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황도에서
* * *
"멋있어."
"이게 정말 멋있는 거야?"
"그럼!"
현재는 꽤 조이는 하얀 바지와 하얀 셔츠, 그 위를 덮는 검은색 조끼 위에 하얀 스카프라는 상당히 기묘한 차림을 강요당했다. 지구 기준으로 묘사하자면 마치 승마복 같은 차림이었다.
"그리 입으시니 마치 젊은 귀족 신사분 같으시네요."
여자 점원이 와서 같이 호들갑을 떨었다.
'이 세계에선 이런 게 유행인가? 아니, 점원이야 팔아먹으려고 호들갑을 떠는 거겠고.'
"이렇게 멋진 근육을 가진 신사분을 뵙는 건 처음이랍니다. 옷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정말 탐나는 모델이에요."
점원의 호들갑에 미아의 표정이 복잡미묘해졌다. 현재가 칭찬을 받는 건 좋은데 너무 건방질 정도로 들이대는 느낌이 있었다. 여기 옆에 임자 있는 거 안 보여? 그렇게 따지고 싶은 기분.
"이런 멋진 남편 분이 있으셔서 좋으시겠어요. 이렇게 귀여운 따님 분이랑."
파탈리테가 케이프의 후드를 쓰고 귀를 가리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얼굴의 갈색 피부는 눈에 띌 텐데. 점원은 어째서인지 미아와 현재가 부부고 파탈리테는 딸이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미아는 잔뜩 우쭐해진 표정으로 점원에게 답했다. 현재가 보기엔 그냥 점원의 판매 전략인 것 같았지만, 미아는 아무래도 진심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래요? 보이는 만큼 힘이 좋아서 든든하긴 한데, 너무 힘이 넘쳐서 힘든 것 같기도 하고……."
미아가 하는 말에 현재는 깜짝 놀랐다. 나 얘랑 밤일 했어 동네방네 광고를 하는 꼴이 아닌가? 항상 현재가 들이대면 놀라 몸을 빼던 미아기에 그런 반응은 좀 의외였다.
'하긴, 내가 시킨 건 거의 노출광 치녀급 행동들이긴 했지.'
미아도 그렇게까지 폐쇄적인 성향은 아니었던 거다. 현재의 너무 심한 변태짓에 거부 반응을 보였을 뿐. 이 남자가 내 남자고 밤일에 뛰어나단 자랑 정도는 할 수 있는 여자, 미아는 그런 여자였다.
'그럼 엉덩이 정도는 만져도 되는 거 아닌가?'
현재는 그 선을 가늠해보려 고민하다가 적어도 오늘 정도는 참기로 했다.
'기분 좋아 보이는데 괜히 건들지 말자.'
미아는 현재가 입은 승마복 비슷한 옷 위로 클록이라는 망토 비슷한 겉옷을 덮었다. 클록에는 머리를 덮을 수 있는 후드가 달렸고 따로 팔을 끼우는 구멍은 없었다. 목에 두르고 끈을 매어 고정하는 형태였고, 전체적으로 어깨와 등을 덮는 망토 형태의 의상이었다.
'이건 좀 괜찮아 보이네.'
검은 색의 클록은 마치 중세 배경의 게임에서 암살자가 입는 옷 같았다. 현재의 특징적일 정도로 커다란 덩치는 암살자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아 보였지만.
'이 하얀 바지만 어떻게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미아가 좋다니까 어쩔 수 없나.'
백바지가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좋을대로 미아에게 옷을 입혔던 대가라 치면 싼 것이리라. 현재는 그리 생각하며 미아가 골라준 옷을 받아들이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그럼, 이제 다음은 뭐하고 싶어?"
"관광할까? 황도에는 작은 도시에선 볼 수 없던 구경거리가 잔뜩 있다는 모양이야."
언제 알아본 건지, 미아는 현재와 파탈리테를 끌고 보고 싶던 관광지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
"와!"
커다란 초대형 분수. 거의 작은 호수처럼 보이는 분수의 위용에 미아는 감탄했다. 현재와 파탈리테는 조용했지만. 그 맥 빠지는 반응에 미아는 당황했다.
"역시, 이런 거 보는 거 별로야?"
미아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녀 원하는대로 가도 좋다고 했지만 역시 이 정도로 반응이 없으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마법이 아닌 이상 이 세계 물건이 날 놀라게 할 수는 없을 텐데. 그래도 미아 기분에 맞춰줘야지.'
자유 이용권이라는 것이 너는 놀아봐라 나는 따라가만 줄게 이런 의미는 아니었다. 되는 한에서 최대한 기분을 맞춰주겠다는 의미. 현재는 호들갑은 떨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분수의 분위기에 놀란 척을 했다.
"아니, 신기한 걸 보니까 좋네. 전기도 없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큰 분수가 쏟아지게 만든 걸까."
아마도 기계장치가 어찌어찌 힘을 전달하는 것이겠지. 물리학도 기계공학도 배운 적 없는 현재는 아주 어설프게 밖에는 작동 원리를 상상하지 못했다.
"전기란 건 번개의 힘을 작게 만들어 사람들이 쓰는 거랬지?"
미아는 언젠가 현재의 입에서 들었던 지구의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은 번개가 전기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전기를 다루는 이가 하나도 없는 세상에서 번개 외의 방법으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기에 현재는 그렇게 설명을 했었다.
"그게 있으면 무척 편리하다고, 없으면 너무 불편하다고 그러면서 적응하기 어려워 했었지."
"그래. 이 세계도 전기를 쓸 수 있게 되면 좋을 텐데."
혹시 누가 당장 전기를 발견해내더라도, 활용 방안과 저장장치를 개발하고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에는 수백 년이 걸릴 것이었다. 현재가 전기 기술에 대해 아는 거라곤 배터리에 리튬이 들어간다는 것 정도일까. 리튬이 뭐고 어디서 구하는 건지도 모르는데 기술 발전을 선도한다는 건 매우 요원한 일일 것이다.
"역시, 이 세계는 엄청 불편하고,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그렇겠지?"
미아는 쓰게 웃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해도 그것 뿐인가. 현재의 대답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두 세계 중에 고르라면 미아가 있는 이 세계가 낫네. 가장 최고는 미아랑 함께 그쪽 세계에 돌아가면 좋겠지만. 꼭 둘 중의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여기를 고를래."
아니, 바뀌었다. 현재는 여전히 편하고 안전하고 안락한 지구를 매우 그리워하지만, 그곳에 미아가 없다면 필요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어제 확실히 느꼈다.
"정말?"
미아는 약간 드러난 불안을 다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정말이지."
아니, 그 떨림은 불안 때문이 아니라 행복 때문이었나?
"그 세계보다도 내가 더 중요해?"
"그럼."
미아의 눈가에 자그마한 물방울이 맺혔다. 인간은, 때론 기쁘기에 울기도 하는 생물이었다.
"나도, 그 어느 세계보다도 현재가 더 중요해."
한 세계에 밖에는 살아보지 않았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미아가 진심으로 그리 믿어버렸다는 것.
달려들듯 현재의 품에 들이닥친 미아는 폭 안겨들어 그대로 입을 맞췄다. 키 차이로 인해 흡사 철봉에 매달리듯 현재의 목을 끌어안고 몸을 띄운 상태였기에, 현재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 미아의 허벅지를 잡고 몸을 지탱해주어야 했다.
어쩌다 보니, 들고 박는 듯한 자세가 됐지만 미아는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아님 눈치 채지 못했을 수도 있고.
'여자친구 팔힘이 너무 좋으니까 이런 일도 일어나네.'
팔만으로 이렇게 자기 몸을 쉽게 들어올릴 수 있는 여자는 한국에는 매우 드물겠지. 그런 우스운 생각이 들어 현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키스가 끝나고도 미아는 내려달라 하지 않고 현재의 팔에 들린 채로 한참을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꿀 떨어지는 듯한 눈빛으로 현재를 향해 눈웃음을 치면서.
'뭐지? 따먹어 달라는 신호인 것인가? 지금 나를 유혹하는 것인가?'
미아의 사랑 가득한 눈빛에 현재는 상당한 충동을 느꼈지만, 오늘 만큼은 참기로 결의했기에 그 이상 손을 대지는 않았다. 잔뜩 안겨 현재의 얼굴을 바라보던 미아는 한참이 지나고서야 내려달라고 하고 분수 앞에 걸어가 솟아나는 물줄기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현재야. 이 분수에 동전을 던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대."
"여기에도 그런 얘기가 있는 거냐."
너무 심하게 흔해빠진 이야기라 현재는 맥이 빠졌다.
"현재의 세계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
"관광지에 예쁜 분수가 있으면 거의 다 하나씩 달고 있는 전설이지."
가본 적은 없지만. 가난과 일에 치여 바빴던 현재는 관광이란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인간이었다.
"그래도, 이만큼 예쁜 분수를 본 건 처음이야. 데려와줘서 고마워. 사랑해."
허리를 슬쩍 끌어안으며 현재가 말하자 미아는 다시 현재의 얼굴을 보더니 아까처럼 달콤끈적한 꿀 같은 시선을 보내왔다.
'혹시, 나 잘생겼나?'
그게 진실인지 콩깍지가 씌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미아는 현재의 얼굴을 아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하긴, 나 정도면 절대 못 생긴 건 아니지.'
처음 보는 사람마다 그를 산적 두목 내지는 미친 살인귀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알지 못한 채 현재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도 사랑해!"
'저 인간들은 대체 나를 왜 여기 데려온 걸까?'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보며 파탈리테는 생각했다.
'그냥 숙소에 있을걸.'
이틀 연속 홀로 두는 건 불쌍하다고 미아가 말할 때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인간들에게 물이란 건 이렇게 갖고 놀아도 좋을 만큼 넘치는 물건인가.'
파탈리테가 분수를 보는 감상은 다른 이들과는 매우 남달랐다. 사막, 오아시스를 찾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삶, 그러나 한곳에 정착할 수 없는, 신의 저주를 받은 종족.
'물은 우리를 증오하지만, 우리는 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어. 이 저주란 건, 언젠가 풀 수 있기는 한 것일까.'
인간들은 몰랐다. 신에게 버림 받다 못해 저주 받은 종족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지. 파탈리테는 잘 알았다. 당연하지만 그녀가 살아온 삶을 그녀가 모를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까.
'아름답다. 허나 닿아서는 안돼.'
분수에서 계속 물이 흔들려서 바깥으로 쏟아지는 양이 결코 적지 않았으나, 파탈리테는 그 물에 가까이 가는 일을 할 수 없었다.
엘프에게 내린 물의 신의 저주로 인해, 그 종족은 물에 닿는 것으로 비할 데 없는 고통을 느낀다.
그렇다고 인간과 달리 물을 마시지 않고 살아갈 수 있냐면 그것조차 아니다. 그들도 인간과 같이 약 사흘 이상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으며, 그렇기에 물을 꾸준히 마셔야하고, 마실 때마다 지옥 같은 고통을 겪었다.
수인과 같이 신에게 버림 받은 이들조차 모르는, 신에게 저주 받은 종족의 삶.
그 끔찍한 삶에서 동족을 구해 건져내는 것이 파탈리테가 가진 단 하나의 목표이며 의무였다.
'나는, 그들에게 돌아가야만 해.'
은빛의 촘촘이 박힌 속눈썹 아래, 핏빛 눈동자는 오늘도 우울감과 사명감을 반씩 담고 있었다. 어쩌면 그 이상의 수십 가지 감정이 섞였는지도 모르고.
"리테도 동전 하나 던질래?"
꽁냥대던 두 연인은 이미 금화 하나씩을 분수에 던졌다. 현재는 던진 게 무려 금화이니 만큼 누군가 분수에 뛰어들어 그걸 건져갈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지만, 미아가 즐거워하고 있었기에 그런 것은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미아가 열심히 벌어들인 돈이었다. 한 도시의 영웅으로서 그 어떤 위기에도 도망치지 않고 도시를 지키며 싸워왔기에 쌓여 흘러 넘치는 돈. 그런 돈을 아깝다며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하는 건, 미아 입장에서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일이겠지. 설령 그게 돈을 분수에 던지는 일이래도 그랬다.
미아는 진심으로, 이 작은 기원이 기적을 일으켜 자기 소원을 이루어지길 빌고 있었으니까. 물론, 이런 동전에 모든 마음을 위탁할 만큼 나약한 여자는 아니지만서도.
"아니, 나는 됐어."
그리고 리테는 그 작은 기원조차 거부했다. 그녀는 신도 기적도 믿지 않는다. 신이 있다는 걸 믿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신이 그녀의 편을 들어주리라는 가능성에 대해 단 일말의 희망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쭉 그랬다. 태어난 순간부터. 기적 따위는 없다고 굳세고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나 뿐, 동족을 구할 수 있는 것도 나 뿐, 내가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절대로.'
이런 도시에서 노예로 썩어들어가기엔 어깨에 짊어진 과업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파탈리테는 현재에게 감사했다. 영원히 창고 밑바닥에서 썩어들어갔을지도 모르는 운명을 이 바깥에 풀어준 것에 대하여.
그 감사로 보은을 할 수 있을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 남자도 날 이용하고 싶은 거고, 나도 이 남자를 이용하고 있는 것 뿐.'
그래서 그녀는 생각한다. 마음을 벼린다. 날카로운 칼날처럼. 누구라도 찌를 수 있게.
혹은, 자신의 마음의 나약함마저 잘라버릴 수 있도록.
'나는 어디에서도 기대면 안되고, 누굴 의지해서도 안되고, 주저앉아 울어서도 안된다. 그렇게 약속했다.'
그녀가 그냥 보통의 엘프 노예가 아니라 상당히 대단한 존재임을 현재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흡혈귀니 뭐니 하는 간단한 설명으로 절대 담을 수 없는, 거대한 서사를 담고 있는 인물임을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