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순애조교 위강력간물-83화 (83/119)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침쯤에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국경

* * *

현재와 파탈리테는 어떻게든 달그림자에 몸을 숨기며 지붕과 지붕 사이를 넘어 여관으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여관에 돌아올 때까지는 들키지 않아 추적자가 붙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

미아는 당연하지만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있었다. 일행 두 사람이 모두 나갔는데 마음 편히 자는 일은 불가능했으니.

"설명하자면 어려운데."

현재는 파탈리테의 눈치를 봤다. 어디까지 얘기해도 되는 걸까. 한때 그녀의 휘하에 있던 패잔병들이 약에 절여져 노예 창관에서 장난감 대신 사용당하고 있었다는 것?

"한때 나의 전우였던 자들이 노예로 붙잡혀 있길래, 그 가엾은 생명을 모두 이 손으로 거둬주고 오는 참이다."

파탈리테는 매우 담담히,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설명을 곤란해하던 현재는 그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구할 도리 없이 망가져 있었다는 얘기구나.'

미아는 굳이 파탈리테가 전우를 모두 죽인 이유를 묻지 않고도 눈치 채었다.

어떤 식으로든 결코 유쾌하게 받아칠 수 없는 이야기라, 여관 안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짧은 침묵 후에 현재가 말했다.

"도시 성문을 손쉽게 통과하긴 글렀단 말이지."

지금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 파탈리테가 그 말을 받았다.

"밤을 틈타 건너가는 게 낫지 않겠나?"

"식량 보급은 해야하는데, 시장에 가기는 글러먹었지. 그냥 식료품점이라도 털까."

다른 방도가 딱히 없었던 탓에 도둑질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세 사람은 짐을 챙긴 채 여관을 빠져나가 근처에 있던 식료품점을 털었다.

"당신들 누구야!"

물건을 터는 사이 부스럭대는 소리에 잠에서 깬 가게 주인이 가게 옆에 달린 작은 방에서 걸어나왔다.

"오, 미안합니다. 아가씨."

"끼!"

비명을 지르려는 여자의 입을 현재가 붙잡아 막아버렸다. 다만, 죽이거나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

"돈은 내고 갈게요."

현재는 훔친 식량보다 많은 가치의 금화를 그녀의 손에 쥐어줬다. 왜냐하면 식료품점 아가씨가 꽤나 예뻤기 때문이었다. 중년 아저씨 따위가 나왔다면 한 푼도 내지 않고 그대로 줄행랑을 칠 예정이었다.

"거스름은 필요 없어요."

찡긋 윙크를 날리고 도망치는 현재.

"으읍!"

밤에 몰래 와 물건을 털더니 멀쩡히 돈을 내고 팁까지 주는 도둑의 황당한 모습에, 식료품점 주인은 매우 어리둥절해졌다.

"가자."

현재 일행은 식량을 충분히 챙긴 다음, 그대로 동쪽 성문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범인들이 분명하다! 막아라!"

네 성문을 다 막은 건지 아니면 어찌어찌 방향을 추측해낸 것인지, 동쪽 성문 앞에 수십에 달하는 병사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는 막힌 성문으로 가는 대신 옆에 있는 성벽 쪽으로 일행을 유도했다.

"왜 막다른 길로?"

지휘관이 놀라 당황하는 사이, 현재는 높이 6미터 두께 2미터에 달하는 석제 성벽을 몸으로 밀어 부숴버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뛰쳐나가 도시 바깥으로 벗어나는 일에 성공했다.

"괴물!"

괜한 피를 보지 않기 위해 힘의 격차를 알려준 것이다. 맨손으로 성벽을 부숴버리다니? 지휘관은 당황한 나머지 추적해야할지 포기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쏴라! 화살을 쏴!"

그래서 타협안으로 궁병을 시켜 활을 쏘았다. 추적을 포기한 건 아닌데 적극적인 것도 아닌 그런 공세. 눈먼 화살에 맞아줄 만큼 약한 일행이 아니기에 추격전은 겨우 그것으로 끝이 났다.

"후."

그러나 추격전이 끝났다고 너른 평야에 자리 깔고 누울 수도 없는 법. 도시 옆에 펼쳐진 너무 넓은 평야는 시야가 확 트여 있어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덕분에 세 사람은 마라톤 수준으로 오랜 달리기를 해야했고, 아주 먼 거리를 이동한 후에야 몸을 숨길 만한 장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무너진 성벽, 멸망한 도시의 잔해.

이전, 파탈리테가 무너뜨리고 멸망시켰던 도시의 흔적이었다.

* * *

"오, 이 침대는 안 썩었나 보다."

현재는 그리 말하며 폭신한 침대 위로 올라앉았다가, 우지끈 소리와 함께 침대가 주저앉는 경험을 해야했다.

"씁."

현재의 체력은 충분했으나 미아와 파탈리테 둘이 지쳤기 때문에, 그들은 가장 덜 무너진 폐가에 들어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특히 상당히 지친 미아는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침대에 등을 붙이자마자 잠들어버렸다.

가장 멀쩡한 침대를 미아에게 양보한 현재는 몸 뉘일 만한 푹신한 무언가를 찾아 집안 이곳저곳을 뒤지고 또 뒤졌다.

'무슨 영광을 누리겠다고 침대를 찾냐, 그냥 이불 깔고 누우면 거기가 잠자리지.'

마지막으로 발견한 침대가 썩어 폭삭 무너진 이후로는 제대로 된 무언가를 찾기를 포기해버렸지만. 어쩌면 이 침대도 미아가 누웠다면 멀쩡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두 사람의 체중은 무려 두 배 가량의 차이가 나니까.

"한 잔 할래?"

어디 누울 생각도 못하는지 방 구석에 서서 멍하니 벽을 바라보는 파탈리테의 심경이 매우 복잡해보였기에, 현재는 가죽 자루에 든 술을 권했다.

파탈리테는 단호히 거절했다.

"이 마음을 약에 의존해 잊고 싶진 않다."

"약이라. 하긴, 술도 약이라면 약이기는 하지."

따로 부르는 이름이 있기에 간과하기 쉬우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여 우울감을 덜어주는 술이란 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정신과 약물이었다.

약에 절여져 자존도 자아도 긍지도 모두 잃어버린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동족들을 보고 온 파탈리테에게, 마약과 지극히 유사한 개념인 술이라는 약물을 몸에 밀어넣는다는 것은 너무도 끔찍한 일처럼 여겨졌다.

현재는 술 상대가 없어 홀로 조용히 술을 마셨고, 파탈리테는 계속 벽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묻지 않는 거냐?"

왜 묻지 않느냐는 물음을.

"뭐를?"

"이미 들은 적 있는 이름의 평원, 그 옆에 존재하는 무너진 성, 이 도시를 멸망시킨 것이 나라는 사실, 진작 눈치 채고 있지 않은가?"

이 도시를 멸망시킨 것은 파탈리테다. 그것은 너무 눈치 채기 쉬웠지만, 현재도 미아도 그것을 언급하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랬나."

현재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파탈리테는 그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의 사고방식은 그런 걸 용납하지 못했기에.

"너는 동족의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가?"

"인간 전체의 대표를 하라고? 너무 무리한 요구야. 나는 인류에 대한 소속감 같은 거 가지고 있지 않은데. 음, 개나 고양이가 인류를 지배한다면 좀 반항심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별로."

현재의 태도는 파탈리테와 상극에 가까웠다.

"나는 모든 엘프를 대표해야 하고, 구원해야 한다. 그렇게 정해졌다."

"네가 원해서 맡은 것도 아니잖아? 억지로 떠맡은 거면 어깨에 힘 좀 빼도 된다고 생각해."

"그렇게 가벼운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파탈리테는 눈을 흘겼다. 여전히 느긋한 표정의 현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는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네가 그 사명을 품고 가든, 힘껏 던져버리든, 뒤에서 구경만 하는 녀석들이 뭐라 할 자격은 없다고."

"결코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나의 전우들은 아티팩트도 신의 은총도 없이 나약한 맨몸으로도 전장에 섰다. 그리고, 전장에 서지 못한 이들도 싸울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을 뿐이지, 무서워서 도망친 것도 싸우기 싫어 숨어버린 것도 아니다. 그저, 아티팩트를 받아들이기 가장 적합한 신체가 나였을 뿐인 거다. 나의 동족을 함부로 비난하지 마라."

파탈리테는 자신의 동족들을 억지로 옹호했다. 구원자의 책무를 억지로 떠넘겼다고 생각하는 건, 죽어간 이들에게도 자신을 믿고 있는 이들에게도 실례라고 생각했다.

"그러냐. 거 미안하게 됐다."

현재는 대충 사과한 후 술을 더 들이켰고, 둘 사이엔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속으로는, 녀석의 말에 공감해버리고.'

힘드니까, 어깨에 매인 짐이 무거우니까 내려놓고 싶다고, 나한테만 다 떠넘기지 말라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따라와준다 해도 그들은 그녀의 뒤에 서있을 뿐. 제일 앞에서 가장 험난한 풍파를 견뎌야 하는 것은 오롯이 파탈리테의 몫이었다.

그런 것을 생각해보면 떠넘겼다는 표현은 충분히 정답에 가깝지 않을까?

'그래선 안돼. 그건 나의 나약함이 만든 변명일 뿐. 올바른 생각이 아니야.'

약함은 죄악, 자신은 약해져선 안된다. 파탈리테는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주문을 되뇌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긴 침묵이 깨졌다. 이번에도 침묵을 깬 것은 파탈리테였다.

"너는 입만 살았다. 신에게조차 유린당하지 않을 정도로 강해지겠다고 허풍을 떨고서는, 왜 그렇게 언동을 가볍게 하고 아무 생각 없을 수가 있는 거냐."

만약 그녀가 옳다면, 현재의 답은 틀린 것이어야 했다. 그것이 정반대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두 사람의 운명이었다. 그래서 파탈리테는 현재가 틀렸다고 규정하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지는 않은데? 은근히 막말하네 너도."

"너는 나 만큼 절박하지 않지 않으냐. 그러니까 그리 쉽게 말할 수가 있는 거다. 백만 엘프의 운명을 짊어진 나는, 결코 그 책임을 내려놓을 수 없다. 절대로."

절박함. 그 말에 현재는 여신과 계약하던 그 날을 떠올렸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상관 없다고 굳게 다짐했던 그 순간. 현재는 분명 누구보다도 절박했다.

"절박하지 않다라. 나도 나 개인으로서는 굉장히 절박했는데? 많은 사람 몫의 꿈을 맡았으면 절박한 거고, 한 사람 분량의 꿈 밖에 없으면 절박하지 않은 거냐?"

"당연하지. 단순한 계산. 1보다 2가 크다는 건 세상 누구나가 다 아는 진리다."

"하지만 사람은 원래부터 자신을 최우선으로 하도록 설계됐단 말이지. 그걸 추구하는 건 절대 이상한 게 아니야. 자연스러운 거지. 그런데 너는 왜 그렇게 괴로워하면서까지 남의 꿈을 대신 이뤄주지 못해 안달인 거냐."

"나 밖에 못하니까. 내가 아니면 안되니까."

파탈리테는 단호히 답했지만, 현재는 그 답을 쉽게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그게 왜 네 알 바야? 네가 구해주지 않으면 망하는 종족? 그냥 콱 망하라고 놔둬버려. 겨우 이만한 꼬마애한테 일족의 명운을 맡긴 종족이라니. 망해버린다 해도 쪽팔려서 하소연할 곳도 없겠다."

"꼬마애라니. 나는 너보다 연상이다."

"나이만 많으면 뭐해. 키도 작고, 덩치도 작고, 그릇의 크기도 작은데. 너는 대범함이 너무 부족하단 말이다."

"무책임함을 잘못 말한 거겠지."

그렇게 매도하는 파탈리테의 눈빛은, 혐오감은 담고 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부러워하는 눈치로도 보였다.

"아니, 책임질 일은 져야지. 나는 케이트와 뱃속의 아이를 위해 꼭 돌아가야 하고, 미아를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줄 책임이 있어. 하지만 이건 누가 나에게 떠넘긴 일이 아니야.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정말 나를 위한 일들이야."

"그게, 사랑이라는 거냐?"

"그래.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여자들. 받은 것보다 훨씬 크게 돌려주지 않으면 사나이 체면이 안 산다."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았구나."

파탈리테는 피식 웃었다. 이 남자는 자꾸 진지하게 자기 꿈이 대단하다고 이야기하고, 또 자기 사랑이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라 당당히 선언해버리기에, 가끔은 정말 그렇지 않은가 속아넘어갈 듯한 기분이 들고는 했다.

실은 그런 태도가 부럽다고 느낀 적도 많았다.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하필 이 인간이라 그런 것 같아.'

신의 저주를 타고난 종족의 대표자로서 신의 은총을 타고난 인간들을 모두 질시하고 저주했던 파탈리테인데, 어째서인지 현재에게는 별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인지, 현재라면 엘프로 태어났어도 이 따위로 살다가 힘이 없어서 푹 찔려 죽었을 거 같은, 그런 묘한 느낌.

"너는 강해서 정말 다행이구나. 그 사고방식에 약하기까지 했다면 순식간에 죽어나갔을 테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

실제로 미아를 상대로 들이받았다가 살해당할 뻔 한 적도 있었지. 그런 일 따위,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얌전히 약한 자의 삶, 노예의 삶을 받아들이는 게 뭐가 그리 어려웠는지. 물론, 순응하지 않고 들이받았던 덕분에 미아를 얻는 결과가 나왔지만 말이다.

'갑자기 괘씸하네. 침대에서 또 혼내줘야겠는데?'

지금 떠오른 것이 부정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한때 그렇게 강하고 무섭게만 보이던 미아가 지금은 얌전한 애완동물 수준으로 순종적이라는 게 떠오르자 흥분이 됐을 뿐. 확실히 말해, 발기했다.

술기운이 오른 현재는 미아를 덮치기 위해 그쪽 방으로 옮겨가려고 했다. 그러나 파탈리테가 현재의 손을 붙잡아 막았다.

"뭐냐?"

"너는 내가 엘프의 숙원을 저버리고 나만을 위해 살아도 결코 비난하지 않는다는 거지?"

"여태 뭘 들은 거냐? 그렇다고 몇 번이나 확실하게 말해줬잖아. 또해줘야돼?"

"너는 정말, 곁에 가까이 두면 절대로 안되는 유형의 사람이구나. 여기저기에 나쁜 물을 들이는 사람."

현재는 정말 막 사는 사람이라고, 그리 생각해 파탈리테는 쓰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생각하든가. 나는 계속 얘기했잖아. 너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나는 지금 왠지 네 생명력을 빨고 싶은 기분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파탈리테는 현재의 방식을 흉내내고 싶어졌다.

"배에서는 내렸고, 물 위도 아닌데? 괜히 내가 아까운 생명력을 나눠줄 이유가 있겠어?"

술에 취해 뇌기능이 저하된 현재는 왜 갑자기 생명력을 달라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다지 않느냐. 마음대로 하라고 했으면, 조금 정도는 어울려주거라."

파탈리테는 팔을 뻗어 현재의 머리를 아래로 끌어당기고는, 자기 자신은 발돋움을 해 까치발을 하고 서서 최대한 머리를 뻗었다.

현재가 허리를 직각에 가깝게 꺾은, 상당히 어정쩡한 자세를 해서야 엄청난 키 차이의 두 사람이 입을 맞출 수 있었다.

'이상한 남자에게 이상한 물이 들어버렸다.'

파탈리테는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쁜 기분은 전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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