 약간 붉게 달아오를 뿐 검신에 긁히더라도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아프다니까요!"
'방패를 버려야겠어.'
현재는 여지껏 한손검과 방패를 든 것처럼 싸우고 있었다. 검신의 길이만 2미터를 넘는 거검이었지만 현재의 근력으로는 충분히 다룰 수 있었고, 공방 밸런스를 갖추기 위해 방패를 놓지 않고 있었던 것. 그러나 적에게 아무런 피해를 줄 수 없는 상태로 계속 싸우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방패가 없는 만큼 위험하겠지만, 피해를 주기 위해 어쩔 수 없다.'
현재는 타워실드를 등 뒤의 지표면에 꽂아버리고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너는 몰랐겠지만, 양손으로 검을 들면 한손보다 두 배 강해진다!"
놀라운 검의 비밀을 밝히며 드래곤에게 돌격하는 현재, 그러자 드래곤의 눈에 전의가 끓어올랐다.
"어떻게 해야 항복 받아줄 건데!"
신화적인 마법 공격, 따뜻하다 못해 후끈거릴 정도로 뜨겁던 지표면 위로 거대한 빙판이 깔렸다.
그 엄청난 냉기를 몸으로 맞아버린 현재도 굳어버린 자신의 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방패를 버리게 하기 위한 유도였나!'
뒤늦게 후회하지만 얼어붙어버리고 만 몸, 이대로라면 치명상을 허용하고 만다.
'아니 애초에, 이만한 대마법을 준비시간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시점에서 내 패배는 확정되어 있던 것인가.'
그러나 현재가 한계까지 힘을 끌어내 얼음을 부수고 나올 때까지 추가적인 마법 공격은 없었다.
'어째서지?'
"이제 좀 얘기를 들어줄 생각이 드셨나요?"
생각해보면 드래곤의 태도는 커다란 본모습을 보인 이후로 쭉 신사적이었다. 여자한테 신사적이라 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예절 발랐다.
"먼저 대화를 회피한 건 너잖아. 동굴 위에서부터 내가 거는 모든 말을 무시하고 도망치기만 해놓고."
"그때는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와 대화하는 거라 겁이 났달까, 뭐라고 말해야할지 고민하느라, 그리고 좀 부끄럽기도 하고."
현대 한국의 사회 문제 중 하나인 방구석 폐인 같은 소리를 하는 드래곤.
"얼마나 오랜만인데?"
"4천 년 정도요?"
갑자기 아득해지는 시간 스케일에 현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눈 앞의 드래곤은 4천년간 누구와도 대화해보지 않은 초대형 방구석 폐인이었던 것이다.
"아니, 제가 그렇게 늙었다는 건 아니에요. 전생도 포함한 이야기니까. 실제 나이는 500살 밖에 안됐답니다."
'그것도 충분히 노친네인데.'
인간이라면 아무리 긴 수명을 잡아줘도 100년을 사는 사람이 다섯 명은 있어야 닿을 수 있는 시간, 20년마다 세대가 교체된다면 25세대나 바뀔 수 있는 무시무시한 나이였다.
"그래서 얘기하자면 동료분들을 재운 건 제가 맞는데요, 그냥 지나가려고 했던 건데 당신이 마법에 걸리지 않으니까 신기해서 보고 있다가."
"당장 마법을 풀어. 내 동료들이 깨어나게 해."
"그건 곤란해요."
현재는 즉시 드래곤에게 검을 겨눴다.
"제가 근처에 있으면 사람은 두려움에 죽거나 미쳐버리거든요. 오직 당신만 빼고."
"신들이 내린 저주라는 거냐?"
"맞아요. 그런데 당신은 왜 저를 두려워하지 않는 거죠?"
"글쎄."
짚이는 것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다른 세계에서 온 인간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약오름의 신에게 힘을 받은 사도라는 것이었다.
'둘 다 그럴 듯한 이유라 뭐가 정답인지 모르겠네.'
"아무튼 동료분들을 깨우고 싶으시다면 저와 거래해주셔야겠어요."
드래곤의 말에 현재는 눈썹을 이지러뜨렸다.
"원하는 게 뭐냐."
"절 가져주세요."
"?"
드래곤은 커다란 가슴 계곡 사이로 손을 넣더니 이상한 목걸이 같은 것을 꺼냈다.
"이것은 지배의 신이 만든 아티팩트, 복종의 고리입니다. 생물에게 이걸 채운 상태로 신의 이름을 부르면 상대방을 영구적으로 자신에게 복종시킬 수 있죠."
무시무시한 능력의 아티팩트였다. 현재가 한 번 쯤은 생각해봤지만, 절대로 구할 수 없으리라 여겼던 진귀하고 강력한 아티팩트.
"그걸 직접 차겠다고?"
"네."
"왜?"
"5백년간, 아니 4천년간 저는 너무 외로웠어요.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못한 채 만나지 못한 채 홀로 보내는 세월은 버틸 수 없는 고독이었죠."
"그럼 자살이라도 하지 그랬어?"
"그래봤자 기억과 영혼을 계승한 후대가 될 뿐, 진정한 구원은 찾아오지 않아요."
"기억도 영혼도 그대로면 역시 4천 살 맞는 거 아니야?"
"아니요. 인격이 달라졌기 때문에 저는 전대와는 분명히 다른 사람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드래곤이잖아."
"사람은 충분한 지성과 문명을 지닌 모든 종족을 부르는 말이잖아요? 그렇다면 저를 사람이라 불러도 되는 거겠죠?"
이 세계의 사람이란 그런 단어였던가. 현재는 달리 부정할 말을 찾지 못해 이전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자살을 반복하다 보면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특이한 인격이 뽑힐지도 모르잖아?"
"……당신이야말로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네요. 그러다가 자살조차 두려워하고 외로움은 못 버티는 유약한 인격이 나오면 어떻게 할 건데요."
"그거야 네 팔자지."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마세요!"
"너 같은 이상한 드래곤의 주인이 되고 싶진 않은데. 거절하면 어떻게 되지?"
인간의 형상을 한 드래곤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지고 파충류 특유의 소름 끼치는 눈빛이 드러났다.
"그럼 반대로, 제가 주인이 되어 당신을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만드는 수 밖에 없네요. 영원히 저와 함께 해주셔야겠어요."
그것은 결코 반길 수 없는 일이라 현재는 다시 검을 잡고 경계했다.
"그냥 신의 이름을 한 번 불러 아티팩트를 발동시키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싫으세요?"
"함정일지도 모르지. 반대로 아티팩트를 발동시키는 사람이 노예가 되는 물건일지도 모르잖아?"
현재는 누구도 쉽게 믿지 않았다. 만일 함정에 빠지더라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상대에게는 조금 마음을 놓지만, 이렇게 위험한 상대에게는 절대로 마음을 놓지 않고 깊이 경계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그렇게 배웠다.
"어떻게 설득해도 들어주지 않을 것 같네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2안으로 제가 당신의 주인이 되는 수 밖에 없겠어요."
드래곤은 이번에도 커다란 가슴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기다란 마법 지팡이를 꺼냈다. 2미터 가까이 되는 길이의 여러번 휘어진 고목나무 지팡이, 머리 부분 가운데에는 마법의 힘으로 떠있는지 커다랗고 붉은 구슬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슴 사이에서 나올 수 있는 물건이 아니잖아.'
4차원 주머니라도 달고 있는지 작은 공간에서 말도 안되는 크기의 물건을 꺼내는 드래곤의 모습을 보고 현재는 경악했다.
'아공간 마법? 근데 왜 하필 문이 저기냐고.'
그건 정말 신경 쓰일 수 밖에 없는 위치였다.
"긴장하세요. 저는 이 모습으로도 상당히 강하답니다?"
2차전이 시작됐다.
드래곤이 양 팔을 앞으로 뻗어 지팡이를 가슴 앞에 가로로 세우고 오른손은 활짝 편 채 정신을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팡이 위로 그려지는 마법진, 그리고 그녀의 등 뒤로 떠오르는 다섯 개의 불꽃. 불덩이는 하나하나가 거대한 바위와 같아 강렬한 위압감을 뽐냈다.
현재는 뒤에 박아놓았던 방패를 도로 들었다. 검으로 쳐내기엔 너무 커다란 불꽃이었다.
다섯개의 불꽃 포탄이 차례차례 현재를 향해 날아왔다.
쾅! 쾅! 쾅! 쾅! 쾅!
파탈리테는 이 방패 또한 아티팩트라고 말해줬었다. 아티팩트는 모두 신의 도구 답게 무시무시한 내구도를 자랑하는 것이 특징이었고, 방패는 무사히 드래곤의 마법을 모두 막아내주었다.
'더운 건 어쩔 수 없구만.'
그러나 폭발을 몇 번이고 막아낸 방패는 뜨겁게 달아올라 곁에 있는 것만으로 익어버릴 것 같은 열기를 방출했다. 현재는 방패를 다시 바닥에 꽂고 그 위로 뛰어올라 방패를 밟아 차며 드래곤을 향해 도약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순식간에 내려꽂는 현재의 검, 이번에는 두손으로 쥐고 도약을 통해 속도까지 붙은 상태라 맞춘다면 확실하게 타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드래곤이 지팡이를 세로로 돌리자 새로운 마법진이 나타나며 물리력을 흡수하는 결계가 쳐졌다.
쾅! 쾅!
두 번의 충돌로 결계는 부숴졌으나 드래곤의 다음 마법은 이미 준비된 후였다.
촤르륵!
이전, 한 번 보았던 빙결 마법. 대지를 통째로 뒤덮었던 냉기가 이번엔 현재를 향해 모조리 쏟아졌고 그 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죽을 것 같이 시리다!'
몸의 일부에 감각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얼어죽을 것 같은 느낌.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는, 너무나 강력한 빙결 마법.
'녀석들이 얼어죽게 둘 순 없어!'
추위 속에 있는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동굴에 피워둔 불이 꺼지기라도 한다면? 아니 굳이 꺼지지 않더라도 매캐한 연기 속에 자고 있는 것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일이다. 어서 가서 깨워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드래곤에게 지면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현재는 결의했다. 반드시 승리하기로.
"그아아아악!"
정신이 육체를 지배해냈다. 움직일 리 없이 감각이 사라진 몸은 움직여, 그대로 검을 드래곤에게 휘두르게 했다.
현재가 움직이지 못하리라 확신했던 드래곤은, 당황해 그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허락해버렸다. 당황에 의해 그녀가 외우던 주문은 취소되었고, 현재의 검은 그 허리를 때렸다.
"끼약!"
그러나 놀라는 비명 뿐, 얼어붙은 상태에서 억지로 휘두른 검은 그녀의 허리를 양단하지 못했다. 그저 드레스를 찢어 옆구리를 드러나게 할 뿐.
"정말 보통 인간은 아니시네요. 그럼, 사정 봐주지 않겠어요!"
드래곤이 땅을 지팡이로 찍자 바닥이 크게 갈라졌다. 현재는 빠지지 않기 위해 하늘로 도약했다. 그러나 그를 쫓는 수십 발의 얼음 화살. 칼로 쳐낼 수록 몸을 둔하게 얼게 만드는 냉기.
'너무 강하다!'
이쪽의 공격은 잘 들어가봤자 옷을 찢는 정도. 저쪽의 공격은 언제든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정도로 위력적이다. 승산이 없는 싸움, 결국 폭발하는 화염구에 맞은 반동으로 현재는 갈라진 땅의 사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아아악!"
그리고 갈라진 땅은 다시 붙어버렸다. 거대한 지반 속에 갇힌 현재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