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오늘밤 12시 10연참 @@@@@오늘밤 12시 10연참 @@@@@오늘밤 12시 10연참 @@@@@오늘밤 12시 10연참 @@@@@오늘밤 12시 10연참 @@@@@오늘밤 12시 10연참 @@@@@오늘밤 12시 10연참 @@@@@오늘밤 12시 10연참 @@@@@오늘밤 12시 10연참 @@@@@
아르젠타의 영웅
* * *
"들어와. 선공을 양보해줄게."
현재가 손을 까딱이며 경비병을 도발했다. 기세 좋은 신입이 현재를 향해 덤벼들었다. 현재는 몸을 돌리며 긴 다리를 활용해 신입을 차냈다.
사람이 난다. 마치 길거리의 돌멩이를 찬 것처럼. 신입은 먼 거리를 날아 그가 작게 보일 정도의 거리에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말도 안돼."
"끼야아아악!"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구경꾼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건 더이상 안전한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그들을 덮쳐드는 실존하는 위협이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이제서야 이게 위험하다고 깨달은 거냐. 병신 같은 놈들.'
현재가 가장 증오하는 건 빵집 주인의 딸과 그 아비였지만, 그렇다고 이 도시가 전혀 상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누명을 씌운 것은 빵집 부녀였지만 돌을 던진 것은 지나가던 행인들. 현재는 그 얼굴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있었으나 전부 찾아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야말로 지나가던 행인들이었기에.
그렇다면 전부 불사르면 된다. 도시 전부를 불사르면 그들을 남김 없이 징벌할 수 있다.
'망설임 같은 건 없어.'
무고한 사람? 당연히 있겠지. 그런데 어쩌라고? 현재가 무고하고 억울할 때에 강한 자들은 사정을 봐주면서 괴롭혔던가? 누가 구해주러 오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다들 숨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업보가 돌아올 뿐인 거다. 방관자 또한 공범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지금부터 이 도시를 다 태워버릴 거야. 그러니까 막고 싶으면 막아봐. 무슨 수를 쓰든 좋아."
현재는 자신의 힘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다. 도시에서 가장 강한 미아를 발 아래에 깔고 짓밟을 수 있는 힘, 그 힘에 한 점의 의구심도 가지지 않았다.
'아끼다가 놓치고 또 사라질 힘이라면, 지금 쓸 수 있는 만큼 실컷 써서 즐기는 것이 좋겠지.'
그가 즐기는 것, 그가 지금 가장 간절히 갈망하는 것은 복수였다. 그의 안에서 날뛰는 괴물을 멈출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자신조차도.
현재는 기름 가게를 오가며 도시에 발라줄 방화 용품을 열심히 날랐다. 그 사이 착실하게 자라난 불은 아버지의 뜻대로 몸집을 불리며 어느새 다섯 개가 넘는 건물을 태우고 있었다.
이런 소란을 일으켰으니 모인 경비병의 수가 늘어났어야 할 텐데, 오히려 그 수는 줄어들어 있었다. 현재의 압도적 무위에 겁을 먹은 이들이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 남은 이들도 도시에 대한 애착과 조금 남은 의무감으로 겨우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현재에게 달려들 만한 용기는 없었다.
대들면 죽을 걸 알면서도 기다린 주제에, 덤벼들 용기는 없다니? 그것은 지극한 모순이었으나, 이 압도적인 악의 앞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침착한 경비병은 존재하지 않았다.
현재는 압도적이었다. 범접할 수 없었다. 그런 그를 막으려 시도할 수 있는 이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대단한 용기 혹은 그 이상의 어리석음이 필요한 일이었다. 결과가 반드시 필패이므로 용기 또한 어리석음과 같은 말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도시를 불사르는 현재 앞에 소녀가 나타나 섰다.
"……그만해."
미아는 여태까지 중 가장 처량한 목소리와 비참한 몸짓으로 그렇게 말했다.
"미아 님!"
"미아 님, 제발 저 자를 막아주세요!"
경비병들은 환호하듯 애원하듯 미아를 향해 소리질렀다. 그들이 아는 미아는 기품 있었고 고귀했으며 선량하고 또 강했다. 그야말로 도시의 영웅이었다. 저런 나쁜 방화범 따위는 단숨에 해치워줄 것으로 믿었다.
털썩.
그러나 미아는 검을 뽑는 대신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박으며 절을 했다.
"미아 님?"
"뭐, 뭐야. 이딴 거 현실이 아니야. 다 꿈일 거야. 꿈이야! 그렇지? 어?"
경비병들은 이 낯선 상황에, 또 끔찍한 분위기에 이게 현실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였다. 그들의 영웅은 싸워보기도 전에 무릎 꿇었다. 이미 진작에 싸우고선 압도적으로 패배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그들이었다.
"하라는 건 뭐든지 할게. 그러니까 그만 멈춰줘. 부디, 제발 멈춰주세요."
미아는 도시를 위해 무릎 꿇고 절을 하고선 부탁을 했다. 현재는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딴 도시에, 이딴 잔인하고 미개한 도시에 왜 그렇게 애착을 가지고 있는 거냐고.
"거짓말 하지 마. 뭐든지가 뭐든지가 아니잖아? 내가 '도시의 인간들을 학살해'라고 시키면 따르지 않을 거잖아?"
"……실언했습니다."
현재의 말에 미아는 꿋꿋하게 납작 엎드린 저자세를 유지했다. 부디 그 비굴함에 조금이라도 현재의 마음이 움직이기를 기도하면서.
"사람들을 해치지 않는 일이라면 뭐든 할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주세요."
현재는 기분이 너무 많이 나빴다. 자신에게 애정을 느꼈다면 이 도시 따위보단 자신의 기분을 더 맞춰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저 꼴은 뭔가. 꼭 악당에게서 도시를 구해내려는 히어로인 척을 하잖아. 아니, 히로인이었던가?
"이 도시가 너의 뭔데?"
현재의 물음에 미아는 조금 느리게 답했다.
"살아온 곳, 살아갈 곳, 내가 사랑하는 곳."
이방인인 현재와 다르게, 미아는 이 땅에 뿌리를 내렸다.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하고 아껴주고 찬미하고 때로는 의지하고 부탁하고 돌봐주고 신경 써주는 그런 도시가 좋았다. 그런 관계가 있었다. 그런 유대를 쌓았다. 10년이 넘게 이 도시에 살면서 10년 가까이 이 도시를 위해 싸우면서 쌓아온 모든 것들이, 지금 한 남자에 의해 위협 받고 있었다.
"고개 들어."
현재의 말에 미아는 즉시 따랐다. 그 얼굴엔 울음기가 가득했다.
"일어나."
그 말에도 즉시 따랐다. 미아는 머뭇거리지 않고 일어섰다.
"이리 와."
현재는 손가락을 까딱였고, 미아는 현재 앞에 섰다. 빵집은 활활 잘도 타올라 매캐한 연기를 계속 뿜어대고 있었고, 이제 화재는 열 집을 넘는 곳으로 퍼져 있었다. 초기 진압을 하려면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됐다. 이제 곧 걷잡을 수 없는 큰불이 되고 만다.
그러나 현재는 아직 소방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불은 계속 타올랐다. 도시를 태우는 불꽃은 마찬가지로 미아의 가슴 속도 태우고 있었다. 그녀는 현재가 도시를 태우지 않기를 바랬다.
"후회하게 될 거야. 불이 휩쓸고 난 자리에는 잿더미 밖에 남지 않는걸. 거기엔 뿌듯함도 상쾌함도 온정도 없어. 아무 것도 없다고."
"글쎄. 잿더미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
"너는 아니야."
미아는 확신하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아니, 너는 날 몰라."
현재는 그 확신을 거부했다.
"그래서 너는 내가 지금 뭘할지도 모르지."
미아는 두려움에 떨었다. 압도적 강자인 현재의 말은 절대적이므로, 그가 무얼 원하든 진정으로 원한다면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벗어. 전부. 아무 것도 남기지 말고."
미아는 안도에 가까운 감정과, 그와 대비되는 수치심을 느꼈다. 겨우 그런 거라니. 하필 그런 거라니.
이 자리에 남아있는 경비병은 다섯.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수였다. 다 큰 처자가 함부로 알몸을 내보여도 될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현재의 명령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거부할 수는 없었다.
스르륵,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하나둘씩 옷들이 떨어지고 미아는 완전한 알몸이 되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가슴께와 은밀한 곳을 양손으로 하나씩 가리고 있었다.
"손 치워."
그러나 그 자그마한 저항조차 무산이 됐다. 현재의 명령에 그녀는 차렷 자세를 하고 온전한 알몸을 드러내야 했다.
숭고한 희생, 도시를 위해 그 몸을 다 바치고 있건만, 경비병들은 경외감을 느끼는 대신 드러난 아름다운 나신을 구석구석 눈에 담았다. 현재는 비웃었다.
"네가 지키려고 하는 것들은 저렇게나 짐승 같은 녀석들이야. 고귀한 희생? 오늘밤 딸감으로 쓰일 것이지. 그런데도 너는 저딴 것들을 지키고 싶어?"
"나는……,"
미아는 입을 열기를 망설였다. 입을 열어도 되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지키고 싶은 건 너야."
그 말에 현재는 곧장 미아의 목을 잡고 그 몸을 들어올렸다. 그의 손은 미아의 가는 목을 한손에 조르기에 충분히 컸다. 그가 미아를 높이 들어올리자 그녀의 발은 지상으로부터 반 미터 이상 떠올라 허공에서 축 늘어졌다.
"나를 이렇게 만든 게 너잖아! 네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약자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강자의 자비를 구걸하는 수 밖에 없다고, 미아가 그렇게 가르쳤다.
그것은 반대로, 강자는 약자들에게 얼마든지 마음 내키는대로 해도 된다고, 그런 뜻으로 해석되지 않는가?
……말도 안되는 억지인 것은 실은 현재 또한 알고 있었다.
"약해빠졌으면 하고 싶은 말도 참아! 소중한 게 망가지거든 구석에 찌그러져 슬퍼하고나 있어! 약한 주제에 강한 사람에게 훈계질이라니 너무 건방져!"
……하지만 이미 망가진 마음은 스스로는 고칠 수 없었다.
현재는 목을 쥔 손에 적당히 힘을 줬다. 목뼈가 부러지지는 않게, 하지만 숨을 쉴 수는 없게.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미아는 숨을 쉬지 못한 탓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네가 다 잘못했잖아! 네가 그렇게 나를 벽 끝까지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가끔은 의지해도 된다고 했으면! 슬플 때 달래줬으면! 따뜻하게 안아줬으면! 그럼 나도 이렇게까지 고장난 인간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너무 많이 가혹한 세계였다. 자신은 누구보다도 약한 채, 무엇 하나에 기댈 수 없고, 어디에도 정을 줄 수 없고, 유일하게 의지하는 이는 계속해서 자신을 몰아붙이며 화를 내고 몰아붙이며 꾸짖어댔다.
그것은 동그란 마음을 깎아 검으로 만드는 듯한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뭉텅 뭉텅 떨어져나간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잊어버려 이제는 찾을 수 없었다. 남은 것은 가시처럼 삐죽하기만 한, 검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형편 없는 형태의 조각난 마음 뿐이었다.
실패한 제련이었고 망가진 검형이었다. 너무나 부러지기 쉬운 파편 한 줄기가 남았을 뿐이었다. 오직 남을 찌르기 밖에는 할 수 없는 날카로운 마음.
미. 안. 해. 미. 안. 해.
숨을 쉬지 못해 말을 뱉을 수 없는 미아는 오직 혀와 입술만을 움직여 벙긋벙긋 그런 소리를 했다. 아니, 소리가 나지 않았으니 소리라는 표현은 옳지 않겠지. 그런 말을 전했다. 소리가 나지 않더라도 전하기 위해 애썼다.
현재는 목을 쥔 손을 놓았고 바닥에 떨어진 미아는 주저앉은 채 멎었던 호흡을 다시 재개시키느라 애를 썼다. 콜록거리는 기침과 헥헥 거리는 숨소리를 뿜어내면서.
호흡을 미처 다 정돈하지 못한 채로 그녀는 말했다.
"미안해, 흑. 나는 바보라서, 흐읍. 그런 방식 밖에는 몰라서, 흐읍……. 네가 다른 세계에서 온 섬세한 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그렇게 밖에 하지 못했어, 허억. 다 내 잘못이야. 다 내 잘못이니까, 나를 마음대로 해. 화가 풀릴 때까지 때려도 되고, 가지고 놀아도 좋아. 정말 어떤 걸 해도 좋다는 의미의 마음대로야."
'역시 이 애는 나름 날 위해서라고 그렇게 대했던 건가.'
주방의 선배였던 사내놈들이 저희가 저지른 부조리에 대해 '널 위해서였다'는 그런 소리를 했다면 참지 못하고 패죽였을 것이었다. 하지만 미아는 작고 귀여운 소녀고, 섞었던 몸이 매우 부드럽고 따스했다. 그리고 현재도 사실은 어렴풋이 그렇다고 느끼고 있었기에, 그래서 용서가 되었다. 마음의 상처가 낫는 데에는 오래 걸리겠지만, 그렇다 해도. 조금은 화를 풀 수 있었다. 흉터를 씻어낼 수 있었다.
"지금 한 말 똑바로 지켜."
"응."
현재의 말에 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뭘 멍하니 서있어? 빨리 가서 불이나 꺼."
현재는 경비들에게 소리쳐 명령하고는 미아의 옷을 주워 도로 입히고선 길을 걸었다. 돌아가는 것이었다. 집으로. 미아의 집으로. 그녀와 현재가 쭉 살아왔던 집으로.
더는 이 도시에 살 수 없게 될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잠시나마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썩 나쁘지만은 않은 기분이었다. 완전한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지워지고, 조금이나마 이 세계의 주민이 된 느낌이었다.
'강간마에 방화범이지만 말이야.'
현재는 조용히 쓰게 미소지었다. 어차피 빚을 갚기 위해 끝없이 레벨을 올려야 하는 입장. 애초에 이 도시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그는 슬슬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에는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든 그를 기다리는 것은 싸움, 살육, 피와 검과 생명이 꺼져가는 광경들, 그렇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두렵지만은 않았다. 어느 작은 소녀에게서 싸우는 방법과 그에 걸맞는 마음가짐을 배웠기 때문에.
'그래, 이거면 된 거지.'
그는 미아를 용서하기로 했다. 어쩌면, 용서 이상의 마음을 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가 그 마음을 쉽게 인정하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