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오늘은 내가 요리사
* * *
호텔 주방에는 정해진 거래처로부터 꾸준하게 식재료가 공급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가 재료 하나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번번치 못한 요리사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새벽 같이 시장에 나갔던 경험을 토대로 메스토크 시의 시장을 돌아다니며 훌륭한 재료들을 골라냈다.
지구와 매우 닮은 세계에 똑같은 생물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막 이세계에 떨어졌을 때는 은총도 없고 돈도 없어 그 축복을 누릴 수 없었으나, 이렇게 힘이 생기고 보니 그 모든 게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돼지도 소도 없는 세계였다면 얼마나 어색했을까.
그렇게 재료를 사모으는 현재 옆에는 파리안이, 살짝 뒤에는 미아가 따라오고 있었다.
"이게 좋은 사과를 고르는 방법이야."
현재는 때때로 파리안의 질문에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 대답해주었다. 파리안의 화술에는 상대를 우쭐하게 만들어 필요 이상의 말을 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현재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뭐 대단한 걸 캐묻는 것도 아니니 기꺼이 그 대화의 기술에 넘어가 주었다.
"오늘 정말 많은 걸 배우네요."
"아버지가 길드장인 부길드장 아가씨가 주방에 설 일은 없겠지만."
"꼭 그렇게 짓궂게 얘기해야 하나요?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그를 위해 요리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초보자가 주방에 서는 것보다 좋은 맛집을 찾아가는 게 훨씬 낫다고 보는데. 칼질 하나만 해도 익숙해지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이야."
"낭만이 없네요. 정말."
"그런 소리 자주 들었어."
뻔뻔스런 현재의 대답에 파리안과 현재 모두 웃음이 터졌다. 웃지 못하는 건 미아 뿐이었다. 현재는 뒤늦게 완전히 어두워진 미아의 얼굴 표정을 발견했다.
"피곤해? 그럼 숙소에 가서 쉬어."
"아니야. 별로 안 피곤해."
"관심 없는 데 따라다니느라 재미 없지 않아? 차라리 관광이라도 다니는 건 어때. 그리 오래 있을 도시도 아니잖아."
"나도,"
"?"
미아는 우물쭈물거리다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나도 언젠가 마음에 드는 남자한테 요리해줄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냐."
미아도 그런 생각을 하는 건가. 그건 너무 미아와는 어울리지 않고, 또 한 편으로는 심각하게 잘 어울려서 현재는 앞치마를 두른 미아의 모습을 상상하고 얼굴을 붉혔다.
'이 일이 끝나면, 다른 남자와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녀석은.'
3년이나 같이 살았음에도 그러한 낌새가 없었던 걸 보아 구체적인 대상이야 없겠지만은, 그렇다 해도 미아가 누군가 다른 남자와 알콩달콩 사귀거나 결혼한다는 상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것만으로 기분이 나쁘고 열이 올랐다. 그래서 현재는 퉁명스레 말을 했다.
"그 남자는 다른 남자한테 요리를 배웠다고 하면 질색하고 싫어할걸? 굳이 배우고 싶다면 여자 스승을 찾아보는 게 어때?"
"그게,"
그 남자가 너야. 미아는 그리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 3년간 현재를 대해온 태도는 어딜 봐도 사랑에 빠진 소녀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차라리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모를까. 그리고 자신이 품은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는 미아 자신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연민을, 동정을, 이 세상에 버려진 이방인이요 고아가 된 현재에게서 가엾음을 느껴 그렇게 대한 것 뿐이 아닌지, 그따위 것도 사랑이요 애정이라 이름 붙여도 되는 것인지 미아는 알 수 없었다. 그래, 사랑은 분명 훨씬 달콤하고 몽글몽글한 것이리라. 그러니까 이런 삐죽하고 울퉁불퉁한 감정이 사랑일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미아는 뭐라 더 말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에 걸린 말을 도로 뱃속으로 삼켰다.
"그런가."
그래서 그런 어정쩡한 대답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나, 피곤한가 보다. 네 말대로 숙소에 돌아갈게."
미아는 그리 말하고 터벅터벅 걸어 짐을 두고 온 여관으로 향했다.
"어서 가죠? 빨리 현재 씨 요리 먹어보고 싶단 말이에요."
파리안이 현재의 팔에다 팔짱을 꼈다. 커다란 가슴이 팔뚝 옆에 짓눌리며 부드러운 느낌이 났다. 아마 첫경험을 하기 전의 현재였다면 거의 기절을 했으리라. 그리고 첫경험을 마친지 한참 된 지금도 그 감촉은 꽤나 황홀했다. 대놓고 유혹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넘어가버릴 정도로.
* * *
요리 대회, 아니 경합의 날이 왔다. 파리안의 입맛을 사로잡은 현재는 그녀의 대리인으로서 그녀의 아버지가 고른 요리사인 레스토랑 푸른 달의 주방장과 요리 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이 도시에 도착한지 겨우 나흘 만의 일이었다.
그동안 현재는 재료를 모으고 식탁에 올릴 음식들을 구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여신과의 계약에 얽매인 몸, 어쩌면 일 년 후에는 힘이 다하여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지만, 또한 그래도 후회하지 않기 위해 즐길 것은 다 즐기고 갈 셈이었다.
그가 서울에 살 때의 꿈이었던 요리사, 이곳에서 그 꿈을 이루고 가기 위해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이제는 승부의 때였다.
광장에 차려진 특설 무대, 이백 명이 넘는 관객이 자리를 차지한 가운데 요리 대회가 시작되었다. 비록 원시적인 이동식 화로와 조리대가 설치된 모습이었지만 그 열기 만큼은 결코 지구의 요리 대회에 떨어지지 않았다.
"흥, 요리사가 아니라 꼭 힘 깨나 쓰는 건달 같은 놈을 데려다 놨구나. 혹시 요리 승부에서 지면 칼부림이라도 하려는 것이냐?"
"상인이 겉모습에 심취해 본질을 보지 못하다니. 부끄러운 줄 아세요. 현재는 실력 있는 요리사니까요."
아니, 실은 훨씬 더 뜨거운 열기가 몰아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한 요리 경합이 아니요, 아버지와 딸 그리고 도시 최대 규모 상업 길드의 길드장과 부길드장이 앞으로의 경영방침을 두고 벌이는 자존심 싸움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누가 옳은지 증명해보자꾸나!'
'좋아요. 근데 설마 말로만 증명이 어쩌니 하는 건 아니시겠죠? 우리는 상인, 승부를 내려면 계약서부터 써야 하지 않겠어요?'
'좋아. 내가 이기면 너는 내 말을 아주 잘 들어야 할 거야.'
'제가 이기면 아버지도 제 말을 아주 잘 들어야 할 거에요.'
그 결과는 향후 길드의 운영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었다. 그런 이면의 계약이 존재함을 현재는 이미 파리안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 중요한 싸움을 처음 만난 사람에게 대뜸 부탁하는 파리안은, 뭐랄까 너무 파격적이어서 현재도 좀 놀랄 정도였다.
'그래서 재미 있어. 매력적이야.'
현재는 표정으로 응원하는 파리안을 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거인이 별명일 정도로 큰 덩치에 근육질인 사내가 그러고 있으니, 다른 관중들이 보기엔 흉악하게 밖에 보이지 않는 미소였지만. 파리안은 마주 웃었다.
"길드장 측! 레스토랑 푸른 달의 주방장이며 도시 최고로 명성을 떨치는, 쉐프! 아! 비! 앙!"
"와아아아아!"
사회자의 소개에 관객의 대부분을 차지한 길드원들 중, 길드장을 지지하는 이들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부길드장 측! 아르젠타에서 찾아온 수수께끼의 요리사, 그러나 아가씨의 입맛을 사로잡은 남자! 유! 현! 재!"
"와아아아아아!"
이번 호응도 결코 이전 아비앙에게 쏟아진 호응에 뒤지지 않았다. 물론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 대부분인 현재를 믿고서 소리 지르는 건 아니었다. 그냥 길드장 지지 세력 만큼이나 부길드장 지지 세력 또한 커다랬기 때문에 질 수 없어서 지르고 본 것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두 사람의 자존심을 건 요리 대결을, 이제, 시작 하겠습니다아아아아아!"
마이크도 스피커도 없는 세계에 종이를 말아 만든 원시적인 확성기를 들고 사회자는 힘차게 소리질렀다. 그리고 관객이 그에 맞춰 박수를 치고 호응을 했다. 열기 하나만은 확실한 광경이었다. 현재는 그게 썩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시작되는 요리, 당연히 시선을 잔뜩 끄는 것은 현재였다. 아비앙의 요리는 '고급'스럽다고는 하나 모두 이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요리법. 그러나 현재가 벌이는 기행은 요리가 맞는지 모두가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볼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아아! 저것은 대체 무얼 하는 걸까요? 화재가 난 건 아닐까요? 소방 전문가를 불러와야 하는 것이 아닌지!"
"괜찮아. 두고 보기나 해."
호들갑 떠는 사회자를 파리안이 진정시켰다. 냄비 위에 치솟는 화려한 불. 모르고 보면 요리 도중에 실수로 불이 난 게 아닌가 싶을 수도 있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의도된 것이었다. 플람베, 알코올을 기화시켜 술의 향만을 요리에 남기는 기법이었다. 타오르는 불꽃의 화려함에 손님들에게 시각적 만족을 주는 부가적 효과도 있었다.
현재는 플람베를 통해 레드 와인 소스를 졸여냈다. 스테이크에 끼얹기 위한 소스였는데 그 화려한 불꽃에 관중들의 이목을 처음부터 다 끌어들였다.
"저게 제대로 된 요리법일 리 없어! 그냥 겉멋이겠지!"
현재가 뭐라 한 것도 아니건만 푸른 달의 주방장 아비앙은 적대적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가 만들고 있는 것은 보편적인 구이 요리로, 그러나 얼음 창고에서 건식 숙성을 하였기에 육향이 깊은 최고급 재료를 쓰는 것이었다.
그가 신봉하는 것은 고급 재료와 비싼 향신료, 귀족적인 입맛을 맞춘다면 다른 모든 것은 의미가 없다 생각했다.
'저 뜨내기가 도시에 온 건 일주일도 안 지났다고 들었어. 제대로 된 숙성육을 구했을 리가 없지. 기껏해야 정육점에서 어설프게 보관한 고기 밖에는 못 샀을 거다. 그러니까 내 승리가 확실해.'
아비앙은 자신에게 최면을 걸 듯 스스로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그렇게 요리가 진행되고 약속된 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소란이 일었다. 많은 호위 병력을 대동한 채 아주 높으신 분이 등장하셨기 때문이었다.
카르데아 백작. 이웃 도시인 루센의 영주이자 광활한 카르데아 평야의 적법한 지배자인 노년의 귀족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이 경합의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리한 이상 심사위원 전부는 그와 뜻을 함께할 것이라 보면 되었다. 감히 백작과 다른 의견을 내놓을 얼간이는 없을 테니까. 귀족이란 그런 것이었다. 인간인 주제에 매우 당연하게도 자신이 평민들과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존재. 주변인들은 당연하다는 듯 그 눈치를 보고 복종할 수 밖에 없는 존재.
길드장이 손을 쓴 것이었다. 공평을 기하기 위해 각각 둘, 셋의 심사위원을 데려오기로 하였는데, 동전 던지기에서 이긴 부길드장 파리안이 셋의 심사위원을 데려왔다. 그러나 길드장이 카르데아 백작을 데려온 이상, 그 백작이 곧 하나 뿐인 심사위원이라고 보면 되었다.
게다가 카르데아 백작은 지극히 귀족적인 인물, 귀족 사이에서 대유행인 향신료 범벅 요리가 익숙할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아비앙의 손을 들어주리라고 길드장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딸과 의견이 갈린 부분은 귀족적인 것이 옳으냐 귀족적이지 않은 것이 옳으냐의 싸움. 그러니 딸이 고른 요리란 절대로 귀족적이지 않을 것. 그러나 심사위원이 귀족이라면 결국 귀족적인 것이 승리할 테고, 만에 하나 그 딸조차 귀족적인 것을 준비했다면 그녀는 명분을 잃어 패배하게 될 터.
자신의 계획엔 어떠한 빈틈도 없다고 길드장은 자신했다.
'이런 건 계획에 없었는데.'
그리고 그 때문에 파리안은 당황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무슨 수를 쓰리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설마 백작을 불러왔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귀족의 엉덩이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 몸을 움직였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렀을 것. 아버지가 대체 무얼 바치고 저 노인을 데리고 왔는지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답네.'
그녀의 아버지가 허투루 도시 최고의 상업 길드 길드장이 된 것이 아니었다. 적대하는 자라면 그게 딸이라고 해도 철저히 짓밟는다. 반드시 이기는 확실한 수를 골라서. 그것이 바로 그녀의 아버지가 살아온 방식이다.
'이러면 정말 기적이 일어나주길 바라는 수 밖에 없겠는걸?'
파리안은 현재를 보았다. 그의 요리 솜씨는 만난 첫날에 바로 확실히 확인했다. 하지만 그게 귀족조차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날 모든 걸 보여준 건 아니라고 말했지만, 겨우 사흘이 더 지났을 뿐이다. 그 사이에 뭐가 얼마나 바뀔 수 있었을까. 바뀐 부분이 많아야, 아주 많아야 할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승부에서 패배하고 말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