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물 위의 흡혈귀
* * *
저녁. 현재 일행은 짐을 챙기고 여관에서 나오며 모든 대금을 치렀다. 2박 3일의 짧은 체류였지만 즐거운 추억을 잔뜩 만들었다고 현재는 생각했다.
"미아 덕분에 분위기 있는 관광지도 둘러보고 참 알찼네."
"맞아. 야한 거 말고도 재미 있는 일은 잔뜩 있는 거야. 그러니까 좀 주변을 둘러보란 말이야."
미아의 말에 현재는 멋쩍게 웃었다. 글쎄, 왜 이렇게 자꾸 성에 집착하게 되는 걸까.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인가?'
동물은 죽기 전에 생식 본능이 최대가 된다고들 한다. 현재가 이 여정 끝에 반드시 승리하고 살아남겠다고 맹세한 것과는 별개로, 그 몸은 저절로 자신이 살아왔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20대 남자가 이 만큼 건강한 거야 당연한 건지도 모르고.'
학생 시절 성욕이 이 만큼이나 강하지는 않았지만, 인간 남성의 신체적 전성기는 보통 20대 초반, 그것도 콕 찝어 23세 가량이라고 한다. 딱 그 나이로부터 한 살 빗겨나간 현재는 정욕도 그만큼 풍부하게 자라난 것이 당연한 일일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창 시절에는 옆에 이런 미녀가 없었으니, 현재의 매우 강한 성욕은 반쯤은 미아의 탓이 아닐까? 현재는 그리 생각했다.
'말 하면 화내겠지?'
현재는 고민하다가 살짝 돌려말했다.
"미아가 너무 예쁘고 매력적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어. 내 눈에 자꾸 너 밖에는 안 보이는걸?"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똑같은 말이라도 어휘 선택이나 어감을 다르게 하면 다르게 들리는 게 인간의 말이었다. 참고로 본래 하려던 말은 '네 몸이 너무 야해서 자꾸 꼴리게 하잖아!'였다.
"퍽이나!"
미아는 말도 안된다는 듯 소리질렀지만 그 얼굴엔 다 감추지 못한 웃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배를 향해 걸어가던 이들 옆에 스치듯 검사가 지나갔다. 아니, 지나가려 했다.
"대뜸 남의 일행에 칼을 겨누는 건 뭔 짓이지?"
"어떻게?"
이곳은 평화로운 대로변, 아무 소란도 없이 늦은 저녁을 걸어 즐길 거리를 찾아가거나 집에 향하는 평범한 시민들이 잔뜩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단숨에 행인의 목을 치기 위해 검을 휘두른 여자가 한 명, 그 여자의 손을 잡고서 검을 휘두르지 못하게 막아낸 남자가 한 명.
현재는 파탈리테의 목을 향해 휘둘러지는 검사의 검을 막기 위해 그녀의 양손을 잡아 막았다.
'어떻게 알아채고 막았지?'
검사는 제 검이 잡힌 것에 당황했다. 이 기습을 눈치 채고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의외로 힘이 세네?'
현재 또한 놀라고 있었다. 그것은 현재가 여신에게 힘을 빌리고 처음으로 느끼는 감각이었다. 여태까지 그 누구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힘이었는데, 지금 눈 앞의 여자는 현재에게 유의미한 긴장감을 줄 수 있을 정도로 힘이 강했다.
'그렇다면 놔줄 수는 없지.'
현재는 여자의 손을 부숴버리려고 했다. 먼저 기습한 이상 그 정도의 조치는 취하는 게 당연했다. 기습의 이유를 묻는 일은, 완전히 제압했다는 자신감이 있을 때나 하는 것이었다. 조금 우위를 잡았다고 방심하면 훅 간다. 현재는 미아에게 그렇게 배워왔다.
그렇게 손에 힘을 주어 여검사의 손을 부숴버리려고 했을 때,
"앙그레!"
여자는 주문 같은 말을 외웠고 갑자기 강해진 힘으로 현재를 밀쳐냈다.
'힘에서 밀렸어?'
여자는 현재를 떨쳐낸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대로 검을 휘둘러 파탈리테의 목을 마저 따려 했다. 현재는 그녀보다 빠르게 움직여 파탈리테와 미아를 끌어안고 먼 곳으로 회피 기동을 했다.
"히익?"
"윽!"
너무 빠른 이동 탓에 일행들의 몸이 충격을 받았다. 평범한 사람들은 뭐가 휙휙거린다는 감상 밖에는 남기지 못할 초인들의 싸움.
미아는 뒤늦게 자신들에게 검을 겨눈 여검사를 발견했고, 파탈리테는 혀를 찼다.
"칫."
여자는 파탈리테가 아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파탈리테를 쓰러뜨린 유일한 인간이 그녀였으니.
'너무 대놓고 돌아다녔나? 아니, 이 큰 도시에서 우연히 마주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추적형 아티팩트를 갖고 있었나?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텐데.'
파탈리테는 견적을 쟀다. 현재와 여검사,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기게 될까? 싸움에 걸리는 시간은?
"무슨 일이냐!"
순찰 중이던 경비병들이 칼부림을 제압하려 다가가다가, 여자의 얼굴과 목소리를 확인하고 멈춰섰다.
"너희는 행인들을 피난시켜라. 적의 상대는 내가 하겠다."
"앗! 엘리님? 어째서 이런 곳에?"
"조심해라, 적은 너희가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니까. 끼어들 생각은 말고, 주변인을 피난 시키는 일에 전념해."
"알겠습니다!"
그 사이 현재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현재는 제 등에 짊어졌던 짐을 미아에게 넘기고는, 그녀에게 당부했다.
"미아, 이 애를 챙기고 바로 출발해. 나는 경유지에서 반드시 합류할 테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이동하라고."
이동수단이 배라는 것을 특정 당하지 않기 위해 현재는 그렇게 말을 돌려 지시했다. 미아는 파탈리테를 데리고 이탈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스스로 살아날 방법을 고민하던 파탈리테는 그 사실에 놀랐다.
'내가 원인인 게 명확한데도, 날 버리지 않는 거야?'
엘리는 그 뒤를 쫓으려 했으나, 현재가 막아섰다. 현재를 제치려고 시도하다간 등 뒤가 비어 치명상을 허락하게 될 가능성이 너무 컸다.
그녀는 검을 든 채, 현재는 맨손인 채, 그 정도가 딱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균형을 이룬 상태였다. 그런 아슬아슬한 균형은 어디에서든 무너질 수 있었는데, 등을 보이는 치명적인 짓 따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너, 저 엘프가 무슨 괴물인지 알고 데리고 있는 거냐?"
"알고 있지. 사람 피를 빠는 흡혈귀라면서?"
"아니. 너는 전혀 모른다. 겨우 사람 서른하나 죽여본 애송이 주제에 뭘 안다는 거냐?"
"서른하나? 나도 모르는 숫자를 잘도 아는데?"
"내 눈에 담긴 아티팩트의 힘이지. 불의 신께서 악한 자들을 처단하라고 내리신 신물. 그리고 저 엘프가 죽인 인간의 수는 12만 8761이다. 알았으면 비켜라. 저 괴물을 놓치면 또 몇 개의 도시가 불타 사라져버릴지!"
"13만이라. 호들갑을 떨만 하기는 하네."
그러나 현재는, 비켜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듣고서도 막아서겠다는 거냐? 그렇다면 죽여 치울 수 밖에 없지."
검사의 검이 하늘로 치솟았다. 삭월을 그리는 검의 궤적은 절제되어 아름다웠다. 가장 효율적이기에 그만큼 아름다운 검로, 그 아름다움에 한눈을 판다면 그 순간에 몸이 갈라져 죽음을 맞이할 터다.
현재는 피했다. 손으로 잡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초월의 영역에 달한 그라고 해도 엘리의 검을 맨손으로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속도도 힘도 아주 약간의 우위를 가졌을 뿐이다. 무장과 비무장의 차이로 메꿔질 수 있는 정도라서 그녀를 압도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손으로 잡을 만한 검은 아니네. 황제가 사는 황도라더니, 진짜 괴물 같은 놈이 숨어 있었잖아?'
현재는 자신이 매우 강하다는 것은 느꼈지만, 그렇다고 대륙 최강이리라고 오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우연찮게도 자신과 비슷할 정도의 능력을 가진 여자와 적대하게 될줄은 몰랐다. 아니, 정말로 우연이기는 한 걸까?
"너, 정체가 뭐냐?"
"내가 먼저 묻고 싶군. 너는 대체 누구길래 저 학살자 엘프를 감싸는 거지?"
"그냥, 내 동료가 되려면 그 정도 능력은 있어야겠다 싶었을 뿐이야."
"미친 놈."
여자는 검을 휘둘렀고 현재는 그녀와 너무 멀어지지 않게 유도하며 근처의 경비병을 노렸다. 경비병을 급습한 그는 경비병의 무장인 한손검을 빼앗아들고 여자의 검을 제압하려 했다.
쨍강, 아쉽게도 길거리의 흔한 경비병이 지닌 칼은 두 초인의 검격을 일합도 견뎌내지 못했다. 오히려 어설프게 검을 믿었던 탓에 현재는 팔이 스치며 칼자국을 팔에 남기고 말았다.
'오랜만에 다쳐 보네.'
뜨거운 통각이 몸에 흥분을 더하고 심장을 요동치게 해 전투에 더 적합한 상태로 만들어줬다.
'다행히도 독은 없나 본데?'
암살자처럼 칼에 독을 발라뒀다면 더 성가셨을 텐데, 엘리는 그런 사전준비를 해두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현재는 뒤늦게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붉은 망토와 금장식이 섞인 은백색의 제복, 척 봐도 신분이 높아보이는 여자다. 어째서 이 평화로운 거리에 와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마치 고위 기사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황실 근위대 쯤 되나?"
"1기사단 단장, 황제의 검, 엘리. 이 이름을 안다면 당장 도망치도록 해라. 특급 수배자이자 이미 처형당한 사형수 파탈리테를 감싼 죄는 즉결 처형감이니."
"네가 이 황도에서 제일 센 대빵이냐?"
"그래."
"그건 좀 다행이네. 나랑 맞설 정도의 상대가 사천왕이나 십강 같은 소리 하면서 잔뜩 나왔으면 엄청 기분 나빴을 텐데."
현재는 바닥에 손을 꽂고 길거리를 뒤엎었다. 검이 없는 이상 주변 지형과 사물을 이용해서 싸우는 것 밖에는 답이 없어 보였다.
'검을 배에 두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의 무장인 거인을 가르는 검과 타워실드는 배에 실어둔 채 내렸다. 고블린도 없는 황도에서 본격적으로 싸울 생각 따윈 전혀 없었고, 또 본신의 무력을 믿었기에 따로 무장을 챙기지 않은 채 다녔던 것이었다.
이런 강자와의 싸움이 벌어질 줄은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다.
'후회해봤자 늦었지.'
뜯어진 길바닥이 10미터 가량 일어나 파도처럼 엘리를 덮쳤다. 공간 감각을 잃는 순간 죽는다. 판단이 늦어지는 순간 죽는다. 직감에 따라 왼쪽으로 뛰어 피한 엘리는 곧장 날아드는 현재의 주먹을 막아야 했다.
그 짧은 순간에 세로로 검을 세웠다. 이대로 손과 검이 부딪힌다면 분명 손이 반으로 잘리고 말겠지. 황제의 검이라 불리는 엘리가 황제에게서 하사 받은 아티팩트는 그런 정도의 명검이다.
"습!"
주먹을 뻗던 현재는 몸을 틀어 팔의 방향을 바꾸며 회전력을 다리에 실어 돌려차기로 전환했다. 노리는 곳은 검이 막아주지 못하는 다리쪽, 명중한다면 다리를 부숴 기동력을 빼앗을 수 있으리라.
"힌지!"
엘리의 발 밑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그 충격으로 몸이 하늘에 떴다. 현재는 폭발에 다리를 쓸려 옷이 찢어지며 피부에 흙더미가 날아와 박혔다.
'아주 아티팩트로 떡칠을 했구만?'
그러나 하늘에서는 방향을 바꿀 수 없으리라. 그리 판단한 현재는 하늘을 향해 땅 속에 묻혀있던 바위를 뽑아 던졌다.
쿵!
그러나 검을 눕혀 검신으로 바위의 힘을 흘려낸 엘리는, 그 바위가 너무 멀리 날아가기 전에 타고 달려와 옆 건물 지붕을 향해 도약했다. 흡사, 쏘아낸 대포를 밟고 달려오는 것처럼 보여 도무지 인간에게 가능한 곡예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 대단한 곡예를 선보인 엘리는 그대로 지붕을 넘어 미아가 사라진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거리를 너무 벌렸나? 아직 미아는 멀리 못 갔을 텐데.'
엘리의 목적은 현재에게 이기는 것이 아니라 파탈리테를 척살하는 것, 그래서 어설프게 거리를 벌렸다간 이렇게 되는 게 당연했다. 현재는 손으로 땅을 긁어 벽돌을 잔뜩 뽑아내면서 엘리를 따라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벽돌을 투척무기 삼아 달려가는 그녀의 등짝을 맞춰 쓰러뜨릴 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씁, 여기서부터는 심리학의 영역인가?'
힘은 충분히 강했다. 그 힘을 컨트롤할 정밀함도 갖췄다. 250미터 바깥의 정지한 과녁을 맞추는 것이라면 너무나 쉽게 가능하겠지. 조금만 연습하면 그보다 훨씬 더 멀다 해도 맞출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지금 맞추려는 표적은 그 자신에 준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표적. 던지는 궤적은 하나일 수 밖에 없는 것에 반해 그녀는 입체적으로 어디로든 피할 수 있어, 선택지는 무한이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할 만큼 무수히 많았다.
그렇기에 이 거리에서 벽돌을 던져 맞추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현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협박, 인질. 저쪽이 파탈리테를 노려서 따라간다면 나는 이 도시의 시민을 인질로 잡으면 된다.'
현재가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논리적인 해답이 나왔다. 물론, 윤리는 다소 결여되어 있었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
"이봐! 엘리!"
벽돌을 던져 주변의 건물을 붕괴시키면서 엘리의 이름을 불렀다. 기둥이 통째로 파괴된 건물들은 하나둘 씩 그 커다란 몸집을 주저앉혔다. 엘리는 음속보다는 빠르지 못하기에 붕괴의 폭음이 그녀의 귀에도 들렸을 터다.
"13만 명을 죽인 엘프를 쫓다가 60만 황도 인구가 전부 죽게 둘 거야? 네가 지금 막아야하는 건 그 녀석이 아니라 나 같은데?"
뒤에 눈길 따위 주지 않으려 했던 엘리의 몸이 멈칫했다. 그녀의 이성은 상대가 그런 미친 짓거리를 벌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그녀를 멈추게 해 불러세웠다.
만약 저 남자가 진짜로 학살을 벌일 수 있는 미치광이라면? 13만을 죽인 엘프를 감싸는 것을 볼 때 그 가능성은 분명 제로는 아니다.
"어째서냐! 왜 그 엘프를 그렇게까지 감싸지? 그 녀석을 써서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냐?"
돌아보며 엘리는 멈췄고, 현재 역시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섰다.
"궁금하면 나를 이긴 다음 고문해서 입을 열게 하면 되겠지?"
까딱까딱, 현재는 손을 까딱여 엘리를 도발하며 말했다. 둘의 싸움은 쉽게 끝나지는 않을 듯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