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황도에서
* * *
미아는 파탈리테를 처음 보는 순간 생각했다.
'엄청 예쁜 애다. 엘프기는 하지만. 현재는 그런 걸 신경 쓰는 인간이 아니었지?'
제국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수인과 엘프를 꺼렸다. 그야, 신의 은총을 잃은 종족이라 하면 불길하니까. 온전히 신의 존재가 입증된 세계에서 배교자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요 심판해야 할 죄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세계에서 나고 자라 가치관 자체가 다른 현재는 수인이든 엘프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이 보였다. 정작 수인도 엘프도 황도에 와서야 처음으로 만나보았으니, 그걸 확신할 만큼의 관찰은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설마, 나랑 그 여자로는 모자라서 섹스 상대를 늘린 건가?'
미아는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부정하고 싶었다. 파탈리테는 키도 작고 가슴도 없으며 어린 얼굴을 하고 있어 도무지 여인으로 보기 힘든 생김새였다. 미아에게 있어 파탈리테란 마냥 귀여운 소녀처럼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절대 남자애랑 헷갈릴 일 없는 여자의 몸이야.'
그러나 얇은 허리와 넓직한 골반으로 이어지는 곡선을 보면 또 요염한 여인의 자태가 느껴지기도 하니, 절대로 현재 취향이 아니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현재는 미아가 사랑 고백을 하던 그날부터 케이트와 미아를 동시에 애태우며 삽입을 애원하게 하는 걸 즐겼으므로, 그 장면에 다른 여자 한 둘이 끼어든다고 그림이 이상해지지는 않으리라. 그것은 어쩌면 아주 자연스럽게까지 느껴졌다.
'나한테만 집중하라니까……. 자기도 나를 사랑한다고 해놓고. 흥.'
미아는 불만이 가득차 입을 삐죽거리다가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기로 했다.
'아냐, 그런 목적으로 데려온 게 아닐 거야. 현재는 내 큰 가슴을 좋아하잖아.'
미아는 탱글거리는 자신의 가슴을 생각하며 자신감을 채웠다. 현재가 잔뜩 집중해서 희롱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칭찬했던 가슴이다. 그게 좋아하기 때문에 일부러 더 괴롭힌 것이라는 것 쯤은 뇌가 없는 게 아니고서야 눈치 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완전히 안심하기에는 케이트의 작은 가슴도 충분히 좋아했던 현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실 현재는 여자 가슴이라면 다 좋은 게 아닐까? 그런 불안이 고개를 슬쩍 들이밀 정도로.
'하지만 저건 여자 가슴이라기엔 너무 평평한데.'
그렇다고 해서 현재가 사내아이처럼 평평한 가슴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파탈리테의 가슴은 이미 가슴이 아니었다. 아니, 일단 가슴이 맞기는 한데 여자의 가슴이라고 대할 수는 없어 보였다.
'그래, 파티원이랬잖아. 모험에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데리고 온 걸 거야.'
미아는 자신과 파탈리테의 가슴 크기를 비교하며 일단 그렇게 믿고자 했다. 그리고 미아가 파탈리테를 살폈듯이, 그 사이에 파탈리테 또한 미아를 살폈다.
'인간치고는 보기 드문 미인이고 흉터 하나 없는 피부를 가졌지만, 몸짓에서 강인한 전사의 흔적이 느껴져.'
얼핏 보기에 미아는 마음을 놓고 편안하게 행동하는 듯 보였으나, 싸움에 익숙한 파탈리테가 세밀히 관찰한 바로는 언제든지 전투로 돌입할 수 있을 정도로 긴장을 늦추지 않은 상태였다.
'많은 생명을 거둬들인 자의 냄새가 나…….'
결코 편한 인생을 살아오지는 않았다고 호소하는 듯한 전사의 기백. 어쩌면 죽고 죽이는 상대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파탈리테는, 일단 무해하고 무구한 소녀를 연기하기로 결심했다.
로브를 입어 옷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끈들을 가린 후 문신 가게 바깥으로 나왔을 때, 파탈리테는 미아를 향해 물었다.
"인간……, 너도 나를 아프게 할 거야?"
불안에 떨리는 목소리, 방어적으로 몸을 감싸는 몸짓, 소심하게 머뭇거리는 행동은 분명 그녀를 상처 입은 새끼 여우처럼 가엾게 보이게 하겠지.
"네가 지시만 잘 따라준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
그러나 미아는 딱딱하게 선을 지키는 태도로 말했다. 그녀의 태도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매우 중립적인 듯 보였다. 단지 귀엽다는 이유만으로 여자애에게 홀릴 정도로 미아가 어설픈 인간은 아니었다.
"알았어, 말 잘 들을게."
일단 미아를 방심 시키기 위해 파탈리테는 그렇게 말했으나, 속으로는 일이 쉽지 않을 걸 느꼈다.
'절대 어설프지 않은 인간이구나.'
손가락보다 훨씬 굵은 쇠사슬을 실이라도 되는 듯이 가볍게 뜯어버렸던 남자의 부하다. 굳이 베테랑 전사 다운 면모를 보이지 않았어도 충분히 경계해야할 대상임은 분명했다.
"나는 미아야. 너의 이름은?"
"파탈리테."
"발음하기 쉬운 이름은 아니네. 리테라고 불러도 되겠지?"
"그래."
"귀는 숨기는 게 좋겠어. 피부색은 좀 독특하다 생각하고 넘어가겠지만, 귀를 들키면 소란이 날지도 모르니까."
미아는 파탈리테에게 다가가 소녀의 긴 귀를 머리카락과 로브의 후드로 덮어 잘 가려주었다. 인간의 도시에서 엘프의 귀란 반드시 숨겨야 할 흉물이었다.
'이곳은, 내가 환영 받지 못하는 땅, 허락 받지 못한 세계다.'
엘프인 자신과는 다른 인간들이 살아가는 땅, 여태까지 충분토록 사무치게 뼈에 새겨졌던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새삼 다시 확인하는 순간, 파탈리테의 눈꺼풀이 외로운 파랑의 그림자를 뒤집어 쓰고 조그맣게 내려 앉았다.
애초부터 신을 죽인 업보를 지고 저주 받은 종족이지만, 그래도 사막에서 살아갈 때에는 같은 처지의 동료들이 있었는데……. 이젠 없다. 여기에는 없다. 이곳에서 파탈리테는 완전히 홀로 고독한 이방인이었다.
"그래, 그랬지."
미아는 그런 소녀를 어설프게 동정하지는 않았다. 소녀가 겪은 세월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조심스레 가늠할 뿐.
'엘프는 수명이 인간의 두 배고, 그런 만큼 생장도 느리다고 하던데.'
엘프 소녀는 겉보기와 달리 나이가 많을 공산이 컸다. 그러나 굳이 짐작만 하고 넘어가야 할 이유는 없으니 미아는 직접 소녀에게 물었다.
"너는 몇 살이야?"
"스물 여섯 살."
예상대로 파탈리테는 미아보다 나이가 많았다. 심지어는 현재보다도 케이트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반으로 나눠 보면 인간 기준으로 열세 살 쯤 되는 아이겠지만, 그런 건 의미 없겠지.'
26년을 살았으면 스물여섯인 것이지 인간 기준 열세 살이 말이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벌레의 수명이 1년이라고 해서 12개월차 벌레가 백 년을 산 노인의 지혜를 가지지는 않는 것이 당연하다. 미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열아홉이지만, 존대를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니지?"
"응. 그런 건 상관 없어."
"좋아. 들었다시피 현재는 네게 밥을 먹이라고 했는데, 무언가 먹고 싶은 거 있어?"
"현재?"
"너를 사온 인간 남자 전사 말이야. 방금까지 같이 있었던, 든든한 근육이 멋진 그 사람."
'멋져? 그게?'
파탈리테의 기준에 따르면 현재는 멋짐과는 거리가 멀었다. 엘프의 미적 기준에 따르면 멋진 남자란 호리호리한 몸매에 예쁜 얼굴을 가진 미남을 뜻했다. 현재와는 억만광년 쯤 떨어진 기준이었다.
"너도 현재의 노예야?"
파탈리테의 질문에 미아는 당당하게도 선언했다.
"아니, 나는 현재 여자친구야."
예전에는 무슨 사이냐 물으면 모험가 동료니 뭐니 이래저래 대답할 것이 궁했지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지금은 매우 위풍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어감이 낯간지러워 미아는 뺨을 발그레 물들였다.
"그럼, 그 야한 옷이랑 노예 목줄은 네 취향이야? 자궁 윗쪽에 새기던 문신도?"
"자궁, 위……?"
미아는 여태까지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파탈리테의 지적에 확실히 알았다. 아랫배에 이런 모양의 문신을 새기려 한 의미, 현재는 미아의 자궁에 다른 남자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자물쇠를 걸고 싶었던 거라고. 이 문신은 그런 의미이리라.
"아니, 이건 다 현재 취향인데."
미아는 적나라하게 둘 사이의 성적 관계를 까발려진 탓에 빨갛게 얼굴을 물들이며 대답했다.
"너는 그냥 다 들어준 거고? 그걸 다 들어주면 노예랑 다른 점이 뭐야?"
"우리는 서로 사랑해."
"노예랑 주인도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거 아냐?"
파탈리테의 계속되는 진실 후벼파기에 미아는 살짝 당황했다.
'그러네? 사실 나는 현재 노예인가? 그렇지만, 노예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면 너무 변태 같나?'
지은 죄에 대한 속죄라는 변명은 진작에 집어치웠다. 그래도 사랑하니 어지간한 건 다 들어주자고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글쎄, 그건 노예와 다른 게 뭘까.
'그냥 사회적 신분으로 나는 자유민이지만, 그런 게 의미가 있을까? 바깥 나라에서 온 엘프한테?'
"인간의 사랑은 복잡하구나."
미아는 대답이 궁해 입을 열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는데, 파탈리테가 먼저 좋을대로 납득했다.
"그렇지?"
상당히 혼란스러워진 미아는 파탈리테에게 그렇게 수긍하는 것 밖에는 하지 못했다.
"나는 고기가 좋아."
파탈리테의 말에 미아는 즉시 반응하지 못했다. 머리가 복잡해진 그녀는 파탈리테의 말이 아까 자기가 한 밥은 뭐가 좋냐는 질문의 대답이라는 걸 이해하는데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고기, 많은 고기, 아주 많은 고기!"
조금씩 흥분의 기색을 띄며 점점 크게 말하는 파탈리테의 모습에 미아는 간신히 엘프 소녀가 먹고 싶은 걸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고기 먹으러 가자."
두 소녀는 암흑가를 빠져나와 멀쩡한 거리로 나섰다. 아까 그림자로 스며들듯 도망쳤던 조직원들이 소문을 퍼뜨린 탓에 보호자도 없이 바깥으로 나오는 소녀들에게 덤벼드는 얼간이는 없었다.
미아는 파탈리테를 데리고 번듯한 식당에 들어갔다.
"뭐 먹을래?"
미아는 나무패에 새겨진 메뉴판을 보며 요리 하나를 고른 후 그것을 파탈리테에게 넘겼다.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도 돼?"
로브를 챙길 때 두둑한 돈주머니를 챙겨왔으니 계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
"그럼 난 여기부터 여기까지."
"응?"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먹겠다고 말했어."
파탈리테의 기묘한 주문 방식에 미아는 의문을 느꼈다.
"메뉴 하나가 1인분이야.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
그렇다고 해도 보통 사람 기준인지라, 몸을 활발히 움직이는 미아는 3인분은 거뜬했고, 덩치도 괴물 같으며 활동량도 심각하게 많은 현재는 10인분까지도 집어삼킬 수 있었지만, 지금 파탈리테가 시키려는 것은 무려 20인분이 넘는 음식이었다.
어느모로 생각하나 그 작은 몸에 다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알아. 1인분이란 건 엄청나게 적은 양의 식사지? 이미 본 적 있어. 그 정도라면 25인분은 거뜬하단 말이야."
"그래? 그래도 일단 5인분까지만 시키자. 주방에서도 한 번에 그렇게나 주문이 들어가면 곤란할 테고, 괜히 시간만 더 오래 걸리게 될 거야."
미아는 파탈리테가 어느 정도로 진심인지 모르겠어서 그렇게 제안했다. 그러자 파탈리테는 이번에는 메뉴판의 가장 앞에서부터 5가지를 선택했다. 아무래도 메뉴판의 모든 메뉴를 먹어치우겠다는 방침은 전혀 바뀌지 않은 모양이었다.
'5인분 정도야, 남으면 버리거나 하면 되겠지.'
미아는 자신이 시키려던 요리와 파탈리테의 몫 5인분까지 총 6인분을 주문했다. 체구가 그리 크지 않은 두 소녀가 그렇게 주문하자 점원이 정말로 그리 많이 시키냐고 확인을 했다. 26인분을 주문했다간 장난으로 여겨져 쫓겨났을지도 모르겠다고, 미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오, 맛있어보이는 것이다."
곧 요리가 나왔을 때 미아는 그 생각을 고쳐야했다. 파탈리테는 기름에 볶은 커다란 고깃덩이를 마치 부드러운 푸딩을 삼키듯이 한 입 씹어 끊자마자 그대로 목 뒤로 넘겨버렸다.
"아니, 안 씹어? 그러다 체하겠어?"
"씹는다고? 씹는다는 게 뭐지? 나는 그런 거 몰라."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음식을 마시기 시작하는 파탈리테. 그 작은 입에 어떻게 저렇게 요리를 밀어넣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너 정말 위장 안 터지겠어?"
"나는 아직 배고프다."
미아는 곧장 10인분의 추가 주문을 넣었다. 식당 주인은 정말 먹을 수 있겠냐고 따지려고 왔다가 파탈리테의 푸드 드링킹 쇼를 보고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 화로에 불을 붙였다.
"엘프는 원래 다들 그렇게 많이 먹어?"
"사막의 엘프들은 다들 먹을 수 있을 때 먹지 않으면 나중에 영양이 부족해 굶어죽는 삶을 살고 있다. 그건 내가 여기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다."
무언가 깊은 한이 서린 듯,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는 파탈리테.
"그리고 나는 지금 잔뜩 먹을 수 있어 행복하다! 노예 최고!"
그러더니 그녀는 방긋 웃으면서 몸에 맞는 천진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진심으로 이 포식이 즐겁다는 듯이 활짝.
미아는 상당히 기묘한 동료가 생겼구나 싶었고 파탈리테의 푸드 드링킹 쇼는 계속되었다. 주방에서는 뜨거운 불길이 도무지 꺼질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