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순애조교 위강력간물-89화 (89/119)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산맥의 주인

* * *

한 송이씩 내리기 시작했던 눈조각은 어느새 그 수를 무수히 불려 태풍과도 같이 거친 눈보라를 퍼붓고 있었다.

'씨발. 대체 무슨 조화야?'

없던 탈모도 생길 것 같은 극한의 스트레스가 현재의 머리를 조였다. 눈보라 치는 설산에서 동료들이 원인 불명의 혼수상태. 여신으로부터 힘을 빌린 이래로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무력감에 그는 몸이 떨렸다.

'이대로 녀석들을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3년 이상을 함께 하여 생애의 일부가 되어버린 미아가 없는 삶 따위 이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함께 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더라도 몸도 마음도 섞어보았던 파탈리테가 죽는 것 또한 참기 힘든 고통이리라.

만일, 정말로 둘 다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못하게 된다면?

파탈리테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팔자에도 없는 엘프의 구원을 찾아 떠나겠지. 유현재는 그런 남자였다.

'그건 싫어.'

자신의 사명도 아닌 남의 꿈을 맡아 이뤄가는 것 쯤이야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그 과정에 미아도 파탈리테도 없이 오롯한 고독을 곱씹으며 영원히 걸어나가야한다는 것은 너무 잔혹했다.

그런 미래는 견딜 수 없다.

'반드시 살려야만 한다.'

10미터 앞조차 식별하기 힘든 짙은 눈보라 속, 근처에 있는 바위 너머에서 현재는 사람의 그림자를 봤다.

"이봐!"

현재가 소리치자 그림자는 깜짝 놀랐는지 몸을 움찔하더니,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거기 서!"

현재는 최대한의 속도로 그 뒤를 쫓았으나 놓쳐버렸다. 그건 말이 안됐다. 초월적인 신체 능력의 현재를 이렇게 쉽게 따돌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사막에서 신기루를 보듯, 온통 하얀 설산에서 환상을 보고 만 것일까?

어딜 봐도 하얗기만 한 세계는 정신병에 걸리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씨발! 여기 누구 없냐고! 여기 사람 있다고! 도와줘!"

두 사람이 정말 얼어죽지 않을까 너무나 걱정이 되던 순간에 현재의 눈 앞에 절벽 사이 갈라진 틈으로 동굴이 보였다.

'일단 녀석들의 몸을 좀 녹여줘야겠어.'

열심히 달려다닌 현재야 춥기는 커녕 몸에서 열이 날 정도였지만, 자는 채로 눈보라 속을 옮겨다닌 두 사람은 체온이 낮아졌을 것이 분명했다.

현재는 동굴 안에 들어가 온 정신을 집중했다. 횃불을 들 손 따위 없다. 동굴 속에 빛은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온 감각을 집중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수 밖에 없다.

'발소리가 울리는 형태에 집중해.'

현재는 괜히 까만 세계가 보이는 게 싫어서 눈을 감고 온 기감을 집중했다. 박쥐가 초음파를 튕겨 앞의 상황을 확인하듯, 그는 발소리가 튕겨나오는 간격을 느껴 동굴의 구조를 파악했다.

심안, 눈을 감고도 앞을 볼 수 있다는 경지를 오직 초인적인 집중력만으로 도달해낸 것이다.

'평지. 습도가 그렇게 높지 않고, 바닥은 충분히 단단하다.'

현재는 적당한 장소를 찾아 두 여자를 내려놓고 짐에서 장작과 부싯깃, 부싯돌을 꺼내 불을 붙였다. 오랜 이세계 생활로 원시적인 불 붙이기에 익숙해진 현재는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캠프 파이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봐. 일어나."

현재는 두 여자의 몸을 흔들어봤으나 여전히 깨어날 생각을 안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둘 모두 코 아래로 손가락을 댔을 때 명백한 호흡의 증거가 느껴졌다는 것이었다.

"깨어나지 못할 이유도 전조도 아무 것도 없었어. 대체 어째서 깨어나지 못하는 거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된 것인지 전혀 짐작조차 가질 않으니.

'신벌이라는 거냐? 또, 내 가장 소중한 것들을 가져가겠다는 거냐?'

이 정도로 원인을 알 수 없는 최악의 사태, 그것은 신이 내린 벌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너무 많은 인간을 죽이고 망가뜨린 거냐?'

천국에 갈 수 있다고는, 먼지 만큼도 생각치 않았다. 그러나 이 현세에서 신의 심판이 내릴 수 있다고는 역시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신벌이라면 절대, 절대로 신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파멸의 전주곡을 연주하는 듯이 이를 갈며 눈동자 속 흉흉한 귀화를 피어올리는 현재.

그 극한까지 끌어올려진 기감 사이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현재는 검과 방패를 들고 그쪽으로 뛰어들었다. 동굴의 코너에 숨어서 그를 훔쳐보던 것은 여자였다. 설산에 대비한 두터운 외투 따윈 입고 있지 않은, 이상할 정도로 가벼운 차림의 여자.

노출도가 제법 있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서울에선 질리도록 봤으나 이 세계에서는 거의 보지 못한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황인종 느낌의 여자였다.

다만 그 몸매는 너무나 서구적이라서, 아니 파멸적이라서 가슴 한쪽이 머리통보다 컸고, 키도 170은 넘는 듯 했다. 말로만 듣던 젖소 수인이 아닐까 잠깐 고민해야할 정도였다.

'이런 곳에 그딴 수인이 있을 리가 없지.'

신의 은총을 가진 인간도 굳이 와서 살지 않는 험지, 너무 낮은 기온 탓에 배추인지 감자인지조차 키울 수 없다. 그런 곳에 신의 은총도 없어 인간보다 훨씬 약한 수인이 살고 있을 리가 없다.

"드래곤이냐?"

어떤 신화에 따르면 나쁜 용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을 속여 잡아먹거나 서로 죽이게 하는 등의 일을 즐긴다고 전해진다.

어지간한 생물은 살 수 없는 고산의 만년설 지대, 이곳에 살 수 있는 인간 형태의 생물이라면 설인이거나 드래곤일 수 밖에 없을 터다.

현재가 칼을 겨누며 묻자 여자는 휙 돌더니 동굴의 어둠 속으로 도망쳐버렸다. 캠프파이어의 불꽃이 닿는 곳은 여기까지, 코너를 너머 조금만 지나가면 다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오고 만다.

현재는 선택을 강요당했다.

첫번째, 이곳에 남는다. 혼수상태인 미아와 파탈리테를 위험 속에 방치해둘 수는 없다는 선택. 그녀들을 잃는 것은 제 목숨을 잃는 것보다 훨씬 커다란 아픔이 될 것이었다.

두번째, 여자를 쫓는다. 왜 미아와 파탈리테가 혼수상태가 되었는지에 대해 그 어떤 실마리도 없다. 유일하게 찾아낸 특이점이 바로 저 여자. 보내준다면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불안하지만, 나아가야 할 때다.'

현재는 이 상황을 유지하기보단 타개해야겠다고 결심해, 동굴 안쪽으로 도망친 여자를 쫓기 시작했다.

그러나 빠르다. 여자는 이 어둠 속이 훤히 보이는 듯 빠르게 달렸고, 그 속도를 쫓기 위해 현재는 보이지 않는 동굴의 일부가 팔이나 다리에 걸릴 때마다 힘으로 부숴버리고 그대로 앞으로 돌진했다.

그럼에도 둘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현재는 새로운 지형을 발견했다.

'공동, 엄청나게 커다란 공동이 있다!'

여자의 발소리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현재의 발소리가 울리는 양상이 너무 크게 바뀌어 달리는 도중에도 이제부터 지형이 바뀔 것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좁디 좁은 외길이 끝나고 축구 스타디움 정도는 되는 거대한 공동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바닥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래로는, 깎아지르는 절벽이야. 깊지 않다면 좋겠지만.'

현재는 자신이 달려온 동굴길의 끝이 깎아지른 절벽임을 깨닫고서 검을 아래로 뻗어 깊이를 재보려고 했다. 닿지 않았다. 그의 팔과 검의 길이를 합치면 약 3미터 이상. 그 정도 내려가도 발은 닿지 않는다.

이어 현재는 바닥에서 돌멩이를 주워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을 향해 던졌다. 소리가 얼마나 빨리 나느냐에 따라 깊이를 알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었지만, 돌은 저승으로 빨려들어가기라도 했는지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보통 깊이가 아니다. 산을 이만큼이나 올랐으니, 지표까지 구멍이 파여있다 해도 놀랄 일도 아니지.'

그렇다면 깊이는 약 4km.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절벽이 아니다.

'하지만 돌아갈 수는 없어.'

기껏 찾은 단서를 놓치면, 두 여자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현재는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경사는 90도, 그렇다고 하나하나 찍어가며 확인할 수는 없다.'

그 깊이가 범상치 않으리라 예상되는 이상, 천천히 벽을 찍으며 내려간다는 선택은 할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여자가 사라지기 전에 내려가야 한다.

'그렇다면 달린다.'

절벽을 달려 내려간다. 평범한 인간, 아니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해야 했다. 그래야만 시간을 아낄 수 있다.

'살린다!'

두 여자를 살리겠다는 집념 밖에 남지 않은 현재는 폭주기관차처럼 자기 생각을 재고해보지도 않고 그대로 절벽 아래를 향해 90도 경사의 길이 아닌 길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할만 하다!'

그냥 달리면 반동으로 인해 절벽에서 점점 멀어져 결국 발이 절벽에 닿지 않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현재는, 발로 절벽을 파버리며 구멍을 뚫어 발을 걸고 지렛대로 이용하여 절벽 쪽으로 돌아올 수 있게 달렸다.

단단한 암벽을 파버리고 새겨지는 족적. 인간의 상식에선 존재할 수 없는 질주로 현재는 수 분 만에 공동의 바닥에 닿을 수 있었다.

'다행히 바닥이 용암은 아니구나.'

기온은 40도쯤 될까. 매우 후끈거리는 기운이 사방에서 올라오고 있었지만 지옥을 떠올리게 하는 용암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도 활화산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여자는 어디로 갔지?'

현재는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공동의 구조를 파악해보려 했다. 그러나 소리가 닿는 부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공동이 굉장히 넓다는 사실 하나 뿐이었다.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면, 지금도 날 보고 있지 않을까?'

이미 여자가 작정하고 도망쳤다면 잡을 방도는 없었다. 하지만 현재가 단 하나 기대할 수 있는 점이 있다면, 여자 쪽에서 자꾸 이쪽을 먼저 찾아왔다는 것.

그렇다면 지금도, 어디선가 숨어 현재를 보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봐! 여기 있지? 어서 나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던 거 아니야!"

현재는 매우 높은 확률로 미아와 파탈리테를 재운 게 하얀 드레스에 검은 머리칼을 지닌 그 여자이리라고 생각했다. 그야, 그 외의 생물을 만년설 지대 이후에서 본 적이 없으니 그렇게 추측할 수 밖에 없었다.

"네가 내 동료들을 재운 거지! 원하는 게 있다면 어서 말해! 이 산을 통째로 무너뜨려버리기 전에!"

초조, 불안, 그 부정적인 감정들은 현재의 마음 속에서 세를 불렸다. 지금 이 순간 옆에 동료들이 없다는 것에, 현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사실이 그를 미치게 했다.

"빨리 나오라고 하잖아!"

그의 검이 땅을 찍었다. 아쉽게도, 그 정도로 산은 무너지지 않는다. 아무리 그가 초인이라도, 이 거대한 산을 통쨰로 무너뜨리는 일은 쉽게 할 수 없다.

"제발! 나와!"

그러나, 쉽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할 수 있다. 그의 검은 대지에 명백한 상흔을 남긴다. 삽 수천 개가 동시에 땅을 파는 정도의 일은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언젠가 이 산맥을 파서 없애버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거다.

"그아아아아아아!"

현재는 비명 같은 기합을 지르며 땅을 갈랐다. 지반을 붕괴시켜 산을 침몰시키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너는 내가 두렵지 않아?"

그제서야 대답이 들려왔다. 현재는 목소리가 들어온 방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발을 딛고 있는 지반으로부터 약 10미터 가량 윗쪽. 완연한 어둠 속인지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무언가 시선이 느껴졌다.

"두렵고 나발이고, 내 동료들을 재운 건 너지? 그렇다면 깨워!"

"그건 불가능해."

"깨우지 않으면 죽인다!"

"그것도 불가능해."

화륵, 현재가 바라보던 곳에서 두 개의 귀화가 타오르듯 빛을 뿜었다. 그 빛에 비춰 보인 것은 커다란 아가리를 가진 생물의 머리통이었다.

단적으로 말해, 드래곤이었다.

화르르르르륵.

횃대도 없는 사방의 허공에 동시에 불꽃이 켜지기 시작했다. 드러난 것은 너무나 거대한 공동과, 그 공동의 반 정도는 차지하고 누워있는 거대한 드래곤.

검은 비늘의 용은 그 머리통이 위치한 높이 즉 체고가 10미터 가량, 길이는 50미터를 넘을 듯 하며, 체중은 짐작도 할 수 없다.

'진짜 있었구나.'

현재는 검과 방패를 꽉 쥐고 전투 태세를 취했다.

"덤빌 거야?"

용은 놀랐다는 듯이 물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아름다운 목소리는 목에서 난 것이 아니라 정신적 사념파에 가까운 듯 했다. 귀가 아닌, 머리로 들려오는 목소리.

"네가 내 동료들을 풀어주지 않겠다면, 때려서 풀게 만들어야겠지."

현재는 결심했다. 절대 지지 않으리라. 반드시 승리해서 동료들을 구하리라고.

'신들과도 싸우겠다 결의했었다. 드래곤 따위, 그들의 졸개 밖에 못되는 잡졸이잖아?'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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