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갑자기 온 손님
* * *
현재는 이제 이곳에 온 목적에 대한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사실 황녀를 강간한 건 그냥 덤이었다. 딱히 하지 않았어도 상관 없는 일.
"듣자 하니 너희 황제님께서는 백작의 넓은 영지가 탐나서 참을 수 없는 모양이지? 노친네에게 존재하지도 않는 후사를 만들어줘서라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을 정도로. 아주 가치가 높은 땅인 모양이야."
마비어스는 현재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다짜고짜 나타나 위험도 재지 않고 무자비하게 황녀를 강간해버린 광인. 그러나 마냥 미치기만 한 것은 아닌지 상황을 판단할 머리 정도는 있는 모양이었다.
이해하지 못하면 바보일 정도로 상황이 명확하기는 했으나, 현재는 그것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이지가 흐트러진 듯이 보였다. 그렇지 않으면 감히 황녀를 강간하겠다는 미친 생각을 하겠는가?
"그러면 황녀만 달랑 보냈을 리가 없고, 혼인 지참금을 잔뜩 실어 보냈을 텐데, 어때. 그 중에 아티팩트 같은 건 없나? 던전의 보물 말이야."
게다가 그 남자는 뻔뻔하게도 황녀 뿐 아니라 다른 보물도 노리고 있었다. 마법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유일하게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도구. 던전의 보물 아티팩트.
문명을 벗어난 땅으로 향하는 현재에게 금화나 보석 따위는 별 의미가 없기에 현재가 원하는 것은 그것 뿐이었다.
마비어스는 대답했다.
"우리가 가져온 것은 보석, 가구, 그리고 비단과 향신료 뿐이다. 아티팩트는 목록에 없지."
"많이 유감인데?"
현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티팩트가 진짜 있든 없든, 없다고 한 이상 그의 분노를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마비어스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신의 구원인지 장난인지,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아티팩트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마비어스는 매우 강했다. 현재에게는 무참하게 패배했지만 그것은 현재가 매우 강한 마비어스보다 훨씬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이었다.
황실 기사 마비어스. 황궁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 그는 이 습격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반드시 배제하지 않으면 습격을 막아낼 너무나 뛰어난 실력의 보유자.
그렇기에 적들은 마비어스를 제거하고 싸움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 방법은 바로 아티팩트였다.
"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소장한 아티팩트가 있다."
마비어스는 자그마한 구슬 같은 것을 꺼냈다. 탁구공 정도의 크기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색상이었다. 한두 가지 색깔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흡사 물에다가 온갖 색소를 뿌려놓고 휘저은 듯이, 오만 가지 색상이 소용돌이 치며 서로 뒤섞이지 못한 채 제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그건 뭐지?"
"혼돈신의 정처 없는 발걸음. 생물을 수십 킬로 바깥으로 날려버리는 아티팩트다."
마비어스는 그것에 당해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고 멀리 날려졌다. 그것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자신이 아티팩트에 당하지만 않았더라면 전투는 빨리 끝났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런 악마에게 붙잡히는 일도 없었을 터인데. 그리고 황녀도…….
"어디로 날아갈지는 쓰는 이조차 몰라. 나는 이것에 당해 전투에서 배제 당해 있었지."
"오."
현재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적이 그걸 써서 너를 날려보냈다면, 적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냐?"
아티팩트는 모두 하나 뿐인 보물, 그렇기에 그 주인을 특정하는 일이 어렵지 않게 가능했다.
"아니, 이 아티팩트는 한참동안 행방불명이었다. 용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겠지. 적을 추방하되 동시에 아티팩트의 소유권이 적에게 넘어가버리니, 그야말로 신의 장난 같은 물건이다. 비장의 방어 수단이지만 적에게 그 수단을 넘겨주게 되는, 다루기 아주 까다로운 물건."
"사용법은?"
"발동 주문을 외치고 상대에게 던지면 된다. 빗나가면 큰일이지만, 그 정도는 알아서 해야 하는 거다."
100퍼센트의 명중을 보장하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마비어스는 더욱 후회했다. 자신이 조금만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면, 이런 결말은 피할 수 있었지 않을까, 그런 후회가 덮쳐들어서.
"주문이 뭔데?"
"혼돈신의 이름."
"혼돈신의 이름이 뭔데?"
"모르는가? 하지만 내가 그 이름을 말하면 아티팩트는 발동하고 만다."
"카사아리."
미아가 끼어들어 혼돈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혼돈신의 이름은 카사아리야."
"그래. 그 이름이다."
마비어스가 동의했다.
"좋아, 이리로 넘겨."
현재는 손을 뻗었고 마비어스는 구슬을 던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입이 열렸다.
"카사!"
열린 입은 부서졌다. 현재가 손으로 쥐고 우그러뜨렸기 때문이었다. 둘 사이엔 상당한 거리가 있었는데, 그게 좁혀진 것은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말보다도 빠른 이동, 그 판단 속도에 마비어스는 진작부터 현재가 자신을 믿지 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끅!"
"그럼 안되지. 모처럼 자비를 베풀어주고 있는데, 나를 쫓아내려고 하면 기분 나쁘잖아."
마비어스는 진실 속에 거짓을 숨겨, 현재를 잘 속여넘긴 다음 방심한 차에 추방하려고 했다. 허나 현재는 그 사실을 진작 눈치 채고 마비어스의 입이 열리자마자 손으로 틀어막고 비틀어 우그러뜨렸다.
턱이 부러지고 혀를 붙잡힌 그는 혼돈신의 이름을 끝까지 부르지 못했다.
"기분 나쁜 침이 묻었군."
현재는 마비어스의 혀를 잡다 묻은 침을 기사의 망토 뒤에 슥슥 문질러 닦아냈다.
"아티팩트를 노린 범행이리라 생각했는데, 아티팩트를 쓰면서까지 해치우려 했다니. 이래서는 정말 황녀를 노린 것 뿐인 듯 하네. 높으신 분들은 피곤하구나. 맨날 정쟁, 암살,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을 벌이고. 지루할 일은 없어 좋겠어?"
"나는, 이런 삶, 한 번도 바란 적이 없었어. 그냥 평범하게 살 수 있었다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는데……."
황녀가 울먹였다. 그저 평범한 삶을 살고 평범한 사랑을 해 평범한 가정을 이루었다면 좋았다. 기왕이면 그 남자가 마비어스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런 지위, 이렇게 팔려가다가 또 습격당하는 인생 따위 원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평범해? 웃기네. 너는 특별하지 않은 삶이 어떤지 모르잖아?"
그러나 싸늘한 칼날 맺힌 말에 그 말은 차단되었다.
"네가 생각하는 평범함은 평범함이 아니야. 진짜 평범함은 네가 생각하는 비참함, 아니 상상조차 못하는 그런 비참함이지. 가난한 삶, 굶어 죽어가는 나날이 어떤지 알지도 못하면서 평범 운운하기는. 네가 말하는 평범함이란 부족함 없이 모자람 없이 살아가는 그런 거잖아? 화목한 가정, 굶지는 않을 정도의 풍족함, 위협 받지 않는 안전,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르면서, 평범한 삶이 부럽다고? 진짜 평범한 절대다수의 삶에 던져진다면 너는 단 하루도 버티기 힘들걸?"
그것은 표면상 황녀에게 하는 말이었으나 실제로는 과거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서울의 작은 집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던 자신. 그러나 그 가난함조차도 사실은 엄청난 풍족함이었다는 것을 이세계에 뚝 떨어진 후에야 깨달았다.
언제나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실 수 있고, 배고프면 밥을 먹을 수 있던, 밤에 피곤하면 등 뉘일 집이 있고 잘 때마다 목숨을 위협 받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던, 의식주 모두가 보장된다는 평범함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 이제서야 깨달았다.
이제는 호텔 주방에서 자신을 갈궈대던 선배들과 쉐프마저 그리울 정도였다. 돌아가고 싶다. 다시금 원래 세계에서의 삶이 주어진다면, 매일매일 감사하며 살아갈 텐데.
현재는 오래도록 과거의 자신을 실컷 비웃었기 때문에, 이번엔 황녀를 비웃었다.
"그건 너희가 당연히 짊어져야 할 업보다. 남의 머리 위에 서서 그들의 피와 살로 배를 채웠으면 그 정도 고충 쯤은 기꺼이 견뎌냈어야지. 인간들의 시기, 질투, 원망, 증오, 모두 너희가 스스로 원해서 산 것이 아니냐? 그런 것들이 따를 것임을 알면서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부와 권력과 명예를 더 바랬기 때문에."
현재는 황녀를 비웃을 수 있는 자신이 조금은 마음에 들었다. 아마도 황족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겠지. 그랬다간 목이 달아날 테니까. 그러나 지금 황족보다 강한 힘이 있기에 현재는 당당히 말할 수가 있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란 건 변명이 안돼. 만백성의 고혈을 빨아 살아가는 너는 그들의 존재에 대해 항상 통찰하고 고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지 않은 너에게는 마땅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 뿐이지."
왕이 되려는 자, 그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 국민의 노동 위에 올라타 살아가는 자들은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개념은 황녀에게는 너무 어려웠던 걸까. 아니면 애초에 고려할 대상조차 아니었던 걸까. 현재는 알 수 없었다.
이번에도 황녀에게 던진 말들은 실은 과거의 자신에게 내던진 일침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에 항상 감사했다면 이런 지옥까지 떨어지지는 않지 않았을까? 현재는 어쩌면 이곳이 지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평생 감사하지 않았던 자신에게 죽은 후에 내려진 단죄가 아닐까.
"뭐, 내가 그런 이유로 널 덮친 건 아니지만 말이야. 너는 빨통이 너무 컸어. 만져보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만큼."
현재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너무 감정적이 되었었다.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황녀를 보니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서 한 마디 해주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진짜 밑바닥의 삶들은 정말 상상할 수 없이도 끔찍함을, 현재는 옆에서 꾸준히 보아왔다. 이곳은 그런 세계였다.
'정말로 비틀린 인간.'
성욕에 따라 움직인 주제에 개똥철학을 읊으며 설교하는 현재에게 황녀 케루비아는 커다란 역겨움만을 느꼈다. 그것이 현재가 바라는 바였지만. 현재는 황녀를 개심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분 나쁘라고 내키는대로 지껄인 것 뿐이었다.
'그냥, 닥치는대로 내뱉는 개소리일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거야…….'
그러나, 그 뒤에 스멀스멀 부정적인 감정이 그녀의 머리를 채워 그녀 본인의 가치관에 커다란 상흔을 남기고 있었다.
그야, 이렇게 충격적인 경험이고, 이렇게 강한 남자다. 내용과는 상관 없이 그가 하는 말이 머리에 새겨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정말로, 내가 나의 사명을 다하지 않았기에 단죄 받은 걸까.'
신이 있는 세계. 인간들은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어 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이 그녀의 운명인 걸까.
'내가 못난 인간이기 때문에 비극에 떨어진 걸까.'
현재는 황녀를 심란하게 만든 후에, 아주 만족한 듯이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슬슬 갈게. 이렇게 된 김에 보물 몇 개 좀 털어가마. 잘 살아라."
현재는 옷매무새를 고친 후 마차 바깥으로 나갔다. 미아 또한 칼을 거둬 검집에 집어넣고는 바깥을 향했다. 안에 남은 건 팔이 잘리고 턱뼈가 부러진 마비어스와 벌거벗은 채 정액 범벅이 된 황녀 뿐이었다.
현재는 이후 뒷쪽에 있던 마차들을 털어 각종 금은보화를 챙겨 떠나갔다. 금은보화 따위 딱히 필요 없다고는 했었지만, 미래란 게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니.
'아티팩트 하나에 많은 보석, 제법 괜찮은 보수를 손에 넣었구나.'
그는 상쾌하게 미소지었다.
* * *
운하도시 카디악.
메스토크 시에서 마차를 타고 7일 거리라는 그곳에 4일 안에 도착해야만 했던 현재는, 그 두 다리로 열심히 달린 결과 3일하고도 반 나절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에 황녀의 마차를 습격한 괴한들을 물리치는 사건을 겪고도 그랬다.
내일 출항하는 상선의 담당자에게 파리안이 써준 서신을 전달한 후, 출발까지 한 나절 반의 유예가 남아 현재와 미아는 관광을 하기로 했다.
카디악의 옆을 흐르는 거대 운하는 상선들이 오갈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깊어 흡사 한강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도시 안쪽으로 새끼 수로들이 잔뜩 파여있어 나룻배 따위를 통해 물건을 나를 수 있었다.
해가 떠있는 오전 중에는 이런저런 물자들이 오고 가느라 복잡한 수로지만, 저녁 쯤에는 오가는 이 없어 텅 비기 마련이었다.
운치 좋은 도시 내부의 수로임에도 관광객들이 감히 배를 띄울 수 없는 이유는 어두운 밤이 야습을 당하기 딱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야습 따위가 두렵지 않았으니, 나룻배 하나를 빌려 작은 등불 하나를 켜놓고서는 수로 위 유람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