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아르젠타의 영웅
* * *
"그 거대한 몸집, 솟아오른 근육, 이 검에 어울리는 자가 마침내 나타났구나!"
금색 턱수염을 기른 중년의 대장장이가 호들갑을 떨며 거검을 가지고 왔다. 그래, 거검이었다. 대검이라는 말마저 부족하게 만드는 그 검은 길이가 2m를 가뿐히 넘고 무게 또한 그에 걸맞았다.
"이상한 거 팔아먹으려 하지 마세요."
미아가 눈매를 좁히며 싫은 소리를 했다. 소녀는 저런 검을 구하려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카이트 실드 제일 큰 거랑, 아밍 소드를 한 자루 살 거에요."
미아와 현재는 현재의 장비를 사러 대장간에 왔다. 대장장이는 그것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미아의 장비는 얼마 전 정비가 끝났기 때문에 굳이 새 무기를 구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아밍 소드라니? 이런 거인에게는 이 '거인을 가르는 검'이야말로 어울려! 한손검이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지!"
"손님이 원하지 않는 물건을 강요하지 마세요."
"이 몸 대장장이로서 그 주인에게 어울리는 물건을 추천하지 않을 수 없지! 이건 내 신념이야!"
"그럼 공짜로 주실 건가요?"
"아니, 당연히 돈은 받아야지."
아주 뻔뻔한 신념이었고 미아는 상대할 가치를 못 느꼈다. 그녀는 검들을 둘러보더니 자기 키에 조금 못 미치는 장검을 골라 현재에게 건넸다.
"한 번 휘둘러봐. 손에 맞을 것 같은지."
"좋은 검이란 게 어떤 느낌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현재는 곤란했다. 검을 휘둘러본 적은 커녕 제대로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번에 경비병들에게 포위당했을 때는 그저 날카롭고 위험하다는 것 밖에는 느끼지 못했으니.
'식칼 고르는 요령으로 고르면 되려나?'
그나마 칼 자체가 처음은 아니라는 게 위안이 될까. 주방에서 식칼은 질리도록 잡아봤기 때문에 날붙이가 익숙하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전투용 검과 재료 써는 식칼은 전혀 다른 물건이었다.
현재는 미아가 가져다 준 세 자루 검 중에 가장 휘두르기 편한 검 하나를 골랐다. 이어 몸의 반절 정도를 가릴 수 있는 커다란 카이트 실드를 하나 손에 쥐었다. 철이라고는 들어가지도 않은 나무와 가죽으로 이루어진 방패였음에도 무게가 상당했다.
"방패를 쓰려면 적어도 통짜 철판으로 된 타워실드를 써야지. 덩치에 걸맞게 말이야!"
대장장이는 자기가 제대로 들지도 못하는 타워실드를 추천해줬는데, 그야말로 철탑 같은 방패이기 때문에 어림짐작으로도 100kg이 넘는 것처럼 보였다. '은총'이 없는 인간은 드는 것조차 불가능해보여, 지구의 역사에선 존재하지 않는 방패일 듯 했다.
"그 방패 절대로 안 팔릴 텐데, 이제 좀 녹이지 그래요?"
"대장장이로서 이런 명품을 녹인다는 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야!"
대장장이는 절규했다. 이 타워실드란 던전에서 나온 보물이었다. 허나 그 너무도 거대한 크기와 말도 안되는 무게에 사용할 사람이 없는 탓에 미아가 재료가 된 강철 값만 받고 대장간에 넘긴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재료 값마저 보통은 아니었다. 다 녹이면 판금갑옷 여러 벌이 나올 정도의 대량의 강철, 평민은 커녕 귀족들조차도 부담스러워 할 가격이었다.
미아는 괜한 집착으로 방패를 녹이지 않고 전시해둔 대장장이의 심정을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아무튼 지금 고른 검이랑 방패, 계산해주세요."
미아는 값을 치르고 현재와 함께 대장간 밖으로 나왔다. 현재는 굉장히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은총이라도 있었으면 모험을 떠나는 것에 재미를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자기가 일반인들에 비해 명백하게 나약한 상태라는 걸 알고 있어서야 그저 불안할 뿐이었다.
그건 굉장히 생소한 감각이었다. 190의 키에서 알 수 있듯 항상 반에서 가장 컸던 현재에게 있어 왜소한 아이들은 굳이 티를 내지 않아도 자신보다 약할 것이라 확신이 드는 존재였는데, 이 세계에선 그 왜소한 사람들이 자신보다 훨씬 강한 존재였다.
그 괴리감, 그 무력감이 현재의 기분을 착잡하게 만드는 주된 원인이었고, 곧 던전으로 모험을 떠나야 한다는 이유가 한층 더 깊은 우울감을 주고 있었다.
"검도 방패도 공짜는 아니야. 당신이 앞으로 갚아야 할 돈이니까."
미아는 그리 말했고 현재는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
"애초에 던전에 안 가면 사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내가 집을 지키고 있으면 안돼?"
현재의 약한 소리에 미아는 냉정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어리광 부리지 마. 나는 당신 부모가 아니야. 당신은 당신 몫을 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거라고. 아직도 이해가 안 가?"
미아는 도시의 인기인이었다. 그녀의 강함과 더불어 훌륭한 인품에 아이부터 노인까지 그녀를 싫어하는 이를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현재는 더욱 때때로 보이는 소녀의 냉정함이 가슴 아팠다. 너는 이방인이라고, 그렇게 계속해서 선을 긋는 것 같아서.
'다섯 살이나 어린 애한테 무슨 추한 꼴이냐.'
현재는 스스로의 마음을 채찍질했다. 확실히, 아무리 다른 세계라도 작고 어린 소녀에게 보일 만한 태도는 아니었다. 그 소녀가 아무리 자신보다 아득히 강한 검사라고 한들, 그렇다 해도.
'은총인지 뭔지만 있었어도.'
다른 세계에 떨어졌다면 적어도 같은 시작점은 줘야 하지 않느냐고, 현재는 응답하지 않는 신에게 마음 속으로 따져들었다. 그러나 저번과도 같이, 며칠 전 교회에 가 간절히 기도했던 때와 같이 아무런 대답도 찾아오지 않았다.
검과 방패를 산 현재는 던전에서 쓸 여러 물품들과 육포 등의 보존식량을 사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 던전으로 출발한다. 그 사실은 설렘보단 걱정과 불안만을 불러왔다. 이 세계의 사람들이 얼마나 힘이 센지, 육체적으로 얼마나 우월한지 지난 일주일간 사무치게 익혀왔기 때문이었다. 현재는 덩치만 클 뿐 성인 중에서는 싸움과 전혀 관계 없는 삶을 사는 마을 여자와 비슷할 정도로 약했다.
'현대 문물이 그립다. 기관총! 로켓런처! 탱크!'
아직 군대에 가지 않아 소총조차 만져보지 않은 주제에, 현재는 지구의 병기들을 간절히 그리워하며 잠이 들었다.
* * *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왔다. 던전으로 토벌을 떠나기 위한 아침. 배낭 안에 버거울 정도로 무거운 짐을 가득 채운 채 미아를 따라나선 현재는 처음 보는 여자 둘을 만났다.
한쪽은 긴 금발을 뒷쪽으로 올려묶은 마른 체형의 여자, 얼굴에는 주근깨가 잔뜩 박혀있었다. 키는 160 남짓해 보통이었지만 이쪽 세계를 기준으로 상당한 장신일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빨간색 머리를 짧게 친 근육질의 여자, 짧게 쳤다는 게 여성스러운 단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짧게 빡빡 민 여자였다. 한국에서 입대를 앞둔 청년 같은 머리랄까, 가위 대신 면도기로 밀었을 것 같은 헤어 스타일이었다. 키는 155 남짓이었으며 발달한 근육 탓에 다른 두 여자에 비해 옆으로 넓은 듯이 보였다.
그녀들도, 또 미아도 현재와 비슷할 정도로 짐을 들고 있었지만, 힘들어하는 것은 현재 혼자 뿐이었다. 다들 마을 여자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강자들이었던 것.
즉 마을 여자와 비슷한 수준의 현재하고는 아득한 힘의 차이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와, 크다. 진짜 크네. 이게 소문의 거인이구나?"
"있잖아. 거시기도 키 만큼 커?"
두 여자는 상당히 무례했다. 싸움을 직업으로 삼은 이들답게 거칠다고 할까. 그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인데도, 미아의 선을 지키는 태도에 익숙해져 있던 현재에게는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그 당황스러움은 시선으로 표출되었다. 현재는 중재를 바라는 듯이 미아를 바라보았으나, 미아는 그 시선에 아무런 화답을 해주지 않았다.
"맨날 여자끼리만 가서 칙칙했는데, 멋진 남자가 끼니까 분위기가 사네."
"그러게. 밤이 아주 외롭지 않겠어."
현재는 꼭 남자 상사들 사이에서 희롱 당하는 여직원이 된 기분이었다. 평생 단 한 번도 느껴볼 일 없는 기분이라 생각해왔건만. 주방 선배들의 부조리한 폭력과 갈굼에는 익숙했어도 이런 방식의 희롱을 당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였다.
"그만 하시고, 출발하시죠."
현재는 단호히 대처했다. 그러자 두 여자는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게 꺄악꺄악거리기 시작했다.
"어머, 목소리도 완전 좋아!"
"그러게, 신음 소리는 어떨지 궁금해지는데?"
'미친.'
험악한 인상에 커다란 덩치 탓에 사람들로부터 꺼려지던 그였다.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했던 겉모습이 이곳에선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게 내심 기쁘면서도 복잡한 심경을 느끼게 했다.
'나보다 훨씬 강한 여자들이란 말이지, 저게.'
싸워보지는 않았으나 내심 남자들 사이에서도 강한 편이라고 생각해왔던 그다. 그런데 이젠 저 여자들보다도 훨씬 약하다는 사실이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그만 하고 출발하자."
"에이, 아직 얼굴도 못 익혔는데."
미아의 말에 금발 여자는 반박했으나 미아가 말 없이 쳐다보자 압도되어 금방 말을 바꿨다.
"그래, 출발하자. 가면서 얘기하면 되지."
그 모습에 현재는 확실히 느꼈다. 이 파티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것은 미아라고. 저 가장 작은 소녀가 이 파티의 실세이며 리더라고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린네고 저 돼지는 카르아. 거인군 이름은?"
"현재요."
"우린 둘 다 스물 다섯인데, 현재는 어때?"
"스물하나요."
"대답이 되게 짧네? 우리가 말 거는 게 싫어?"
"아뇨."
현재의 대답은 짧아질 수 밖에 없었다. 등 뒤에 맨 짐이 지나치게 무거워서. 그녀들이 걷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대화를 나눌 여유 따위는 현재에게 허락되지 않고 있었다.
행군이란 걸 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와는 비교도 안되게 힘들 것이 분명했다. 행군때 매는 군장이 20kg 남짓임은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까. 그에 비해 지금 등에 맨 가방은 명백하게 100kg이 넘어가고 있었다. 주방일로 단련됐다고 견딜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자, 먼저 타."
던전 근처까지 마차를 타고 가는 것이 현재에게는 크나큰 다행이었다. 만약 걸어간다면 도중에 반드시 퍼졌을 테니까. 은총 없는 몸으로 은총 있는 자들과 보폭을 맞춘다는 것은 명백한 무리이자 불가능이었다.
현재가 가장 먼저 마차의 안쪽에 탔고 차례로 여자들이 올라탔다. 네 사람이 타고 각자가 커다란 짐을 가지고 있으니 꽤 넓은 마차임에도 안이 가득 차버렸다.
"와, 앉아도 마차 천장에 머리가 닿네. 신기하다."
이 세계 사람들의 신체에 맞춰진 마차는 꽤 넓은 것을 골랐음에도 현재가 몸을 펴고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아직 던전 입구조차 도착하지 않았는데 현재는 굉장히 지치는 느낌이었다.
"나는 탐색이랑 함정 해체가 특기야. 마법적 지식도 조금 있지."
"그리고 나는 때려부수는 걸 잘한다."
금발의 린네와 적발의 카르아가 한 마디씩 했다. 현재는 자신도 입을 열어야 할 타이밍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뭐라고 하지?'
은총 하나 없는 몸, 미아가 알려준 그의 역할은 그냥 짐꾼이었다. 그냥 그대로 말하기엔 무언가 부끄러웠다.
"저는 요리를 잘합니다."
"오?"
"와, 완전 내 이상형인데. 나한테 장가 들래?"
겉보기부터 먹는 걸 좋아할 것 같은 카르아가 전혀 반갑지 않은 제안을 했다. 현재는 약간의 껄끄러움과 그나마 자존심은 지켰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가진 거 거의 전부가 건식량인데 어쩌지.'
그러나 요리를 잘한다는 건 허세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던전에 들고 가는 식량은 거의 전부가 보존식, 멀쩡한 주방에서나 가능한 호화 요리를 던전에서 먹을 수는 없었다. 그가 요리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걸 던전에서 느끼게 해주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던전에선 돌덩이 같은 비스킷 안 먹어도 되는 거야?"
'아뇨 계속 그거 먹어야 되는데요.'
현재는 잔혹한 진실을 전할 수가 없어서 두 사람의 망상을 멈출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마차의 바퀴는 계속 굴러갔고, 그에 맞춰 두 사람도 계속 현재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럼에도 현재는 자신의 발언을 정정할 기회를 찾지 못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싫어도 알게 되겠지.'
그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리라고 현재는 안일하게 생각했다. 오히려 짧게나마 행복한 식사를 꿈꾸게 해준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 않을까. 그리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면 안되는 줄도 모르고서.
하지만 그건 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현재의 모든 생각은 지구의 한국의 서울에 맞춰져 있었으므로, 이세계인들이 어떤 성정인지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특히 처음 만나 인연을 맺은 사람이 미아인 탓에, 다른 세계 사람들도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구나 하고 잘못된 인식을 가진 것이 문제였다.
현재는 그 안일한 생각과 잘못된 인식에 대한 대가를 금세 치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