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국경
* * *
힘은 아마도 이기고 있다. 그 차이를 메꿔주는 것은 아티팩트의 권능. 아무리 세게 베더라도 창에 닿는 순간 그 힘은 먹혀버리고 만다.
속도 또한 현재가 이기고 있다. 둘 사이의 속도 차를 메꿔주는 것은 창이 가지는 강점, 길다는 것. 창이 방어할 수 있는 영역은 넓고, 거기에 닿는 순간 모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내가 유리해. 아티팩트의 권능만 아니면 진작 이기고 지나갔지. 녀석이 방어를 굳히고 있는 건 날 쓰러뜨릴 수단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수는 많았다. 이 자에게 붙들려 막지 못한 추적자들에게 미아와 파탈리테가 붙잡혀 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 자를 돕기 위한 지원이 합류할 수도 있다.
이곳은 상대를 위한 전장이다. 그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더라도 상황은 악화될 뿐, 현재를 위한 호기가 찾아올 리는 없다.
'그러니까 단기결전, 반드시 빠르게 승부를 내야 한다.'
초조감이 현재를 뒤덮었다. 긴장감이 몸을 떨리게 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 기분 좋은 설레임이 그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강자와 대등, 그 이상으로 싸울 정도로 나는 강해졌다.'
힘에 대한 실감, 비록 전능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대단한 싸움을 벌일 수 있다는 것에 도취마저 느꼈다.
술이나 섹스가 몸을 기분 좋게 해주는 것처럼, 전투의 흥분이 현재를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 더할 나위 없는 오락이다.
'그렇다면 좀 더, 화끈한 모습을 보여줘야겠네.'
그는 생각한다. 앞으로 이어질 전투의 양상, 그 결과, 대처법.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며 검을 휘둘렀다.
"이피아!"
이번에도 기사는 창으로써 그를 막으려 했다. 현재는 휘두르는 척하던 검을 던졌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꼭 자석으로 붙이기라도 한 듯 현재의 검이 창에 맞닿은 채 굳어 허공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최악보다 훨씬 낫구나.'
검이 산산조각나는 일도 생각했으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상상한 최악보다 훨씬 괜찮은 상황에 현재는 입가를 비틀어 미소지었다.
그는 몸을 숙이고 창이 가리지 못한 빈틈으로 파고들었다. 창의 장점이 긴 사거리라면, 단점은 얇다는 것이다. 방패라면 가지지 않았을 단점. 면이 아닌 선의 방어는 필연적으로 빈틈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곳을 꿰뚫는다!'
현재는 주먹으로 기사의 배쪽을 후려쳤다. 그러나, 또 때리는 느낌이 없었다. 모든 충격이 거대한 질량에 의해 흡수되는 느낌. 그저 반동이 손으로 돌아올 뿐. 기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명치는 확실한 급소일 텐데, 아무리 갑옷이 있다고 모든 충격이 흡수됐을 리가?'
심지어는, 창과 부딪힌 검조차 하늘에 뜬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현재는 깨달았다.
'아티팩트의 능력은 수호가 아니라 정지였다.'
창이 멈추면 그에 닿은 것 또한 멈춘다. 현재의 검이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것은 창을 휘두르는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권능으로 정지했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주먹에 명백한 급소인 명치를 맞고도 기사가 멀쩡한 이유. 창에 닿은 건틀렛에 이어진 옷에 걸쳐있는 판금 갑옷이 '정지'한 상태이기 때문에. 온전히 정지한 갑옷은 그 너머로 단 하나의 힘도 지나가지 않게 절대적인 방어를 펼치고 있었다.
기사의 말은, 어느 정도는 진실이었다. '수호 결계', 신의 힘을 뚫지 못하는 이상 그 너머에 충격을 주는 방법은 없으리라.
'생물에게는 통하지 않는 듯 하지만, 무생물은 저 창의 권능에 닿는 순간 정지한다.'
그렇다면, 갑옷이 없는 곳 밖에는 노릴 수가 없다. 없지만 기사는 온몸을 갑옷으로 둘러싸고 있는 상태였다. 갑옷이 정지하면, 바깥에서의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정지한 이상 녀석도 날 공격할 수 없지만, 나도 녀석을 쓰러뜨릴 수 없어.'
절대 방어에 가까운 모습에 현재는 머리를 굴렸다.
"왜 그러지? 더 때리지 않는 건가?"
기사가 도발했다. 현재는 생각했다. 그가 멈춘 이유. 시간을 끌기 위해서.
'정지'한 상태에서 기사는 피해를 입지도 않지만 공격을 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현재를 붙잡고 있는 상태로 기다리기만 해도 지원이 올 테니까.
기사는 몇 번의 공격을 교환한 끝에 자신이 현재를 이길 수 없다고 깨닫고서, 그의 검을 봉인해버린 것이다.
'이대로 시간을 끌려서는 안된다.'
생각해야 했다. 정지한 적을 이기는 방법, 혹은 따돌리는 방법을. 그러나 이대로 두고가는 건 안됐다. 멀쩡한 무기를 잃을 수는 없었다.
가진 것. 검과 방패. 그리고 추방의 아티팩트. 맞서야할 것은 정지한 적, 그러나 정지하지 않은 내용물. 현재는 생각하고 생각했다.
'그거다!'
현재는 땅을 파내고, 흙을 기사의 투구 사이에 퍼부었다.
투구 앞부분에는 시야를 확보하고 숨을 쉬기 위한 구멍이 파여있었다. 안의 생물은 정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틈으로 흙을 채워넣으면, 기사는 숨이 막혀 호흡할 수 없다!
"큭!"
기사가 창의 권능을 풀며 뒤로 물러섰고 현재는 검을 되찾았다. 그러나 상황이 나아진 건 없었다. 기사는 머리를 흔들어 투구 안에 들어찬 흙을 털어냈다.
따돌리기 힘드니까 쓰러뜨려야겠다고 생각한 상대는, 따돌리기 힘들 뿐 아니라 쓰러뜨리기도 힘들었다.
'발동할 땐 반드시 신의 이름을 불러. 하지만 해제는? 해제하기 전에는 무언가 전조가 없는 건가?'
유지하려 들면 얼마든지 유지할 수 있는 것인지, 기사가 유지 자체를 버거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현재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검은 아무 쓸모가 없어. 옷은 오히려 날 위험하게 해. 그렇다면, 차라리 맨몸이 낫겠다.'
무장한 상태가 전투에 적합하다는 고정관념에 붙잡혀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는 검을 땅에 꽂아넣고 방패도 마찬가지로 박아 세운 뒤 옷가지마저 모조리 벗어버렸다.
"무슨 짓이냐!"
기사는 현재의 기행에 놀라는 척 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능력에 대해 모두 파악했기에 벌이는 대처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옷은 몸을 무겁게 할 뿐!"
현재는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가 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덜렁거리는 남성의 상징이 매우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짐승 같은 전투방식에 아주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기사가 멈추면 투구에 흙을 집어넣고 멈추지 않으면 때린다. 혹은 발로 찬다. 맨몸이 갑옷 이상의 강도를 가지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싸움법. 하지만 너무나도 강력한 현재에게는 그것이 실제로 가능했다.
"크윽!"
밀어붙여지며 기사는 당황한 듯 소리를 쳤다. 이토록 야만적인 전투법, 그러나 확실한 정답에 가까운 해법은 기사를 놀라게 만들었다.
한 번이라도 옷에 창이 닿은 채로 권능이 발동되면 그 옷이 '정지'되어 찢을 수도 벗을 수도 없이 붙잡혀버리리란 사실을 현재는 완벽하게 이해해버린 것이었다.
어느 순간, 기사는 더는 아티팩트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현재가 계속해서 투구에 집어넣은 흙이 꽉 차버려서, 투구를 벗고 털지 않으면 소리를 낼 수 없게 됐다.
"여기까지냐!"
현재는 맨 주먹으로 기사의 투구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더 이상 권능을 쓸 수 없게 된 기사는 그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창이 가진 사정거리의 유리함은, 영거리의 접근을 허용한 순간부터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철조차 부숴버리는 강권에 기사의 투구가 찌그러지더니, 이내 기사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게되었다.
"아이템 획득!"
현재는 창을 챙겨들고 뒤에 박아뒀던 방패와 검을 챙겨서 달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알몸이었다. 옷 따위를 챙길 시간이 있을 만큼 여유롭지 않았던 거다.
그는 검을 등에 찬 검집에 도로 꽂아넣고 한 손에는 창, 한 손에는 방패를 들고서 전력질주했다.
'어서 미아를 찾아야 해. 그리고 지켜야 해. 파탈리테도.'
말을 타는 것보다 차라리 달리는 게 훨씬 빨랐다. 현재는 그만큼 대단한 초인이었다.
열심히 달리다 보니 말을 탄 기병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미아와 파탈리테를 거의 따라잡은 기병의 목을 치며 현재는 그들에게 합류했다.
"내가 돌아왔다!"
파탈리테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왜 알몸이야?"
"남자의 싸움을 하고 오느라!"
설명을 할 여유는 없었다. 현재는 뛰어다니며 남은 기병의 말 혹은 병사를 쓰러뜨리고 다시금 일행에 합류했다.
'그놈 만한 괴물은 없었구나.'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미아와 파탈리테가 붙잡혔을 테니, 인질로 삼거나 즉결 처형이라도 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됐을 터다.
'어째 달릴 일이 자주 생기네.'
꾸준히 멀리 달린 덕에 추적자들을 따돌리는 데에 성공했다. 국경 바로 앞은 천혜의 국경이 되어주는 산맥이었기에 그 앞에 조금 있는 평원만 지난다면 추적이 붙기 어려웠다.
아마, 국경의 책임자도 추적을 포기하지 않을까. 이미 놓친 상대를 잡기 위해 국경의 경계를 허술하게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니까. 현재는 그리 여겼다.
* * *
산을 어느 정도 올라 적들이 찾아오기 힘들어졌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현재는 짐에서 옷을 꺼내 입었다.
"누군진 몰라도 꽤 강적이었어. 쓰러뜨리느라 애를 먹었지만, 이렇게 아티팩트를 노획해왔지."
현재는 빼앗아온 창을 자랑했다. 2.5미터 가량의 그렇게까진 길지 않은 단창. 재질은 금속인지 모든 부분이 차갑고 검었으며 균일한 굵기에 끝부분만 뾰족해 창이라기보다는 길게 늘린 말뚝에 가까운 형태였다.
"이건, 싸운 적 있는 적의 무기네."
파탈리테가 그 무기를 알아보았다. 현재는 갑자기 궁금해져 물었다.
"이겼냐?"
자신이 간신히 쓰러뜨린 상대, 전성기의 파탈리테라면 이길 수 있었을까?
"투구의 틈새로 피를 뿌려 숨을 막고서 죽이기 직전까지 갔었다. 직후 엘리라는 여자가 끼어드는 바람에 마무리는 하지 못했지만."
'이 녀석은 마법 비슷한 걸 쓸 수 있었지.'
이전에 본 피로 된 촉수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 그 싸움법은 평범한 엘프의 전사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피의 마녀 같은 이명이 붙어있다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다. 제대로 된 마법은 못쓰지만.
"숨을 막아야 한다는 해법을 알고 있는 걸 보니, 정말로 싸웠었나보네?"
"그럼 내가 거짓말을 했겠나?"
"아니, 우리 둘이 같은 적을 상대했다는 게 신기해서 말야."
"비슷한 장소니까, 같은 적을 만날 수도 있겠지."
파탈리테는 그리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상대는 죽었는가?"
"몰라. 잘하면 살릴 수도 있을지도. 일단 기절할 때까지 패긴 했는데. 확실한 마무리까지 하지는 않았어."
전투불능이 된 상대, 현재는 분명 목을 자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는 않았다. 부상병이 사망자보다 적에게 더 짐이 된다는 교전 수칙을 떠올렸기 때문에? 아니,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지나가면 땡인데 죽일 필요까지 있나 싶어서."
강자의 여유였는지 최후의 양심이었는지. 인간이란 복잡해서 한 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을 터.
그리고 어차피, 마무리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기사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어쩌면 그간 때린 것만으로 절명했을지도. 아니, 그럴 확률이 살아남을 확률보다 높으리라 여겨졌다.
"그나저나 너도나도 다들 아티팩트를 들고 있어서, 몸으로만 때우려는 나는 너무 힘드네."
"뭐?"
현재의 말에 파탈리테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왜?"
"네가 든 검과 방패는 아티팩트가 아니면 뭐란 말이냐?"
이번에는 현재가 놀랐다.
"이거 아티팩트라고?"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그야 두 무구는 던전 내부에서 미아가 발견했던 물건이니까. 그러나 사용법을 알지 못하는 이상 아티팩트의 권능은 발현할 수 없었다.
"알지 못하고 있었다니 황당한 일이다. 당연히 신의 이름을 알고서 사용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파탈리테는 현재가 이 두 무구를 들고 싸우는 모습을 본 적 없기에, 그 능력조차 모르고 사용하는 중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데 너는 이게 아티팩트라고 어떻게 아는 거야? 아직 만져본 적도 없으면서?"
"이상한 질문이다. 명백한 신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지 않느냐?"
"그런 게 있다고? 미아. 너는 느껴져?"
"아니? 전혀?"
"어? 내가 이상한 것인가?"
파탈리테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신의 기운을 느끼는 자신이 이상한 것이란 사실을.
"그런 것 같은데?"
"인간 중에 신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는 못 들었어. 엘프라 그런 게 아닐까?"
미아가 의견을 제시했다.
'아티팩트와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대박이잖아?'
현재는 밝혀진 파탈리테의 또다른 능력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