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황도에서
* * *
달이 깊은 밤. 여관 침대 하나를 혼자 차지하고 누운 파탈리테는 스르르 눈을 떴다. 현재 미아 파탈리테는 모두 같은 방에 있었는데, 미아를 커다란 사이즈의 침대에 재운 현재가 그 옆에 누웠기에 조금 작은 침대 하나는 통째로 파탈리테의 차지였다.
혼자 누운 것은 파탈리테에게 있어 호재였다. 그 기회를 살리기 위해 이 침대에 누운지 세 시간이 넘도록 그녀는 단 한 숨도 자지 않은 채였다.
모두 깊이 잠들기를 기다린 그녀는 이불 뒤척이는 소리 하나 내지 않도록 조심히 몸을 일으켜 꼭 유령이 움직이는 듯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바닥을 걸었다.
찰칵, 문의 잠금 장치를 여는 소리 만큼은 그녀가 주의한다고 없앨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다만, 소리가 새어나올 문틈 사이로 손을 받쳐 최대한 소리를 줄이는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고급 여관인 만큼 문조차도 신경 써서 관리했기에 경첩에 기름칠이 잘 되어 있었고 덕분에 문은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녀는 여관 2층에서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대신 오히려 윗층으로 올랐다.
여관은 총 4층의 건물이었다. 방 하나하나가 커다랗고 호화스러운, 부자들만을 상대로 하는 최고급의 여관. 복도의 창문조차 커다롭고 아름다워 건물 통째로 예술품 같이 보이는 여관이었다.
그 크고 아름다운 창문을 열며 파탈리테는 창틀에 발을 걸었다. 모두가 잠든 복도에 그 모습을 보는 이는 없었다. 물론 죽고 싶어 뛰어내린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녀는 발을 걸고 가벼운 몸을 들어 휙하고 창문 윗쪽으로 올라섰다. 이번에도 역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물흐르듯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마치 무희가 춤을 추는 것 같이 아름다웠다.
여관의 지붕은 붉은 색이었고 또한 삼각형이었다. 경사가 약 30도 가량 되는 완만한 기울기의 지붕. 그렇다고 해도 4층을 넘는 높이의 지붕을 걷는 건 꽤나 담이 커야 하는 일이겠지만, 이런 곳에서 떨어진다고 다칠 수준이 아닌 파탈리테는 길을 걷듯 자연스럽게 그러나 조용히 걸었다.
"아……."
작은 탄식이 그녀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곁에 있는 생물들도 거리와 건물의 모습도 먹는 것도 숨쉬는 공기의 냄새와 온도마저 다른 곳이었지만 그럼에도 밤하늘만은 사막에서 봤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살던 곳은 남쪽으로 대체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던가. 걸어서는 백날에 가까운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 테고, 무얼 타거나 열심히 뛰더라도 수십 일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이런 먼 타향에 완전히 홀로인 이방인이란 사실은 그녀의 심장을 돌칼로 휘적거리며 긁어 상처 입히는 느낌을 받게 했다.
그녀는 그리움을 삼키며 하염 없이 달을 바라보다가, 도로 4층의 창문을 통해 여관으로 들어오고는 2층에 와서 그녀가 묵던 방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소리 죽여 방문을 닫고, 찰칵, 소리만은 또 막지 못한 채 흘려버렸다.
"어디 갔다 왔어?"
그 소리에 깬 것처럼, 잠긴 목소리로 현재가 물었다. 파탈리테는 간단히 대답했다.
"화장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현재는 다시 몸을 눕혔고 파탈리테도 제몫의 침대에 누웠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밤이었다.
'미행했던 걸 눈치 챘나?'
현재 또한 애초에 잠든 적이 없었다. 생기를 빠는 살인 흡혈귀가 어디로 튈 줄 알고 잠을 잔단 말인가? 그래서 소리 죽인 채 방을 빠져나갈 땐 분명히 도망치거나 사건을 일으킬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파탈리테는 지붕 위에서 달을 본다는 황당한 짓만을 벌인 후 얌전히 방에 돌아왔다.
'역시 강한 남자다.'
예상대로 파탈리테는 현재의 미행을 눈치챘다. 그대로 도주해봤자 잡힐 것이라 생각했기에 얌전히 돌아왔을 뿐. 태연하게 아무 일도 모르는 척 잠 자다 일어난 사람을 흉내내는 것이 도무지 범상치 않은 인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나를 이 남자에게 맡긴 거겠지만.'
파탈리테가 루스키에게 팔려온 경위 또한 결코 범상치 않았다. 루스키는 그녀를 매우 갖고 싶어했지만, 도저히 다룰 수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고 포기했다. 그래서 지하 깊숙한 곳에 온몸을 철저히 구속당한 채 봉인되어 있었던 것인데, 루스키는 현재의 강함을 꿰뚫어보고서 그에게 이 처리가 곤란한 포식자 엘프를 떠넘긴 것이었다.
'역시, 당분간은 얌전히…….'
이 도시에는 현재 뿐만 아니라 '그 여자'도 있다. 그러니 눈에 띄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그것이 파탈리테의 결론이었다.
작은 사건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입에 담지 않은 밤, 달은 그 속도가 변하는 일 없이 꾸준히 하늘을 걸어, 이제는 지평선 아래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잠들지 않았다.
* * *
아침, 두 여자와 함께 여관이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하러 온 현재는 괴악한 광경을 보고서는 놀라 눈살을 강하게 찌푸렸다.
"뭐하는 거냐?"
"먹으라면서?"
"먹으라고 했지. 마시라고는 한 적 없는데?"
파탈리테는 또 음식을 씹지도 않고 마셔버렸고, 현재는 그 장면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한때 요리사였던 그로서는 주방장이 열심히 애를 써가며 만든 맛있는 요리가 저렇게 혀에 닿기만 한 채 식도로 넘어가는 꼴을 보고 있기 힘들었다.
'요리 맛이 개판이었다면 저래도 뭐라 하지 않았겠지만, 이 집 요리는 제법 맛있는데.'
현재는 동석한 미아를 향해 물었다.
"얘 설마 어제도 이랬어?"
"응. 한 가게에서 30인분을 먹고, 모자라다고 옆 가게에서 20인분을 더 먹었지 뭐야. 그래서 배가 말도 안되게 부풀어올랐었는데, 하루만에 다시 도로 작아졌네?"
로브를 입은 파탈리테이기에 배가 직접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 납작함 정도는 느낄 수가 있었다. 어제 먹었던 요리가 어디로 갔는지 의아할 정도로 쏙 들어간 배는, 처음 만났을 때의 날씬함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왜 그러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근본적으로 같은 행위 아닌가? 음식을 목 뒤로 넘길 뿐인 일."
현재가 왜 그러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파탈리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먹는다는 일엔 씹는다는 일이 선행되거든. 둘이 같은 거면 말이 따로 있겠냐고."
"나의 위장은 남들보다 훨씬 튼튼해. 굳이 씹지 않아도 소화를 시키는 일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렇다. 음식을 씹어 잘게 부수는 일은 애초에 소화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행위. 그런 것 없이도 말끔히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씹는 일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씹지도 않고 삼키면 요리의 맛을 알 수가 없잖아. 요리사가 어떤 맛이 날지 얼마나 열심히 고심해서 레시피를 고치고, 신선한 재료를 구해서 손질하는데 공을 들이고, 불조절을 하느라 땀을 빼고, 간을 맞추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그리고 또……."
"사막에서 식사란 되도록 빨리 끝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먹는 도중에 적습이 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둘째 치더라도, 그럴 시간을 아껴 한 시라도 바삐 움직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 사막에서 구할 수 있는 식량들의 맛이란 건 정말 끔찍해서, 음식을 먹는데 거슬리는 방해물일 뿐이었다. 자리를 깔고 앉아 먹는 일 따위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동하는 시간에 걸으면서 먹을 것을 입에 쑤셔넣는 일이 일상이었지. 동료들은 가끔 내 씹지 않고 삼키는 능력을 부러워했다."
파탈리테는 현재의 긴 이야기에 더욱 긴 이야기로 보답했다.
"그건 사막의 일이잖아. 여기가 아니고."
현재의 지적에 파탈리테는 눈을 깜빡이면서, 잠시 고민하더니 답을 바꾸었다.
"그렇다. 그랬구나. 그럼 나도 태도를 바꾸어도 상관 없는 것이구나."
파탈리테는 이제서야 고기를 마시는 대신 씹기 시작했다. 껍질 째로 잘 구워진 고기는 겉면의 바삭한 감촉과 속의 촉촉하면서도 쫄깃한 감촉, 코를 간질이는 진한 육향과 적절하게 짭짤한 간이 밴 육즙으로 입 안 가득히 커다란 행복을 선사해주었다.
"맛……, 이게 맛이 있다라는 느낌인 건가……. 그렇구나……."
파탈리테는 그 맛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으나 은빛 속눈썹이 낮게 쳐지며 얼굴에 빛나는 우울을 그렸다.
"내 동족들도 이런 맛을 알 수 있기를 바랬다."
먼 사막에서 아직도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을 동포들을 생각하며, 파탈리테는 천천히 고기 요리의 맛을 음미했다. 무엇 하나 쓴 맛이 날 재료 따위는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어째서인지 검게 그을린 듯이 탄 맛이 났다.
"파탈리테."
현재는 매우 진중한 목소리로 노예 엘프 살인귀를 불렀다.
"뭐지?"
그녀는 딱딱한 태도로 답했다. 그러고 보면, 소녀가 잠깐이나마 미소 짓는 모습을 본 것은 방금이 처음이었다. 물론, 만난지 하루 밖에 되지 않았고 즐거울 일을 같이 한 기억도 없지만.
"나와 함께 해서 1년간 살아남는다면, 나는 그때 너를 해방해주겠어. 그냥 버리겠다는 것도 아냐. 너의 고향까지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이제 1년도 남지 않았다. 11달 하고도 조금 더, 그 정도 시간이 지나면 어떤 형태로든 현재는 결착을 맞이하게 될 거다.
실패하여 죽거나, 죽음보다 못한 처지를 맞이하든지, 아니면 성공하여 모든 것을 손에 넣든지.
"마냥 쉬운 얘기는 아니야. 우리는 지금부터 지옥 같은 사지로 갈 거거든."
"지옥 같은 곳? 내가 살던 버려진 사막을 말하는 건가?"
"아니, 그곳 말고 그 옆. 저주 받은 대지로 갈 거다."
현재의 대답에 파탈리테의 눈썹이 꾸물거렸다. 그것은 이해했으나,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의 제스쳐였다.
"너도 원하는 거구나? 신들의 지보, 아티팩트를."
"그래."
목적은 이해했다. 그러나 왜 그런 목적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저주 받은 대지는 어설픈 각오로 가도 괜찮은 곳이 아니었기에.
그곳에 가려면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아무리 강한 자라고 해도, 아니 어쩌면 강할 수록 더욱 더. 그래서 파탈리테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러는 거지? 너 정도 강자라면 그따위 힘을 구하지 않아도 제국을 호령하며 내키는 대로 살 수 있을 텐데? 옆에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맹세한 연인도 있고. 무엇이 부족하여 더 큰 힘을 탐하는 것인가?"
파탈리테가 생각하기에 현재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인간이었다. 힘도, 돈도, 연인도 가져 부족할 게 없는 인간. 그런 인간이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거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신의 변덕조차 내 운명을 망칠 수 없는 힘을 원한다."
파탈리테는 현재의 힘이 신에게 잠시 빌린 것이라 곧 도로 토해내야 할 힘이라는 것을 몰랐다. 현재는 파탈리테에게 가장 깊은 진실을 전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지금 하는 말 또한 진심이었다.
'세상 일이란 게 원래 대체로 갑작스럽기 마련이지만, 이건 너무 심하게 갑작스럽잖아. 나는 더이상 이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겪고 싶지 않다고.'
갑자기 다른 세계로 뚝 떨어져 겪었던 고통들을 현재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고, 이 세계에 잔인하고 인간적이며 변덕스러운 신들이 존재하는 한, 그런 고통들은 언제든지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
신에게 휘둘리지 않을 정도로 강해지지 않는 이상은.
"미아. 말리지 않을 건가? 현재는 죽으러 가고 싶다고 해. 절대로 성공하지 못할 모험을 떠날 거라는데."
"아니, 현재가 하고 싶다면 그건 분명 그럴 만한 일이야. 나는 현재를 믿어."
미아도 당연히 현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 쯤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믿고 있었다. 언젠가 말해주리라고, 아니면, 애초에 숨기는 이유가 그녀를 위해서던가.
사실, 무얼 숨기든지 그런 건 별로 중요치도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열렬히 사랑하겠다고 스스로와 약속했으니.
'그래도 사랑해.'
인간들은 마법을 잃어버렸지만, 그건 정말 마법 같은 주문이었다. 그렇게 되뇌이는 순간 마음 속을 어지럽히던 수많은 번뇌와 슬픔과 괴로움이 모두 싹 나아버리는 듯 했다. 그래서 미아는 그 말이 좋았다.
"현재야 사랑해."
어떠한 말은 가슴 속에선 아주 작은 의미만을 가지지만 내뱉는 순간 커다란 힘을 가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사랑해라는 말이 바로 그랬다. 혼자 품었을 때보다 밖에 꺼내놓았을 때 훨씬 더 커다란 의미를 가지는 말.
아끼기만 하면, 속에서 빛이 바래버리는, 그래서 아끼기엔 너무 아까운 말.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이것을 말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오해와 상처가 있었는지. 그렇기에 한 층 더 귀한, 더욱 가치 있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갑자기?"
현재는 조금 부끄러운 듯 커흠 하고 헛기침을 했지만, 시선을 슬쩍 피하면서 그대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나도, 나도 사랑해."
아침 댓바람부터 동석한 일행도 생각치 않고 신혼부부마냥 애정행각을 벌이는 두 사람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190을 넘는 거구의 근육질 사내에겐 잘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현재 스스로도 그렇게 느꼈기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사랑이 뭔데?'
그 모습에 짜증도 슬픔도 한심함도 부러움도 아닌, 의문이라는 감정을 품는 엘프 소녀. 그녀는 사랑이란 감정과 너무나도 철저하게 박리된 삶을 살아왔기에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아무런 단서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