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배 위에 올라탄 독사
* * *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아 출항일이 되었다. 현재는 아직도 술이 덜 깼는지 상태가 헤롱헤롱한 미아를 데리고선 커다란 배에 올랐다.
'윽, 머리 울려. 어지러워. 힘들어…….'
미아는 도무지 어떤 말을 할 만큼 건강하지 못해 현재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기대고 있었다. 체면이니 뭐니를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현재는 그러거나 말거나 여유로워 여행 기분을 내고 있었다.
"이렇게 큰 배를 돛이 아니라 노로 저어서 움직인다고?"
상선은 돛에 받는 바람의 힘을 동력으로 쓰는 범선이 아니라 노를 저어 움직이는 갤리선이었다. 돛이 달려 있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보조일 뿐, 주동력은 노를 젓는 힘이었다. 그렇기에 그 형태는 현재가 생각하던 중세시대의 배와는 꽤나 달랐다.
"어설프게 아시는군. 범선은 매우 강한 바람이 부는 바다에서나 쓸 수 있는 물건이지. 물결도 바람도 잔잔한 내륙의 운하에선 도저히 충분한 속도를 낼 수 없다오."
갈색 수염이 성성한 중년의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한때 매우 건장한 근육질이었을 몸은 조금 노쇠했으나 그럼에도 젊은 시절의 강건함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위로 살짝 굽이치는 독특한 모자를 쓴 모양새가 영락 없는 선장이었다.
선장은 출항까지 시간이 좀 있어서인지 아직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지금 바쁜 것은 선장이 아니라 짐을 나르고 확인하는 상단의 사람들과 선원들이었다. 배를 움직이기 시작하는 건 조금 나중의 일이리라.
"이렇게 큰 배를 움직이려면 장난 아닐 텐데."
현재야 어제 잠깐 나룻배를 몰았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노 젓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쯤은 확인할 수 있었다. 작은 나룻배도 그럴 진데 이렇게 커다랗고 짐이 잔뜩 실려 무거운 배를 움직이는 건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노잡이는 제법 보수가 후한 일이지. 건강한 젊은이들이 한몫 잡기에 상당히 괜찮은 일이라 지원자는 많소."
현재는 뒤늦게 이 세계 사람들이 지구인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지녔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다른 세계로 불쑥 떨어진지 벌써 3년이나 지났는데도 가끔씩 이렇게 지구의 기준으로 생각해버리는 버릇이 남아있었다. 20년이 넘게 살았던 땅이라 강렬히 새겨진 것인지, 아니면 너무 그리워 무심코 그곳을 기준으로 생각해버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흐음."
"만나서 반갑소. 나는 선장인 겔리메르요. 대단히 중요하신 분이라고 들었소만."
이런 대형선은 건조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들어 배 모는 기술만 가진 선장이 사기에는 너무 비쌌다. 때문에 선장이 따로 있고 배를 가진 선주는 또 따로 있었다.
이 배의 주인은 다름 아닌 파리안이었다. 이곳에 실린 물건도 전부 파리안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최종 책임자가 그녀이기는 했고.
그렇기에 선장으로서는 그녀의 소개장을 들고 찾아온 현재를 매우 정중하게 대할 수 밖에 없었다. 거친 바닷사람인 그가 애써 차린 예의가 겨우 저 수준이기는 했으나, 나이도 있으니 딱히 현재가 거슬려할 만한 부분은 없었다.
"현재입니다. 그냥 여행객이죠. 제국 반대편까지 가는."
배는 수도에 정착해 이틀 정도 짐을 교환하고 그 후에는 아예 제국 반대편으로 갈 예정이었다. 약 한 달 간의 항해. 마차보다 훨씬 빠른 배를 타고도 그 정도의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횡단할 수 없을 정도로 제국은 넓었다.
어찌 보면 온전히 두 다리로 달리는 게 더 빠를 수도 있었으나, 현재는 며칠을 아끼자고 한 달 가까이 뛰기만 하는 중노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사흘을 내리 달린 것만으로도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몸이 지친다기보다는 정신이 피로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피곤한 건 피곤한 것이었다.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신가?"
"그렇네요. 평생을 한곳에만 살았으니까."
정확히는 단 한 번, 나라도 대륙도 행성내도 아니고 아예 다른 차원으로 떨어진 적이 있지만, 그런 사정까지 설명해줄 이유는 없었다. 믿게 만드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닐 테니.
'여행이 거의 처음이나 다름 없는 건 사실이고. 이렇게 길게 떠나본 건 진짜 처음이네.'
새삼 서울에 살 때 참 돌아다니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는 꿈도 못 꿨고 국내 여행도 학교에서 가는 것을 빼고는 다녀본 적이 없었다. 가난한 삶이란 그런 거였다. 먹고 살기도 바빠 여유를 즐길 사이 따위는 없는.
그런 면에서는 이 세계에 와서 참 별 짓을 다하게 된다 싶었다. 첫경험도 이곳에 와서 가졌고 말이다.
'비록 첫 3년은 지옥 같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이전보다 나아진 걸지도.'
비록 스마트폰도 없고, 깨끗한 물을 마시려면 매일 신경 써서 물을 끓여 증류수를 만들어야 하고, 세차고 따뜻한 물을 맞을 수 있는 샤워기도 없고, 향긋한 바디워시나 샴푸 또한 없고, 전기도 없는 데다 기름 활용도 어정쩡해 이것저것 불편한 게 말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유하다는 느낌과 넘치는 힘,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로움 같은 것들은 분명히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사람 사는 곳이라고 적응이 되기는 한 것인지. 현재는 애써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항해에 비하면 운하를 따라 여행하는 건 확실히 낭만이 있는 일이라오. 매일 파도, 바다, 파도, 하늘, 파도, 새, 파도, 무인도, 그렇게 밖에 볼 것 없는 항해와는 달리 운하를 건너다 보면 이 도시, 저 도시, 이 논밭, 저 논밭, 새로운 산, 새로운 땅, 볼 것이 생각보다 풍부하니까."
"그렇군요."
"아름다운 연인도 있고, 참 정말 젊음이 부럽구만. 나는 슬슬 항해 준비를 하러 가봐야겠소.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를."
'연인은 아니지만.'
현재는 굳이 선장의 말을 지적해주지는 않았다. 선장은 그 인사를 끝으로 선원들을 지휘하러 가버렸고, 한 달을 배 위에서 같이 보낼 선장과의 첫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다음에 찾아온 것은 배가 아니라 화물을 관리하는 상단의 책임자였다.
"반갑습니다. 케이트입니다."
그녀는 머리를 뒷통수 윗쪽으로 단정하게 말아올린 20대 가량의 젊은 여성이었다. 그 헤어스타일이 한국에서 많이 보았던 간호사나 은행원, 백화점 판매원 등을 떠올리게 했다. 비록 머리색깔이 검은색도 갈색도 아닌 주홍색이었지만. 그나마 눈빛은 많이 보던 초록색이라서 인간 같지 않다는 느낌까진 들지 않았다.
어딘가 정장 비슷한 복장을 입고 있는 점도 그리운 느낌이 들게 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던 파리안을 제외하면 이 세계 사람들이란 대체로 움직이기 편한 헐렁한 튜닉에 통 넓은 치마 혹은 바지를 입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카르데아 백작이나 케루비아 황녀의 옷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들은 귀족이니까 그렇다고 치고-, 케이트는 또 희귀하게도 제 상단주처럼 무언가 움직이기 불편해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꽉 조이는 치마와 짧게 달라붙는 셔츠. 힘 쓰는 일이 아니라 사무직 담당이라고 호소하는 것 같달까. 어찌 보면 엘리트처럼 보인다고 표현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매우 특이하게도 안경을 쓰고 있었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소도시 아르젠타에서는 안경을 쓴 인간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었다. 메스토크 시는 그리 찬찬히 둘러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눈에 띈 사람 중에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현재, 그런데 그 안경 도수가 있는 건가? 쓰면 더 잘 보이나?"
"그렇죠. 꽤 귀한 물건입니다만."
질문을 받은 케이트는 괜히 손을 뻗어 안경 다리를 한번 들썩였다. 렌즈 깎는 기술은 이 세계에도 있는 모양이었다. 귀하다는 걸 보면 당연히 아무나 가진 것은 아니겠지만.
'하긴, 내가 본 세상은 굉장히 좁은 곳 뿐이었지.'
아르젠타의 인구는 겨우 3천 여명. 서울의 인구수가 천만 명인 것을 생각하면 정말 웃기기까지 한 숫자다. 그러니 도시 사람들이 서로를 척 보면 알아보고 아는 체를 하며 모든 소식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겠지.
'어쩌면 나는 이 세계에 대해 거의 모르는 것일지도 몰라.'
실제로 오크나 엘프를 만나본 적조차 없었다. 고블린은 정말 질릴 때까지 죽였지만. 그리고 수인이라는 존재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신을 저버린 끝에 은총을 잃고 몰락했다는 존재. 그들은 모두 노예거나 그보다 못한 삶을 산다고 하던데…….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벌써 멀미를 하시는 건가요? 아직 닻을 올리지도 않았는데."
"그냥 단순한 숙취야. 이름은 미아고."
"얼마나 멀미를 할지도 모르면서 술을 먹고 배를 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닌 듯 한데요."
"그렇기야 하겠지."
케이트가 지적했으나 현재는 딱히 변명하지 않았다. 훈계라기보단 조언에 가까운 말이었으니 그냥 알았다고 하면 되었다.
케이트는 이번 상행의 총 책임자였으나 어디까지나 간부일 뿐, 진짜 보스인 파리안의 부하 직원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파리안이 특별히 받들어 모시라는 소개장을 써주었기에 현재는 아득히 높은 귀빈으로서 배를 탈 수 있었다.
'뭔가 굉장히 사납기만 해보이는 남자인데, 길드장 님은 대체 무슨 까닭으로 상선에 외부인을 끼워넣으신 거지?'
케이트는 현재를 살피고는 이상하다 생각했다. 상선이라는 게 원래 불쑥불쑥 외부인을 태워도 되는 것이 아니었다. 여객선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매우 중요한 사람이니 특별히 대우하라는 건 상식 선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명령이었다.
'합리적이지 않아. 왜 합리적이지 않은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겠어.'
케이트는 현재에게 매우 큰 호기심을 느꼈다. 매우 실리적인 파리안이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면 그것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상인은 항상 이득에 밝아야 하는 법.
비록 길드장의 딸로 태어난 금수저지만 그래도 높은 실적을 올리며 길드원들의 지지를 받고 마침내 길드장의 자리마저 차지해버린 파리안을 케이트는 존경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파리안이 벌인 기행의 요지를 매우 이해하고 싶었다.
그냥 몸을 섞은 매력적인 남자라 잘해준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고서. 여태까지 파리안이 한 남자를 편애하는 모습 따위는 보여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일단 선실로 안내해드릴게요."
보통 선원이나 상단원들은 큰 방에 십수명 씩 모여서 잤지만, 현재와 미아에게는 특별히 커다란 방 하나가 따로 배정되었다. 이것은 선장이나 이번 상행의 책임자인 케이트나 되어야 누릴 수 있는 특혜였다. 받는 현재 입장에서는 매우 당연한 대우라고 생각했지만.
"밤 사이에 제대로 된 침대를 공수해두었어요. 원래는 이렇게 좋은 방이 아닌데. 길드장 님의 명령이시니 특별히 신경 좀 썼죠."
기름 램프나 촛대, 테이블과 침대 등이 놓여 그럴 듯하게 꾸며진 선실이었다. 바다를 건너는 항해 배는 흔들림이 심해 무조건 튼튼한 물건들로 채워야 했지만, 운하를 건너는 배는 잔잔하여 이런저런 것들을 실어도 되었다. 물론, 바다보단 적다고 해도 바람에 배가 흔들릴 위험은 품고 있지만 말이다.
"식사는 시간에 맞춰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죠. 좋은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남기고 떠나가려는 케이트를 현재는 붙잡았다.
"잠깐, 많이 바쁘신가?"
"그리 여유롭지는 않네요. 화물의 확인은 계속 해야하니까요."
"다시 말하면 꼭 해야하는 일은 아니라는 거네?"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럼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지."
현재의 말에 케이트의 눈매가 가늘게 좁아졌다. 현재가 하는 행동은 누가 봐도 추파를 던지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옆에는 예쁜 애인을 끼고도.
'내가 좀 미인이긴 하지만.'
케이트는 거절하려고 했다. 아무리 파리안이 귀빈으로 잘 대접하라는 서신을 보냈다고 한들, 이런 일에까지 어울려줄 의무는 없었다.
그녀는 접대부가 아니라 상인이고 상단의 책임자 중 한 명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거절하려던 차에,
"내가 좀 돈이 많아서 투자를 하려고 하거든. 어때, 구미가 당기는 얘기지?"
현재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꺼내왔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세공 다이아가 박힌 백금 목걸이가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다이아몬드가 저렇게 커? 위조품이겠지? 그런데 저렇게 정교하게?'
케이트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저런 귀물은 황실에서나 보일 만큼 엄청난 물건이 아닌가? 물론 진품이라면 말이지만.
꿀꺽, 목울대 너머로 침을 삼키며 케이트는 대답했다.
"곧장 술을 준비해오도록 하죠. 물론, 안주도 같이요."
"좋은 생각이야. 말이 잘 통하네."
현재가 웃었다. 그의 마음 속에 끓어오르는 음심을 케이트도 느꼈지만, 자신은 잘 대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상인이 갖춰야 할 소양이 바로 화술과 줄타기.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키며 가질 수 있는 것은 다 가지리라. 케이트는 그리 굳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