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아르젠타의 영웅
* * *
밤이 왔다. 현재는 또다시 다른 세계의 괴리감과 싸워야 했다.
자기 전에 몸을 씻는 것은 한국인에게는 숨 쉬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것. 노숙자가 아닌 이상 누구나 집에 있는 화장실에 가면 상수도가 나오고, 깨끗한 물로 몸을 씻을 수가 있다. 아니, 노숙자조차 물을 구하자 하면 대충 아무데서나 깨끗한 물을 구할 수가 있었다.
인간, 잃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무려 수천 년에 거쳐서 인류가 이룩한 역사이며 문명의 정수이고, 전혀 당연하지 않은 축복이며 귀중함인 것을.
잔뜩 흘린 땀을 씻지 못한 것이 찝찝하여 현재는 물었다.
"몸을 씻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
"내일 새벽에 물 배달꾼 올 때까지 기다려."
"물 배달꾼?"
그것은 매우 생소한 어휘였다. 그나마 이해가 가는 단어 두 개가 합쳐져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우물도 강가도 멀어. 씻으려면 물 배달꾼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지. 당연한 거 아니야?"
"수도는 없는 거야?"
"큰 도시에는 있다고도 들었지만, 아르젠타는 작은 도시라서. 그런 걸 깔 만큼 부유하지도 않고."
상수도 하수도 자체는 무려 로마 시대부터 있던 물건, 기술이 부족해 없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없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보통 돈. 이런 것은 결국 지구와 같구나 하고 현재는 생각했다.
'새벽에 물 배달꾼한테 하루치 쓸 물을 사는 건가.'
그것은 물 만큼은 어디서나 공짜로 얻을 수 있는 한국에 사는 현재에게 굉장히 낯선 개념이었다. 그러나 낯섬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포기했어? 그럼 이제 자자. 침대 위로 올라와."
"뭐?"
현재는 순간 소녀가 자신을 유혹하는 것인가 싶었다. 남녀 사이에 같은 침대에서 자자니. 그것은 유혹이라고 오해하기에 너무나 충분한 제안이었다.
"이제 자자고. 이것도 이해하기 어려워?"
"아니, 같은 침대에서 자자니. 남자하고 여잔데."
이 애는 사춘기도 오지 않은 것인가? 현재는 꽤나 당황스러웠다. 소녀는 비록 키는 작았으나 이 세계 사람들 대부분이 매우 작았기에 그런 것이었고, 아직 어린 아이 같기도 하지만 또 여인 같기도 한 오묘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과 굴곡 있는 몸매가 소녀는 확실히 여성이니라고 계속해서 속삭여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혈기왕성한 나이의 현재는 그런 여자와 같은 침대 위에서 자면서 실수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소파에서 잘게."
그래서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기로 했다.
"그러고 싶다면 말리지야 않겠지만, 추울 텐데. 이불은 하나 밖에 없어. 당연히 양보해줄 생각도 없고."
"양보 받을 생각도 없어."
"그래. 그럼."
소녀는 그 말을 끝으로 이불 속에 묻혀 잠들었다. 현재는 소파에 누워 쌀쌀한 가을 날씨를 느끼면서, 다른 세계의 낯설음에 불안에 떨다가 조용히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울어제끼는 닭들의 울음 소리에 눈을 떴다.
꼬끼오오오오오오오!
'진짜 빌어먹을 천연 알람이네.'
도시 안에 닭을 키운다는 것이 서울 사람인 현재에겐 사무치게 낯설었다.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이불도 없이 잠든 탓에 목이 상당히 깊게 잠겨 있었다.
짤랑, 돈끼리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자루가 하나 날아왔다. 정확하게 소파 옆 테이블 위에 자루가 안착하는 것은 무언가 대단한 기술처럼 보였다. 그리고 목소리가 뒤늦게 따라붙었다.
"곧 물 배달꾼이 올 거야. 씻고 싶다면 넉넉하게, 한 세 통 정도는 사야하겠지?"
소녀는 그 말만 남기고 다시 잠들었다. 평소라면 그녀 자신이 물을 사야 하겠지만, 오늘은 대신 할 사람이 있으니 일어나지 않을 셈인 모양이었다.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나?'
현재는 어쩔 수 없이 돈 자루를 챙겨 집 앞으로 나가야 했다. 물 배달꾼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놓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그러나 그 걱정이 기우임을 깨달은 것은 10분 쯤 후였다. 물 배달꾼은 나타나기도 전부터 우렁찬 목소리로 외쳐대고 있었다.
"물이요! 물!"
몇 개나 되는 옆집인지 멀리서부터 오는 물 배달꾼은 장사가 잘되는 것인지 처음 목소리가 들린 후로 5분은 더 지나서야 소녀의 집 앞까지도 도달했다.
"저기."
"어? 소문난 그 이방인?"
물 배달꾼은 소년이었다. 아니면 성인인가? 역시 키가 160 남짓했기에 덜 큰 것처럼 보였지만, 이 세계 사람들의 평균 신장을 생각하면 성인일지도 몰랐다. 고생의 흔적이 역력한 얼굴은 청년처럼도 보였으나 단순히 노안인지 정말 나이가 많은 것인지 현재로선 판단하기 매우 애매했다.
그는 나무 수레에 물통을 잔뜩 싣고 있었다. 고무를 쓰지 않은 나무 바퀴가 매우 낯설었다.
"소문이라니?"
"미아 님께서 수상한 이방인을 잡아갔다고 소문이 났지요. 이 도시에 비밀 같은 건 없으니까 말입니다."
작은 도시라더니 무슨 시골 마을마냥 소문이 빠른 모양이었다. 인구수 천만의 도시 서울에 살던 현재로서는 이것 역시 낯선 감각이었다. 동네는 커녕 옆집 소식도 모르는 것이 서울 사람의 삶이었으니.
"그래서, 물 사실 건가요?"
"세 통 부탁하지."
소년인지 청년인지 헷갈려 존대를 해야하나 반말을 해야하나 갈피를 잡지 못한 현재는 어중간하고 이상한 말투를 쓰게 되었다. 그러나 물 배달꾼은 딱히 개의치 않는지 물 세 통을 마당으로 넣어주었다.
"동화 여섯 닢입니다."
그게 비싼 것인지 싼 것인지 현재는 판단할 수 없었다. 이곳의 물가라고는 하나도 알지 못하니까. 그래도 미아의 집에 미아의 돈일 것이 뻔한데 사기를 치지는 않겠지 싶어 당장 그 돈을 지불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시길!"
그런 인사를 남긴 채 물 배달꾼은 다음 집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물이요 물 하는 커다란 외침을 계속 질러대면서. 깡마른 몸에 근육이 잡힌 언밸런스한 모습, 그 근육에도 불구하고 왜소한 체구로 무겁고 큰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현재는 물통을 집안으로 날랐다. 물통 세 개의 무게는 장난이 아니라서 한손에 하나를 들기도 힘들었다. 그런 물통을 수레를 쓴다고 하나 수십 개를 들고 나르는 물 배달꾼의 모습은 이 세계에서의 삶이 결코 평탄치 않음을 예고하는 듯 했다.
집안에 따로 욕실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는 마당 구석에서 몸을 씻어야 했다. 배수구가 따로 없는 방 안에서 물을 끼얹었다가는 재앙이 일어날 테니까. 집 근처를 두른 담벼락은 그리 높지 않아 누구든지 엿보려면 엿볼 수 있을 듯 하여 현재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비누도 뭣도 없는 상태로 몸을 씻다 보니 두 통을 다 쓰고도 뭔가 찝찝했다. 그래도 남은 한 통은 미아의 몫인지라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렇게 씻고 몸을 좀 말리고 불쾌하게도 어제 입었던 옷가지를 다시 입은 채 집 안에 들어가니 그제서야 미아가 꾸물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벌써 씻었어? 남은 건?"
"마당에다 뒀어."
미아가 나가고 현재는 그녀가 씻는 걸 훔쳐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건강한 남성으로서는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동방예의지국에서 유교주의적 관점을 주입당하며 자란 그는 결국 훔쳐보러 나가지 않았다. 대신 주방에 들어가 불 피우는 일을 연습했다.
화륵, 그가 피어난 불똥을 부싯깃에 옮겨, 그걸 또 장작에 붙여내는 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다 씻은 미아가 주방에 들어와 화를 냈다.
"아니 물을 세 통 샀으면 한 통만 쓰는 게 당연하지 않아? 어쩌자고 두 통이나 쓴 거야? 하나는 당신 씻을 거, 하나는 내 거, 마지막 하나는 마시고 먹는데 쓸 거였는데. 그리고 비누는 왜 안 썼고."
"있는지 몰랐어. 미리 말을 했어야지. 그래도 미안."
현재는 억울했다. 물이라는 걸 아껴 써야 하는 이 상황 자체가 매우 낯설었다. 그래도 진작 말을 해줬다면 어떻게 아껴봤을 텐데, 뒤늦게 화를 내는 게 또 억울했다.
"그래. 첫날이니 그럴 수 있지. 이건 남은 물. 그리고 내일부터는 빈 물통들을 돌려주고 물통값을 받도록 해."
나무 물통은 그 자체로 값이 나가는 물건인 모양이었다. 소주병도 가게에 가져가면 돈을 돌려준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진짜 가져가 받아본 적은 없는 현재였는데, 다른 세계에 와서 새로운 경험을 수도 원 없이 하고 있는 유현재였다.
"나 때문에 마음껏 씻지 못한 거야?"
"그렇지."
"미안."
현재는 억울함을 묻어두고 순수하게 사과했다. 여자애가 자기 때문에 물을 아껴가며 씻었다는 것은 무언가 사과하지 않으면 안될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니야. 됐어. 미리 얘기하지 않은 내 잘못이 맞네. 그래도 앞으론 잊어버리지 마."
무언가 어색하고 쑥쓰러운 분위기가 되어 현재는 일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불을 피우는데 성공했다. 그러니까 어제처럼 어설픈 요리를 하지는 않으리라. 오늘은 진짜 요리 실력을 보여줘서 소녀를 깜짝 놀라게 해주리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다짐은 실패했다. 버튼을 돌리기만 하면 화력이 완벽하게 통제되던 첨단의 화구와는 달리, 화로의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건 상당한 숙련도를 필요로 하는 기술이었다. 재료 손질이나 선정, 간을 맞추는 일은 할 수 있어도 하루만에 화로를 다루게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프가 한 번 너무 조는 바람에 물을 보충해야 했는데, 이래서야 한 번에 완성하는 것보다 맛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일부는 타서 덜어내야 했다.
"뭔가 어정쩡한 맛이네."
"나도 느끼고 있으니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지 말아줘."
"그래도 내가 하는 것보다는 낫다."
테이블 앞에서 소녀가 싱그럽게 웃는 바람에, 현재는 설레이고 말았다. 본 적 없이 아름다운, 분홍색의 머리와 눈동자가 매우 신비스러운 소녀의 웃음에, 심장이 두근두근거리는 것은 통제할 수 없는 불수의근이었다. 그 감정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새삼 예쁜 여자애네 진짜로.'
그러나 현재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소녀, 미아와 함께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 * *
"던전, 이란 곳에 간다고?"
"그러고 보니 아직 내 직업도 알려주질 않았네? 왜 안 물어봤어?"
"그러게?"
미아와 생활한지 일주일. 현재는 새 옷을 사고 불 다루는 법을 익히고 새로운 사람들과 안면을 트며 어떻게든 이세계에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상당히 더럽고 불편한 세계인 데다가 인류 과학의 정수인 스마트폰도 없었지만, 아름다운 소녀가 늘 곁에 있었던 덕분에 그렇게까지 끔찍하지만은 않았다.
"모험가야. 나는. 레벨 35의 모험가. 그리고 이 도시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야."
미아는 빈둥대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소녀였다. 그 나이대 다운 귀여움도 꽤나 있었다. 그런지라 지난 일주일간의 생활은 상당히 정적이고 평화로웠다. 그런데 그런 소녀에게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현재는 당황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빈둥대는 게 직업인 백수인 줄 알았어."
열여섯 살, 한국이라면 어지간해서는 학교에 다닐 나이. 그런 나이의 소녀가 검을 다루고 싸운다는 것이 현재에게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꼭 다큐멘터리의 소년병을 보는 것 같달까.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부류의 사실이었다.
"반쯤은 맞는 말이지. 던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백수나 다름 없으니까."
"나타나? 던전은 나타나는 건가?"
현재가 생각하는 던전의 이미지는 이랬다. 대충 동굴이나 지하의 아무튼 어두컴컴한 곳. 고대 문명이나 마법 같은 비밀들이 숨겨져있고, 괴물이 살아 위험하다. 그리고 끝에는 반드시 보물 상자가 있다. 그런 정도다.
그런데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다니, 그건 상당히 생소한 표현이었다. 고블린과 오크 엘프의 이미지가 비틀린 것도 있으니, 그가 생각하는 던전과는 상당히 다른 장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던전이란 땅의 여신의 분노. 자신이 축복했던 고블린들에게 배신 당한 신이 내리는 저주 같은 거야. 그래서 던전은 인간이나 오크의 삶의 터전 옆에 나타나지.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방치해두면 계속해서 고블린이 쏟아져나오니까, 토벌해서 없애지 않으면 안돼. 그걸 해결하는 직업이 모험가야."
"그렇구나."
던전은 반드시 토벌해야 하고, 도시에서 그걸 가장 잘하는 것이 미아였다. 그렇기에 이 도시의 사람들은 미아를 의지하고 또 존중하는 것. 현재의 머릿속에 새로운 지식이 적립되었다.
"힘내!"
현재는 미아를 응원했다. 소녀는 어이 없다는 마음을 전혀 숨기지 않고 얼굴에 드러낸 채 말했다.
"무슨 소리야? 당신도 같이 가는 거야."
"나도? 나는 은총도 없어서 일인분도 못하는데?"
은총이란 어마무시한 힘이었다. 저 자그마한 소녀가 현재를 힘으로 압도하게 해줄 정도로. 그렇기에 현재는 그 무시무시한 외향과는 달리 지나가는 일반인과 싸워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일반인들을 상대로도 그런데, 싸우는 게 직업인 모험가들 사이에 껴서 일인분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짐꾼, 요리사, 뭐 그런 거라고 봐도 좋지만……."
미아의 눈이 다시금 싸늘해졌다. 현재는 무얼 잘못했나 금방 깨닫지 못했다.
"내가 당신을 도시에 혼자 둘 리 없잖아? 말했잖아. 나는 당신을 믿지 않는다고. 내가 도시를 비울 때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데 두고 갈 리가 없잖아."
현재는 안락한 생활에 잊어버렸던 사실을 다시금 상기해냈다. 그는 이방인. 이 도시에 아는 이도 그를 믿어주는 이도 없는,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아직 사람들의 신뢰를 사기에는, 조금 시간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아……."
현재는 미아의 말투가 조금 서운했다. 그래도 같이 생활하며 조금은 친해졌다 생각했는데, 그만의 착각인 듯 해서.
아직 두 사람의 마음은 충분히 가깝지 못했던 것이었다. 신뢰라는 관계를 구축할 수 없을 만큼.