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배 위에 올라탄 독사
* * *
"재미 있는 도시네."
현재는 노를 잡고 젓고 있는 미아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수로에서 물비린내와 썩은내가 살짝 섞여 올라오는 것 말고는 굉장히 마음에 드는 도시였다.
"그래. 예뻐."
그리 맑지 못한 물 탓에 잔잔한 파란 수면 위로는 달그림자가 아주 어렴풋이 비칠 뿐이었으나, 그럼에도 도시는 아름다웠다.
'단둘이 이러고 있으면 꼭 무언가 로맨틱한 관계가 된 것 같다고 착각해버려.'
마치 물 위에 뜬 듯한 어두운 도시 아래, 은은한 달빛이 비춘다. 천천히 흘러가는 나룻배 위는, 단둘만이 조용히 공유하는 공간.
그 침묵 사이에서 미아는 무언가 애달픔을 느꼈다.
'될 수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헛되이 기대를 품고, 그 기대를 품은 자신을 모멸하면서 조금씩 갉아먹혀 간다. 행복과 우울에. 그 두 가지 감정은 분명하게 공존하고 있었고, 함께 깊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불빛과 같다. 불빛은 밝게 빛나서 모두를 비추어 희망을 주지만, 정작 자신은 타들어가 망가지고 결국엔 사라진다. 그런 감정, 그런 감각이다.
"있잖아."
배 뒷쪽에 기대어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눈을 감은 채 배의 흘러가는 느낌을 즐기는 현재에게 노를 멈추고 배가 흘러가게 두고 있는 미아가 말을 걸었다.
"왜 황녀님에겐 그렇게 거칠게 했으면서, 나한테는 항상 부드럽게 하는 거야?"
로맨틱과는 거리가 아주 먼 질문이었다. 자기 아닌 다른 여자와의 성교를 언급하는 일이 빈말로라도 로맨틱할 수는 없겠지.
현재는 미아를 안을 때 항상 부드러운 애무로 충분히 몸을 풀어주었다. 덕분에 첫경험부터가 타는 듯한 아픔보다는 찌르는 통증 사이로 은은히 올라오는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황녀가 젖든 말든 대뜸 찔러넣어 내부를 다 찢어발기려고 했던 모습과는 대비되는 행동이었다.
비록 처음의 처음에는 배를 때려 죽기 직전까지 만들었다가, 엘릭서로 간신히 살려냈지만. 그것은 새로이 얻은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의 강함에 휘둘린 듯한 모습이었다. 적응하고 난 후에는 그런 난폭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파리안과 오래된 연인처럼 구는 모습에서 현재라는 인간 자체가 부드럽다고 믿어버렸지만, 아직도 현재의 내부에 난폭한 충동과 분노가 타오르고 있음을 황녀와 그 호위 기사를 대하는 태도에서 알아챘다. 현재는 아직도 마음 속에 화가 많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 화를 원인인 미아에게 푸는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는 것일까. 미아는 그 사실이 몹시 궁금했다.
"그 여자는 그냥 스쳐지나가는 인연이었고, 너는 오래 써야하잖아. 망가지지 않게 신경 쓰는 건 당연하지."
현재는 그렇게 로망이라곤 하나도 없는 소리를 했다. 일부러 표독스러운 말을 고른 듯이.
"그래. 그렇구나."
미아는 어쩐지 그 대답이 석연치 않다고 느꼈으나, 그 이상 캐물을 용기는 없었다. 일선을 넘는 게 두려웠다. 넘어서면 이 불안한 관계조차 망가질 것 같아서.
"여기가 수로의 끝이야. 이제부턴 운하. 어떻게 할까?"
도시의 수로가 끝이 나 두사람이 탄 나룻배는 운하까지 도착했다. 멀찍이 어둠 너머로 어렴풋이 거대한 상선들의 그림자가 엿보였다.
"운하 가운데로 가자. 아직은 뱃놀이를 더 즐기고 싶으니까."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느낌은 두 발이 육지에 딱 붙어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자기는 손 하나 까딱 않고 누워있는 주제에, 현재는 미아에게 그렇게 명령했다.
"그래."
나룻배는 아무 것도 없는 운하 한 가운데로 조용히 흘러나갔다. 물살이 매우 잔잔했기에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선 아주 가끔씩 노를 저어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현재는 도시의 상점에서 사온 술병을 하나 깠다. 운하를 따라 상선을 타고 온 고급 포도주로 머나먼 도시에서 특산품으로 판매할 정도로 괜찮은 물건이었다. 호텔 주방에서 일했던 요리사로서 와인 종류는 익숙했기에 그리운 향취를 느끼며 술을 입에 담았다. 그윽하고 부드럽게 코를 감싸고 도는 향기가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해주었다.
"한 잔 할래? 아, 잔이 아니라 병나발이긴 하지만."
잔도 없이 병나발을 불던 현재는 제 입에 닿았던 와인을 슬그머니 미아에게 권했다. 이제 와서 신경 쓰기엔 너무 싱거운 접촉이기는 했다. 보통 관계에선 절대 서로 닿지 않을 부분까지 맞닿아서 뒤섞였던 그들이니까. 그럼에도 미아는 무언가 싱숭생숭한 기분을 느꼈다.
'모르겠어. 왜 그러는지. 3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나는 정말 현재에 대해 아는 게 아무 것도 없구나.'
알려고 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정을 주기 싫었다. 언제 죽어 사라질지 모르는 나약한 인간에게는 정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보다 수명 짧은 애완동물은 키우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 이상으로 언젠가 다가올 이별이 불안하니까. 상실과 덧없음을 잘 알기에 지금을 즐기지 못하는 얼간이.
그래서 미아는 현재가 지니고 배워온 모든 것을 부정하며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에 알맞은 인간'으로 개조하려고 했다. 그 결과 현재는 선량함과 따스함을 모두 잃고 난폭하고 잔인하고 비틀린 성정의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업보. 그렇기에 이 이상 다가갈 수 없고, 멀어져 도망칠 수도 없다. 파도 속에 흔들리는 해초처럼, 그저 가만히 물살에 휩쓸려 이리 휘어지고 저리 휘어질 뿐.
미아는 이 힘겨움이 술로 인해 조금이라도 덜어지기를 바라며, 현재가 건넨 포도주를 받아들었다. 포도주를 받아들고 곧장 마시지 않고 가만히 병을 바라보는 미아를 보며 현재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녀석이 술을 마시는 꼴을 본 적이 없네.'
술은 정신을 흐리게 한다. 정신이 흐려지면 판단이 느려진다. 언제 어떤 위기가 올지 모르는 이상 항상 정신을 또렷하고 맑게 유지해야 한다고 미아는 항상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던전에 갈 때 뿐 아니라 평소에도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3년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어쩌면 평생 마셔본 적이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술…….'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취한다는 것이. 자신이 자신의 통제를 잃어버린다는 것이. 본심을 내비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취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 터질 듯한 속마음을 조금이라도 진정 시킬 수 있다면, 술이 아니라 독이라도 벌컥벌컥 들이킬 수 있을 정도로 심란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미아는 술을 들이켰다.
꿀꺽, 꿀꺽.
잔잔한 운하 위의 나룻배 안은 너무나 조용해, 그녀가 포도주를 삼키는 그 작은 소리마저 커다랗게 울려퍼졌다.
'너무 벌컥벌컥 마시는 거 아냐? 그래도 술인데.'
평범한 포도주의 도수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고대에는 물 대신 포도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러나 그렇다 한들 술이기는 했다. 현재는 미아가 취하지는 않을까, 걱정보단 호기심을 지닌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미아는 트름 대신 애틋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은 채로 내쉬는 것은 어쩐지 고혹적인 호흡이었다. 현재는 아랫도리에 슬쩍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오늘따라 더 예쁘네.'
구름이 흐리게 끼어 어두운 밤, 은은하게 비치는 달빛, 나룻배 가운데 피워놓은 기름 랜턴에서 피어오르는 불빛에 주홍색 불그림자가 든 얼굴.
적신 눈가와 애달픈 호흡이 마치 교접 중인 여인을 연상케 하여 미아는 평소보다 한 층 더 아름다워 보였다.
미아는 한참을 그렇게 멈춰 있었고, 현재는 그저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본래 미인이란 존재는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이라서 현재는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뚝, 뚜둑.
멈춰있던 미아의 눈에서 어느새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던 교태로운 숨소리 또한 울음에 걸맞은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하아……, 흑……, 히끅……."
"취했어?"
덩치도 크고 몸 건강한 현재로서는 겨우 저 정도의 술로 취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미아는 정말로 만취했는지 물어도 반응을 하지 않았다.
"미안해. 나는, 내가, 너를, 너도. 아……."
너무 많은 낱말이 입 안에 멤돌아 온전한 하나의 문장으로 조립되지 못하고 와해된 언어로써 떨어져나와 모래알처럼 물에 휩쓸려 스러져갔다.
현재도 알았다. 미아가 이 세계에서는, 아니 지구를 포함하더라도 보기 드물게 정의로운 인간이라는 사실 쯤은. 아르젠타에서 그녀는 만인의 칭송과 응원을 받으며 영웅으로서 잘만 살아가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녀의 자애로움과 정의로움은 유일하게 현재에게만 빗겨나가고 있었기에, 그 괴리감이 현재를 더욱이 괴롭게 만들었다.
신의 은총조차 받지 못한 이방인은, 신의 은총이 있는 도시 사람처럼 대해줘서는 안된다. 그러면 그것이 당연하다 받아들이고 말 테니까. 그래서는 분명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고 말아.
가혹하게, 자비 없게, 냉정하게, 그런 방식으로 대했던 것은 분명 호의와 서투름이 합쳐진 결과였으나, 현재는 그것에 감사함 대신에 분노를 느꼈다.
내게 잘해주고 싶어서 한 것이야, 단 한 마디의 감상으로 용서하기에는 너무 심한 짓을 당했던 것이다. 한국이었다면 당장 정신과를 다니며 상담을 받아야 할 정도로. 그 상처들은 아직도 가슴 깊숙이에 남아 현재의 파괴 욕구를 충동질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애처로이 눈물 흘리며 현재에게 용서를 구하는 미아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움과 동시에 부숴버리고 싶을 만큼 가증스러웠다. 손을 뻗으면 언제든 산산조각낼 수 있는 나약한 인간. 죽여 치워버리면 그만일 텐데 그러지도 못하기를 몇일째던가.
'그냥, 예쁜 여자고 내 말대로 잘 따르니까 잠시 데리고 놀고 있을 뿐.'
현재는 다시금 그리 생각하며 뒤틀린 욕망을 씹어 삼켰다.
"돌아갈 수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다면, 시작부터 모두 새로 쓸 수 있다면……."
미아는 술기운에 회한을 숨기지 않고 모두 털어놓았다. 그녀는 현재에게 다가와 양손으로 현재의 두 뺨을 쓰다듬었다.
"그런다면 나는 너를 그냥 부드럽게 대해줄 수 있을까?"
존재하지 않는 만약을 되짚으며 과거를 그리는 사람이라면 가끔 그런 생각에 닿을 때가 있다.
만약에 과거로 돌아갔는데, 그래봤자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면?
예를 들어, 자신이 바라는 게 너무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서 과거로 돌아가 또 노력할 기회를 준다 해도 실패해버릴 것 같다든지, 좋은 운을 필요로 해 시간을 되돌려봤자 잡을 수 없을 것 같다든지, 여하튼 다시 해도 그대로일 것 같다는 그런 생각에 닿을 때가 있다.
이것은 제대로 된 이는 품지도 않을 헛된 고민이요, 덧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에 금이 간 이들이나 상상하고는 하는, 해봤자 아무 쓸 데 없는 가슴앓이.
애초에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없고, 일어나지 않은 일이 일어난 일로 바뀌는 만약 따위는 없어 모두 부질 없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미아는 괴로웠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새로이 현재를 만난다 하더라도 같은 방식을 취할 것 같은 자신이. 하나도 성장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땐 어렸고, 지금도 여전히 어리석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뭔지, 그녀는 미로를 헤매이는 듯 어디로 가야할지 아리송한 기분이었다.
아니, 던전의 미로에는 이골이 났다. 길을 찾는 것은 특기이다. 그러니 미로에 비유하는 것은 웃기는 일인 거다. 땅의 미로와 달리 마음의 미로에서 길을 찾는 방법 만큼은 전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가지 마, 죽지 마, 사라지지 마, 없어지지 마, 너는, 나는, 너를."
너는 내가 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람이란 말이야. 미아는 말을 꺼내는 대신 조용히 그저 입맞췄다.
홀로 긴 세월을 씹어삼켰던 고아였던 자신과 닮은, 도시의 인간들로부터 외따로이 떨어진 이방인. 너무나 허약하고 또 아는 게 없기에,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그러나 너무 강함만을 강요하다가, 그 선한 마음을 망가뜨려버리는 죄악을 저질렀던,
용서 받고 싶은, 그러나 용서 받을 염치가 없는 사람.
그리고 언젠가 이 세계에 왔던 때처럼 갑자기 자기 세계로 돌아가버리지 않을까 불안한 그런 사람.
'아무데도, 가지 마.'
노려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뜬 눈으로 키스를 했다. 혀가 마주하고, 서로의 숨결이 섞였다. 매끄러운 기름처럼 늘어지는 서로의 타액. 현재는 조용히 미아의 작은 등을 끌어안았다.
'이건 하는 분위기지?'
남성기는 이미 더 커지기 힘들 정도로 불쑥 솟아있었다. 아직 생리 기간이 끝나지는 않은 듯하나,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지기도 애매해졌다. 현재가 그리 생각하는 사이.
코오오.
작은 숨소리를 내며 미아는 곯아떨어져버렸다.
"……."
소녀의 작고 귀여운 엉덩이 위로 뻗어가던 현재의 손이 멈췄다. 사이 좋은 연인도 아니다. 잠들었다고 멈출 필요는 없었다. 하고 싶다면 의식이 있건 없건 범하면 될 뿐. 그럼에도 현재는 멈췄다. 그냥, 그러고 싶었으니까.
"술 진짜 약하네. 혼자 있을 땐 절대 먹지 말라고 얘기해야겠어. 알아들어?"
슬며시 입가를 일그러뜨리면서, 엄한 꼴이라도 당하면 안될 테니 단단히 일러둬야겠다고 현재는 생각했다. 잠든 소녀의 뺨을 살짝 꼬집은 뒤, 그녀를 살포시 나룻배의 곡면에 걸쳐 눕혀놓았다.
자리를 옮겨 노를 잡은 현재는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처음 경험하는 노 젓는 일은 그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잠시 헤매던 그는 이내 나룻배를 제몸처럼 다뤄 도시 안쪽의 수로로 향했다.
달을 가리던 구름은 어느새 흘러가 환한 달빛이 도시를 노르스름한 빛깔로 밝히고 있었다. 무엇 하나도 명확해지지 않은 그들 사이와는 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