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황도에서
* * *
"합니다만 뭐."
"이게 또 보통 분들은 결코 다루실 수 없는 물건인지라."
점원은 괜히 말을 늘이며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그것은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이런 걸 소개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대체 뭐길래 그렇게 사리는 건데?"
"엘프입니다."
"뭐?"
"정확히는 괴물 같이 강한 엘프의 전사입니다."
현재는 의아함을 느꼈다. 이 세계의 엘프란 신에게 외면 당한, 정확히는 자신들의 신을 죽여버리고 저주 받아 쇠락한 종족이었다. 당연히, 신의 은총이 없어 인간종 중 먹이사슬 최하위인 수인이나 다름 없이 약해야 이치에 맞았다.
"엘프가 강할 수가 있는 건가? 놈들도 수인 마냥 신의 은총이 없는 존재잖아?"
"그게 또 사연이 복잡한 엘프인지라, 아티팩트를 체내에 이식한 모양입니다. 인간종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모두 유실되었지만 던전에서 나오는 아티팩트의 힘은 여전히 남아있으니까요."
"그런 게 있다고?"
현재는 살짝 놀람과 동시에 무언가 착잡한 기분도 느꼈다. 신의 은총이 없어도 아티팩트를 통해 강해진다라. 그런 선택지도 있었지.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었으나 금화 스무 닢이 없어 자유민 신분조차 사지 못했던 그가 그보다 압도적으로 비싼 아티팩트를 사모은다는 건 현실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였다. 어떻게든 기적 같이 신의 은총을 얻은 지금이야말로 단 하나 뿐인 활로를 찾은 셈이겠지.
'지나간 일을 생각해봤자 의미 없어.'
현재는 작은 미련을 끊어냈으나 그 엘프의 존재가 상당히 궁금해졌다.
"안내해. 어떻게 생겨먹은 엘프인지 보고 싶어졌으니까."
"하지만 손님, 주의하실 것이 있습니다."
"뭐지?"
"피든, 정액이든, 심지어는 땀이나 타액조차도 그것에게 가까이 해서는 안됩니다. 그건, 인간의 생기를 빨아먹는 괴물입니다."
"그래. 명심하지."
점원은 근처에 걸려있던 램프를 들어 촛대에 켜져 있던 불을 옮겨붙이고는 구석에 숨어있어 잘 보이지 않던 지하로 가는 입구로 현재를 안내했다.
그곳은 창고 같은 곳이었는데 우리를 통째로 옮기기엔 너무 좁은 통로 탓에 평범한 수인 노예는 그곳에 없었다. 짐더미가 산처럼 쌓여있을 뿐. 혹시 누군가가 우연히 들어왔더라도 이렇게 짐만 잔뜩 쌓여있는 걸 보면 잘못 들어왔다 싶어 다시 나갈 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좁은 짐더미 사이를 지나 걷다 보니, 마침내 점원이 이야기했던 아주 특별한 상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그것은 이 세상의 모순을 표현하는 예술품 같았다. 신에게 버림 받은 존재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블랙 유우머처럼 느껴졌다.
여신을 본딴 듯, 혹은 여신 그 자체인 듯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소녀.
차분하게 흐르는 백은의 머리칼은 땅으로 추락한 달빛을 추슬러모은 듯 밝은 빛을 머금었다. 그와 대비되는 사막 민족의 모랫빛 피부는 물에게 저주 받아 사막을 떠도는 그네 종족의 운명을 상징하는 듯 했다.
그러나 모래처럼 갈라지는 건조하고 거친 느낌은 없이, 마치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초콜릿인 듯 매끄러운 질감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눈으로 보기만 해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모성을 상징하는 유선의 발달은 놀라울 정도로 전혀 일어나지 않았으나, 안쪽으로 깊게 패인 허리와 유려하게 휘어진 둔부의 곡선은 소녀가 결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여성성을 지닌 몸이라고 증거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여성성을 가린 것은 심히 면적이 좁은 천쪼가리 몇 조각 뿐이라, 가녀리고 또한 아름다운, 혹은 가녀리기에 아름다운 소녀의 몸을 차분히 감상할 수 있었다.
'정말 아름답다.'
지하에서 점원이 든 램프 하나에 의지하여 보는 것 같지 않은 느낌, 소녀 스스로가 밝게 빛나는 별인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 소녀는 속박되어 있었다. 아니 봉인되어 있었다. 각 팔에만 셋, 또 다리에 셋, 총 열둘이나 되는 사슬이 사지를 철저히 결박하고, 눈에는 안대가,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는 모습은 아름다운 여인을 더 수준 높은 예술품으로 만들기 위한 예술가의 시도가 아니라, 사나운 괴물이 날뛸 것을 두려워 해 사람들이 봉인을 해둔 것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팔 수도 건들 수도 없어 솔직히 처치 곤란인 물건입니다만, 손님처럼 강대한 전사분이시라면 또 어떨지."
"내가 강해보이나?"
"그림자 같은 거리에서 평생을 몸 담고 살아왔습니다. 진짜배기이신 분과 얼뜨기들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 괴물에게 어울리는 주인이 있다면 분명 당신 같은 분이시겠지요."
'이게 립 서비스야 아니면 진짜 내 힘을 알아본 거야?'
넋 놓고 우쭐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현재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 점원이라는 남자는 상당히 눈썰미가 좋은 것일까?
"달관하신 분들께서는 평범한 이들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십니다. 그 분위기란 그저 생각이 없을 뿐인 한량들의 것과는 또 완전히 다르지요. 지금 당신께서 풍기고 계신 분위기와 같이 말입니다."
점원이 한 번 더 설명하자 현재는 눈썰미가 좋다고 납득하기로 했다. 지금 자신이 어느 부분을 신경 쓰는지까지 맞출 정도라면 그의 눈을 믿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저 엘프, 인간의 말은 할 줄 아나?"
"그렇습니다. 말을 안다는 것과 대화가 통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현재는 다가가 소녀의 재갈과 안대를 풀었다. 머리색과 같이 순은으로 빛나는 속눈썹 아래로 핏빛 선연한 눈동자가 드러나 현재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캬오!"
그리고 그녀는 입을 벌려 재갈을 벗긴 현재의 손을 물어뜯으려 했다. 현재가 손을 빼자 소녀가 몸을 앞으로 들이밀려고 애쓰면서 사지에 메인 사슬들이 동시에 덜그럭거렸다.
"재밌네."
이 색깔 저 색깔 총천연색의 머리색을 가진 이세계 사람들이었지만 이런 은발을 가진 인간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니, 인간이 아니라 엘프이지만. 그 증거로 그녀의 귀는 길고 뾰족했다.
다짜고짜 물어뜯으려 한 점도 재미 있었고, 생기를 빠는 능력이 있다는 것도 재미 있었다. 아티팩트의 힘이기는 하지만, 흡혈귀나 몽마를 떠올리는 게 그리 잘못된 생각은 아니겠지.
'엘프인데 흡혈귀라……. 내가 부하로 써먹을 수도 있으려나?'
현재는 살아남는 것을 보장할 수 없는 지옥도가 펼쳐진 대륙의 남동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대지의 여신의 저주를 받아 끝없이 괴물이 탄생하는 지옥으로.
그 여행에 쓸만한 동료가 생긴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었다. 이 소녀가 정말 쓸만한 동료가 될 수 있을지는 이제부터 확인해봐야겠지만.
"이걸 풀어주면 온전히 내가 통제해야 한다는 거지? 뭐 따로 안전장치 따위는 없이?"
당연했다. 이 세계의 마법은 모두 유실되었고 그나마 편린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티팩트 뿐. 개중에 진짜로 노예를 복종시키는 물건도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게 있다면 엄청나게 귀하고 또 중요한 물건으로써 다뤄질 게 분명했다. 이런 곳에 막 돌아다니고 있을 리는 절대로 없겠지.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이미 아는 사실을 다시 확인 받은 현재는 엘프 소녀에게 물었다.
"야, 너 이름이 뭐냐?"
"캬오오! 크르르……."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녀는 이름을 가르쳐줄 생각이 없는 듯이 보였다.
"이름이 캬오오 크르르야? 더럽게 독특하네."
현재의 너스레에 엘프 소녀는 여전히 표독스러운 눈빛을 유지했다.
"야, 캬오오 크르르. 거기서 풀려나고 싶냐?"
소녀는 대답이 없었다. 크르릉거리던 짐승 소리를 포함해서. 아무래도 머릿속으로 셈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셈은 상당히 빨리 끝이 났다.
"파탈리테."
나뭇잎을 타고 호수에 떨어지는 이슬인듯 귀를 맑게 하는 청아한 목소리가 스스로의 이름을 소개했다. 소녀의 내적 갈등은 모두 끝난 모양이었다. 아니면 타협했든지.
"나는 파탈리테고, 여기서 풀려나길 원해. 너는 나에게 무얼 원하지, 인간?"
"너 내 부하가 돼라."
"좋아."
시시할 정도로 명쾌한 대답이었다.
빠각. 드르륵, 철그럭.
요란한 소리를 내며 파탈리테를 속박하고 있던 쇠사슬의 일부가 떨어졌다. 현재가 맨손의 손아귀 힘으로 그 굵은 쇠사슬을 뜯어버린 것이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힘.'
신의 은총을 받은 이라고 해도 이렇게 쇠사슬을 손아귀 힘만으로 뜯어내는 건 극소수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점원의 눈빛이 경탄으로 빛났다.
빠각, 드르륵, 철컥.
아까와 같은 소리가 이어지자 소녀의 팔을 묶던 여섯 쇠사슬은 모두 끊어지고 팔을 묶고 있던 수갑들만이 남았다. 그러나 아직 다리에도 6개의 사슬이 남아있었다.
지직, 뻐걱.
현재는 이번엔 한손에 세줄씩 쇠사슬을 모으고 그대로 분질러버렸다. 역시 사슬을 달고 있던 족갑이 남기는 했으나, 일단 소녀는 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얼마지?"
"제가 감히 귀인께 어찌 돈을 받겠습니까? 다만 제가 여기서 귀인의 존명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모두 가면을 쓰고 정체를 숨긴 이 거리 안에서 이름을 물어?"
"실례했습니다. 다만, 이 거리의 주인인 루스키의 이름을 부디 잊지 말아주시기를."
루스키는 꼭 귀족이 하는 것처럼 한손을 가슴 위에 얹고 한손을 뒤로 빼며 허리를 숙여 최고의 예를 표해 인사했다. 그 태도에 현재는 생각했다.
'하긴, 이 키에 이 몸집인데 밖에서 날 못 알아볼 리는 없지.'
루스키가 굳이 현재의 이름을 묻지 않는다 해도 도시에 계속 현재가 체류한다면 찾지 못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명심하지."
현재는 일부러 이 도시에 단 사흘만 체류할 것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루스키가 곧 그 사실을 알아낼지도 모르겠으나, 그 때에는 그 때의 일이고. 셈을 안 치러도 된다고 하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을 낼 필요가 있을까?
그런 것보다 현재는 당장 새로 얻은 노예인 파탈리테와 대화를 좀 하고 싶었다. 부하로 써먹으려면 그 능력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하지 않으면 안됐으니까. 마침 소녀는 잔뜩 굶주린 모양이고, 먹을 것으로 잘 구슬리면 되지 않을까.
"그럼 나는 가보겠어. 이 녀석에게 밥이라도 먹여야 할 것 같고."
"알겠습니다."
현재는 루스키의 배웅을 받으며 파탈리테를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거리는 개판이 되어있었다. 싸움이 일어났는지 수많은 조직원들이 모여있었는데, 그 싸움의 중심에 있는 소녀는 매우 익숙한 얼굴이었다.
"미아?"
소매장식이나 머리띠는 어쨌는지 바니걸 본체만 겨우 챙겨입은 미아가 수많은 검은 양복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이 거리에 들어올 땐 가지고 있지 않던 장검 한 자루가 쥐여 있었다.
"지인이십니까?"
"내 노예야. 문신 가게에 맡겨두고 왔는데 왜 이 꼬라지가 나있는지 모르겠네."
"이것들아! 다들 주목!"
루스키가 소리지르자 조직원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 여자는 귀하신 분의 노예다. 어서 사과드리고 썩 물렀거라!"
"죄송합니다!"
단결된 하나의 목소리가 들린 후 조직원들은 거리에 녹아들듯 하나둘 모습을 감췄다. 현재는 굳이 도망치는 놈들을 쫓기보다는 먼저 미아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었어?"
"아니, 문신사들이 갑자기 날 납치하려고 하더니, 걔네를 쓰러뜨리니까 갑자기 여기저기서 이상한 검은 옷들이 나타나서 포위하는 거야. 그래서 막 싸우고 있다 보니, 쓰러뜨릴 수록 적이 자꾸 늘어나서?"
우발적인 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이번만 일어난 일 같지는 않았다. 숨 쉬듯이 익숙하게 벌이던 짓이리라.
"흠, 딱 봐도 맨날 있는 일이구만?"
현재의 지적에 루스키가 뻔뻔스레 대답했다. 그는 묘하게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정말 실례했습니다. 제가 이 거리를 손에 쥐고 주무르고 있다고들 얘기는 듣습니다만, 그 손가락 끝 손톱들까지 어떻게 움직이는지까지는 알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귀빈 분의 일행이 계셨다는 걸 알았다면 진작부터 녀석들의 기강을 잘 다져놨을 텐데 말이지요."
"글쎄, 그건 그거고 내가 기분이 나빠진 것의 보상은 받아야겠는데? 네 이름 석 자를 잊어버리는 것 정도로는 내 소중한 노예가 위험에 빠졌던 것에 대한 대가로 너무 부족한 것 같아서 말이야."
"크흠, 무엇을 원하시는지요?"
"아티팩트. 아주 쓸만한 걸로. 아, 장물인지 아닌지는 상관 없어. 주인이 날 찾아와도 절대 가져가지 못할 거니까."
루스키는 울분을 애써 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곧장 알아보도록 하지요."
그리고는 가까이에 있는 조직원을 부르더니 무언가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조직원은 명령을 듣자마자 어딘가로 열심히 뛰어갔다. 현재는 미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몸을 살폈다. 일단 겉보기엔 상처는 없어보였으나 현재는 굳이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어?"
"괜찮아. 문신을 새기다 말고 뛰쳐나와서 그게 진행 도중에 멈춰 버린 것 말고는."
일단 괜찮다고는 했으나 미아로서는 굉장히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문신이 잘못되는 건 아닌가 겉모습을 신경 쓰는 여자로서 매우 신경 쓰이던 그녀였는데, 이렇게 미완성으로 남아버리게 되는 게 아닌가 걱정이 컸다.
"걱정하지 마. 혹시 도안이 없어졌어도 내가 그대로 다시 그릴 수 있으니까."
현재는 미아를 안심시키며 아까 갔던 문신 가게를 눈에 담았다. 인기척은 없지만 정말로 비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일단 처음에 우리 미아 뒷통수를 친 문신사년들은 조져야겠지?"
아무리 아티팩트를 받을 것이라 한들 제일 처음 덤벼든 녀석들을 그냥 놓아줄 수는 없는 법. 현재는 일벌백계를 위해 그 여자들을 잡아들이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