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순애조교 위강력간물-18화 (18/119)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오늘은 내가 요리사

* * *

치렁거리는 드레스는 윗가슴부터 어깨와 목까지 모두 드러나 있어 상당한 눈요기가 되었다. 아가씨의 가슴이 풍만하여 특히 그랬다. 딱 주무르기 좋을 정도로 적당히 살이 오른 몸은 군살 하나 없이 마르고 탄탄한 미아의 몸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매력이 있었다.

진하고 풍성한 파란 빛깔의 머리카락은 물결처럼 굽이치며 허리까지 내려왔고, 호박 같이 선명한 주홍색 눈동자가 시선을 끌어당기며 빛났다.

자신의 가치를 안다는 듯이 당당한 표정과 왼눈 아래에 눈물점이 찍힌 화장한 얼굴은 매혹적이면서도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었다. 상당히 서양스러운 미인이었다. 이 세계에 동서양의 개념은 딱히 없지만.

"누구쇼?"

"파리안이에요. 백금화 자루 길드의 부길드장이랍니다."

그녀의 발언에는 넘치는 자부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웃기는 이름이네.'

현재가 듣기에는 상당히 웃기는 길드 이름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길드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행객이죠? 요리사인가요? 생긴 건 꼭 깡패 불량배 같이 생겼는데."

"그러는 그쪽은 꼭 홍등가 에이스처럼 생겼는데?"

무례함엔 더한 무례함으로. 현재는 곱게 자란 아가씨처럼 생긴 파리안이 울거나 화를 내거나 싸대기를 날릴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왜 무례한 인간들은 자기도 무례하게 대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의외로 파리안은 현재의 말을 웃어넘겼다.

"그건 매력적이란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죠? 칭찬 고마워요,"

그녀는 정말로 그 모욕이 신경 쓰이지 않는 듯,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이걸 칭찬으로 듣는 사람은 처음이네."

"깡패 같이 생겼다는 것도 칭찬이에요. 듬직하다는 뜻이잖아요? 막, 다 때려잡을 것 같은."

휙휙, 파리안은 뜬금 없이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섀도우 복싱을 하면서 말했다.

'이 세상 사고 방식이 아니다.'

한국에서 온 현재는 이 세계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적응하느라 한참이 걸렸지만, 개중에서도 파리안은 다시 한 차원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이었다. 현재는 그 독특함에 낯설음과 함께, 묘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긍정적인 거야? 아님 바보인 거야?"

"상행을 하다 보면 끔찍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 말 하나하나에 다 슬퍼하다간 눈물을 너무 빼서 탈수로 죽어버릴 걸요?"

상행이란 무역을 뜻하는 것이겠지. 듣자하니 백금화 자루는 상인들의 길드인 모양이었다. 과연, 듣고 보니 길드 이름부터가 돈이랑 깊은 관련이 있었다.

"아무튼, 진짜 메스토크의 요리가 맛보고 싶다면 지금 바로 푸른 달 레스토랑에 방문하세요."

"부길드장이니 어쩌니 하더니, 하려던 건 결국 호객이었어?"

"아니요, 뒷 얘기가 더 있지만, 관계자가 아니면 알려드릴 수 없네요. 진짜 실력 있는 요리사라고 생각되면 그때 말해드릴게요."

무슨 이야기이길래 진짜 요리사를 찾는다는 걸까. 현재는 지구에서부터 유일하게 지켜온 요리사의 정체성으로 인해 파리안의 이야기에 큰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푸른 달 레스토랑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 레스토랑은 어디 있는데?"

"그리 멀진 않아요. 7번가의 중앙이고 물새 광장 옆인데, 여행객이시라 지리는 잘 모르시려나? 이쪽 가도를 따라 쭉 걷다가 커다란 5층 여관 건물 옆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또 조금, 그러면서 왼쪽 길을 유심히 살피면 커다란 새 동상이 보일 텐데 그때 골목을 지나 광장으로 나오면 돼죠. 아니면 제가 직접 안내해드릴까요?"

그런 현재의 오른팔을 작은 손이 잡았다. 미아였다.

"나, 진짜 배불러서 아무 것도 더 못 먹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러면 넌 적당히 구경하고 여관에 들어가 있어."

미아는 무언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야, 나도 따라갈래."

"그러든가."

두 사람은 새로 합류한 파리안을 따라 길을 걸었다. 그리 멀지 않다는 말과 달리 10분은 넘게 걸어야만 했다. 물론 그리 빠르지 않은 파리안의 보폭에 맞춰준 탓도 있지만. 새로 만난 도시의 거리 풍경을 보며 산책하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았기에 현재는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푸른 달 레스토랑은 현재가 이 세계에 와서 본 가장 화려한 건물이었는데, 샹들리에란 개념이 이곳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여기 와서야 깨달았다. 물론 전기가 없는 것은 똑같았으므로 촛불을 담는 샹들리에였다.

대리석 바닥과 은제 식기, 샹들리에와 흑단목 테이블, 모든 것이 고급품인지라 여기 황제가 와서 식사를 한다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가지 씌우려는 건가?'

현재는 파리안이 뭘 믿고 자신을 여기에 데려온 건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거지 꼴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 가게에 값을 치를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 보인다고 생각치도 않았는데.

'영 아니다 싶으면 안 내고 튈 거지만.'

현재는 법도 도덕도 잃어버렸다. 서울의 요리사이자 준법시민 유현재는 죽었다. 지금 여기 있는 건 충분히 큰 힘에는 아무런 책임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한 이피아 대륙의 모험가 현재 뿐. 거슬린다면 부수고 수 틀리면 다 죽여버릴 생각이 가득이었다.

이후 요리가 나왔다. 에피타이저니 뭐니 순서를 지킨 코스 요리는 아니었다. 이 세계의 식당은 모두 옛 한국과도 같이 모든 요리를 한 번에 올리는 한상 차림을 했다.

송어 스테이크와 소고기를 양념에 재워 튀긴 것, 송이가 들어간 크림 수프와 연어알이 들어간 샐러드, 꿩 요리, 육해공을 망라하는 진수성찬은 단 한 명을 위한 요리라기엔 너무 많았다. 현재는 그 요리를 입에 넣었다.

'후추가 너무 과해.'

향신료는 비싸고 비싼 것은 귀한 것, 그렇기에 이 세계의 고급 요리란 향신료로 범벅을 만든 것이었다. 당연히 맵고 짜서 그렇게 훌륭한 요리는 아니었다. 그나마 다른 곳들보다 신선한 재료를 썼기에 재료 본연의 맛은 좋았다는 게 위안일까.

'사치에 너무 집중해서 정작 맛을 잃어버렸어. 본말전도지. 얼빠진 귀족 요리구나.'

이런 게 이 도시 최고의 요리라면 실망할 수 밖에 없으리라. 그래서 현재는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맛을 위한 요리가 아니라 많은 돈을 과시하기 위한 요리. 무조건 많은 향신료와 비싼 재료를 넣는 게 목적이기에 요리사의 실력이 관여할 여지도 거의 없어. 그런 요리가 마음에 들면 요리사 실격이지."

이제 와서는 귀한 흑단목 테이블과 대리석 바닥, 별처럼 하늘을 수놓은 샹들리에조차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호텔 주방에 있었던 것은 요리 기술을 배워 언젠가 서민을 위한 레스토랑을 차리기 위해서였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단순히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며 가졌던 요리사의 꿈이, 어쩌다 보니 진짜 자기 직업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기왕이면 많은 사람에게 싸고 맛있는 요리를 먹을 수 있게 해주자. 서울에 살던 현재는 그런 꿈이 있는 청년이었다.

이젠 다 손에 쥘 수 없는 신기루요 허깨비가 되었지만, 그 모든 기억과 추억을 다 잃어버린 건 아니었다.

"그래, 도시의 맛은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고 입에 댈 수 있는 길거리 음식에 있는 거야. 이런 부르주아 밖에는 찾을 수 없는 식당에서 자기들의 재력이나 뽐내기 위해 만드는 요리가 진짜 이 도시의 요리라고? 그럴 리가 없지. 이런 걸 진심으로 추천한 거라면 정말 엄청나게 실망인데?"

"그래요.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의 말에 파리안이 반색했다. 그리고 매우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마구 끄덕거렸다.

"뭐?"

"이 짜고 맵기만 한 요리는 얼마나 돈이 많은지 과시하기 위한 것 뿐이죠. 이건 진짜 요리가 아니에요. 진짜 요리는 맛이 있어야 한다고요!"

그녀의 목소리는 컸고 흥분으로 가득 차있었다.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 아 그러니까 우리 길드장 님은 상인으로서의 본분을 잊고 이상한 사치의 길에 빠져들었어요. 그래봤자 평민이란 사실이 바뀌는 게 아닌데, 귀족들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요? 귀족이 하는 건 꼭 해야 한다면서 왜 그러는지 무슨 의도인지 충분히 생각치도 않고 무조건 마냥 따라하기만 계속 하고 있죠. 이 레스토랑도 그런 아버지의 취향을 듬뿍 담아 세운 것이고요."

현재는 굉장히 의아했으나 곧 이 식당에 데려온 것이 파리안이 그를 시험해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시험을 훌륭하게 통과한 모양이었다.

"무릇 상인이란 실리에 밝아야 하는 법, 이런 허영만 가득한 아버지 아니 길드장 님의 방침은 절대 인정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이번 요리 대회에서 반드시 아버지의 콧대를 꺾어줘야만 해요."

"실용을 따지는 사람 치고는 복장이 너무 화려하지 않나? 생활하기 굉장히 불편해 보이는데."

현재의 지적에 파리안은 매우 당당하게도 답했다.

"아니요, 움직이기 불편해서 얻는 손해보다 남자들에게 사는 호감이 훨씬 큰 걸요.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나요? 저는 굉장히 매력적이니까."

자기가 예쁜 걸 아는 여자란 상당히 불편한 족속이라고 현재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정도까지 당당하고 털털하면 반 바퀴 마저 돌아 호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파리안은 스스로 자신한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렇긴 하네."

현재가 작게 웃었다. 그 사이 두 사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음식엔 손도 안 대고 구경만 하고 있던 미아가 어금니를 살금살금 갈고 있었다는 것을 현재는 눈치 채지 못했다. 워낙 말 하나 없이 조용히 있었기에 잠시 그 존재를 잊어버린 것이었다.

'매력적이니 뭐니, 그런 소리 나한테는 한 번도 한 적 없으면서.'

미아가 현재에게 들은 소리라고는 엉덩이가 예쁘네 몸이 야하네 하는 성희롱 발언들 뿐이었다. 이전에는 워낙 원수 같은 사이라서 말을 거는 일 자체가 거의 없었고, 지금이라 해도 연인 분위기나 알콩달콩한 말 따위가 오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여태까지 그런 걸 신경 쓰지는 않았는데, 어느 여자를 상대로든 현재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일 자체가 없었는데, 어째서 저런 처음 만난 여자하고는 죽이 착착 맞고 서로 말이 잘 통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런 여자가 취향인가? 살, 찌워야 하나? 아니면 화장? 옷? 나한테 부족한 게 뭐지? 내가 못 생겼나?'

미아는 뒤늦게 자신이 현재의 연인이라도 되는 양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그런 관계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현재는 그렇게 날 미워하고 원망하는데, 이제 와서 그런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리가. 나는 그냥 계속 속죄해야 하고, 현재는 날 미워하고 싫어해서 괴롭힐 뿐이고. 그거고.'

그렇지만 그럼에도 다른 여자에게 잘해주는 현재 따위는 보고 싶지 않다. 우울했다. 미아는 또다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그런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속에 다시 삼키느라 애썼다.

'그래,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죄인이야.'

미아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갔다. 그녀는 표정을 현재와 파리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현재는 파리안과 떠드느라 이쪽은 거들떠도 안 봤다.

'진짜 싫어.'

싫은 게 현재였는지 자신이었는지 파리안이라는 여자였는지, 그 대상조차 명확히 하지 못한 채로 미아는 그냥 싫어했다. 기분 나빴다.

"그래서, 당신의 요리, 직접 보여줄 수 있어요?"

그 사이 파리안은 진도를 팍팍 나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파리안은 그저 요리 대회에 나가 제 아버지 콧대를 꺾어줄 요리사를 구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미아는 왜인지 파리안이 현재를 꼬시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에 차있었다.

파리안이 벌이는 모든 일과 하는 행동 뱉는 말 하나하나가 전부 현재에게 던지는 추파요 유혹인 것 같았다. 그녀 자신은 절대 그럴 수 없었기에 그게 원망스러우면서도 부럽기까지 했다.

"요리야 언제나 보여줄 수 있지만, 주방은 있어?"

"괜찮아요. 저희 집 주방은 아주 훌륭하거든요. 원하는 요리 도구는 다 있을 걸요? 괜히 상업 길드의 부길드장이 아니랍니다."

"그건 요리사 길드에서 할 말 같은데."

"아버지가 이런 레스토랑을 세운 걸 보면 아시겠지만, 이 도시의 요리 길드는 저희 백금화 자루의 부속 길드거든요."

"덩치가 크다고 자랑하는 거군."

"그래요. 당신이 정말 훌륭한 요리사라고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면, 저는 아주 큰 보상을 드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 가치를 증명해 주세요."

'재밌겠어.'

그동안 미아의 집 주방이나 지켰을 뿐, 제대로 된 식당에 요리를 내본 적은 없었던 현재였다. 그는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녹슬었는지, 이 세계에도 통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 한 번 해보자고."

그래서 그는 파리안의 놀이에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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