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아르젠타의 영웅
* * *
재판에서 현재의 무고함은 예상 외로 너무나도 쉽게 밝혀졌다. 빵집 딸내미가 금 목걸이를 샀는데 공교롭게도 그 가격이 딱 금화 세 닢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은 귀금속점 주인이 재판에 나와 증언했다.
"아니 이 녀석이!"
빵집 딸은 그 죄에 대한 대가로 꿀밤을 한 대 맞았다. 가정 내의 도둑질은 가장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는 허무함과 함께 서슬 퍼런 칼날처럼 울리는 분노를 느끼었다.
'나는 죽을 뻔한 죄가 저 계집애한테는 그냥 꿀밤 한 대로 넘어갈 일이라는 거지?'
안다. 가족은 그런 거다. 남이라면 서로 죽일 일이라도 말 몇 마디 매질 한 번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가족의 범위란 꽤나 확장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이 도시의 사람들은 서로 안면을 트고 대화를 나눠온 만큼 쌓아온 세월이 있어 어지간한 일은 자기네들의 식으로 해결하고는 했다. 현재는 두 달 가까이를 이곳에서 지내면서 그걸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가족도 이웃도 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는 여전히 동떨어진 이방인, 독특한 검은 머리와 거구를 지닌 '소문의 거인'일 뿐이었다. 그는 이 사회에 전혀 녹아들 수가 없었다. 한 달 간 빵집에서 성심성의껏 일해봤자 돌아오는 건 도둑이라는 의심과 행인들이 합세한 돌팔매질 뿐이었다.
"고마워."
그는 자신을 구해준 미아에게 감사했다. 이렇게 무고를 밝혀주지 않았다면 꼼짝 없이 빚이 늘어날 뻔 했다. 아니 애초에 거리에서 구해주지 않았다면 돌을 맞고 죽어버릴 뻔 했다.
그러나 미아는 그 작은 감사조차 똑바로 받지 않았다.
"아직 검과 방패 값을 안 갚았잖아. 그러니까 죽으면 곤란했을 뿐이야."
"……."
당연하지만 현재는 빵집 일을 그만뒀다. 그런 일을 겪고도 그 남자와 같은 주방에 서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염치 없는 부탁을 하나 했다.
"미아, 다시 너희 집에서 일할 수 있을까?"
"마음대로. 내 돈 떼먹고 도망 가지 못하게 감시할 수 있겠네."
그렇게 현재는 다시 미아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이전과는 달랐다.
'변해야 한다.'
다른 세계에 왔다면, 다른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안됐다. 물렁한 한국에서의 자신은 버려야 했다. 이 세계에 맞는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 변해야만 했다.
개 한 마리 마음대로 죽이지 못하는 나약한 자신은 버린다.
인간이 선의와 호의를 지녔으리라 믿는 어설픈 자신은 버린다.
은총이 없으니 그만큼 다른 것으로 메꿔야 했다. 신이 돕지 않는다면 자신이 자신을 돕는 수 밖에는 없었다.
현재는 이제 미아가 집에 빈둥거리는 시간에 운동을 하고 몸을 키웠다. 매일 넘치도록 음식을 주는 것은 사람들이 주는 선물이 처치곤란일 정도로 많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다.
몇 번을 던전을 가고, 그때마다 다른 이들에게 멸시를 당하면서, 그리고 어설픈 이들이 죽어나가는 꼴을 보면서 정신을 더 날카롭게 벼렸다.
터뜨릴 곳 없는 분노는 쌓여만 갔으나 결코 터뜨리지 않았다. 분노를 터뜨리면 약한 자신은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래야 했기에 참았다. 그렇게 서울 사람 유현재는 3년을 살아남았고, 조금은 이 세계에 걸맞는 인간이 되었다. 신의 은총을 받지 못한 것만은 여전한 채로.
* * *
초장부터 매우 불길한 던전이었다. 쉬웠다. 너무 쉬웠다. 쉽다는 건 방심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현재는 역으로 더욱 기감을 날카로이 세웠다. 3년의 세월은 주먹질 한 번 해본 적 없던 샌님을 베테랑 모험가로 만들기에 충분한 세월이었다. 아니면 전혀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고.
미아는 언젠가 모험가에 베테랑 따위는 없다고 자만하지 말라며 동료를 잔뜩 물어뜯은 일이 있었다. 왜냐하면 자만한 모험가는 당장 던전에 삼켜지기 때문에. 그날은 몇십 번의 던전 탐사를 모두 성공적으로 마쳤던 모험가 카르아가 죽은 날이었다.
'조금 띄워주면 저 꼴이지. 방심하다 훅 가는 거야. 너도 저렇게 되고 싶지 않다면 던전에 익숙해졌다는 자만 따위 당장 집어치워.'
동료를 잃고 우는 린네 앞에서 미아는 차가운 피가 흐르는 뱀과 같이 그렇게 말했다. 도무지 감정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건지 의심이 갈 지경인 발언에 현재는 새삼 감탄했다. 이런 악귀가 어떻게 도시에서는 그렇게 선량한 인품의 소녀를 연기하는지, 웃기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리고 오늘은 그 린네가 카르아를 따라간 참이었다. 아는 함정이라며 여유롭게 해체하고 나섰던 린네는 연계된 다른 함정에 의해 떨어지는 천장에 깔려 납작한 포가 되었다. 사람으로 포를 떴으니 인포라고 불러줘야 하나? 현재는 그런 농담을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돌아가지 않는 거야? 길잡이를 잃었잖아."
활 잘 쏘는 페리는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어두운 던전 안에서 동료 하나가 죽었다는 것이 그녀를 떨리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던전 탐사 경험 10회 미만의 신입 모험가였다. 그런 그녀가 동료의 죽음을 눈 앞에서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돌아갔다 다시 오면, 그 동안 주변 농가들이 피해를 보겠지."
"농부 놈들이야 죽든지 말든지! 얼마든지 다시 채울 수 있잖아! 나는 모험가야! 고급 인력이라고!"
"그래. 그렇담 다시 돌아가도 좋은데, 함정은 전부 기억하고 있어? 해체하지 않고 그냥 넘긴 것들이 꽤 되니까, 어설프게 기억을 되짚으며 가다가는 당할걸?"
"윽!"
"돌아가든지, 따라오든지, 잡지는 않을게."
미아는 그리 말하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현재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정말 안 돌아갈 거야? 윽! 같이 가!"
페리 또한 그 뒤를 따랐다. 그게 나은 선택인지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쁜 선택인 건 확실했다. 그녀는 반 착란 상태에서 전투를 벌이다 고블린의 독화살에 맞았고, 전투가 끝났을 때엔 이미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독이 퍼진 상태였다.
"싫어, 안돼, 추워, 죽고 싶지 않아……."
현재는 그녀의 장비와 소지품을 챙겨들기 시작했다.
"뭐야, 뺏어가지 마, 제발, 살려줘……."
그리고 싸늘하게 식어가는 페리를 뒤로 하고 다시 던전 안쪽으로 향했다. 당연히, 미아의 묵인 하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저승으로 떠날 여행객에게 많은 짐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보스룸의 앞에서 미아는 말했다.
"현재, 먼저 돌아가도록 해."
이제 이 세계에 익숙해진 현재는 힘의 논리를 완벽히 이해했다. 법보다 더 강력하고 또 가까운 그것을. 그러니까 이 세계에 익숙해진 현재는 알았다고 말하고 곧장 발을 돌려야 했다. 함정의 위치는 모두 외웠다. 던전의 지도를 통째로 외운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요령만 있으면 함정을 외우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늘 새로운 함정만 있는 것이 아니니, 차근차근 나아간다면 무사히 던전 입구까지 돌아갈 수 있겠지.
"돌아가라고?"
그런데 오늘따라 현재는 기행을 벌였다. 얌전히 물러나지 않고 미아에게 맞서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치 3년 전, 처음 던전에 와서 억울함을 토로했을 때처럼.
"그래."
소녀는 언제나와 같이 짤막한 대답, 냉정한 목소리. 설명은 사족이라는 듯한 감정을 도려낸 것 같은 태도.
"여기까지 얼마나 힘들게 왔는데 나는 그냥 돌아가라고?"
미아는 조그맣게 동요했으나 티를 내지는 않았다. 3년에 걸쳐 철저하게 마모된 현재가 더는 헛된 생각을 품지 않으리라 생각했건만, 이번에는 너무 많이 닳은 나머지 이상한 방향으로 감정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미아는 알아챘다. 현재가 반쯤은 죽고 싶어서 저런 말을 하는 거란 걸. 반항하면 다친다. 까딱하면 죽는다. 그 사실을 명백하게 이해하고서도 저런 선택을 했다는 것을.
그러나 모른 척을 했다.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인간의 마음을 모른다는 듯이. 그게 미아가 현재를 아끼는 방법이었다.
"보상이 신경 쓰이는 거야? 그런 건 어련히 챙겨줄 테니까 일단은 바깥에 나가 있어."
"싫어."
현재는 거부했다. 미아의 배려를. 그리고 강압을. 이 처지가 계속되는 것은 싫다고 분명히 말했다.
"요즘은 좀 조용하다 싶더니, 갑자기 왜 그래? 내 주먹 맛이 그리워졌어?"
그럼 미아가 꺼낼 대답은 하나 뿐이다. 철권. 말을 듣지 않는 이는 매로써 다스린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기보단 노예와 주인의 관계 같은 것이었다.
"보상을 혼자 다 챙길 셈이지? 너 혼자 확인하고 별 거 아니었다고 하면, 나는 뭐라 할 수도 없는 거니까. 그래서 혼자 열어보려는 거잖아?"
현재는 아직도 자유민 신분을 사지 못했다. 미아가 검과 방패 값을 먼저 빼앗아가는 바람에 수중에는 금화 열 닢이 채 안되는 돈이 겨우 남아있을 뿐이었다. 3년이 지나도 자유민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그의 마음에 어둠을 품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하아."
미아는 이미 주먹 외에 타협할 길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머뭇거리고 있었다. 파티원이 둘이나 죽어버렸으니 다소 동요하는 건 어쩔 수 없겠지. 어울리지 않게 그런 배려심을 발휘하면서.
"아무리 내가 짐꾼에 잡일꾼이라도 목숨 걸고 따라온 거야. 보수는 제대로 챙겨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네가 주는 보수는 너무 짜. 혼자 다 쳐먹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디까지 욕심 부리려는 거냐고."
미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현재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때려주는 것이 바른 길이었다. 그게 이 세계에 걸맞는 방식이니까.
"보수가 불만이면 도시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낮은 자세로 부탁을 했어야지. 이런 던전에서 둘만 있을 때 화를 낸다고 뭐가 될 거라 생각해? 그게 약자로서 올바른 자세야? 현재야. 내가 몇 번이나 가르쳐줬잖아. 약한 주제에 그러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하극상이라는 건, 싸워서 승산이 있을 때에나 허가되는 것이다. 이길 가능성이 단 하나도 없는데 역모를 일으키는 건 그냥 처형당하고 싶어 몸부림을 치는 것에 불과하다.
아니, 현재의 지금 행동은 실제로 죽고 싶어 벌이는 짓이기 때문에 일종의 자해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미아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3년이나 지났는데도 이곳에 적응하지 못했구나 싶어서.
"지금 무릎 꿇고 빌면 주먹 열 대로 봐줄게. 빌지 않으면 죽일 거야."
"좆까!"
최후 권고에도 상대는 항복을 하지 않고, 미아는 자신의 필요 없는 감정을 잘라냈다. 애착과 자비. 그런 것은 살아가는 데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감정들이었다.
"그게 대답이구나. 그럼 죽어."
3년간 성장한 소녀의 레벨은 무려 40. 도시 제일은 물론이고 제국에 강자로 이름을 떨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가 명성에 집착하지 않는지라 널리 퍼지지까지는 않았지만, 이 도시 근방에서 그녀를 모르는 이는 없을 정도였다.
십 미터 넘는 거리를 두 걸음에 좁혔다. 3년간 소녀의 키는 십 센치가 컸지만, 그렇다고 이해해주기에는 너무나 긴 도약 거리였다. 총알처럼 쏘아진 소녀는 현재가 검을 쥔 손을 차내고, 손뼈가 부러지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검을 놓치지 않은 채 반격하는 현재에게 잠깐 놀란 다음, 그럼에도 머뭇거리는 일 없이 현재의 가슴팍에 돌려차기를 날렸다.
거구가 난다. 마치 중력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190센치에 100키로를 넘는 거구가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추락. 천장에 쳐박히고 다시 바닥에 쳐박힌 현재는 끔찍한 소리로 신음하며 꿈틀거렸다. 꼭 몸의 일부를 밟힌 지렁이처럼.
"윽……, 으윽……, 그으윽……."
"정말 배운 게 없구나. 약한 자에게 살 길이란 바짝 엎드려 강자의 자비를 구걸하는 길 밖에는 없다는 것을. 3년이나 지나도 배우지 못하는 거야? 등신."
소녀는 그 말대로 실망했다. 이제 좀 적응하나 싶더니 못 견디고 저런 꼴이다. 그래서야 죽음 이외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데, 대체 왜 적응하지 못하는 건지. 소녀는 자신처럼 하지 못하는 현재가 너무 답답했다.
감정은 버리면 된다. 마음은 지우면 된다. 살아가는 데에 필요하지 않은 것은 전부 포기하는 게 맞다. 자존심이니 억울함이니 하는 그런 것들은 있어봤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특히 현재처럼 특출나게 약한 인간에게는.
현재는 어느 순간 움직이지 않았다. 미아는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죽일 생각으로 친 것은 아니었지만 죽을 수 있다고는 인지하고 있었다.
"이런 끝이 오지 않을까 싶기는 했지만, 이런 끝이 오지 않기를 바랬는데……."
왜 끝까지 마음을 버리지 못한 걸까.
'그런 면에 신경이 쓰였던 거기는 하지만.'
미아는 회상했다. 경비병 사이에 둘러싸여 얼 빠진 표정을 하고 있던 다른 세계로부터의 방문객을. 잠시만 혼자 둬도 픽 하고 죽어버릴 것 같은 가녀린 이방인을.
그건 상당히 이상한 감상이었다. 사나이 유현재는 소녀에 비해 머리통 하나 반이 큰, 아직도 머리통 하나 만큼은 커다란 거인이었으니까. 그런 병아리에게나 어울릴 법한 수식어들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미아는 겉모습으로 모든 걸 판단할 만큼 어리지 않았다. 그녀는 알았다. 현재가 파도 한 번이면 스러질 모래성과 같이 덧없이 연약함을. 그래서 강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따라오지를 못했다.
시체 정도는 수습해줘야지. 현재 옆으로 다가갔던 미아는 순간 덮쳐드는 현재의 주먹을 피하지 못했다.
"윽!"
이번에는 미아가, 천장에 쳐박힌 후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무 강한 공격에 그녀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