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배 위에 올라탄 독사
* * *
케이트에게 펠라를 시키며 서있는 현재의 등뒤로, 미아가 다가와 그를 꼭 끌어안았다.
"뭐야? 저리 가있으라니까?"
현재는 조금 후에 등에 닿는 축축한 감촉을 눈치챘다. 설마 침은 아니겠지. 두 구멍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그 물기에 등을 적시고 나서야 현재는 그것이 눈물임을 눈치챘다.
"왜 울어?"
"미안해."
미아는 또 습관처럼 사과를 했다. 그것은 너무나 익숙한 일이다. 그녀는 현재에게 너무 큰 잘못을 했다는, 그러니까 속죄해야한다는 명분을 붙이지 않으면 자기 마음조차 표현할 수 없는 부끄럼쟁이였으니까.
그러나 오늘만은 예전에 저지른 죄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저지르고 있는 죄악에 대한 사죄였다.
"내가 너를 그렇게 상처 주고, 망가뜨린 인간인데, 그런데도 널 좋아해서 미안해. 사랑해서 미안해. 이기적인 괴물이라서 정말로 너무 미안해."
현재는 멈칫했고 그것은 그의 성기를 입에 빨아들이며 애무하고 있는 케이트에게도 느껴졌다. 케이트는 아주 짜증이 났다.
'나랑 주인님이 즐기고 있는데 뭔 짓이야? 저 여우 같은 년. 좋아하는 거 아니라고 그렇게 우겨대더니.'
그래서 케이트는 애무를 더 격하게 했고, 현재는 그 머리를 밀어냈다.
"그만. 잠깐 멈춰."
케이트는 처절한 패배감을 느꼈다. 현재가 미아를 밀쳐내고 자신에게 집중해주기를 바랬는데, 이번에는 그 반대였다. 현재는 케이트를 밀쳐내고 미아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방금 미아가 느꼈던 열패감을 이번에는 케이트가 느껴야 했다.
"나를 사랑해?"
"그래."
"알고 있었어."
"아냐, 너는 몰라……."
미아는 현재의 알고 있었단 대답을 부정했다. 모르고 있을 게 확실했다. 그녀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을 정도로 커다란 사랑을, 그 무게를, 그 크기를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좋아하는 게 아냐. 챙겨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정도가 아냐. 곁에 있고 싶다고 바라고 마는 정도가 아냐. 그런 크기가 아니야. 그런 정도가 아니야."
미아는 꼭꼭 눌러담겨 있던 마음이 터져나와서, 이제는 눈이라는 창문 뿐 아니라 입이라는 문으로도 마구 흘러넘치는 것을 알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문짝이 부러져서 어디 날아가버렸는지, 다시 입을 다물 방도가 도무지 떠오르지를 않았다.
"곁에 없으면 죽을 것 같아. 혼자 두지 말아줘. 날 떠나지 말아줘. 네가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린다고 생각하면, 살아갈 이유가 없어진 것 같아서 금방 죽어버릴 것 같아. 네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장 돌아가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심장이 다 갈기갈기 찢겨서 죽어버리는 줄 알았어. 네 세계가 나보다 훨씬 너에게 소중하다는 걸 알았을 때, 망치 천만 개가 나를 두드려 죽이는 줄만 알았어. 그게 당연한 건데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현재는 깜짝 놀랐다. 이제 현재가 훨씬 강해졌다고 하더라도 미아는 항상 무서운 사람이었다. 아니 무거운 사람이었던가? 이런 애정 표현을 할 수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치 못했다.
미아는 항상 무거우려 했다. 진중하려 했다. 어설프지 않으려고 했다. 자기 감정을 숨기고 통제하려 했다. 그런 것이 뭐 대단한 이득이라도 주는 듯이, 도저히 무언가를 입 밖에 내는 일이 없는 인간이었다.
그녀가 입 밖에 내는 것은 이제 밥을 먹자, 이동하자, 경계해라, 싸워라 죽여라, 이 따위의 지시어, 명령어 뿐이었고 자기 기분이 어떻다 날씨가 어떻다 뭐가 좋더라 하는 일상 회화라는 영역은 도무지 할 줄을 모르는지 꺼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힘의 크기가 역전된 이후에도 그랬다. 현재는 여유를 되찾고 나서야 미아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걸 그녀의 입으로 듣게 될 날은 평생 오지 않을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건 뭔가. 미아는, 그 나이대 소녀라고는 절대 보이지 않았던 미아는, 사실은 누구보다 감수성 넘치는 어린 아가씨였다.
그 사실이 현재의 가슴을 몽글거리게 만들었다.
'이게 뭐냐 대체?'
현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등 뒤에 안겨있는 미아는 보지 못할 것이 다행이었다. 이미 몸과 몸을 수십수백 번이나 섞었던 주제에. 현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알몸이 된듯이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미안해. 너무 미안해.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네 생각부터 해. 눈 앞에 있어서가 아니라, 내게 가장 소중한 게 너라서 그랬어. 네가 갑자기 이 세상에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저 세상으로 돌아가버릴까봐. 매일 불안하고 그래서 매일 감사해. 네가 아직 여기에 있다는 것에. 멀리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신께 감사드려. 그리고 잠이 들기 전이면 또 네 생각을 해. 내가 너를 아프게 하고 상처 입혔던 그날들을 후회하고, 그래서 또 망상해.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처음부터 네게 잘 대해주고, 그래서 네가 날 사랑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돌아갈 수 없는 날인 걸 알고 있으면서도 수천만 번씩 생각해. 처음부터, 잘할걸. 그때, 잘해줄걸. 내가 다 상냥하게 알려줄걸. 네가 날 미워하지 않게 해줄걸."
현재의 몸을 안은 미아의 양팔에 아플 정도로 센 힘이 들어왔다. 그건 현재를 괴롭히기 위해 주는 힘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그가 이 팔을 내팽개치고 가버릴까봐, 불안함에 떨며 애정을 갈구하는 가엾은 소녀의 애걸이었다.
"그렇게 많이 잘못했는데, 네가 날 미워하는 게 당연하게 행동했는데, 그러면서도 자기 죄도 잊어버리고 너를 너무 사랑해서 미안해. 네가 나를 사랑해주길 원해서 미안해. 정말, 웃기는 년이지? 나쁜 년이지? 한심해서 웃음 밖에 안 나오는 그런 년이지? 내가 생각해도 웃기니까, 마음껏 비웃어도 좋아."
현재를 안은 그녀의 팔이 파르르 떨리면서, 잔뜩 주었던 힘이 조금 빠져나갔다. 툭 밀어내면 밀어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죄로 인해 내팽개쳐진다면, 그걸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는 듯이.
"웃기고, 한심하고, 불쌍하지? 그러니까 그런 불쌍한 나를 사랑해줘. 좋아해줘. 버리지 말고 곁에 둬줘. 쓰다듬어줘. 안아줘. 기절할 때까지 품어줘. 떠나지 말아줘."
그러나 말로써 구질구질하게, 이보다 더 구질구질할 수 없게 애걸했다. 꼭 떠나는 남자의 발목에 매달려 우는 것 같았다. 그런 내용이었다.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나보다 너를. 그래서 미안해."
현재는 미아의 팔을 툭 쳐냈다. 그녀의 양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비웃었다. 미아가 미아를. 어리석은 행동을 해버린 스스로를 비웃었다.
불쌍한 여자가 좋다고 놀리듯이 한 말은, 결코 본심일 리가 없었다.
그런 장난 같은 말에 기대해서 최대한 비참하게 애걸한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애정을 느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이 떨어졌겠지. 추해서, 비참해서, 역겨워졌겠지. 혐오스러웠겠지.
그렇게나 현재를 학대했던 그녀다. 그토록 강한 척 하며 자기에게 훈수질을 해댔던 년이, 이런 나약하고 어설픈 정신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분노나 증오마저도 느끼겠지.
그래서 미아는 생각했다. 이대로 맞아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그건, 그래도 그나마 나은 결말이 아닐까. 만약 맞아 죽는다면, 현재가 자신을 죽여버린다면.
'그러면 적어도, 내 마지막은 현재의 소유네.'
그게 웃겨서, 살짝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를 버릴 거라면 차라리 여기서 죽여줘. 네가 없는 세계는 내겐 필요 없어. 그러니까 나의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줘."
그리고 현재는 돌아서서 미아를 봤다.
"진짜 깜짝 놀랐네."
현재는 그렇게, 담담하게 지금 자신의 상태를 입에 담았다. 얼굴은 여전히 잔뜩 부끄러워 빨개진 채였다.
"나는 네가 던전에서 도끼나 휘두르던 그 불곰 같은 여자랑 비슷한 생물인줄 알았어."
언젠가 던전에 함께 갔던 도끼 전사 여성을 이야기했다. 움직임에 방해가 된다며 머리를 밀어버린 그녀는 자신의 울퉁불퉁 솟아오른 근육을 최고의 자랑으로 여겼는데, 그런 모습으로 거친 전사 남자들과 가졌던 잠자리를 이야기할 때는 정말 입을 찢어버려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런 이족보행 멧돼지 같은 여자와 몸을 섞을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게, 그런 여자를 상대로도 발기할 수 있는 남자가 있다는 게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다.
미아도, 비록 겉모습은 아름다운 소녀지만 행동 양식이 대충 비슷해보였기에 같은 과의 인간이라고 여겼었는데, 이렇게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는, 정말 진짜로 단 한 번도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실은 마을에서 실이나 짜던 여자들보다도 훨씬 더 섬세했구나."
서울에 살던 현재와 같이, 평생 싸움이라고는 해보지 않은, 고블린 하나 못 죽이고 기르던 강아지가 죽으면 진심으로 울어줄 수 있는 여자들. 그런 여자들과 미아가 같은 여자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이라면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를 더 길러. 나는 긴 머리가 취향이야. 그리고 쓸 데 없이 이것저것 숨기면서 끙끙 앓지 말고. 나는 솔직한 사람이 좋아. 그리고……."
현재는 마지막 말은 조금 머뭇거렸다.
"그만 미안해 해. 나도 네가 나를 이 세계에 적응시키려고 그렇게 대했다는 건 알아. 네가 아닌 다른 누구를 만났어도 죽었을 거란 걸 알아.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겼던 건, 전부 네가 있어준 덕분이었어. 그걸 아는데, 알면서 그냥 너를 계속 미워했어. 그게 제일 편하니까."
가장 먼저 잘못한 것은, 이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마음가짐을 지닌 자신이었다. 미아의 방식이 다소 거칠었던 것은, 그것 때문에 그 이후에 생긴 문제였다.
현재는 그걸 알면서도 외면했다. 누굴 미워하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서. 이제서야 인정했다. 이제는 힘이 있기에 자신의 나약함을 직시해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니까.
그리고, 저런 표정으로 울면서 자기가 좋다하는 예쁜 소녀를, 도대체 어떻게 탓하겠는가?
"나도, 너를 사랑해. 미아."
현재는 미아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포옹은 길었다. 그 사이에, 눈치 없이 한 여자가 끼어들었다.
"주인님? 절 잊어버리신 건 아니죠?"
케이트는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현재의 다리를 붙잡고선 그렇게 말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사랑하는 두 연인 사이에 절대 끼어들지 않았겠지만, 케이트는 미아의 연적, 현재를 차지하고 싶은 또 하나의 여자였다. 그래서 끼어들었다.
"저도 주인님을 사랑해요! 분명 제가 더 사랑해요!"
현재는 슬쩍 고개를 돌려 케이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비참함으로 이야기하자면 미아에게 결코 뒤질 것이 없어보였다.
"그래? 그럼 너도, 내가 널 죽이는 순간에도 날 사랑할 수 있어?"
그 눈빛이 어느때보다 싸늘했기에, 케이트는 직감했다.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눈 앞의 남자는 정말 죽여서 시험해볼지도 모른다고.
"앗……, 아앗……."
그래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중증의 마조히스트지만, 아직 죽는 것까지는 결심이 서지 않은 그녀였다. 기왕이면 살고 싶었다.
"저 여자도, 저 여자도 거짓말일 거에요! 주인님을 홀려보려고 죽이니 뭐니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요!"
"아니, 거짓말 아냐."
미아 대신 항변한 것은 현재였다. 그는 알았다. 그가 지금 미아의 목을 조르고 목숨을 취하면, 미아는 정말로 기꺼이 그 목을 내놓을 것임을. 그 끝에도 사랑할지, 아니면 후회할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살고 싶다고 발버둥치지 않을 것임은 알았다.
"아무래도 너는, 진심이 부족한 것 같네."
현재는 케이트의 억지를 일축했다. 케이트는 절망했다. 눈 앞에서 주인님을 다른 여자에게 뺏기는 심정, 미아가 이번주 내내 느꼈던 그 마음을 대신 느끼게 된 것이었다.
'아니, 주인님께 버려지는 비참한 나……, 이것도 좀 흥분되는 것 같기도……?'
그러나 중증의 마조히스트인 그녀는 이 상황도 새로운 흥분으로 받아들였다. 어찌 보면 정말 대단한 재능이었다.
현재가 다시 고개를 돌려 미아를 바라보자, 그녀의 얼굴엔 단 한 번도 지은 적 없던 행복이 가득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가장 강렬한 오르가즘을 느꼈던 때에 억지로 지었던 웃음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표정이었다.
"나만 봐. 다른 여자한텐 눈길도 주지 마."
광기 어린 집착으로 눈빛을 번뜩이는 미아.
"싫은데?"
그렇다고 미아의 마음대로 휘둘려줄 생각은 없는 현재였다. 애처가가 되어 마냥 오냐오냐하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라서. 지구에 있을 때의 현재였다면 한 여자만 사랑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이대로 단둘만이 꽁냥꽁냥하며 살았겠지만…….
"주인님한테 기어오르지 마. 아까 너는 완전히 내 거라고 했잖아? 그럼 내가 널 마음대로 하는 거지. 네가 날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야."
이 세계 버전 현재는 조금 제멋대로라서. 미아가 바라는대로 다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흐……, 익!"
미아도 딱히 할 말은 없을 것이다. 현재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것이 바로 그녀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