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NTR, 유산, 상상임신 따위의 쓰레기 전개는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국경
* * *
배는 마침내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운하가 끝나는 도시 엠브리오. 이후 운하는 수많은 지류로 갈라지다가 이내 지하를 향해서 모습을 감추고 말기에 커다란 상선이 닿을 수 있는 곳은 이 도시가 마지막이었다.
케이트와 석별의 정은 미리 충분히 나누었다. 현재는 배가 도착한 후 케이트와 짧은 포옹을 한 뒤 인사를 남기고 떠나기로 했다.
"몸 조심해. 너도, 아이도. 1년 반 뒤에 꼭 건강한 모습으로 볼 수 있으면 좋겠네."
"주인님도 조심하세요. 꼭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혀를 섞지 않는, 친애를 뜻하는 입맞춤 이후 현재는 케이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그리고 더는 망설이지 않고 뒤로 돌았다.
파탈리테의 얼굴을 최대한 숨겨야 하기에, 현재와 동행하는 이들은 빠르게 배에서 멀어져야만 했다. 괜히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 여유 같은 게 없었던 것이다.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기도하는 케이트를 돌아볼 새도 없이, 정박 이후 곧장 짐을 내리기 시작하는 선원들 사이로 세 사람은 빠르게 지나쳤다.
커다란 배에 탄 상인들과 선원들 하나하나의 신분을 모조리 체크할 수는 없는 탓에, 케이트와 선장이 대표로 그들의 신원을 책임지기로 했고, 덕분에 신원 불명자인 파탈리테도 잡음 없이 도시로 숨어들 수 있었다.
도시는 별로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런 도시를 마주한 현재는 감상을 입 밖에 냈다.
"황도나 카디악에 비하면 상당히 초라한 도시네?"
"국경에 가까울 수록 도시의 크기도 모양도 조악해. 항상 고블린과 엘프들에게 위협 받는 땅이니, 파괴되어도 손실이 적도록 많이 투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걸 왜 네가 말하냐?"
"너희는 북서쪽 변방에 틀어박혀서 이쪽에는 한 번도 온 적 없다는 거잖나? 그럼 한 번이라도 와본 내가 더 잘 알겠지 않을까? 나도 이 도시 안에 들어와본 적은 처음이지만 말이다."
"바이젠 평야라는 게 이 근처인가?"
"아마도. 이 도시 자체가 그곳 곡창지대에서 생산한 곡물을 운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 하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겠지."
현재는 케이트에게서 받았던 제국 동남부의 지도를 펼쳐 보았다. 이곳 엠브리오는 국경까지 도달하기 이전에 존재하는 유일하게 멀쩡한 도시였다. 이전에는 더 바깥쪽에도 도시가 있었지만, 그곳들은 지금 현재의 옆을 걷고 있는 엘프 소녀의 침공으로 인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새삼 깨달은 건데 내가 데리고 있는 이거 전범인 거지?'
사형 이외의 다른 형벌이 내려질 리가 없는, 실제로 처형될 예정이었으나 인간의 욕심으로 빼돌려진 탓에 살아남은 기구한 운명의 엘프.
그런 엘프가 싸웠던 전장 근처를 본인과 함께 걷고 있다는 건 굉장히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조금만 더 가면 내가 싸우고 패배해 붙잡혔던 곳, 내 동족들은 어떻게 됐을까…….'
파탈리테는 전쟁 도중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이후 동족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 도시에 들어온 순간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대고 있었다.
'살아남았을 가능성 따위,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만.'
엘프는 인간보다 약하다. 신의 은총이 없는 이상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엘프들이 인간의 도시를 약탈할 수 있었던 것은 걸어다니는 재앙인 파탈리테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없는 엘프 군대 따위 오합지졸, 예쁘기만 한 쓰레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이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을지 상상하는 일은 그리 대단한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내가 잡혀간 지가 몇 달 지났더라?'
너무 당연한 결말인데도, 그 끝을 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파탈리테는 일어났을 리가 없는 기적을 바라고 있었다.
'기적 따위 믿지 않는데. 어째서.'
믿지 않는데, 믿고 싶지 않은데 자꾸 기적을 떠올리고 마는 것은 마음의 나약함 때문일까. 파탈리테는 떨리는 입술을 핥으며 마음을 새로이 했다.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걸 알게 되더라도 받아들여. 당연한 일이잖아? 내가 진 순간 그들이 살아남을 가능성 따위는 없었어. 그건 모두 나의 약함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죽어간 이들의 묘비 앞에 묶여 있을 시간 따위 없지. 오히려, 그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그 혼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와 파탈리테가 모두 너무나 진지한 얼굴로 걷고 있었기에 미아 또한 별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조용히 따랐다. 꽤나 무거운 침묵이었다.
"대부분의 보급은 황도에서 이미 끝내뒀었지. 오래되면 상하는 먹거리 빼고는. 이제 우리가 챙겨야할 건 그런 식량 뿐이야. 내일 아침 날이 밝는대로 시장에 들린 다음 국경 쪽으로 향하면 될 거다."
저녁이 늦은 시간이었기에 시장은 닫은 후였다. 제대로 시장을 보기 위해서는 내일 아침을 기다릴 필요가 있었고, 때문에 현재 일행은 여관을 잡고 이 도시에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아르젠타 시를 떠난 후로 항상 고급 여관에서 묵었던 현재지만, 이곳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일부러 평범 이하의 여관을 골랐다.
그런 만큼 식사도 침대도 영 별로였지만, 문명에서 맛보는 마지막 침대이리라 생각하여 최대한 좋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달이 하늘 가운데 걸린 시각, 잠들지 못한 엘프 파탈리테는 침대에서 벗어났다.
"어디 가냐?"
현재가 그 작은 기척을 눈치 채고 물었다.
"그냥, 잠이 잘 안 와서, 산책이라도 해볼까 한다."
"사고 치지 마라."
현재는 그 말을 끝으로 막지 않았고 파탈리테는 거리로 나왔다.
'이 떨리는 느낌은 대체 뭐지?'
왠지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 배에 타고 있을 때보다 울렁거림이 더 심해진 것을 보면 단순히 운하가 가까운 도시이기 때문은 아니리라.
파탈리테는 그 떨리는 느낌을 안고서 발걸음이 이끄는대로 몸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인적이 드문, 기묘한 분위기의 뒷골목에 홀린 듯 빨려들어오고 말았다.
오고 가는 이들은 잔뜩 취한 듯 모두 발걸음이 휘청이는 사람들 뿐.
파탈리테 또한 가슴의 울렁거림으로 인해 앞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고, 그래서 휘청이는 사람과 몸을 부딪히고 말았다.
"아이씨! 뭐야! 이런 곳에 꼬맹이가 왜 있어!"
소리지르는 남자는 대머리였고 근육질이었고 흉터가 많았다. 단순한 노동직으로는 보이지 않는, 싸우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듯한 사내.
그의 옆에 있던 홀쭉한 사내가 파탈리테에게 조용히 경고했다.
"꼬맹아. 여긴 어린 애가 들락날락 거리가 아니다. 나가서 다시는 얼씬도 하지 마라."
끄덕, 고개를 끄덕인 파탈리테는 골목을 나가려고 했다. 주목 받아서 좋을 일이 없는 몸. 사건에 휘말리기 쉬운 이런 거리는 피해야만 하리라.
그렇게 몸을 돌려 나가려는 파탈리테의 어깨를 어느 손이 잡았다.
"잠깐. 이 녀석 생긴 게 이상한데?"
휙, 하고 파탈리테의 몸을 도로 돌린 남자는 입이라도 맞출 듯이 얼굴을 가까이 하고는 소리질렀다.
"씨발! 엘프잖아! 너희는 눈이 옹이구멍이냐? 어떻게 엘프 암컷을 못 알아보고 그냥 아이라고 생각하냐고!"
달큰한 냄새가 코를 쑤셨다. 이상한 향기를 뿜는 남자는 파탈리테의 후드를 넘겨버렸다. 그 속에 감췄던 엘프의 상징, 뾰족하고 긴 귀가 드러났다.
'죽여야 하나?'
파탈리테는 자신이 지닌 무장을 떠올렸다. 로브 속 양 허벅지의 벨트마다 단검을 매어놓아, 두 자루의 단검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이 거리에서 취객 따위를 절명 시키는 일에는 1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녀의 손이 자신의 허벅지 쪽으로 향했다.
"엘프였냐아? 그런데 왜 가게에 안 있고 여기 싸돌아다닌대냐?"
"도망친 거 아냐?"
"그게 되겠냐고, 됐으면 진작에 멀리 도망쳤겠지. 안에 있는 놈들이 심부름이라도 보낸 거 아냐?"
"꼬맹이 엘프가 뭘 할 수 있다고 심부름을 보내겠어? 아니, 애초에 어떻게 이렇게 멀쩡히 걷고 있는 거래? 이제 남은 엘프는 다 곧 죽을 것처럼 빌빌대는 년들 뿐이던데."
세 사내는 취한 탓에 파탈리테에게 물을 생각도 나지 않는 건지 저들끼리 떠들어댔다. 파탈리테는 그 대화에서 어떠한 실마리를 찾았다.
'가게 안에 엘프가 있어? 생존자?'
사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바람에 골목의 시선이 모두 여기로 쏠렸다. 세 남자를 제압하고 고문해서 정보를 캐기에는 상당히 곤란한 상황.
괜한 소란에 휘말렸다가는 기껏 찾아낸 단서조차 놓쳐버릴지도 모른다. 그리 판단한 파탈리테는 취한 세 남자를 속여넘기기로 했다.
"맞아요. 심부름을 갔다온 거에요. 근데 밖에 처음 나왔기 때문에 길을 잃어버려서, 가게가 어디었죠?"
"역시 엘프 녀석들은 다들 저능하다니까! 자기 사는 곳도 모를 정도로 지능이 낮냔 말이야!"
"그만해 인마. 밖에 나오질 못하는데 가게가 어딘지 외울 수가 있겠냐고. 크하하하하."
만취한 탓에 머리가 안 돌아가는지 수준 낮은 대화 밖에는 하지 못하는 사내들. 그중 하나가 어떤 건물을 가리키며 파탈리테에게 전했다.
"저기 있는 저 문 지하로 들어가면 대기실이다. 빨리 들어가봐."
"감사합니다."
어떠한 불길한 예감, 아니 확신을 가지면서 파탈리테는 발을 옮겼다. '대기실'의 입구에는 문지기가 있었다. 어떤 조직의 하수인인 듯, 검은 색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허리에는 단검을 찬 남자가 문을 지키고 서있었다.
문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그 문 안에서 나왔다는 어설픈 거짓말은 통하지 않으리라.
"뭐냐, 넌, 웬 꼬맹."
그러니까 죽인다. 계단 아래 지하인지라 이곳을 주시하는 눈은 없다. 파탈리테는 문지기의 심장을 후벼 3초만에 절명시켰다.
이후, 남자의 몸에서 쏟아진 피는 파탈리테의 피부를 통해 흡수되었다. 남자의 시체는 바짝 마른 미라처럼 수분 하나 없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극."
피를 빠는 일조차 파탈리테에게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순수한 물이 가장 아프지만, 수분이 든 것을 몸에 받아들이는 모든 일이 엘프에게는 고통스러웠다.
그렇기에 이 불쌍한 흡혈귀는 한 사람 분의 피를 몸에 받을 때마다 자신이 살아있는지 죽어버린 것인지 헷갈릴 정도의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하아……."
그 통증을 상쇄해주는 것은 생명력이 몸에 차오른다는 충만감 뿐. 그러나, 이 조직의 졸개는 별볼일 없는 생명력을 지녔기에 잡아먹는다고 그리 기분이 좋을 것도 없었다.
'이 안에 내 동족들이 있는 것인가?'
이제는 너무나 심하게 선명해진 불행의 예감. 이런 장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파탈리테는 너무나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문을 열지 않으면 안된다.
한 번 패배하여 붙잡혔던 여왕은 자신의 패배가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그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
파탈리테는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그녀가 상상하던 그대로의, 그러나 결코 아니길 빌었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 하악……, 학……."
상대해줄 남자가 없어 외로운 것인지, 손에 수갑을 차고 누운 채로 제 허벅지를 서로 비벼가며 음란한 숨결을 토해내는 엘프 여성.
머리칼은 부스스하고, 얼굴은 초췌하고, 눈빛은 총기를 잃었다. 그건, 정말로 노예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파탈리테는 다가가, 그녀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그 뺨을 쓸며 얼마나 아팠냐고 물어볼 셈이었다. 그럴 수 없었다.
"츄릅……."
파탈리테의 손가락이 다가갔을 때, 엘프 여성은 그 손가락을 빨았다. 그것은 털 고르는 동물들이 보이는 그루밍 따위의 행동은 아니었다.
펠라치오, 입에 다가가는 모든 것에게 봉사를 하도록 교육 받은 노예는, 그 손을 뻗는 것이 키 작은 엘프 소녀라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한 채 헌신적인 봉사를 했다.
파탈리테의 눈가가 이지러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이를 악물었다.
'긍지 높던 엘프의 전사가…….'
국경 너머까지 쳐들어온 것은 전사들 뿐이었다. 싸울 수 없는 비전투 인원 따위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여성은, 분명 한 때에는 전사였던 자이리라.
전쟁의 패자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당연, 혹 살아남았다고 한들 노예가 되는 것은 필연임을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영락한 동포이자 부하이자 전우의 모습을 보는 것은, 파탈리테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흉터를 아로새겼다.
"아, 하응!"
멀찍이, 문 너머, '대기실'이 아닌 곳에서 여성의 신음이 울려퍼졌다.
하나가 아니었다. 십수 개의 신음 소리는 이 가게가 아주 성공적인 영업 중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만하고 싶다.'
피로했다. 어차피 이곳을 뒤집어 엎는다고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 걸 알기에, 파탈리테는 그냥 여기 누워 잠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등에 업힌 수십만의 원혼이 허락해주지 않았기에, 그럼에도 파탈리테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달빛조차 외면해 들지 않는 노예 창관 안에 쾌락에 헐떡이는 신음 대신 혼이 몸을 빠져나갈 때 울리는 단말마가 가득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