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순애조교 위강력간물-82화 (82/119)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국경

* * *

파탈리테를 보내고 한참동안 잠을 못 자며 뒤척이던 현재는 불현듯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그 녀석이 사고를 안 칠 리가 있겠냐고."

심지어는 황도에서부터 인간에 대한 강한 적의를 표출했던 파탈리테다. 패퇴한 전장을 근처에 두고 얌전히 있어주길 바라는 건 너무 안일한 판단이란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이미 끝난 전쟁을 회상하며 우울해하는 것이 다라면 좋겠지만, 왠지 무언가 사건에 휘말렸으리란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으응, 현재야. 왜?"

현재가 지른 소리에 옆에 잠들어 있던 미아가 깨어나며 물었다.

"아니, 별 일 아냐. 그냥 다시 자고 있어."

"어디 가?"

"집 나간 모기 좀 찾으러."

"나도 갈게."

"아니, 우리 짐 좀 지키고 있어줘. 찾으러 가는 만큼 지키고 있는 것도 중요하니까."

현재는 그리 말한 뒤 한손검 한 자루를 챙겨 밖으로 나섰다. 방패와 거검까지 챙기기엔 너무 눈에 띄어 괜히 없어도 될 트러블에 말려들 가능성이 컸다.

'지붕 위보다 도시를 관찰하기 좋은 곳은 없겠지.'

넓은 곳을 뒤져야 할 때 높은 곳이 유리한 것은 상식. 다만 걸리는 것은 이쪽이 널리 둘러보기 쉬운 만큼 다른 이들도 이쪽을 발견하기 쉽다는 사실이었다.

'달이 너무 밝다.'

그렇다 해도 이 넓은 도시를 일일히 뒤질 수는 없는 법. 현재는 그 위험을 감수한 채 건물의 외벽을 타고 올라가 지붕 사이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뭔가 급해보이는 불량한 무리들, 혹시?'

몇 개나 되는 건물을 넘었을까. 현재는 왠지 수상한 조직처럼 보이는 십수 명 남짓의 사내들이 이동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뒤를 쫓다보니 커다란 건물 지하에서부터 인간의 생명이 끊어지는 소리가 반복해서 들리고 있었다.

'99퍼센트 확률로 그놈이겠지. 부디 1퍼센트의 예외이기를 빈다.'

그러나 행운의 예감은 대체로 빗나가는 법이고 불길한 예감은 잘 맞기 마련. 지하에 들어간 현재가 발견한 것은 수십 구의 말라 붙은 시체와, 바닥을 흐느적대는 엘프 노예들, 그 사이에 서있는, 광기로 번득이는 눈을 지닌 파탈리테였다.

"인간……."

회한과 죄악감과 증오와 고통으로 점철된, 부정적 감정의 총체 같은 목소리로 파탈리테가 말했다. 현재는 혀를 찼다.

"쯧, 인간이 아니라 파티 리더잖아? 그 정도는 기억해라 좀."

"우리는 날 때부터 세상에게 저주 받은 괴물, 너희는 날 때부터 세상에 축복 받은 사람, 그렇다면 괴물은 사람을 잡아먹을 수 밖에 없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잖아?"

"이쪽 세상에 있지를 않구만."

파탈리테는 이미 이지를 상실한 상태였다. 과거의 환영이라도 보는 것인지, 지금을 사는 현재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태였다.

"모두 죽이고 전부 불살라라. 세상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게 나았다."

파탈리테의 몸에서 뻗어나온 피로 만들어진 촉수, 칼날처럼 좁고 날카롭게 벼려진 촉수 수십 개가 현재를 향해 덮쳐들어왔다.

"이거, 검으로 막을 수 있는 건가?"

현재는 엘리와 싸우던 중 공중에서 창을 돌려 화살을 튕겨냈던 경험을 떠올렸다. 솔직히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해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휙, 휘휙, 휙휘휘휙, 부우우웅!

점점 속도를 더하더니 선풍기 날개처럼 하나의 원으로 보일 정도로 빠르게 회전하는 칼날. 다가오는 피의 촉수들은 그대로 분쇄되어 튕겨나갔다.

"휘유, 이게 또 되네?"

휘파람을 불며 앞으로 돌격한 현재는 촉수의 저항을 순식간에 돌파하고 파탈리테 앞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또 고민되는 것이, 이 작은 몸에는 때릴 만한 구석이 별로 없었다.

"의식이 없을 때는 뺨을 때려 깨우시오!"

언젠가 한국에서 배웠던 응급 처치법이 떠오른 현재는 칼을 도로 꽂아넣고 양손바닥으로 파탈리테의 뺨을 쳤다. 뭔가 올바른 응급처치와 다른 것 같다면, 배운지 너무 오래 지난 탓일 터다.

"윽!"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결코 약하지는 않게, 뺨을 맞은 파탈리테는 크게 휘청이며 뒤로 물러섰다.

"정신이 들어?"

"인간!"

현재를 향해 덮쳐드는 파탈리테의 단검, 그러나 충분히 빠르지 못했기에 그 단검은 현재의 손에 잡혀버렸다.

"부러뜨리면 안되지, 비싼 돈 주고 산 건데."

현재는 단검을 도로 파탈리테의 허벅지에 달린 단검집에 넣어주고 다시 한 번 뺨을 때렸다.

"그억!"

"진짜 정신이 들어?"

"그흑! 으윽! 어억! 그하아아아아윽!"

숨을 헐떡이며 현실을 거부하려는 듯 고개를 휘적휘적 젓는 파탈리테. 그녀의 눈에 조금이나마 총기가 돌아오고, 마침내 그녀는 현재를 알아보았다.

"막지 마, 말리지 마, 나는 내 패배의 죗값을 치러야 해!"

이 도시를 부술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그녀의 모습에, 현재는 문득 한 달 전 어느 도시를 불태우려 했던 남자를 떠올렸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아르젠타 시를 전부 불살라버리려 했던 것은 다름 아닌 현재 자신이었다.

"아니, 너는 이제 엘프를 구하러 가야지."

"미워! 인간들이 미워!"

"인간을 죽인다고 엘프들이 되살아나는 게 아니잖아?"

"그래도! 그래도! 나는 우리를 깔보고 괴롭히는 인간이 너무 증오스러워!"

"도망치는 거냐?"

"……도, 망?"

"엘프를 구하는 것보다 인간을 미워하는 게 쉬우니까 도망치는 거잖아. 신을 이기는 일보다 인간을 이기는 게 훨씬 쉬우니까 거기로 도망쳐놓고서, 아무튼 엘프의 복수를 하는 중이니까 나는 정당합니다, 이렇게 정신 승리 하는 거 아니야? 인간이 멸망한다고 엘프한테 내린 저주가 다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너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쉽게!"

"알 바냐? 나는 인간인데. 엘프의 사정을 알고 있을 리가 없잖냐. 그렇게 괴로워 죽겠으면 그냥 죽여줄까? 더는 싸워도 되지 않게 편하게 해줘?"

현재는 파탈리테의 목에 검을 겨눴다. 쓸모가 있어보여 데려오긴 했지만, 문제만 잔뜩 일으킨다면 더는 필요 없다.

그리 판단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을 동료랍시고 데려다닐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 본인이야 본인을 지킬 힘이 충분하지만, 미아도 파탈리테를 쉽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긴 어려웠으니까.

지금 당장은 미아가 조금 더 셀지도 몰라도, 피를 잔뜩 빤 이후의 파탈리테는 전혀 다른 강함을 가질 것이라고 현재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겨우 뒷골목 잡놈들 몇 마리 쳐먹었다고 벌써 이 정도, 앞으로 얼마나 세질지 감도 안 잡히는구만.'

그러니까 결론은 이렇다.

'다룰 수 없다면 죽여야 한다.'

양날의 검, 베는 면이 두쪽이면 그 활용도가 외날 검에 비해 훨씬 높아질 것이나, 그만큼 다루기 더 어렵고 자신을 상처 입힐 수도 있다.

내가 쓸 수 없다면, 남의 손에 들려 자신을 찌르기 전에 부숴버려야 한다.

"나도, 그만하고 싶어. 그만하고 싶은데. 그만할 수가 없잖아!"

파탈리테는 제 머리를 쥐어 뜯다가 손을 아래로 해 이마부터 뺨까지를 꺼거걱 소리와 함께 긁어내버렸다. 여덟 줄의 손톱 자국이 고운 얼굴을 흉하게 만들었다.

"이 영혼에 눌러붙은 저주 때문에, 포기할 수가 없잖아!"

뚝, 뚝, 뚝, 뚝.

얼굴로부터 흘러내리는 것은 피인가 아니면 피에 섞인 눈물인가?

"버겁냐?"

"힘들어, 싫어, 그만 할래."

"그럼 죽여줄까?"

"안돼, 포기 못해. 나는 백만이나 되는 엘프의 운명을 전부 짊어지고 있는! 엘프의 여왕이란 말이다!"

정신분열증이라도 걸렸는지 이랬다 저랬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파탈리테에게 현재는 하나의 제안을 내밀었다.

"그럼 그 무게, 전부 남한테 떠넘길래?"

"나 말고 누가 이 왕관을 짊어질 수 있겠냐고!"

"나한테 넘겨. 맡아줄게."

"뭐?"

"너무 힘들어서 못해먹겠다는 거잖아? 그럼 나한테 넘겨. 나는 이미 신보다 강해지기로 결의한 몸. 하는 김에 종족 하나 덤으로 구원하는 것 쯤 별 일도 아니야."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보여준 게 뭐가 있다고! 너를 믿고 맡기라는 거야?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적어도 자살할까 말까 고민 중일 정도로 정신이 고장난 꼬맹이보단 낫지 않겠어?"

"안돼. 다른 종족에게 맡겨도 될 일이 아니야!"

"아직 순혈주의나 찾는 거 보니까 아주 살만한가 본데?"

"아니야, 나는! 너를 믿고 맡길 수가 없다고 하는 거라고!"

"꼭 믿어야 맡길 수 있냐?"

"당연한 소리를."

"못 미더운 녀석한테 대충 떠넘겨도 되지 않아? 사실은, 너도 그렇게 대충 찝혀나와서 떠맡게 된 거잖아? 선거라도 했어? 저를 뽑아주신다면 꼭 엘프를 구원하겠습니다 하고 유세라도 하고 다녔냔 말이야. 그냥 떠맡았지? 그럼, 너도 다른 사람한테 대충 떠넘겨도 아무도 불만 못 가지는 거 아니야?"

"말도, 안되는, 소리."

현재가 하는 말은 너무 어처구니 없는 소리였다. 반박해야 되는데, 어째서 반박을 할 수가 없었을까? 파탈리테는 머리가 더욱 어지러워졌다.

"자기를 구하고 싶으면 자기가 구할 것이지 왜 한 사람 찝어서 일을 다 시키냐 이 말이야. 조별과제 무임승차하는 조원 마냥, 아니 이건 알아들을 리가 없나. 아무튼 멋대로 떠넘긴 일을 네가 꼭 해줘야 할 이유는 없잖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버리려는 자신을 막기 위해 애쓰며, 파탈리테는 진심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엘프를 구하고 싶다."

"이 씨발년이? 이랬다 저랬다 할래? 그럼 그냥 엘프를 구하고 싶은 거 맞잖아. 왜 자꾸 못하겠다고 징징대! 포기할지 계속할지 지금 여기서 확실하게 정하란 말이다!"

"구할 거야!"

"그럼 쓸 데 없이 인간 죽이는데 힘 빼는 일은 집어치워. 네가 해야될 일은 엘프를 구하는 거지 인간을 죽이는 게 아니잖아."

"……그렇네."

"좋아. 끝이구나. 근데 씨발 이제 어떻게 하지? 내일까지 도시에 머물기는 그른 것 같은데?"

현재는 파탈리테가 조금 진정되자마자 현실적인 어려움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소란을 피웠으니 아침에 시장을 봐서 조용히 도시 밖으로 나가겠다는 계획은 완전 박살이 난 셈이다.

그때, 건물의 윗층으로부터 창관을 관리하는 조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으악! 흡혈귀잖아!"

"악몽의 재림이다!"

"그런데 저 인간은 뭐지?"

도망칠지 싸워야할지 갈피를 못잡는 조직원들에게 현재는 가뿐하게 소리 질러줬다.

"죽기 싫음 꺼져!"

"으아악!"

잔뜩 겁을 먹었던 차에 도망 갈 구실을 주어 고맙다는 듯이, 조직원들은 일제히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싱거운 새끼들."

현재는 다시 시선을 돌려 건물 지하의 끔찍한 참상을 확인했다.

'인간들이야 저 녀석이 찔러 죽이고 피를 빨았다고 쳐도, 엘프들은 왜 바닥을 기고 있지?'

현재는 엘프 여성의 상태를 살피러 다가갔다가, 금세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잔뜩 흥분한 채, 누가 건들지도 않았는데 절정에 이르는 모습. 어느 여자는 갑자기 가랑이 사이에서 분수를 쏘며 가버렸고, 그렇지 않은 여자라도 모두 애액을 질질 흘려대고 있었다.

'약에 절였구나.'

성적인 흥분 상태, 혹은 그 이상을 유도하는 약물에 범벅이 된 것이리라. 당연하게도, 수명이니 건강 따위를 생각해준 물건은 아닐 것이다. 이성이라는 것을 모조리 제거당한 채 그저 남자들의 장난감으로 쓰이기 위해 조교 당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모습.

'이걸 보고 빡돌았었구나?'

현재는 이 엘프 여자들을 어찌 처리해야할지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러나 마땅한 해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엘프들을 데리고 몰래 도시를 벗어나는 것은 협력자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얼굴을 파느냐, 팔지 않느냐.'

현재가 정면에 나서 가공할 무위를 떨친 후에 도시의 안전을 빌미로 협박하면 성문을 통과할 수는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경우엔 현재의 존재가 노출된다. 아무리 얼굴을 가려도 이 커다란 덩치는 특정 당하기가 너무 쉬우리라. 게다가, 타워 실드와 거인을 가르는 검을 보인다면 이젠 알아보지 못하는 녀석이 바보인 수준이 된다.

그렇게 고민하는 순간, 서걱, 하고 파탈리테는 순수 엘프 노예들의 목을 전부 잘라내고 있었다.

"야! 너, 뭐하는!"

파탈리테는 더는 울고 있지 않았다. 무언가를 굳게 결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이 내게 죽여달라고 했어."

"그러냐……."

현재는 더는 묻지 않았다. 파탈리테가 스스로 하겠다고 확실히 말한 이상 자신이 끼어들 만한 사안이 아니라고 느꼈다.

* * *

이것은 현재가 창관을 찾아오기 조금 전의 이야기.

파탈리테의 힘은 남의 생명을 빨아들일 수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반대로, 자신이 가진 생명을 남에게 불어넣는 것도 가능했다.

대기실의 엘프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은 파탈리테는 약에 절은 그녀를 제정신으로 돌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비난 받았다.

"어째서! 약에 취한 채로, 행복한 상태로 죽을 수 있었는데. 어째서 이런 끔찍한 현실에 날 돌려놓은 거야! 싫어! 돌려줘! 내 행복 돌려줘!"

한때 전사였던 엘프 노예 창녀의 상황은 너무도 비참했으나, 약과 성적인 쾌락에 잠겨 있는 동안 만큼은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사막이 아닌 곳에 끌려와 거칠게 굴려진 탓에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수명, 행복한 꿈을 꾸며 죽는 게 나았으리라고 말했다.

약에서 깨어나는 바람에 현실을 자각한 그녀는, 이 현실이 너무 괴로웠기에 파탈리테의 손에 들려있던 단검을 빼앗아 자살해버렸다.

파탈리테는 너무 힘들어서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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